새로운 현실 - 피터 드러커
The New Realities - Peter F. Drucker
다음 세기는 도래해 있다. 문제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다. 그러나 해결책을 알지는 못한다. 많은 정치인과 경제 전문가, 학자, 사업가, 노조 지도자들이 나름대로 문제 의식을 가지고 책을 써고 연설을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작금의 세계 정치와 경제가 전혀 비현실적인 감각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육체노동에 매니지먼트를 적용하게 된 교육훈련이었다. 교육훈련은 전시의 필요에서 생긴 부산물이었다.
아담 스미스는 어떤 제품을 생산하고 판매하기 위해 필요한 노동의 전통을 배양하고 육체노동과 경영관리의 능력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수백 년이 걸린다고 말했지만, 1차대전 때문에 그 기간이 급속히 당겨진 것이었다.
테일러의 과학적관리법이 1885년에서 1910년에 걸쳐 개발되었고, 이것이 2차대전 중에 더욱 발전하였다. 전후에 일본으로 도입된 것이, 다시 20년 후에는 한국에 도입되었고, 그 결과 두 나라의 경이적인 경제발전이 있게 된 것이다.
15세기나 16세기에는 인쇄된 교과서가 학교교사들의 배척의 대상이었다. 17세기 예수회에서 인쇄된 교과서를 사용하면서 교수법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그때까지는 학습이라는 것이 힘들여서 원본을 베끼거나 강의를 듣고 복창하는 것이었다.
컴퓨터는 인쇄된 교본보다 훨씬 사용자에게 친절하다. 무한한 인내력이 있다. 이와 같은 것은 교사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시청각 교육은 순식간에 사실을 전달하는 효과가 있다. 결과적으로 교사는 감독이나 상담상대로서의 역할을 강화해 나가게 된다.
서양의 인쇄된 교과서의 출현은 인류사상 전무후무한 학습열에 불을 붙였다. 누구나 자기에게 맞는 속도로, 자기 집에서 학습할 수 있다.
서평
피커 드러커의 책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그가 인식하는 문제와 해결책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수십년의 연구와 성찰로, 조직의 움직임을 연구해 왔고, 항상 공정한 태도로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종사하는 경영과 효율의 문제, 조직 시스템의 오류를 발견하고 해결하는 모습에서, 우리가 전혀 몰랐던 문제점을 새로 배우며, 혹은 단편적인 지식으로만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 체계적인 접근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은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사회를 정확하게 진단하고, 개인적으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 지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책이다. 세상과 동떨어져 아무리 혼자서 사유하더라도 다가오지 않는 문제점을 알게 해 주는 점에서 반드시 한번 읽어 두어야 하는 책이다.
드러커에 대해서 기억나는 한 가지는, 그는 항상 5년을 주기로 한 주제를 택하여 공부한다는 것이다. 자기 전공 분야가 아닌 취미에 대한 주제를 말이다. 언젠가 그가 일본 미술의 연구를 시작하여, 공저로 일본 미술에 대한 책을 출판했다는 글도 본 적이 있다.
The New Realities - Peter F. Drucker
다음 세기는 도래해 있다. 문제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다. 그러나 해결책을 알지는 못한다. 많은 정치인과 경제 전문가, 학자, 사업가, 노조 지도자들이 나름대로 문제 의식을 가지고 책을 써고 연설을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작금의 세계 정치와 경제가 전혀 비현실적인 감각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육체노동에 매니지먼트를 적용하게 된 교육훈련이었다. 교육훈련은 전시의 필요에서 생긴 부산물이었다.
아담 스미스는 어떤 제품을 생산하고 판매하기 위해 필요한 노동의 전통을 배양하고 육체노동과 경영관리의 능력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수백 년이 걸린다고 말했지만, 1차대전 때문에 그 기간이 급속히 당겨진 것이었다.
테일러의 과학적관리법이 1885년에서 1910년에 걸쳐 개발되었고, 이것이 2차대전 중에 더욱 발전하였다. 전후에 일본으로 도입된 것이, 다시 20년 후에는 한국에 도입되었고, 그 결과 두 나라의 경이적인 경제발전이 있게 된 것이다.
15세기나 16세기에는 인쇄된 교과서가 학교교사들의 배척의 대상이었다. 17세기 예수회에서 인쇄된 교과서를 사용하면서 교수법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그때까지는 학습이라는 것이 힘들여서 원본을 베끼거나 강의를 듣고 복창하는 것이었다.
컴퓨터는 인쇄된 교본보다 훨씬 사용자에게 친절하다. 무한한 인내력이 있다. 이와 같은 것은 교사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시청각 교육은 순식간에 사실을 전달하는 효과가 있다. 결과적으로 교사는 감독이나 상담상대로서의 역할을 강화해 나가게 된다.
서양의 인쇄된 교과서의 출현은 인류사상 전무후무한 학습열에 불을 붙였다. 누구나 자기에게 맞는 속도로, 자기 집에서 학습할 수 있다.
서평
피커 드러커의 책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그가 인식하는 문제와 해결책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수십년의 연구와 성찰로, 조직의 움직임을 연구해 왔고, 항상 공정한 태도로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종사하는 경영과 효율의 문제, 조직 시스템의 오류를 발견하고 해결하는 모습에서, 우리가 전혀 몰랐던 문제점을 새로 배우며, 혹은 단편적인 지식으로만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 체계적인 접근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은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사회를 정확하게 진단하고, 개인적으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 지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책이다. 세상과 동떨어져 아무리 혼자서 사유하더라도 다가오지 않는 문제점을 알게 해 주는 점에서 반드시 한번 읽어 두어야 하는 책이다.
드러커에 대해서 기억나는 한 가지는, 그는 항상 5년을 주기로 한 주제를 택하여 공부한다는 것이다. 자기 전공 분야가 아닌 취미에 대한 주제를 말이다. 언젠가 그가 일본 미술의 연구를 시작하여, 공저로 일본 미술에 대한 책을 출판했다는 글도 본 적이 있다.
서문
우리가 직면해 있는 문제 중 몇 가지는 과거의 성공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복지 국가의 성공 따위가 그것이다. 조세 국가의 성공, 지식 사회의 성공 등도 그 예이다.
경제발전이 민족주의와 식민지주의에 미친 영향에 관한 19세기의 경험도 그것이다.
제 1 부 정치의 현실
1. 역사의 경계
역사에도 경계가 있다. 두드러지게 돋보이는 것도 아니다. 그 시점에서는 특히 인식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일단 그것을 넘어서면 사회적, 정치적 풍경이 바뀌고 기후가 바뀐다. 언어도 바뀐다. 새로운 현실이 시작된다.
1965년에서 1973년 사이의 어느 시점에서 세계는 그런 경계를 넘어 새로운 다음 세기로 들어섰다.
18세기 계몽시대 이래 모든 나라에서 정치의 중심이 되고 원동력이 된 것은 “사회에 의한 구제”라는 사상이었다. 지난 300년 동안 군비는 생산적인 존재였고, 정치의 수단으로 유효하게기능해 왔다. 이제 군비는 반생산적인 존재가 되었다.
1873~1973년
이전에 역사의 경계를 넘은 것은 1873년, 비엔나의 증권시장이 공황에 빠졌을 때다. 그것 자체는 큰 사건이 아니었다. 비록 프랑크푸르트, 런던, 파리, 뉴욕 등 증권시장을 공황으로 몰아넣기는 했으나 단기간에 끝나고, 유럽 미국 경제는 1년 반 후 완전히 재기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볼 때 그것은 자유주의 시대의 종식으로 1776년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과 시작된 하나의 세기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었다.
그 사태 이후 10년도 되지 않아, 유럽 미국에서 자유주의 정당이 혼란과 후퇴에 빠졌고, 그 후 다시 재기할 수 없었다.
유럽에서 자유주의는 마르크스 사회주의와 반유태 사회주의에 밀려났다. 1940년대 후반의 스탈린에 의한 유태인 탄압은 단순히 편집병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정치의 천재 스탈린이 이미 마르크스주의가 실패작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죽어가는 사회주의와 당을 활성화하는 깃을 반유태주의에서 찾은 것이었다.
비엔나 증권시장 붕괴 이전에는 빅토르 아들러와 게오르그 폰 셰넬러는 오스트리아 자유주의의 젊은 기수들이었지만, 증권시장 붕괴 후 5년도 되지 않아, 아들러는 유럽대륙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마르크스주의자로, 셰넬러는 최초의 반유태 사회주의 정당 창립자로서 격심한 적대관게를 형성했다.
60년 후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에서 실천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전 비엔나에 있을 때 이 셰넬러에게서 배운 것이었다.
비엔나 증권시장 붕괴 10년 후, 1883년에서 1888년 독일에서는 비스마르크에 의해 국민건강 보험제도와 노인연금 보험제도가 제정되었다. 그 무렵 영국과 오스트리아에서는 공장의 안전규칙이나 부녀자노동 제한규정이 가해졌다.
미국에서조차 농민구제법, 철도규제, 독점금지법, 증권업 규제를 위한 주법 등이 생겼다.
1880년대 말에는 미국에서 반기업적 정치운동인 populism이 생겨났다. 포퓰리즘은 정부규제를 요구하였고, 비엔나 시에 이어 네브래스카 주 수도 링컨에서 전력, 가스, 시내전차등 공공사업이 공영화되었다.
1890년 중반 유럽 각지에서 반유태주의가 큰 정치세력이 되었다. 1894년의 드뤠피스 사건으로 반유태주의가 폭발했다. 2차대전 당시 프랑스의 비시정부는 이 반유태주의의 흐름을 계승한 것이다. 드레퓌스가 무죄라는 것은 잘 알려졌었지만, 군의 무오류, 군이야말로 진리요, 궁극의 기준이라는 전체주의가 팽배했다.
결국 1873년 이후 전 시대는 정부에 의한 경제지배와 사회지도가 진보적 이념이 되었다.
1973년의 경계
1973년은 정부가 진보를 뜻하던 시대의 끝이었다. 즉 1870년대에 형성된 사상과 정책이 지배하던 시대의 종언을 고한 해이며, 미국민주당 자유주의파, 사회민주주의자, 마르크스 사회주의자, 국가사회주의자의 사상과 정책에 종지부가 찍힌 해였다.
정치구호는 언제나 정치적 현실보다 장수한다. 지금도 1850년의 정치구호, 위대한 자유주의 등이 오늘날 신보수주의자에 의해 사용되고 있다. 마찬가지로 복지국가의 구호도 앞으로 두고두고 사용될 것이다.
복지국가의 구호도 사태를 늦추는 힘을 가지고 있지만, 이미 행동지침 또는 동기가 될 수는 없다.
2. 사회에 의한 구제의 종언
사회에 의한 구제라는 생각이 과거의 것이 되었지만, 50년 전만 하여도 그런 사상이 일반적이었다. 사유재산의 폐지를 포함한 각종 사회정책이 인간을 근본적으로 바꿔서 새로운 종류의 사회를 만들 수 있는 것으로 믿었던 것은 사회주의자만이 아니라, 압도적으로 많은 정치인들이 그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사회주의자인 인류, 나치주의자인 인류, 공산주의자인 인류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정치나 행정의 구실은 사회의 완성에 대한 장애를 제거하는 데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정부가 점차 소멸해 간다는 것은 아니다. 또한 사회주의자나 노동당원은 없어질 리가 없지만, 그들의 존재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미테랑 대통령이야말로 진정한 사회주의자였지만, 취임 후 자본도피라는 현실 문제로 방향을 틀어, 서방에서 가장 친자본주의적인 정권이 되었다.
1982년 이후 사회주의란 여당인 사회당의 친구나 지지자를 국영기업 사장이나 회장에 앉히는 것을 뜻하는 것에 그치고 있다. 또한 사회당 정권 유지에 도움이 되는 모든 것을 사회주의라고 한다.
존 F. 케네디는 권력획득 말고는 어떤 계획도 없었고, 재임 3년 동안 아무 업적도 남기지 않았지만, 지금까지도 영웅 대접을 받고 있다.
문제에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는데, 사회의 구제라는 것은 오직 한 가지만 있어야 하기 때문에 결국 방법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중세 유럽을 지배한 것은 ‘신앙에 의한 구제’였다. 그것은 16세기 종교개혁에 의해 힘을 얻었다가, 17세기 중엽에 힘을 상실했다.
사회에 의한 구제라는 사상을 처음으로 제창한 것은 장 자크 루소였다. 그 30년 후 정치사상으로 완성시킨 것이 제레미 밴담이고, 더욱 과학적인 이론으로 체계화한 사람이 오귀스트 콩트와 헤겔이었다. 이 콩트와 헤겔로부터 태어난 것이 마르크스이고, 마르크스의 자식들이 레닌, 히틀러, 모택동이었다.
사회에 의한 구제의 종언은 과거 200년간의 가장 보편적인 꿈, 즉 대혁명의 신비가 끝났음을 뜻했다. 혁명은 계속 발생하겠지만, 참으로 세상을 좋게 할 수 있는 혁명은 이제 거의 기대할 수 없다.
1848년의 유럽대륙 혁명의 실패, 1871년 파리 코뮌이 무너지고, 중국의 문화혁명, 페루에서 파괴활동을 계속하는 모택동주의자 이제 모두 끝이 난 것으로 보인다.
1700년 근대 의학이 등장했을 때, 마침내 만병통치약 탐구를 그만 두고 구체적인 질병 하나하나에 유효한 개별적인 치료법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오히려 더많은 의약과 의사가 필요해졌다. 지금의 정부도 마찬가지다.
사회구제사상이 죽은 자리에, 이슬람 원리주의의 발호가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한 시도의 하나로 보인다.
독일에서는 빌리 브란트가 사회구제를 목적했지만, 후임자 헬무트 슈미트는 아무 이념없이 현실주의적 정치, 당면한 단기적 문제에 몰두했다. 헬무트 콜 또한 마찬가지다.
3. 루즈벨트식 정치의 종말
사회에 의한 구제라는 정치원리의 경쟁자는, 1890년대 이후부터 경제적 이해의 연합이라는 것이다. 189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마크 해너가 경제적 신분 계층을 번영이라는 이름의 공통이익으로 통합시킨 것이다. 그 이후 공화당은 분열했지만, 1912년 민주당의 우드로 윌슨도 그러한 이익의 지향자였고, 40년 후 플랭클린 루즈벨트가 민주당에서 경제적 이해의 연합을 완성시켰다.
루즈벨트의 경제정책 그 자체는 모두 실패했다. 그러나 그의 정권은 정치적 및 사회적으로는 미국 역사상 가장 빛나는 성공을 거두었다.
루즈벨트를 답습한 것이 해리 트루먼이었고,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에 의해 그 절정기에 이르렀다.
최근 가장 실효있는 정부, 즉 전후의 일본 정부도 또한 마크 해너류의 경제적 이해의 연합에 기반을 두고 있다.
워싱턴에서는 공화당 정부가 되든 민주당 정부가 되든 변호사, 저널리스트, 대학교수, 기업체 임원이 쉴새없이 번갈아가며 등장해서 정부 부서 안에서 실질적으로 모든 의사결정을 하기도 하고 의회의 위원회 스탭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경제적 이해의 연합도 이제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되고 말았다. 이것을 마지막으로 시도한 대통령은 린든 존슨이었다. 1984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월터 먼데일은 인격, 식견, 경험, 그 어느 면으로나 미국 역사상 최고의 대통령 후보였다. 그러나 그는 경제적 이행의 연합을 재구축함으로써 루즈벨트류의 미국을 재현하려고 한 원인으로 대실패를 맛보았다. 그는 시대착오적인 존재로 찍혔고, 50세 미만인 사람중 그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이해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 4년 후 마이클 듀카키스가 기존의 이해집단을 소외시키지 않으면서 새로운 이해집단, 특히 중산층을 동원하려 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일본에서는 자민당이 정권을 계속 잡지만, 그것은 야당이 사회에 의한 구제라는 이데올로기의 신봉자여서 자민당보다 더 매력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경제적 이해의 연합의 문제점은, 경제적으로 볼 때 이해집단 그 자체가 독립된 계층으로서의 존재가 아니게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선진국에서는 농민이든 노동자든 이미 이해집단으로서의 규모나 정치적 중요도가 크게 떨어지고 있다. 마크 해너 시대의 미국에서는 농민이 미국인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고, 루즈벨트 시대에는 공업노동자가 노동인구의 5분의 2에 가까웠다.
사회적으로도 이들 집단이 이미 독자적인 존재가 아니다. 목축업자와 낙농업자, 담배재배업자는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 숙련노동자와 미숙련 노동자와는 다른 경제적 이해관계를 가진다. 그들은 각기 자기들 신문을 읽고 자기들 교회에 나가고 거주 구역도 다르다. 오늘날 계층으로서의 가치관이나 생활양식은 거의 사라져 버렸다.
자동차 공장의 노동자는 여행용 트레일러 하우스, 호수낚시용 보트 하우스, 혹은 퇴직연금에만 관심이 있다고 한다. 그들은 경제적 이해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구매력에 의해 자기의 사회적 위상을 결정한다.
지식노동자의 존재는 이해집단이라는 개념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들은 피착취계급이라는 느낌을 가지지 않는다. 그들의 대부분은 부하를 거느리고, 동시에 상사도 모시고 있다. 교육 수준이 높을수록 일생을 조직의 피고용자로서 보내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한 신분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아무런 특정한 이해관계를 수반하지 않는다.
4. 러시아 제국이 붕괴할 때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사건 두 가지가 1857년의 세포이 반란과 1867년의 메이지 유신이다. 세포이 반란은 세계의 서양화를 결정짓게 하고, 메이지 유신은 비식민지화를 결정짓게 했다.
19세기 최고의 역사학자인 스위스의 야콥 부르크하르트는 1870년대가 큰 전환점인 것을 통찰한 사람이다. 그의 강의록 ‘세계사적 고찰’에서 그런 통찰을 밝혔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다.
세계사를 서양사에서 참된 세계사로 바꾼 것이 세포이 반란과 메이지유신이었다.
세포이 반란은 그들이 영국을 내좇은 후에 세워야 할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그 뒤 서양의 기술, 체제, 산업, 과학, 교육에 의한 세계제패가 가능해진 것이다.
서양화에 대한 저항이 계속되어 최대의 것으로는 1900년 중국에서 발생한 의화단 사건이다. 최근 이란의 호메이니 혁명도 그 하나이다.
유럽은 세포이 반란과 실패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재빨리 파악하고, 전세계의 서양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에 대해, 유럽인들은 결국 무의미하게 보았지만, 일본은 승리했다. 그들은 서양을 끌어들임으로써 서양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1982년에 시작한 페레스트로이카라는 개혁운동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러시아제국의 해체는 촉진될 것이다. 페레스트로이카는 위로부터의 혁명이고, 그런 종류의 혁명의 성공은 역사상 매우 드문 일이다. 그런데 성공한 예는 모두 러시아에 있었다. 이반 뇌제의 혁명과 막무가내로 서양화를 실현시킨 피오트르 대제에 의한 혁명이다.
레닌의 혁명이 성공한 것은, 러시아화 정책에 대한 비러시아계 민족의 분노를, 모든 민족에 대해 문화와 교육의 완전한 자치를 약속함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스탈린이 정권을 잡고 난 이후, 러시아어가 아닌 모국어로 쓰기와 읽기의 능력을 급속하게 높인 비러시아인들이 결국 문제를 심각하게 만들었다.
소련이 군사력을 유지하려면 아시아인을 많이 징병해야 한다. 그러나 역사상 아시아인이 러시아인 지취 하에서 싸운 예는 없다. 따라서 소련은 병력을 대폭 삭감하든지, 아시아인에게 군에 대한 지배권을 넘겨 주어야 한다. 1988년 가을 고르바초프가 병력 50만의 일방적 삭감결정을 내린 것은 인구구조에 대한 고려 때문이다.
소련내 아시아인의 문자해독률은 모국어에 관한 한 100%이다. 이 중 러시아어에 대해서는 3분의 1만이 가능하다. 소련의 정부, 경제, 과학계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러시아어밖에 없다.
페레스트로이카의 성공은 일찌기 보지 못했을 정도로 강력한 원심력을 급속히 만들어내게 된다. 소련에서 민족주의 운동이 가장 격렬한 지역이 가장 풍요로운 발트 3국인 것도 우연이 아니다.
오스트리아 - 헝가리 제국의 예를 보면, 헝가리의 지주계급을 위해 오스트리아는 많은 양보를 하다가, 결국 체코, 이탈리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폴란드인이 속속 들고 일어났고, 이 민족주의 압력을 피하기 위해 경제발전정책을 추구했다. 1870년 이후 체코의 심장부인 보헤미아에서는 역사상 유례없는 경제발전이 이루어져, 1914년에는 유럽에서 가장 공업화가 잘 된 가장 번영하는 지역이 되었으며, 그 생산성과 생활수준은 프랑스를 능가해 독일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였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실패가 되었다.체코인은 생활이 풍요로울수록 더욱더 세차게 독립을 요구했다.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서구화가 진행되고 생활이 나아지고 이동의 자유가 인정되고 교육수준이 높아지면 사람들은 그만큼 민족주의자가 된다.
군사적인 승리가 국가를 재생시킨다는 생각이야말로 정치적인 노망이고, 전형적인 환상이다. 1914년 오스트리아 - 헝가리제국, 1982년 포클랜드섬을 점령한 아르헨티나, 나폴레옹은 1809년 오스트리아에 패하고, 웰링턴경에게 패해서 천하무적이 아니라는 사실이 증명된 1812년 러시아 침공을 결심했다.
멕시코는 베니토 후아레스 대통령 이래 100년 이상이나 변함없는 한 가지 목표는, 북쪽의 가공할 거인 양키로부터의 독립, 특히 경제적 독립이다. 후아레스는 멕시코를 인디오의 농업국가로 남겨놓음으로써 그 독립을 유지하려고 했다. 후계자인 포르피리오 디아스는 유럽의 자본, 은행, 공업을 도입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 시도는 실패하고 1911년 디아스는 실각했다. 그 후 20년간 내전이 이어진 다음, 멕시코는 자급자족을 지향해서 공업에 대한 보호주의 정책을 추진했다. 상당히 성공한 것처럼 보이던 이 정책이, 1980년대 초 원유가격의 폭락, 기본적으로 보호주의가 정부의 부패, 국유산업의 비능률화, 경쟁력 저하를 초래한 결과 자급자족정책은 완전히 파산하고 만다. 멕시코가 살아갈 유일한 길은 미국과의 경제통합을 받아들이는 길이다.
멕시코는 완전한 통일국가라고는 할 수 없다. 북부는 주로 스페인계가 차지하고 있으며, 공업도 북부에 집중해 있다. 비교적 풍요한 토지는 북부에 있다. 남부에서 스페인어가 사용되는 곳은 도시지역 뿐이다. 주민은 대부분 인디오들이다. 대다수는 450년전과 같이 추장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캐나다와 미국은 경제적으로 볼 때 이미 통합되어 버렸다. 사실 1920년대 이후 캐나다의 제조업, 은행업, 부동산업의 미국내 활동이 증대함으로써 이미 크게 개선되고 있다. 다만 캐나다는 중앙부 여러 주에 영국의 스코들랜드계, 퀘백 주에 프랑스계, 서부의 태평양 연안 여러 주에 미국계라는 3개의 문화를 가진 하나의 나라인가가 문제이고, 인구밀도가 희박하고 서로 이질적인 요소를 내포한 이 거대한 국토를 하나로 묶어 나간다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다.
5. 군비의 반생산성
제2차 대전 후 군비확장 경쟁이 전 세계적인 규모에서 전개되었다. 제2차 대전 후 군비야말로 최대의 성장산업이었다. 이에 비하면 컴퓨터도, 전기통신도, 비디오테크놀로지도, 금융도 성장산업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1914년 8월까지 20년간에 걸친 격렬한 군비확장 경쟁에 뛰어든 나라는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의 4개국뿐이었다. 그러나 최근 40년간에 걸친 군비확장경쟁에 참가하지 않은 대국은 일본 한 나라뿐이고, 비교적 큰 나라로는 캐나다와 멕시코가 있을 뿐이다.
오늘날 페루, 리비아, 이라크 등조차도 제2차 대전 돌입 당시 대국들보다도 더 대량의, 그리고 더 파괴적인 무기를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군비경쟁은 아주 반생산적인 존재이다. 소련의 경제위기, 미국의 경제적 주도권 후퇴, 남아메리카에서 경제발전이 실패한 주된 원인이 바로 이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보아도 이미 군대는 19세기와 같은 국가의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도 수행하지 못하게 되었다.
한국동란은 병력과 무기면에서 모두 미국의 압도적인 우세하에 치러진 전쟁이었음에도 결과는 무승부로 끝났다.
프랑스는 알제리와 베트남에서, 미국은 베트남에서, 중국은 베트남에서,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에서 패했다.
미국이 베트남에서,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패한 이유는, 군비가 그 군사적인 힘을 상실해 버렸기 때문이다. 군비는 개개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는 있을지라도 전쟁 그 자체의 향방을 결정할 수는 없다. 그리고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 아니라, 정치의 실패를 뜻하는 것에 불과하게 되었다.
기사 1명을 유지하려면 말 4필과 종자가 적어도 6명이 있어야 했다. 그 모든 이를 먹여 살리려면 8세대에서 10세대의 농가가 필요했다.
유럽에서는 화기를 위한 화햑이 14세기에 사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화약이 민생용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그 5백년 후인 19세기 중엽에 들어서면서부터다. 결국 군사용 기술이 민수용으로 사용되지 못한 것이다.
민수용 기술이 군수용으로 이전되지도 않았다. 고대 유럽에서는 노젓는 배가 중심이었고, 8세기에서 10세기에 걸쳐 북유럽에서는 풍차와 물레방아가 실용화되어 인력과 동물 이외의 동력원이 생겼다. 그리고 풍력이 배의 동력으로 이용되었다. 군사용으로는 700년 동안이나 인력을 주된 동력으로 하는 갤리선이 여전히 사용되었다.
17세기에 들어와서 제2차 대전 종결까지의 250년 동안 군사경제와 민간경제는 서로 도우면서 나란히 발전했다. 네덜란드인은 17세기 말에 선원과 그 식량 이외에도 대량의 화물을 적재 운반하는 배를 건조했다. 그것은 군함이었다. 그 배의 설계도가 세계 최초의 효율적인 화물선을 만드는 데 이용되었다.
1700년 이후 250년간에 걸쳐 민간 경제면의 모든 기술혁신이 곧 군사용으로 전용되었다. 증기기관, 전화, 무선통신, 자동차, 비행기 따위가 그것이다.
전쟁이 초래한 갖가지 기술진보에 의해 상업화가 수십년씩이나 촉진된 경우도 많았다. 나폴레옹은 유럽시장에 대한 영국의 사탕수수 독점을 깨뜨리기 위해 사탕무우에 의한 사탕을 개발했다. 만약 1차 대전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라디오의 개발도 30년은 늦게 기다려야 했을 것이다. 첫 컴퓨터로서 유명한 에니악은 군사목적을 위해 개발되었다. 그러고 보면 지금의 GPS와 인터넷도 마찬가지다.
19세기 초에 영국이 세계에서 경제적 주도권을 확보하게 된 가장 큰 요인의 하나는 넬슨의 무적함대를 건조한 조선소를 새로 설계된 쾌속선이나 기선을 대량건조하는 데 전용한 것이었다. 그것들이 50년간 세계의 해상무역을 지배했던 것이다.
미국도 1812년 미영전쟁의 해군창설을 위해 확장한 군수용 조선소를 민수용으로 전환했다. 1941년 12월 제2차대전 참전 당시 미국은 군수용 생산시설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뷔크, 올즈모빌, 폰티액 등 승용차를 생산하고 있던 뉴저지 주 린던의 자동차 조립공장을 미국 최대의 함재전투기 공장으로 전환하는 데 불과 4개월밖에 소요되지 않았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 5개월만에 그 공장은 다시 자통차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제 이런 것은 옛말이 되었다. 군사비 지출은 군사기술도 민간 경제를 고갈시키는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일본이 가장 중요한 예다.
문제는 자금이 아니라, 인재에 있다. 일본에서는 대부분의 과학자와 기술자가 군사 분야에서 일하지 않고 민간 경제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런데 미국은 기술자의 약 3분의 1이 군사분야에 고용되어 있다.
페루, 칠레, 아르헨티나, 브라질 등 국가는 군사비가 생산적 설비투자에 돌려져야 할 자금의 절반을 흡수하고 있다.
군대는 이미 국가의 교육기관이 아니다. 신병이 기술, 규율, 위생관념, 노동의 습관 따위를 전혀 모르는 영세농민의 무식한 아들이었던 시절에는 군대에서도 가르칠 거리가 있었다. 오늘날 발전도상국에서조차도 그런 아이들은 없다.
군대는 지난날에는 가능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오늘날에는 현대사회나 현대정치의 갖가지 유혹으로부터 군대 자체를 지킬 수조차 없게 되었다.
군사원조가 목적에 어긋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은 장군들이 믿을 수 없는 인종이기 때문은 아니다. 애당초 외국원조를 받는다는 사실이 군의 본질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국가의 독립과 그 유지야말로 군대의 사명이다. 그러므로 군사원조는 그것이 크면 클수록 모순도 커진다.
2차 대전 후 40년간 정치의 수단으로서 방대한 군사원조가 사용된 적은 역사상 없다. 더욱이 그 성과가 그처럼 초라했던 적도 없다. 소련은 대규모적인 군사원조를 실시했다. 그러나 그 성과들이 서방진영의 군사원조 성과보다 초라했다는 것은 조금도 서방세계의 위안이 되지 않는다. 그리스의 대령들의 정권, 이란의 샤, 필리핀의 마르코스, 파나마의 노리에가 등 미국의 푸짐한 군사원조는 새로운 적을 만들었을 뿐이다.
군사 작전이 실패하는 것은, 아무리 강대국이라 할지라도 한 종류의 군사행동에 대해서 밖에 준비하고 계획하고 훈련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대 사회의 진보된 기술 아래에서는 군사작전은 무수히 있을 수 있다. 특정한 적에 대한 특정한 군사행동을 취하기 위한 계획, 훈련, 정비, 지휘라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모든 종류의 적에 대해 모든 종류의 군사행동을 취하기 위한 계획, 훈련, 정비, 지휘 등과 같은 것은 오늘날 불가능하다.
대양에서의 해상작전을 위해 건조되고 장비된 미국의 구축함은 민간항공기와 민간선박이 북적거리는 페르시아만에서 유조선을 호위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군비가 정치의 수단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만은 명확하다. 이 사실이야말로 과거 40년간 왜 군비가 그처럼 방대한 것이 되어 버렸는가를 설명해 주고 있다. 그것은 양으로써 질을 보완하려 했기 때문이다.
사병의 부활
유럽을 황폐화한 30년 전쟁 (1618~1648) 당시는 사병으로서의 군대가 있었다. 그러나 이 30년전쟁을 고비로 모든 국가가 국가의 관리하에 놓이지 않는 군대의 존재를 일절 허용치 않게 되었다. 국민을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지키는 것이 국가의 의무인 동시에 국가의 독점적인 권리로 인정되었다. 소포로 핵폭탄이나 세균무기 화학무기를 보내는 것은 쉬워졌다. 국가에 의한 국방의 독점은 사실상 무너지고 말았다. 테러리스트가 사병을 복권시킨 것이다. 테러에 대해 전통적인 뜻의 국방은 효과가 없다.
과거 30년간 군축사상은, 군사적인 우위에 설 수 있을 경우에 한해서만 군비를 삭감한다라는 것이었다.
제2부 정부와 정치 프로세스
6. 정부의 한계
거의 2세기 동안 정부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관해 뜨거운 논의가 계속되었지만, 정부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 거의 아무런 의무도 제기되지 않았다.
선진국에서는 사회도 정치도 다시 다원화하고 있다. 사회의 다원주의는 한 가지 목적인 성과제일주의의 비정치적 기관에 의한 다원주의다. 정치의 다원주의는 순전히 정치적인 고도로 조직화된 소수파로 이루어지는 다원주의다.
전능의 정부에서 민영화로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이 1776년 나온 이래, 그는 정부는 그 본질상 경제를 운영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19세기 사람들은 정치에 관해 논했다. 정부의 계획, 통제, 활동에 대해 가장 엄한 비판을 전개한 것은 최후의 자유주의자인 허버트 스펜서이다.
신보수주의자의 아버지 하이예크 또한 예속의 길 1884에서 정부의 무능을 논한 것이 아니라, 정부가 너무 많은 능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정부의 경제에 대한 간섭을 배제하기 위한 논의를 했다.
민영화를 시작한 영국의 대처 정부나, 프랑스의 사회당을 보면, 정부의 무능이 사실임을 알 수 있다.
오늘날 민영화의 또다른 형태는 경쟁입찰에 의한 공공서비스 부문의 민간위탁을 들 수 있다. 청소, 소방, 경찰업무까지 민간에 위탁하는 도시가 적지 않다.
이런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 데는 세 가지 원인이 있다. 제2차대전 후 정부의 계획과 사업이 잇달아 실패하고, 세금의 징수와 세출에 의해 할 수 있는 일에 한계가 있다는 인식, 정부의 세입증대도 한계가 있다는 인식이다.
정부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19세기에는 대부분의 정부사업이 좋은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우편사업이 그 예이다. 유럽의 국유철도, 독일의 건강보험제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1900년 전후에 시작된 노동자 재해보상 보험제도 들이다.
제2차대전 후, 정부계획이 다소나마 성공한 나라는 오직 일본뿐이다.
중국에서는 농업 민영화 이후 하루 아침에 생산량은 급속히 증대하고 생산성도 향상했다.
다국적 기업 페덱스의 창립자인 프레드 스미스는 아직 스위스에 진출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그 나라만이 아직 정부의 우편사업이 성공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정부의 사업은 그것이 독점적으로 진행될 때에 비로소 유효하게 기능한다. 경쟁자가 있으면, 정부사업은 유효하게 기능하지 못한다. 민간사업에서는 청산, 매각, 해산이 있지만, 정부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후에도 그 활동을 끝내 포기하지 못한다.
윤리의 문제냐, 경제성의 문제냐
정부활동은 부족한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많은 방법 가운데 하나라는 관점은 사라지고, 언제나 성스러운 것으로 취급된다.
성과가 없으면 그때까지의 노력을 일단 의심해 보아야 하는 것인데, 1차대전 말기인 1917년경에 헛된 인명의 희생만 강요하는 광기의 참호전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의심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전쟁은 쌍방 모두 성스러운 목표가 되고 완전승리밖에는 생각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약물남용은 20년간에 걸친 정부에 의한 박멸운동이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윤리적 혹은 도의적인 접근방법에 문제가 있다면, 형벌을 폐지하고, 무거운 세금을 매기는 방법도 효과가 있을지 모른다.
전기는 경제적인 문제임에도, 미국에서는 윤리적 혹은 도의적 문제로 취급된다. 테네시강 유역개발공사는 설립목적을 달성했는데도, 오늘날 미국에서 전기요금이 TVA지역이 가장 비싸다.
정부활동은 중지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혁신할 힘도 가지지 못한다.
정부사업은 시작되기가 무섭게 사람들의 고용처를 만들어내기 위해 남용하려는 압력이 높아진다. 정부사업은 복수의 목적을 가지게 되면 그 순간부터 반드시 타락의 길로 들어선다.
정부활동이 유효하게 기능하려면, 달리 목적을 달성할 방법이 없고 어디까지난 독점사업이라야 한다. 정부활동이 유효성을 상실한 훈,ㄴ 또는 그 목적을 달성한 후는 존속해서는 안된다. 정치적인 목적에 봉사해서는 안되며 공공을 위한 일정한 목적달성에만 주력해야 한다.
시영사업을 민간에 위탁한 선구자 데드 콜드리에 의하면, 정부활동에는 쉬운 것가 어려운 것이 있다고 한다. 어려운 것에 대해서는 정부가 효율적으로 운영하기도 어렵고 처음부터 실시하기가 불가능하다. 이해관계자 모두가 동일한 성과를 요구하는 경우에는 정부활동은 쉽다. 그 전형적인 예가 19세기의 우편사업이다.
정부에게만 실시하는 것이 허용되고 또 정부만이 그 능력을 가진 활동으로, 국방과 군비이다. 또 법과 질서와 정의의 확립이다.
이런 활동에 비해 훨씬 복잡하고 많은 논쟁의 여지가 있는 정부활동은 이른바 ‘공정한 경기장의 유지’이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를 예로 들 수 있다.
모든 정부활동이 다 영원한 것은 아니다. 정부활동은 처음부터 곧 끝내야 하는 단기적인 사업으로 조직되어야 한다.
정부가 아닌 다른 기관이 정부보다 더 효율적으로 일을 잘할 수 있으면 정부는 그 일에서 손을 떼야 한다.
돈으로 할 수 없는 것
19세기 공공사업의 경우에, 부유층만의 독점물이었떤 하수도, 상수도, 수송수단, 학교, 의료를 가난한 사람에게 주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서 영세민의 사회적 환경을 바꾸기 위해 방대한 재정지출을 했지만 한결같이 실패로 끝났다.가장 큰 실패작 두 가지는, 미국에서 시행된 저소득층을 위한 주택사업과 사회복지사업이다.
방대한 정부자금에 의해 건설된 저소득층용 주택 가운데 많은 것이 쓸모없이 버려진 상태다. 옛 슬럼가보다 더 지독한 상태에 빠져 있다. 미국의 흑인 생활궁핍자는 그들을 위한 복지예산이 사용되면 될수록 점점 더 가난해지고 궁핍해지고 혜택과는 거리가 먼 상태로 빠지고 있다.
최근 40년간에 걸쳐 가장 성공한 정부활동으로서 영국 대처 수상의 저소득층용 공영주택의 민영화정책이다.
세금으로는 할 수 없는 것
더 큰 실패작은, 정부에 의한 사회개혁의 시도, 즉 세제에 의한 소득재분배이다.
세제에 의한 소득재분배를 정책에 반영시킨 사람은 영국의 데이빗 로이드 조지였다. 로이드 조지가 예산을 국회에 상정한 바로 그 무렵 이탈리아의 수리경제학자 윌프레도 파레토가 오늘날 파레토 법칙으로 알려진 것을 완성했다. 그는 정부에 의한 소득재분배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생산성이 낮으면 소득분배는 불평등하게 된다. 생산성이 높아지면 평등하게 된다.
로이드 조지가 정한 재산세는 1900년 당시의 영국 부자와 귀족으로부터 재산을 몰수했지만, 그 부는 금융업자, 제조업자, 상인이라고 하는 다른 부자들에게 옮겨가게 했을 따름이다.
사실상 소득과 부의 분배를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정책은 단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인플레이션 정책이다. 그것은 중산층으로부터 부를 빼앗는다. 물론 주로 생산성을 파괴함으로써 뺏는 것이다.
조세국가의 한계
1차대전이 끝날 무렵 슘페터는 조세국가의 위기를 발표했다. 정부가 조달하는 자금은 국민소득의 5%였지만, 전비 조달로 인하여 정부의 자금 조달에 한계가 없어졌다. 그 전까지는 정치가는 항상 선택을 강요당했다. 그런데 정부의 자금조달능력이 자유방임됨으로써 소득의 흐름이 생산적인 부문보다 비생산적인 세출이라는 그릇된 방향으로 빗나가게 되었다.
다만 정부의 자금조달능력에 대한 한계는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는 있다. 이 사실을 처음 지적한 사람은 오스트레일리아의 경제학자 콜린 클라크였다. 정부는 불가항력적인 인플레이션 압력을 낳지 않고 국민총생산의 25% 이상을 거둬 들이기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세금에 대한 말없는 반란
세금이 35%에서 45%를 초과하게 되면 국민이 일을 하지 않게 된다. 세금이 그 수준에 도달한 나라는 지하경제가 발달해 있다. 미국에서는 1960년 전에만 해도 탈세 따위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미국은 지하경제가 15%에 달해 있다는 계산이 있다. 스웨덴은 지하경제가 30%에 달해 있다고 한다. 중국은 전체경제의 3분의 1에서 2분의 1까지가 지하경제로 추정한다.
7. 새로운 다원사회의 출현
사회의 다원화와 정치의 다원화는 서로 전혀 다른 형태로 진행되었다. 사회이 새로운 다원주의는 기능과 성과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그것은 부의 창조, 교육, 의료, 혹은 어린이에게 가치관을 심어주고 생활태도를 가르치는 일 등 각각이 독자적인 사회적 구실을 가진 단일목적의 사회적 기관으로 이루어진 다원주의다. 정치의 다원주의는 소수파들로 이루어진 다원주의다. 그런 대중운동은 다수결이나 설득에 의해 얻어지지 않는 것을 힘에 의해 획득하려고 한다.
다원사회
150년 전만 해도 어린이교육, 노인과 환자의 간호 등 오늘날에 사회적 과제로 되어 있는 일 대부분이 가족들에 의해 처리되었다.
75년 전만 해도 미국에서 출산은 대개 가정에서 이루어졌다. 오늘날 출산은 대부분 병원에서 이루어진다. 당시만 해도 미국에서 국민총생산의 4분의 3은 가족농업과 종업원이 4명 이하인 가내공업에 의해 만들어졌다. 오늘날 국민총생산의 4분의 3은 종업원이 25명 이상인 기업체에 의해 생산되고 있다. 학교, 기업, 노동조합, 병원 모두가 사회적 기관으로서 내부에 통치를 위한 기관인 매니지먼트를 가지고 있다.
1920년대 소련 독일, 이탈리아에서 절정을 이룬 전체주의는 모든 기간과 기능을 중앙에 흡수하고 종속시켰지만, 대실패로 끝났다. 전체주의가 사회적 기관에 대해 행할 수 있는 단 하가지는, 모택동이 문혁을 통해 보여 주듯이 사회적 기관 그 자체를 부수어 버리는 것뿐이다.
사회적 기관은 활동의 촛점이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 이 기관들의 최대강점이다. 이 목적의 촛점을 흐리면 문제가 발생한다. 미국의 학교를 인종차별 폐지의 주역으로 만듦으로써 어린이를 교육한다는 임무를 수행하는 능력을 약화시키고 말았다.
새로운 사회적 기관의 기반은 권력이 아니라 기능이다.
100년 전에는 군인, 성직자, 교사 등 극히 한정된 일부를 제외하고 사회적 기관을 위해 일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영국에서는 1910년에 들어와서도 집안일꾼이 ㅊㅗㅇ노동인구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었다.
오늘날 비공산권 선진국에서는 공장노동자는 노동인구의 6분의 1에 불과하다. 20세기가 가기 전에 그것은 10분의 1로 줄어들 것이다. 이 공장노동자를 대체해서 새롭게 등장한 자가 지식노동자이다. 고학력자의 90% 이상이 그들의 인생을 조직의 종업원으로서 보낸다.
언제 시작되었는가?
주권국가가 승리를 선언한지 500년만에 근대기업이라고 하는 전혀 새로운 권력의 중심이 등장했다.
오늘날 경영에 관해 이야기할 때 반드시 ‘기업경영’이라는 말이 사용되는 것도 처음으로 등장한 새 권력의 중심이 바로 근대기업이었기 때문이다.
근대기업이 탄생한 수년 후에 또하나의 다원주의적인 사회적 기관이 나타났는데, 바로 근대 관료기구다. 그 규모와 힘이 급속하게 증대하기 시작한 것은 1875년에서 1880년에 걸친 사이였다. 그 전의 관료기구가 어떤 것인지는, 앤소니 트롤로프의 소설 올리 팜(1862)에 나타나 있다. 당시 영국 정부에서 가장 중요한 부처인 내무부조차 국회의원이자 정치가인 장관과 사무차관, 그리고 4명의 사무관을 합해 6명이 있을 뿐이었다.
과거의 다원사회는 권력에 바탕한 것이었지만 오늘의 다원사회는 기능에 바탕해 있다.
개인의 위치
지식노동자는 착취자도 피착취자도 아니다 . 개개인은 자본가도 아니지만 총체적으로 연금기금, 신탁, 저축 등을 통해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다. 완전히 독립된 존재인 동시에 남에게 의존하는 존재다. 자기자신이 어떤 의미있는 존재이려면 어떤 사회적 기관의 종업원이어야 한다. 적어도 어떤 사회적 기관에 대해 컨설턴트 정도의 관계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오늘의 다원주의는 흔히 지리적인 국경을 초월한다. 역사적 경험에 의하면 새로운 다원사회의 현실에 알맞은 법적, 정치적 원리를 가지려면 1세기는 걸릴 것이다.
새로운 다원사회는 이미 다섯 가지 영역에서 중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사회적 책임이란 무엇인가?
자기 자신의 일을 하고, 자기 자신이 인간, 지역사회, 사회 전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책임을 지고, 마지막으로 환자의 치료, 재화의 생산, 지식의 탐구, 기타 자기 자신의 일을 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생겨하는 것을 제외하고 남에게 영향을 미칠 일에는 일절 관여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사회적 책임에 관해서 논할 때, 그것이 그 기관 본연의 능력을 해치지는 않는가라는 질문을 해볼 필요가 있다. 학교에 인종차별금지 의무를 부여한다면, 반드시 교육을 해치지는 않을지 질문을 해볼 필요가 있었다.
야수의 원칙은, 사자가 우리에서 나오면 사육자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사회적 기관은 남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
종업원이 전진하는 것을 제한하는 것은 본연의 일을 수행하는 데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한편으로 종업원이 고객 빼돌리기나 기업기밀의 누설은 깅 자기를 방어하는 것은 정당하며 본연의 일을 수행하는 데 필수적인 영향력의 행사로 인식된다.
대학으로부터 학위를 거부 당한 학생은 오늘날 지식샇에서 취직, 경력, 그리고 생계의 길이 막힌다. 이것은 그 어떠한 사회적 기관의 권력보다 훨씬 강력한 권력이다.
지역사회에 대한 책임
밀턴 프리드만은, 기업이 본연의 사업으로 만족하는 것만도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고객이 원하는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고 또 내일의 위험, 투자, 성장에 필요한 자본을 만들기 위한 이익을 낳는 일 이외의 행동에 관여한다는 것은 그 사회적 책임에 어긋난다.
미국의 병원이 시내진료소의 개설사업에 나선 것은 완전한 선의에서였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시내의 빈민굴 문제는 사회문제로서 열악한 주거, 실업, 능력 및 동기 결여에 기인하여, 병원의 전문분야인 의료활동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본적인 문제는 아니었다.
정치적 책임
다원사회에서는 누가 전체의 이익을 살피느냐는 문제가 있다. 다원사회의 기관들은 사회가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를 항상 염두에 두지 않으면 사회의 지지를 잃고 만다.
개인의 권리와 책임
지금은 일 자체를 일종의 재산권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전문가라는 것은 항상 전문을 분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전문지식이라는 것은 조직 전체의 목표와 요구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지 않으면 그 자체만으로써는 아무런 성과도 낳지 못한다.
정부의 역할
미국에서는 의료보험비의 3분의 1, 유치원에서 대학원까지 교육비의 4분의 3이 세금에 의해 충당되고 있다.
금후로 다원사회의 정부에 주어질 가장 중요한 과제는 이런 사회적 기관이 수행해야 할 기능에 관해 일정한 기준을 설정하는 것이다.
소수파의 횡포
야생화 보호, 인공낙태금지, 총기보유규제 등과 같은 단일목적을 가진 소수파는 소수파이기 때문에 힘을 발휘한다. 그 힘의 근원은 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내세운 단일목적에 있다. 그것은 무언가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중지시키고 저지하는데 있고, 이것이 오늘날 선진국의 정치과정을 지배하기 시작한 새로운 대중운동이다.
1981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엘이아스 카네티는 치료의 대상이 개인이 아니라, 대중운동이라고 보았다.
소수파는 조직되어 있고 방향이 주어져 있고 행동적이며 한 목적만 고집해서 행동하기 때문에 남을 위압하고 지배하는 존재가 된다. 대중운동에 있어서는 자기들의 목적만이 절대적인 가치를 가진다.
대중운동의 발명자는 조제프 퓰리처와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이다. 그들은 자기 소유의 대중신문을 사용 혹은 악용함으로써 거대한 영향력을 가진 잘 조직된 압력집단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대부분의 정치가가 반대하고, 대부분의 국민도 반대하였지만, 미국을 1898년 미서 전쟁으로 몰아넣는 데 성공했다.
1890년대 유럽의 진보파에게 있어서 스페인은 시대착오적인 반동이자 적이었다.
이것을 이용하는 움직임이 유럽에서도 나타났다. 1905년 프롤레타리아 쇱단의 선동에 따른 총파업에 의해 부르주아를 타도하고 자본주의 사회를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한 프랑스의 조르즈 소렐이었다. 총파업에 의한 혁명의 시도는 1920년대에 세 번 실천되었다. 1921년 이탈리아, 1923년 영국, 1926년 일본에서 대대적인 노사분규가 발생했다. 영국에서는 실패했지만, 이탈리아에서는 뭇솔리니가, 일본에서는 육군의 군부 파시스트가 승리자가 되었다.
그 다음 가장 성공한 제자가 레닌이었다. 대중의 지지 따위는 아랑곳없이 여하한 타협도 거부하며 권력이라는 유일한 목적을 추구하는 강철같이 뭉친 진짜 신봉자들인 볼세비키당을 조직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레닌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고 실토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좌익이 아니라, 금주운동가들이 이를 이용했다. 결국 1918년에서 1920년 사이에 국회에서 금주법을 제정시키는데 성공했다.
대중운동의 전략은 언제나 같으며 타협을 일절 배제한다. 자신들의 목적이 윤리적으로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다고 믿는 것이 중요하다. 자기들의 주장이 널리 일반의 지지를 받지 못해도 상관이 없다. 이 점이 일반언론이나 정치가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다.
유권자의 3%내지 5%밖에 결집시킬 수 없는 소수파 집단은 남을 당선시킬 만한 힘을 갖지는 못하지만, 낙선시킬 수는 있다. 따라서 그들의 힘은 긍정적인 것이 못된다. 애당초 그들은 권력을 잡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도 정치적 존재로 보지 않는다. 자기들을 윤리적이고 도의적인 존재로 알고 있다. 전체주의자는 약탈자였지만, 그들은 기생자다. 전체주의는 사람을 죽였으나, 그들은 사회를 마비시킨다.
녹색당이나 프랑스의 국수주의 운동들로 중도정당은 이미 마비상태에 이르렀고, 좌익정당이 이들 때문에 마비되는 날도 그리 멀지 않다.
정치에서 의사결정의 중심이 정치가나 행정담당자로부터 급속하게 로비활동가에게로 옮아가고 있다.
이런 문제에 대해 해독제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완화제는 있을지도 모른다. 미국에서 극히 유효할 방법의 하나는 세제의 근본적인 개혁이다. 면세, 감세, 연체 따위를 일절 인정치 않는 것이다. 세제 면의 특혜 조치를 요구하는 집단이 많기 때문에 생긴 문제로서, 하위 25%의 소득층은 면세, 25%에서 75%까지는 15%, 상위 25%는 25%의 세율을 정하는 것이다. 징세도 간편해진다는 장점이 있다.
또 하나의 방법은 선거자금의 조달에 관한 개혁이다. 정치헌금은 모두 금지하고, 선거자금 자체를 낮은 수준 이상은 금해야 한다.
8. 카리스마를 경계하라 - 새 시대의 정치지도자
영국의 대처 수상이 아무런 계획도 없다. 그녀가 주력한 과제는, 노동조합의 힘을 파괴하고, 산업, 주택, 교육의 민영화, 유럽공동체에의 적극적인 참여로 인한 영미간의 특수한 관계를 해치지 않는 것이었다.
1981년 취임한 미테랑도 5개월만에 사회주의의 꿈을 버리고, 그 이후는 대통령자리를 계속 지키는 것과 친구와 지지자들을 정부와 민간의 요직에 취임시키는 외에는 아무런 과제가 없었다.
헬무트 콜 수상 역시 어떠한 프로그램도 없이, 발생하는 문제를 처리할 뿐이었다.
카리스마적 지도자는 새로운 현실을 향해서가 아니라 어제라고 하는 과거를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다.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도 현실을 움직일 수 없다. 그리고 현실이 주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 카리스마적 지도자는 편집광이 된다. 20세기의 거대한 카리스마적 지도자는 모두 사나운 미치광이로서 막을 내리고 있다. 스탈린, 히틀러, 모택동을 보라.
지도자는 현실세계 그 자체이다.
카리스마성은 언제나 교만하다. 미국의 군사지도자 가운데 가장 카리스마적이었던 것은 더글러스 맥아더다. 가장 뛰어난 군사지도자이기도 하다. 그는 카리스마성에 유래한 교만 때문에 트루먼의 명령뿐 아니라 중국이 반격할 것이라는 뚜렷한 징후까지 무시하여 비참한 실각을 하게 된다.
더욱이 정책프로그램이 없는 카리스마적 지도자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 그리고 오늘날 프로그램 따위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아데나워는 12년간에 걸친 나치의 공포와 철저한 패전으로부터 독일사회를 부흥시켰다. 그는 이렇다할 개성도 없는 음침한 학자풍 관료이고 조직의 인간이었을 뿐이다. 영국점령군이 전쟁 종료후 그가 다시 쾰른시장에 도전하려고 하자 정치적 무능이라는 낙인을 찍어 거부했을 정도다. 그러나 그가 가진 것은 카리스마성이 아니라 비전과 깊은 신앙과 책임감과 근로의욕이었다.
우연한 대통령인 해리 트루먼은 그는 일찌기 남자의복 판매장의 주임이었지만, 그 점포의 파산으로 작은 정치적 자리에 앉게 된다. 그러나 유럽을 붕괴한 무정부상태, 공산주의, 절망으로부터 구한 것은 트루먼이다. 윤리적인 성실성, 강한 책임감, 조언을 구하는 겸손, 그리고 부지런함이었다.
불과 10년 전 지중해는 공해 때문에 죽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지중해의 공해는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세 나라의 공동행동에 의해 저지되었으며 차차 개선되고 있다.
레이건 대통령은 공화당 매파와 그 군사적 증강 요구의 소리를 이용함으로써 1988년 미소 중거리 핵미사일 감축협정을 마무리지어 세계 최초로 군비의 실질적 삭감을 실현시켰다.
전통적인 정치에서 지도력은 문제를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그러나 금후로 정치적 지도력은 목적에 관한 합의를 중심으로 해서 조직하게 된다. 나아가 목적에 관한 합의를 줌심으로 해서 총력을 결집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길만이 모든 것을 마비시키는 소수파의 힘을 억누르는 유일한 방법이 될 것이다.
제3부 경제, 환경, 경제학
9. 글로벌 경제와 지구의 환경 문제
1970년대 초 또는 중반에 OPEC의 움직임과 변동환율제 이행과 더불어 국제경제에서 글로벌경제로 바뀌었다.
글로벌경제를 움직이는 것은 재화와 서비스의 무역이 아니다. 그것은 주로 자본의 이동이다. 주권국가의 재정금융정책은 글로벌한 금융자본시장을 능동적으로 형성시킨다기보다는 그러한 움직임에 따라 반응한다.
토지와 노동은 2차적인 것이다. 자본도 전세계로부터 조달할 수 있다. 환율 역시 단기적인 의미만이 있을 뿐이다. 결정적인 생산요소는 매니지먼트이다.
글로벌 경제하에서 기업활동의 목표는 이익의 최대화가 아니다. 그것은 시장의 최대화이다.
경제학에서는 주권국가만이 유일한, 지배적인 경제단위이며 효과적인 경제정책을 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주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글로벌 경제에서는 그러한 경제단위가 네 가지나 된다. 제2의 경제다위는 경제 블럭이다. 유럽공동체, 북미 블럭 등. 세번째는 화폐, 신용, 투자와 연관되는 순수하고도 자율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글로벌 경제가 있다. 네번째는 글로벌 기업이다.
글로벌 경제의 경제정책은 자유무역주의도 보호무역주의도 아니다. 그것은 경제 블록간의 상호주의다.
새로운 현실로서 지구적 환경문제가 있다.
미국의 경험
여전히 미국은 세계경제의 지배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일본과 비교해도 2배 가까운 규모다.
1980년대 초 및 중반에 미국의 제조업이 거의 모두 몰락하고 말았다고 한다. 그러나 미국은 단 1년간만을 예외로 하고 해마다 공업제품 수출은 지속적인 증가추세를 보였다.
전통적인 제조업 분야의 지각 변동은 미국만이 그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미국만의 문제도 아니다.
1980년대에 미국의 제조업은 세계시장 점유율을 계속적으로 유지해 왔다.
1980년대의 미국이 안고 있던 거액의 무역수지적자는 미국의 제조업이 몰락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적인 상품가격과 상품수출의 붕괴 때문이었다.
1981년 이래, 농산품과 공업원료의 국제시장가격은 계속적으로 하락했고, 무역량도 계속적으로 줄어들었다. 공업제품가격과 비교한 공업원료의 상대가격은 1980년대에 역사상 최저 기록 수준까지 하락했다. 1930년대의 대공황시대보다 낮은 수준이었다.
1980년대 말의 세계의 식량 수입시장으로는 일본가 소련이라는 두 나라가 남았을 뿐이다.
미국은 역사적으로 농산물과 공업원료의 두 가지 모두 세계 최대의 수출국이다. 주요 선진국중 공업제품이 아니라 공업원료나 식량의 수출로 상위 랭킹을 차지하는 나라는 캐나다를 제외하면 미국뿐이다.
1980년대의 미국의 무역적자의 나머지 부분은 미국의 제조업 부진이 원인이 아니라 원유수입의 급격한 증대가 그 원인이 되고 있다.
모든 경제이론과 경험에 의하면 통화 가치의 급격하고 대폭적인 하락은 그 나라의 급격하고 대폭적인 수출증대 또는 수입감축을 가져 오게 되어 있다.
세계의 금융사상 미국은 자국 통화에 의해서 대외채무를 지는 최초의 대채무국이다. 미국의 주요채권국인 일보놕 서독의 통화에 대한 달러화 가치의 50% 하락은 두 나라가 보유하는 막대한 달러 자산의 가치를 어김없이 반으로 줄여 버리고 만다.
1987년 영국을 비롯한 외국기업은 미국의 기업과 부동산에 350억 달러를 투자했다. 그러나 같은 해에 미국기업은 외국 특히 EC 여러 나라의 자회사 및 관련회사에 적어도 500억 달러를 투자했다. 1987년말 미국의 대외직접투자 잔액은 3100억 ㅏㄹ러에 달했고, 여러 외국의 대미직접투자 잔액을 대폭적으로 웃돌았다.
현실의 교훈
미국의 경험이 가르쳐 주는 첫번 째 교훈은 원료경제와 공업경제의 분리이다. 식량 가격과 원료 가격의 심각하고도 장기적인 슬럼프는 그 18개월 후에는 틀림없이 공업경제의 심각하고도 장기적인 위기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이것은 18세기와 19세기에는 정확했다. 그러나 1989년 세계의 원료경제가 이미 10년 가까이 심각한 장기 불황인데도, 공업경제는 활기를 띠고 있다.
입증된 법칙에 의하면 원료가격은 환율의 변동에 즉각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달러의 국제적 가치가 하락하면 이에 따라 원료의 달러 가격은 상승해야 한다. 현실에서는 달러의 하락과 동시에 원료의 달러 가격도 계속적으로 하락했다. 농업 생산이 늘었다는 사실이 주요인이지만, 그 외 경제가 원료집약적인 것으로부터 탈피했다. 1920년대의 대표적 공업제품이던 자동차의 경우, 코스트 총액에서 원료와 에너지의 비율은 60%였다. 그런데 1980년대의 대표적 공업제품인 마이크로칩은 2% 이하이다. 오늘날 전화케이블의 동선은 글라스 파이버로 바뀌고 있다. 구리선은 원료와 에너지 비율이 8%에 가깝지만, 글라스 파이버는 10%에 지나지 않는다. 최신의 에너지라고 할 수 있는 정보는 원료나 에너지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오늘날의 제조업은 날이 갈수록 노동과는 분리되어 가고 있다. 1988년 동일한 수량의 재화를 생산하는 데에 필요한 공장노동자의 총노동시간은 1973년의 5분의 2 미만이 되었다.
1980년대 미국의 경험에서 또 하나의 교훈은, 기업이 다국적 기업에서 글로벌 기업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다국적 기업은 모회사에서 연구한 것을 자회사에서 생산만 할 뿐이었다. 오늘날은 어디에서든 설계를 하고 있다. 글로벌기업은 한 명의 재무전문가가 전세계의 관련회사의 자금을 집중적으로 관리 운용하고 있다.
실물경제를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는 것은 심볼경제이다. 내수형의 기업이라 하더라도 환율이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각오해야 한다. 환율은 정치적 요인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므로 본질적으로 불안정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환율의 변동이라는 위험에 대해서도 기업을 지킬 준비를 해야한다.
경제적 초강대국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어떤 나라라 하더라도 장기간에 걸쳐서 기술, 매니지먼트, 이노베이션, 설계, 기업가 정신 등에서 우세한 지위를 계속적으로 유지할 수 는 없다.
보완적 무역은 협력관계를 구축하려고 한다. 경쟂ㅇ적 무역은 상대방 단골고객을 확보하려고 한다. 적대적 무역은 산업을 지배하려고 하는 것이다.
근로자재해보상보험제도가 도입되었을 때, 기업주에 대해서 살인면허를 부여하는 것이라는 반발도 있었지만, 그 어떤 안전수칙, 안전검사보다도 산업재해의 감소에 기여했다.
현대의 전쟁에서는 패전국의 부흥없이는 전승국의 번영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전시중에도 전후의 부흥에 필요한 자원은 보호한다는 국제법이 필요하다. 지난 250년 동안 민간인 및 그 재산은 비전투원으로서 교전국 쌍방으로부터 특별한 보호를 받아왔다.
그러나 1899년에서 1902년에 걸쳐 치러졌던 보아전쟁에서 영국에 의해 파괴되었다. 영국군은 전투에 참가했던 보아인을 항복시키기 위해 부녖들을 감금하는 강제수요를 만들ㅇㅆ고 보아인의 농장을 적성재산이라 하여 몰수하고 말았다. 영국군의 이러한 행위는 야만적인 행위로서 규탄을 받았다. 12년 후 영국군은 1차대전을 치르는 동안 이 야만적인 행위를 법적인 원칙으로서 확립하고 말았다. 그 후 적국의 시민 및 그 재산은 적으로 간주되어 어떠한 권리도 인정받지 못하고 어떠한 법적 보호도 부여되지 않게 되었다.
10. 경제개발의 모순
경제개발에는 생산성이 높은 저임금 노동력을 이용한 제품을 선진국에 수출함으로써 실현하는 경제개발이 있지만, 이 것은 선진국의 생산활동이 노동집약적일 때만 가능한 것이다. 또 하나는 유치산업보호에 의한 경제개발이다. 이는 브라질, 멕시코, 인도의 경우를 볼 때 역시 실패했다.
당시 경제개발의 특효약으로 제시된 것은 다음과 같다.
소비에트 스타일의 계획이다. 그런데 이것은 가장 큰 실패를 가져왔다. 1950년에 공산주의자가 아닌 사람들은 이미 농업에는 효과가 없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공업면에서는 성공하고 있는 것으로 믿어졌다. 물론 오늘날 관료들이 수치를 조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소비에트식 계획이 도입되기 전에는 그 생산성과 기술수준이 독일과 맞먹고 프랑스보다 앞서 있었다. 그런데 소비에트식 계획경제가 도입된 지 40년이 자나자 체코의 1인당 공업생산액이 서독이나 프랑스의 반 이하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쿠바 역시 공산주의 체제가 된 지 30년이 지난 오늘날, 공업생산은 카스트로 이전보다 훨씬 밑돌고 있다.
공산주의의 문제점은, 계획이라는 것이 자원의 배분에서도 오류를 범하고, 결합에 있어서도 실수를 하기 때문이다.
1930년대에서 40년대에 걸쳐서 런던 경제학파를 중심으로 마련된 사회민주주의 계획도 아프리카의 구영국령 식민지의 생산활동과 생산성을 파멸적으로 저하시키는 주요원인이었는데, 역시 계획이라는 문제가 있었다.
인도가 경제발전의 길을 제대로 밟아나가기 시작한 것은 초대 수상인 네루가 세상을 떠나기 몇 년 전 학생시절 영국에서 배운 사회민주주의적 계획경제를 포기하고 난 다음부터였다.
아르헨티나의 후안 페론이 1950년대에 실천한 경제정책은 바로 영국 경제학자들이 주장한 그런 정책이었지만, 번영하던 농업은 거의 궤멸상태로 빠져들었다. 군대 뿐만 아니라 민간에서도 관료주의가 판을 쳤고, 수뢰와 독직이 만연했다. 그리고 엄청난 인플레가 닥쳤다.
소비에트식 계획경제에 대항하기 위해 트루먼이 들고나온 것이 경제개발을 위한 개발원조였다. 이것은 전면적인 경제후퇴를 가져오지는 않았지만, 두드러진 경제개발의 성과를 가져오지도 못했다.
트루먼의 개발원조는 마셜 플랜을 본뜬 것이었지만, 마셜 플랜에 의한 지원대상이 된 서유럽에는 경제개발을 수행할 능력이 있었다. 노동자, 교육, 수송, 금융, 그리고 유능한 정부가 있었지만, 트루먼의 개발원조 대상국가는 모든 것이 결여되어 있었다.
또하나 마셜 플랜이 상대했던 것은 기업이나 산업이었지만, 개발원조가 상대했던 것은 정부였다. 정부는 ㄱ들이 선호하는 제철소, 허울 좋은 프로젝트에 투입되었다.
가장 필요한 고용효과가 나오는 곳은, 유통, 판매, 건축, 도로건설, 자동차 수리, 주유소, 지방 영세기업 따위 별로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기술이 없는 수많은 사람들을 고용할 수 있는 일이야말로 그 나라들이 가장 필요로 하고 있던 것이다.
프랑스의 샤를 드골 대통령의 유도적 계획은 어떠한가?
정부가 경제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서 시사를 하면, 그 시사를 따르는 기업이나 산업에 대해 투자를 함으로써 기업을 지원한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10년이 지나자, 아무런 계획이 없는 서독보다 낙후되어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유도적 계획은 기업에 대해서, 기술혁신, 기회와 신기술의 재빠른 이용, 수출을 위한 줄기찬 노력 따위를 포기시켰을 뿐이다. 이 유도적 계획이 1970년 그 마을 내리자, 프랑스의 경제성장이 시작되었다.
일본의 성공한 사업중 정부의 계획에 의한 것은 거의 없다.
성공한 정책
영국은 증기기관, 철도, 기선, 섬유기계, 공작기계, 그리고 국제금융, 보험, 우편, 통신 분야의 우위성에 의해서 세계 최초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미국은 철강, 전력, 전신전화, 농기구와 작물재배기술, 타이프라이터 따위 사무용기기, 최초의 가정용 기계인 재봉틀 따위 분야의 우위성을 무기로 경제대국이 되었다. 또 자동차와 항공기 분야에서 주도적인 지위를 차지했다.
독일은 미국과 비슷한 시기에 철강, 전력, 전기전자기기, 전신, 화학, 약품, 자동차, 유니버설 뱅크에 읳나 금융에서 혁신을 이룩했다.
제 2차대전 이후에 성공한 경제개발정책은 두 가지가 있다. 저임금노동에 의한 공업제품의 수출이고, 유치산업 보호이다. 모두 19세기에 시랲한 정책이지만, 2차대전 이후 사태가 바뀌었다.
일본은 교육훈련을 통해서 저임금노동자의 생산성을 향상시키고, 고품질의 제품을 고도로 훈련된 저임금노동력을 기반으로 수출주도형 경제개발을 했고, 이는 한국, 홍콩, 대만, 싱가포르, 브라질도 본받게 되었다.
오늘날 직접 노무비가 15% 이상 되는 산업은 사양산업이 되고 있을 뿐이다.
GM의 직접 노무비는 오늘날 25%이다. 그러나 도요다 및 포드의 직접 노무비는 18%까지 낮추어졌다. 라디오와 컴퓨터의 조립 등 언제나 노동집약적인 산업에서도 직접노무비는 20%를 훨씬 밑돌고 지금도 여전히 낮아져 가고 있다.
유치산업 실패의 교훈은 멕시코이다. 학실히 보호정책에 의해서 멕시코의 제조업은 급속하게 성장했다. 그러나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경쟁력을 상실해 갔다. 원자재나 부품의 수입은 늘어나기만 했다.
19세기의 유치산업 보호정책은 독일을 비롯하여 거의 모든 나라에서 도입된 지 얼마 못가서 자살적인 정책이라 하여 포기되었다.
일본의 산업은 제조업이건 서비스업이건 수출산업 이외의 산업에는 경쟁력이 없다. 대부분의 수출산업이 해외시장에서 낮은 가격을 유지하기 위해서 국내시장에선느 비싼 가격을 붙이지 않을 수 없다. 훨씬 극단적인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이 브라질과 한국이다.
현실적으로 세계경제에서 의미가 있는 존재는 오오마에겐이찌가 말하는 트라이아드 Triad, 즉 북아메리카, 서유럽, 아시아의 선진국으로 이루어지는 3극 뿐이며, 공산권에도, 비공산권의 제3세계에 대해서도 주의할 필요는 없다고 하는 논의도 나온다. 3극의 여러 나라는 자국이 소비하는 것 이상의 식량을 생산하며, 필요로 하는 공업원료의 사실상 전량을 생산할 수 있다. 전세계 제품의 3분의 2를 생산해서 소비하고 있다.
경제개발이 가장 먼저 가져오는 것은 중산층의 성장이며 경제개발은 우선 처음에는 빈곤을 더욱 두드러지게 만들고 참을 수 없게 한다. 경제개발은 외국의 개발원조에 의해서가 아니라 부지런히 땀흘려 일하는 가운데 이루어지잔다.
11. 갈림길에 선 경제학
새로운 현실이 처음 일어난 것은, 1870년대 경계의 시대였다. 당시 오스트리아의 칼 멩거, 영국의 스탠리 제본스, 프랑스의 레옹 왈라스같은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은 한계효용이론에 의거한 새로운 경제학을 낳았다. 그후 60년이 지나 대공황이 일어나서 이 신고전파 경제학을 궁지에 몰아넣자. 케인즈가 새로운 종합적 이론으로서 국가를 경제단위로 하는 경제이론을 제창했다. 신고전파 경제학의 한계효용이론은 서브시스켐으로 취급당하게 되고, 마이크로경제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밀튼 프리드만 같은 공급주의 경제학자는 포스트케인지안이지, 안티케인지안은 아니다.
오늘날 필요로 하고 있는 모델은 경제를 하나의 생태계, 환경, 형태로서 파악하는 것이어야 한다. 경제는 각 영역으로 형성되는데, 지금까지의 경제학은 이들 영역 중의 하나를 지배적인 것으로, 다른 것은 종속적인 존재로서 함수에 지나지 않는 거스로 가정해 왔다.
이들을 종합하고 단순화하는 경제학이 나오지 않는다면 경제학 부재의 시대가 된다. 우리 경제학은 하나하나의 경제문제를 해결해 줄 뿐인 처방전밖에 덛지 못하고 있다.
매크로 경제학의 모델은, 지배적 지위에 있는 경제는 주권국가의 경제이다. 신고전파 경제학의 모델은 개인과 기업이 주역이지만, 케인즈경제학에 밀려나게 되었다.
케인즈 이전의 경제학에서는 재화나 서비스의 실물경제가 지배하였지만, 케인즈경제학 이후에는 화폐가 현실이다. 또 현재의 의미있는 경제는 국민경제뿐이라고 하지만, 개인과 기업이 매크로경제에 굴복한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조셉 슘페터가 1930년대에 지적하듯이, 개인은 어떤 경제정책과도 상관없이 화폐의 회전속도를 아무도 예상할 수 없는 형태로 느닷없이 급격하게 바꿀 수가 있다.
예를 들어 1936년까지 뉴딜정책에 의해 대량의 구매력이 미국 소비자의 주머니를 부풀게 했다. 그러나 소비자는 그 추가적 구매력을 행사하려 하지 않았다. 그 결과 1936년부터 또다시 경제위기가 닥쳤다.
카터 당시에도 그럴 여유가 많았지만, 전혀 소비하지 않다가, 레이건 대통령 하에서 갑자기 취향을 바꾸어 소비를 시작했고, 소비를 증가시켜 나갔다. 미국이 대폭적인 무역적자를 내고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말이다.
경제학자들이 이윤의 극대화야말로 합리적인 행동이라고 규정하지만, 어떤 기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인가?
그리고 현재의 경제학에는 기술, 혁신, 변화 따위를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문제가 있다. 균형상태에 있는 경제를 가정하고 있다. 그런 것을 경제학이 의식하기는 하지만, 그런 것을 모델에 수용하려는 시도는 모두 실패했다.
경제학이 기능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국면을 통합해야만 한다. 화폐, 신용, 금리의 메크로경제이다. 또 하나는 화폐의 히전속도에 관계되는 의사결정, 현재라고 하는 시간의 길이에 관계되는 마이크로경제이다. 마지막으로 기업가정신과 혁신이다.
글로벌 경제에 있어서는 경제합리성의 관념이 크게 다르다. 의사결정의 대상이 되는 기간도 크게 바뀐다.
레이건이 1980년대 초에 달러강세를 가져왔을 때 미국의 수출기업은 달러에 의한 이익폭을 확보할 것을 결정하고, 가격인상을 단행했다. 미국의 수출기업은 몇 개월 단위로 이윤의 극대화를 시도했다. 얼마 후 미국의 수출기업은 해외에서 매출이 줄어들기 시작했고, 2년이 지나자 이익마저 올릴 수 없게 되었다.
복잡성의 이론이 오늘날 수학의 떠오르는 분야이다. 복잡한 시스템에 있어서는 장기적인 기후는 예측가능하며 안정적이다. 그러나 단기적인 날씨는 예측 불가능하며 불안정적이다. 날씨 따위 단기적인 현상에 대해서는 시스템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있는 것은 혼돈뿐이다.
오늘날의 경제학 경제정책은 단기적 현상을 대상으로 한다. 불황, 물가 등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런 것은 통용되지 않는다.
시카고학파의 조지 스티글러는 미국정부에 의한 경제의 통제, 방향설정, 규제 중에서 성공한 것은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방대한 작업에 의해 분명히 했다.
1929년 이전에는 정부는 경제의 날씨를 지배하려고 시도한 일은 없었다. 그러나 1930년대 대공황이 전세계를 휩쓸었을 때 케인즈가 정부는 경제를 관리하고 지배할 수 있다고 하는 이론을 제시했다.
오늘날 유권자의 가장 큰 지지를 받는 정치가들은 날씨를 지배하는 것보다는 기후를 조성하는 정책에 주력하고 있다.
소비자에 대한 영향이 아니라 고용에 대한 영향을 논하는 사람은 경제학자가 아니라 정치가이다라고 경제학은 말한다.
제4부 새로운 지식사회
12. 탈비지니스 사회
19세기 미국실업가 중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은 금융가 J.P. 모건 한 사람밖에 없었지만, 그조차도 대학 중퇴의 학력이었다.
지식노동자가 급속히 증가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에 들어서부터다. 1900년 이래 미국인구는 7500만 명에서 2억 5천만 명으로 3배가 증가했다. 대학교수는 금세기 초 그 수가 1만 명 이하였다. 오늘날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자는 50만 명 이상이나 된다.
지식과 교육이 좋은 취직을 위한 패스포트로 되어 버린 사실은, 비지니스가 성공을 위한 주도니 길이었던 비지니스 사회로부터, 비지니스는 몇 가지 길 중의 하나에 불과하게 된 것이다.
근래까지도 좋은 일자리와 신분의 안정을 위한 방법은 교육을 받는 것이 아니라, 노동조합이 있는 대량생산 공장에 미숙련공으로서 17세에 취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사회의 중심은 새로운 가치관과 기대감을 가진 집단, 지식노동자에게로 옮아가고 있다.
미국에서는 카운터칼쳐가 생기고 있다. 그것은 무보수의 자원봉사자를 확보하고 있는 비영리, 비관영의 사회적 기관으로 구서오디는 제3의 섹터이다.
그리하여 조직사회에서는 매니지먼트가 중심적인 사회적 기능으로서 커다란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지식이 선진국 경제의 중심적 자본이 되어 지식노동자가 사회의 가치와 규범을 결정하는 존재로 된 결과, 지식 그 자체의 의미나 그 가르치는 방법과 배우는 방법까지 바뀌게 되었다.
비공산권 선진국에서 비지니스는 사회의 부의 생산능력을 폭발적으로 신장시켰다. 선진국에서는 적어도 20배, 한국, 브라질, 스페인 등에서는 그 이상의 신장을 보였다. 그런데, 그것이 물질적 또는 경제적인 부의 재생산에 돌려진 부분은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나머지 중 3분의 1은 임금을 상승시키고 노동시간을 단축하는 형태로 여가시간의 창출에 할당되었다. 미국에서는 20세기 초 연간 3300시간 일하던 것을 1800시간만 일한다. 일본에서는 3500시간이던 것이 2000시간밖에 일하지 않는다. 서독에서는 1500시간으로까지 단축되었다.
나머지 3분의 1은 의료와 교육으로 돌려지고 있다. 의료관계비가 GNP에서 점하는 비율은 50년 전의 1% 이하에서, 현재 8%에서 11%, 학교교육도 2%에서 10%로까지 신장되었다.
비지니스의 성공은 선진국에서 자본가를 경제적으로 의미가 없는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 당시의 자본가는 필요한 자본을 모두 댈 수 있는 자본가였다. 1988년 포춘지에 게재된 미국부호 1천 명의 재산을 모두 합쳐도 미국의 주요산업 하나의 자금수요를 몇 개월밖에 대지 못한다.
오늘의 자본가는 부호계급이 아니라 연금기금이며, 그 소유주인 종업원이다. 오늘날 선진국 대부호 모두가 갑자기 사라져 버려도 세계경제는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도 못할 것이다.
오늘날 가장 강력한 로비단체는 전미 퇴직자연합이다.
마르크스의 통찰중 하나는, 자본은 이동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점에서 자본은 토지나 노동의 생산요소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자본은 가장 좋은 보답을 주는 곳으로 이동한다.
지질학자, 수학자, 기술자, 프로그래머, 타이프라이터비서, 교육훈련 담당자, 회계사, 간호사, 세일즈맨 등 온갖 종류의 지식노동자도 자기들이 어떠한 고용주에게도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 버렸다.
제철소의 노동자가 30년간에 걸친 힘든 육체노동 뒤에는 기꺼이 은퇴했지만, 지식노동자는 30년간 일한 뒤에도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젊다. 그들은 자기가 해왔던 일에 싫증이 나 있다. 이미 지위도 오를 만큼 올랐다. 연금을 받을 자격도 있다. 남은 것은 65세라는 연금 받을 나이가 되기를 기다리는 일뿐이다.
1913년 영국에서 최대의 직종은 가사 고용인, 여자하인이었다. 1914년에 1차대전이 일어나고 남자들이 군대로 간 뒤, 그녀들은 군수공장에 일하러 나갔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아무도 돌아가지 않았다. 공장에서의 일이 힘들어도 가정부생활보다는 나았다. 공장에서는 정해진 시간만 일하면 되었다.
그 당시에는 공원으로 일하는 것만이 하층민의 유일한 탈출구였다. 다이물러도, 미국의 헨리 포드도 처음에는 공원이었다.
1980년대의 여자는 총명과 꾸미나 재능이 없어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장학금을 받아 주립대학에 가서, 4년 뒤 다양한 직업선택의 기회가 기다리고 있다. 약간만 총명해도 5년 후에는 부사장대리나 구매책임자가 된다. 예술도 가능하고, 아나운서로 될 수도 있다.
대학을 나오지 않은 사람에게는 오늘날 역시 공원이나 사무원으로서 기업에서 일하는 것이 가장 좋은 취직이다. 기업은 학력이 없는 사람에게는 최대의 취직자리가 된다. 그러나 취직은 100년 전과는 달리 큰 찬스가 된다고는 할 수 없다. 앞이 가로막혀 있는 것이다.
지식노동자는 아무 곳에도 속박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컴퓨터 전문가에게는 백화점, 대학, 병원, 정부기관, 증권회사 등 어느 곳에서 일하든, 그들의 관심이 급료 이외에는 설비가 최신의 것인가, 일이 재미있는가 하는 것이다. 금융분석가, 물리요법 기사, 인사관리자, 야금 전문가, 세일즈맨, 그래픽 아티스트, 지방미술관의 사업담당 부장도 마찬가지다.
지식노동자는 자기의 전문분야에서 진지하게 일하지 않고는 훌륭한 일을 해내지 못한다.
지식노동자의 가치체계에서 보면 조직의 가치관은 부차적인 것이다.
우리들은 어떠한 방법으로 지식노동자의 전문가로서의 가치관과, 경제 전체 및 개개 조직의 전통적인 가치관, 즉 생산성이나 이익에 관계되는 가치관과의 균형을 이루어나갈 수 있을까
13. 두 개의 카운터 컬처 - 노동자 계급과 써드 섹터
지난날 사회의 중심적 계층이었던 공업노동자가 소위 노동자 계급을 이루어가고 있다. 또 하나의 카운터 컬처는 비영리기관으로 이루어진 써드 섹터이다.
1848년 사회주의자들은 새로운 사회현상으로서 공업노동자의 출현을 확인했고, 1925년 공업노동자는 남녀를 포함한 최대의 직업집단이었다. 그리고 1950년대에는 공업노동자와 그들의 노동조합이 모든 비공산권 선진국에 있어서 중심적인 정치세력이 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와서 이들은 노동력이 차지하는 비율에서, 그리고 절대 숫자에 있어서, 마지막으로 정치적 영향력에 있어서 급속히 그 지위가 저하되었다.
이 공업노동자의 급속한 흥성과 쇠퇴를 가져오게 한 것은 같은 힘이었다. 그것은 지식의 힘이었다. 마르크스 등에 있어서 생산량을 증가시키기 위해서는 보다 더 열심히 더 오래 일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런데 프레드릭 W 테일러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공장노동을 연구 분석하여 현명하게 일함으로써 생산량을 대폭 증가시킬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는 생산량을 대폭 증가시켰고, 제품 가격을 인하시켰고, 수요를 증대시키면서 노동자의 임금인상을 가능하게 했다.
테일러 덕분에 노동자들은 수입과 생활수준이 향상되었다.
1970년 이래 그 다음단계로서 분석과 시스템이 생산 프로세스 자체에 대해서 적용되었다. 제조의 중심이 육체노동자로부터 지식노동자에게로 옮아갔다. 지식 노동자의 직장 증가는 공업노동자의 직장 감소를 훨씬 웃돌았다.
점점 더많은 노동자계급 출신 사람들이 고등교육을 받고 지식노동자로 되어가고 있다. 저학력자들은 점점 더 성공한 친구들로부터 실패자, 낙오자, 문제아, 약자로 취급당한다.
문제는 돈이 아니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다. 미국에서는 1980년대 말에 40세 이하의 비교적 젊은 노동력 인구에 있어서조차 대학졸업자는 4분의 1에 불과하다. 간호, 법률사무, 패션, 그래픽 기술, 컴퓨터 기술, 치과 조수, 기타의 다양한 사람들은 학습하는 방법을 배워 아는 사람들이며, 사회적 지위도 높고 승진의 기회도 많다.
자본가의 역사는 자본주의보다 더 오래다.
노동조합은 공업노동자와 함께 성장했다. 오늘날 노동조합은 공업노동자와 더불어 그 지위의 하락에 직면하고 있다. 노동조합은 모든 의미에서 20세기의 가장 성공한 사회적 기관이라고 말할 수 있다. 1900년에는 비합법조직이었고, 1920년에 이르러 그 사회적 지위를 확립했고, 1950년 경에는 선진국 사회에서 지배적인 기관이었다. 1974년에는 전영 탄광부조합은 보수당을 정권의 자리에서 끌어내렸다. 그러나 10년 후 마가렛 대처가 탄광부조합의 재파업을 결정적으로 무찔렀다. 그 이후 오늘날까지 영국의 노동조합은 4분의 1의 조합원을 잃었다. 같은 기간에 미국에서도 5분의 2의 조합원을 잃었다.
레이건 대통령도 파업에 들어간 전미 공항관제조합을 해산시켜 버렸다.
원인은 노동조합에는 조합원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대폭적으로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선진국에서는 조합이 요구해온 것은 거의 법제화되었다. 노동시간 단축, 초과근무 수당, 유급휴가, 퇴직연금 등이 그것이다.
선진국에서는 임금기금, 즉 GNP 중의 노동자의 몫은 이미 80내지 85%를 넘었다. 이제는 보다 많이 획득해야 할 것이 남아있지 않다. 거의 매년 고용주가 종업원 연금기금에 출연하는 액수는 주주에게 돌아가는 배당을 상회하고 있다.
노동조합 간부의 질적 저하가 있다. 제2차 대전 전, 노동조합 간부의 자리는 노동자계급 출신의 젊은이가 노리는 최고의 지위였다. 그러나 오늘날 큰 뜻을 품은 젊은이는 대학에 가고 만다. 그들은 4년 후에는 경영간부 후보생이 되는 것이다.
노동조합에 대한 세평도 좋지 않다.
또 노동력의 중심이 제조업의 공업노동자로부터 지식노동자로 옮아갔다는 점도 있다.
노동조합에는 세 가지 길이 남아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방법, 그것은 노동조합이 소멸할 것이다. 정치적인 권력 구조를 지배하고 정부를 움직여 노동조합이 권력을 갖게 하는 방법, 이것은 민주적인 제도에 있어 표가 있어야 가능한 방법이다.
노동조합이 스스로의 기능을 제고하는 방법이 있다. 스칸디나비아 제국의 옴부즈만과 비슷한 것으로 재탄생하는 것이다.
세금에 의하기 보다 회비나 기부금으로 운영되는 제3의 기관은 비영리 조직이다. 그것이 갖고 있는 노동력이나 생산하는 산출액은 통계에 나오지 않는다.
미국에서는 성인의 반수, 9천만 명이 제3의 섹터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봉사자의 노동량은 풀타임으로 환산해서 750만명 분에 해당한다. 유급이라고 가정할 경우 1500억 달러에 해당한다. 미국이 유럽보다 세금이 싼 이유는 이 제3의 섹터의 활동에 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GNP의 15%나 되는 부분이 정부가 아니라 이 제3의 기관에 의해서 지출된다. 교회, 병원, 미술관 스카우트 등이 그런 기관이다.
14. 정보화조직
기업이나 정부도 병원이나 대학과 마찬가지로 지식을 중심으로 하는 조직이 됨과 동시에 전문가 집단을 중심으로 구성될 것이다.
데이터 처리능력을 정보력의 향상 쪽으로 돌리는 경우 조직의 구조에도 영향을 미친다. 거의 즉각적으로 경영관리자 계층과 경영관리자의 수를 대폭 축소시킬 수 있다. 경영관리자 계층의 많은 사람이 의사결정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보화 이전의 전통적인 조직에서는 주된 기능은 정보의 중계점, 의사 소통으로서의 초점이 흐린 미미한 정보를 증폭하는 인간증폭기의 역할에 불과했다.
데이터에 의미나 목적을 부가한 것이 정보이다. 따라서 데이터를 정보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지식이 불가결하다.
정보화 조직에서는 지식은 주로 최하층에 있다. 지식은 자기관리를 하며 제각기의 일을 하는 전문가들 머리 속에 있다.
병상이 400개 있는 병원의 경우, 수백 명의 의사와 1200내지 1500명의 의료보조자가 있으며, 60정도의 의료내지 의료보조 전문분야가 있다. 각 전문분야에는 독자적인 지식, 독자적인 훈련방법, 독자적인 용어가 있다. 임상실험실이나 물리요법실 등의 의료보조계통 책임자는 경영관리 전문가가 아니라 스스로 각기 자기 분야의 일을 하는 전문가이다. 그들은 병원의 최고관리층에 직속하고 있고, 중간적인 경영관리자는 없다.
오케스트라의 경우에도 지휘자는 있지만, 중간적인 지휘자는 없다.
광대하고 많은 인구를 가진 인도대륙을 통치하기 위해 영국이 할당한 인원은 항상 1천명 이하였다. 인도는 자기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2200만명을 두고 있다.
영국이 다스릴 때 모두 9개의 주로 나누어서, 1명의 정무관에게 100명의 부하를 두었다.
한 사람의 지휘자 밑에서 수백 명의 음악가가 함께 연주할 수 있는 것은 전원이 같은 악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병원의 전문가들도 환자의 치료라는 공통의 임무를 함께 수행한다. 진단서가 악보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기업이나 정부기관에는 기준삼을 악보가 없다.
정보화 조직에 있어서는 전원이 정보에 관하여 책임을 지는 일 즉 정보책임을 지는 일이 필요하다.
정보전문가들은 도구상에 불과하다. 의자를 고치는 데 필요한 도구가 무엇인지는 알지만, 의자를 고칠 필요가 있는지 없는지 판단하는 것은 별개 문제인 것이다.
톱매니지먼트는 어디서 오는가?
정보화 조직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는 최고경영인이 될 인간의 공급과 준비와 테스트이다.
독일에서는 분권화한 부문을 독립한 기업으로 취급하여 각기 최고경영층을 배치하고 자치권을 주고 있다. 대기업의 최고경영층이 작은 기업에서 뽑혀 올 지도 모른다. 젊은 지휘자는 일류 대형 오케스트라에 채용되기까지 작은 오케스트라나 오페라하우스에서 훈련을 쌓는다.
15. 사회적 기능 및 일반 교양으로서의 매니지먼트
인류의 역사상 매니지먼트만큼 급속히 발전하여 사회에 큰 영향을 준 것은 없다. 불과 150년도 되지 않는 동안에 매니지먼트는 선진국의 사회와 경제를 바꾸어 놓았다. 그것은 글로벌 경제를 창출해 냈고 글로벌 경제를 위한 새로운 룰까지 만들어냈다.
제1차대전이 발발할 즈음에 몇 사람의 사색가가 매니지먼트의 출현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오늘날 미국 노동력 중 최대의 직업은, 미국통계국에 의해 “경영관리직 및 전문직”이라고 분류되어 있는 직종이다. 전체 노동인구의 3분의 1에 달한다.
18세기 중국은 매년 2만 명에 이르는 지식인에게 일자리를 주었다. 그것은 당시 유럽 전체의 수보다 많은 것이었으며 유럽 지식인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오늘날 미국이 매년 1백만 명의 대학졸업자를 배출하고 있는데, 매니지먼트의 힘이 그들의 고용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지식, 특히 고도의 지식은 항상 전문화되어 있다. 단독으로는 아무 것도 생산할 수 없다.
오늘날의 기업은 60 전문 분야에 걸친 1만 명에 이르는 고도의 지식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다. 기술자나 설계자, 경제학자나 통계전문가, 회계사나 심리학자, 마케팅, 계획, 인사의 전문가가 같은 프로젝트를 위해 공동으로 일하고 있는 것이다.
지식을 사회적인 장식품과 사치품의 지위에서 진정한 생산자원으로 바꾼 것은 매니지먼트인 것이다.
1870년 경에 매니지먼트는 전례가 없었기 때문에, 대륙횡단철도나 제철소, 은행이나 백화점을 설립하는 사람은 군대의 지휘명령계통이 조직구조의 모델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최상층 극소수가 최하층의 다수에게 명령하는 조직구조가 100년 가까이 계속되어 왔다.
대학교육을 받은 기술자가 처음으로 제조업에 들어온 것은 1867년, 독일의 지멘스에서였다. 그의 이름은 프리드리히 폰 헤프너-알테네크였다. 5년 이내에 그는 연구부문을 만들었다.
그리고 육체노동에 매니지먼트를 적용하게 된 교육훈련이었다. 교육훈련은 전시의 필요에서 생긴 부산물이었다.
아담 스미스는 어떤 제품을 생산하고 판매하기 위해 필요한 노동의 전통을 배양하고 육체노동과 경영관리의 능력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수백 년이 걸린다고 말했지만, 1차대전 때문에 그 기간이 급속히 당겨진 것이었다.
테일러의 과학적관리법이 1885년에서 1910년에 걸쳐 개발되었고, 이것이 2차대전 중에 더욱 발전하였다. 전후에 일본으로 도입된 것이, 다시 20년 후에는 한국에 도입되었고, 그 결과 두 나라의 경이적인 경제발전이 있게 된 것이다.
군수생산을 위해서 1917년부터 18년에 걸쳐 개발된 간트차트 Gantt charts에서는 계획의 수법이 생겼다. 경험이나 직관을 정량화하기 위해서 분석논리학과 통계학의 수법이 생겼다.
1920년대 중반에서 1930년대 초반이라는 상당히 빠른 시기에 IBM의 토머스 왓슨 시니어, 시어즈 로벅의 로브트 E. 우드, 하버드 비지니스 스쿨의 엘튼 메이어 등이 한결같이 조립 라인의 개념은 일시적인 타협에 불과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조립라인은 생산성을 현저히 향상시켰음에도 너무 경직적인 것이었다. 인적 자원의 사용에 난점이 있고 엔지니어링상의 결함도 있었다. 그들의 사고와 실험으로부터 생겨난 것이 생산프로세스의 자동화이며, 인적 자원의 활용을 위한 팀 제도나 품질관리 서클이나 정보화 조직이었다.
2차대전에서 전략적으로는 독일군 쪽이 마지막까지 뛰어나 있었다. 병참선을 짧게 함으로써 후방부대를 소규모의 것으로 억제할 수 있었고, 대신에 전선의 전투력에서는 연합군과 호각을 이루게 했다. 그러나 최후의 승리는 매니지먼트의 힘에 의한 연합군이었다. 교전국 인구의 모두를 합친 수의 5분의 1에 불과한 미국의 교전국 군대 모두를 합친 수만큼 군대를 동원하고, 또 교전국 군수물자 모두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군수물자를 생산했다. 게다가 그 물자들을 중국, 소련, 인도, 아프리카, 서유럽 등 멀리 떨어진 전선으로까지 보냈다.
매니지먼트는 비지니스를 넘어서, 다양한 지식과 기술을 가진 사람들을 공동으로 일하게 하는 모든 사업에 적용해야 하는 수단이다. 그것은 써드섹터에도 적용되어 오늘날 세계적으로 하나의 새로운 사회적 기능이 되었다.
매니지먼트는 기업가 정신과 이노베이션의 영역까지 포함하게 되었다.
기업이나 매니지먼트의 정통성을 명백히 해 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아서, 적대적인 주식 공개 매입을 하는 기업매수꾼들이 횡행한다. 그들은 영속적인 사업체로서의 기업을 해체하고 약탈해 간다.
매니지먼트란 무엇인가?
매니지먼트는 인간과 연관된 것이다. 사람들의 강점을 발휘시키고 약점을 없애 버리는 것이다.
매니지먼트는 사업에 있어서의 인간의 협력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각 나라, 각 지방의 문화와 깊은 관계를 가진다. 경영관리자는 어느 곳에서도 같은 역할을 하지만, 매니지먼트의 방법은 다르다.
모든 사업체는 자신의 종업원에게 일에 관한 공통의 가치관과 목표를 가질 것을 요구한다.
매니지먼트는 조직과 그 구성원인 종업원의 필요와 기회에 따라 성장하고 적응해 나갈 수 있도록 하지 않으면 안된다. 조직은 학습과 교육을 위한 기관이다.
조직은 다양한 종류의 다른 일을 하는 다른 기술과 지식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조직과 그 매니지먼트에 있어서 성과의 평가기준은 산출량이나 이익만이 아니다. 시장에 있어서의 지위, 이노베이션, 생산성, 품질, 인재육성, 재무상황 등 모든 것이 조직의 성과로서, 또 조직의 생존에 관계되는 문제로서 중요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조직의 성과는 항상 외부에만 있다. 기업의 성과는 고객의 만족이며, 병원의 성과는 환자의 치유이며, 학교의 성과는 학생이 뭔가를 배워 10년 후에 그것을 활용하는 일이다.
매니지먼트는 인문과학의 문화도, 자연과학의 문화도 아니다. 그것은 실천과 실용이다. 그 성공 여부는 성과에 의해서 판정된다. 그것은 기술인 것이다. 동시에 매니지먼트는 인간에 관계되는 것이며 인간의 가치관이나 성장이나 발전에 관계되는 것이다. 즉 그것은 인문과학이다.
매니지먼트는 리버럴아트, 즉 일반교양이다. 지식의 기본, 자기인식, 지혜, 리더십에 관계를 가지기 때문에 일반교양인 것이다.
경영관리자는 심리학이나 철학, 경제학이나 역사 등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에 관한 모든 지식과 통찰을 지니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그 위에 물리적 과학을 익혀 두어야 하고 윤리학도 익혀 두어야 한다.
16. 교육의 변화
오늘날 경제에 있어서는 지식이 참된 자본이며 부를 낳는 중심적인 자원으로 되어가고 있다.
현재의 지식사회에서는 학교의 교육과 수료증서가 취직, 생계, 혹은 직업상의 경력을 크게 좌우한다. 그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교육이 필요불가결의 것으로 되어 있다. 또한 교육은 도시나 나라가 이미 경계가 아닌 오늘날의 복잡한 세계에 대한 이해도 포함한다. 바로 그러한 이유때문에 자신의 뿌리나 지역사회에 대한 이해가 한층 더 중요하게 되어가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석공으로 생계를 꾸렸다. 그가 현대의 돌공자에서 일한다 해도 위화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철학자로서 기호논리학이니 언어학이니 하는 현대 철학의 문제나 방법론에는 당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떤 기술자라도 학교를 나온 지 10년이 지나면 그 사이 그들의 지식을 되풀이 갱신하지 않는다면 시대에 뒤떨어지게 된다.
미국은 1960년대까지는 초등교육이 충분히 이루어졌다. 그 뒤로 교육이라는 본래의 책임이 사회적으로 필요로 하고 있는 다른 역할에 종속되어 버렸다.
미국은 학교제도에 경쟁을 도입하지 아니한 유일한 선진국이다. 프랑스에서는 국민학교 위에 공립과 카톨릭계의 두 병행제도가 있으며, 정부자금으로 운영된다. 이탈리아도 마찬가지다. 독일에는 김나지움이 있는데, 극소수의 엘리트를 교육하기 위한 대학진학 준비학교이다. 일본에서는 유명대학에 들어가는 진학률에 의해서 학교의 등급이 매겨진다.
그러나 미국의 공립학교는 거의 독점적인 지위에 있다. 시카고의 공립학교가 미국에서는 최저의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시카고의 백인은 이미 빈부를 불문하고 시의 공립학교를 기피한다. 이사를 가든지 좋은 사립학교에 보낸다.
교육을 행한다는 것 자체는 비교적 쉽다. 그러나 학생에게 졸업 후에 계속하여 학습하는 능력과 지식을 주고 또한 그러한 욕구를 심어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의학, 법률, 공학, 경영등 전문대학원 이외에는 졸업 후에 학생이 무엇을 배우고 있는지 파악하는 노력을 기울이는 학교는 없다.
학습방법을 배우는 방법에 관해서는 이미 충분한 지식이 축적되어 있다. 서기 1세기에 플루타르크는 아이를 기르는 방법에 관한 아이기르기 Paidea에서, 밝혀 놓았다. 장점이나 재능에 촛점을 맞추어 다른 것에 비하여 뛰어난 것은 더욱 뛰어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음악가, 배우, 화가 등 병아리 예술가를 가르치고 있는 교사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학교는 학생의 단점에만 눈을 돌리고 있다.
체코사람 존 아모스 코메니우스는 초등교육의 필요성을 처음으로 제창함과 동시에 그것을 위해 교과서와 초등독본을 만들어냈다.
18세기에 들어와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이 코메니우스의 영향을 크게 받아 학교를 시민육성의 장으로 만들었다. 토머스 제퍼슨이 만든 버지니아 주의 교육제도는 일반시민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오스트리아의 김나지움은 심각한 민족주의적인 분쟁이나 긴장에도 불구하고 150년 동안 분열을 면하고 통일을 유지할 수 있었다.
지식사회에서 교육은 사회적 목적을 가지게 마련이다. 교육에는 반드시 가치관이 수반된다. 가치관을 뺀 교육제도란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다.
교육제도는 개방적일 필요가 있다. 교육이 고학력자돠 노동자계급 사이의 넘을 수 없는 장벽을 쌓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전통적인 교육제도에서는 각 학교가 스스로를 종착점으로 여기고 있지만, 지식사회에서는 교육에 끝이 없다.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을 몇 번이고 학교로 돌아오게 해야 한다. ## 개인적으로 학교가 과연 그런 교육을 할 능력이 되는지 의문이다##
교육은 이미 학교만의 것이 아니다. 모든 사회기관이 교사가 될 필요가 있다.
실력주의가 금권주의로 변질되는 것을 막는 일이 교육의 사회적 책임이다. 오늘날 학교의 졸업증서가 좋은 직장과 경력을 얻기 위한 조건이다. 학교의 졸업증서가 돈에 대해서가 아니라 능력과 근면에 대해 주어지는 경우에 한하도록 해야 한다.
교육은 경제에 에너지를 준다. 사회를 변혁시킨다. 교육을 받은 사람은 충실한 인생을 살 수 있고, 생계를 꾸려나갈 수단을 확보한다. 교육철학은 모두 인생과 생계를 똑같은 비율로 중시해야 한다.
지식사회에는 수입이 풍부하면서도 살 만한 가치가 없는 생활을 하는 그런 교육받은 야만인은 필요없다. 마찬가지로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 문화적 아마추어도 필요없다.
지식사회는 교육받은 야만인의 사회로 되어 버릴 염려가 있다.
1927년 프랑스 철학자 줄리앙 방다는 “지식인의 배신”에서 우익이나 좌익의 인종적, 정치적 교조에 영합하여 진실을 왜곡한 당시의 학자나 저술자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그의 비판은 예언적이었다. 히틀러 시댕의 지식인, 스탈린주의자와 그 동조자를 보라.
속물근성이나 경멸이나 태만에 의해서 인문과학을 멸망시키는 것은 진리에 대한 배신으로 볼 수 있다.
오늘날의 학교는 지식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종업원으로서 조직에서 산다는 사실을 아직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원래 교육은 이것이 아니다. 아놀드의 퍼블릭 스쿨은 졸업한 사람은 사회의 지도자가 된는 것을 전제로 한다. 남에게 고용되는 것은 상상도 하지 않았다.
미국이나 독일의 대학은 졸업생이 전문가가 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오늘날의 모든 교육기관은 학생에 대해 조직의 일원으로서 성과를 올리기 위한 초보적인 기술조차도 터득시키려고 노력하고 있지 않다.
가르침을 받고 비로소 터득할 수 있는 것은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그 이외의 방법으로 배울 수 없다. 그러나 배워서 비로소 터득할 수 있는 것은 배워야 한다. 그것은 가르침을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새로운 지식이 기술로서 현실에 쓰이기까지는 긴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 때문에 오늘날 배우기에 관해서도 그 축적된 지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교에서 응용이 되지 않고 있다.
15세기나 16세기에는 인쇄된 교과서가 학교교사들의 배척의 대상이었다. 17세기 예수회에서 인쇄된 교과서를 사용하면서 교수법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그때까지는 학습이라는 것이 힘들여서 원본을 베끼거나 강의를 듣고 복창하는 것이었다.
컴퓨터는 인쇄된 교본보다 훨씬 사용자에게 친절하다. 무한한 인내력이 있다. 이와 같은 것은 교사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시청각 교육은 순식간에 사실을 전달하는 효과가 있다. 결과적으로 교사는 감독이나 상담상대로서의 역할을 강화해 나가게 된다.
서양의 인쇄된 교과서의 출현은 인류사상 전무후무한 학습열에 불을 붙였다. 누구나 자기에게 맞는 속도로, 자기 집에서 학습할 수 있다.
지식이란 무엇인가?
인쇄된 교과서가 나타난 뒤 스콜라 철학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전문화하는 것이었다. 지난 200년 동안 모든 사람에게 전문화하는 것이 새로운 지식을 획득하고, 혹은 전하기 위한 왕도였다. 물리적인 과학분야에는 전문화가 왕도로 남아 있을 것이지만, 그밖의 분야에서는 전문화는 앞으로 오히려 지식획득에 장애가 되고, 지식을 유익한 것으로 만드는 데에 더 큰 장애가 되어간다.
학문의 세계에서는 인쇄된 것을 지식으로 정의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자료에 지나지 않는다. 지식이란 정보이다. 지식이란 행동의 기초가 되고, 개인이나 사회적 기관으로 하여금 어떤 성과를 거둘 수 있는 행동을 가능케 하여 뭔가를 혹은 누군가를 바꿀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위대한 학자들은 베스트셀러를 썼다. 케인즈나 슘페터는 대중계몽가가 아님에도, 그들의 책이 경제학자가 아닌 사람들에 의해서도 많이 읽혔다. 1930년대의 아놀드 토인비가 대중의 욕구를 만족시키려 책을 쓴 것이 아니다. 고전학자 에디스 해밀턴이나 베르너 예거의 고대 그리스에 관한 책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들의 후계자인 오늘날의 학자들은 자기 돈을 써가면서 동료들조차 읽지 않는 학술지에 논문을 싣고 있는 실정이다. 널리 이해되지 않으면 지식이라고 할 수 없다.
오늘날 학계의 전문가들의 학식이 급속히 진정한 지식이 아닌 것으로 되어 버렸다. 그것은 기껏해야 전문지식에 불과하다. 더욱 나쁜 경우에는 그것이 단순한 데이터에 불과한 것으로 되어 버린다. ## 공자님 말씀 중에 학문은 일이관지하는 것이라는 말이 그대로 적용된다. 관심있는 분은 백가쟁명이라는 책을 참조하시기 바람##
과거 200년간에 걸쳐서 지식을 만들어내 왔떤 학문의 체계나 방법론이 자연과학 이외의 분야에서는 오늘날 극히 비생산적인 존재로 되어 있다. 학제적인 연구의 급속한 발전이 이것을 증명하고 있다. 19세기와 20세기에 교육, 학습, 연구의 중심이 되어왔던 학문 체계의 틀 안에서는 더 이상 새로운 지식을 얻을 수 없게 되어 있다.
결 론
분석으로부터 지각으로 - 새로운 세계관
산업혁명 이후 기술의 모델은 물리적인 모델로 되었다. 1945년 원자핵폭탄 이후에 물리적인 세계가 모델이었던 시대의 종말이 왔다. 1946년 ENIAC 컴퓨터가 등장했다. 정보가 조직의 요인이 되었다.
기업가 정신의 물결이 17세기 중반에서 18세기 초에 일어났다.
정보는 글로벌화했다. 정보에는 자본과 마찬가지로 조국이 없고, 국경이 없다.
20세기의 대도시는 19세기의 위대한 혁신, 즉 인간을 일터로 운반하는 능력에 의해 실현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정보를 사람이 있는 장소로 옮겨주는 일이 시작되고 있다.
앞으로 도시는 노동의 중심지가 아니라 정보의 중심지가 될 것이다.
규모의 문제가 중심적인 과제가 될 것이다. 물리적인 시스템에서는 항상 대규모화함으로써 보다 큰 성과를 얻었다. 생물적인 시스템에서는 그런 것이 적용되지 않는다. 생물학자는 쥐는 쥐로서 성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모두 알고 있다고 한다. 쥐가 인간보다 머리가 좋은지 나쁜지는 어리석은 질문이다. 쥐는 쥐로 성공하기 위해 인간을 비롯한 어떤 동물보다 잘알고 있다.
정보화 사회에서는 조직의 크기는 종속변수에 불과하다. 모르는 말로 전화를 해올 경우에는 통화상태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1970년대까지 세상의 풍조는 항상 집중화와 거대화를 지향해 왔다. 1929년 이전에는 의사는 수술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기의 환자를 병원으로 보내는 일이 없었다.
분석으로부터 지각으로
컴퓨터는 데카르트의 개념적인 분석적 모델의 승리이기도 하지만, 우리들은 동시에 컴퓨터 덕택에 분석적인 모델을 초월하게 되었다. 정보 그 자체는 분석적, 개념적이다. 우리는 그 도구를 가지고 새로운 의미를 찾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세상은 물리적인 세계관에서 생물적인 세계관으로 이행하는 새로운 종합철학의 등장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