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회화의 발자취 – 서성록
서평
미술사를 공부하면, 서양미술의 전개와 양상이 상당히 흥미를 끈다. 같은 인간이면서 어떻게 세련된 미술이 발전되는 문화가 있었는지, 반만년 역사를 자랑하는 대한민국은 얼마나 암흑기를 지니고 있었는지, 일제 시대부터 시작된 현대회화는 서양의 조류를 한국인의 감성에 맞게 받아 들이는 과정으로 상당히 느껴지는 바가 많게 된다. 해방이 가까이 오면서 한국인 독자적인 미술 세계관이 형성되는 것을 점차 느끼게 되고, 60년 대를 지나면서현대에 이르기까지 늘 그렇듯이 한국의 미술도 세계를 선도하는 분야가 나타나게 된다.
그러한 변화의 편린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분야의 발전도 비슷한 궤적을 밟아 가는 것을 알게 된다. 미술 하나로 이 세상을 재단하려면, 특히 한국 미술 하나로 재단하려면, 한국 미술이 세계 미술에서 차지하는 위치, 미술이 다른 문화 분야와 비교할 수 있는 잣대를 명확히 가져야 한다. 이런 잣대가 없이 단순히 현대 한국 미술을 추적한다면, 한국 미술에 대한 지식만 늘어갈 뿐이다.
이 책은 한국 현대 회화의 흐름을 체계적으로 잘 정리해 놓았고, 우리가 아는 많은 미술가들이 언급되어있기에, 상당히 흥미를 가지고 읽을 수 있다. 다만 제시하는 그림을 흑백으로 하였기 때문에 주위에서 칼라판 그림을 구해서 같이 본다면 재미있게 읽어볼 수 있다.
1. 신미술 도입
가. 우리의 근대
미술이라는 말은 1872년 일본의 메이지 정부에서 독일어 ‘Kunstgewerbe(공업예술)와 Bildende Kunst(조형미술)를 번역하기 위해 만든 신조어로, 한국에서는 1881년 무렵 처음 사용되었다.
중국 화보를 본뜨거나 스승의 그림을 아무런 생각없이 베껴 그리던 전통화가들은 일본에서 밀려온 화풍, 곧 카메라로 포착한 듯한 생생한 인물화와 산수화, 그리고 화려한 채색화에 차츰 말려들었다.
일본의 강점 아래서 근대 초기의 미술가들은 변화된 상황에 적응하기 어려웠다. 고희동은 서양화를 전공했지만 원래 공부했던 동양화로 돌아갔고, 장래가 촉망되던 김관호는 절필을 했고, 김찬영, 나혜석 역시 그림을 중도에 포기했다.
당시 그림을 신기한 잔재주쯤으로 여겼던 분위기 때문에, 미술가들은 애를 먹었다.
나. 서양화의 도입
서양화는 17세기 병자호란 직후 소현세자가 귀국하면서(1645), 천주교 교리와 천주상 그림을 가져오면서부터이다. 이승훈은 베이징에 갔다가 1784년 귀국하면서 성경 외에 천주화상, 그리스도 초상화 등을 가져왔다.
이런 저런 기회로 서양화를 접한 사람들이 서양화적 기법을 충분히 소화한 것은 아니라 해도 강세황, 홍세섭, 김수철, 김두량, 이희영 등 조선 말기 화가의 작품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 작품 속에는 전통 회화에는 없는 원근법, 특이한 준법의 구사, 명암을 통한 입체감의 표현, 대담한 정면 구도 설정, 사실적 묘사, 여백의 재인식 등 서양화적인 기법을 꽤 활발하게 이용하고 있다.
이희영의 견도(1795)는 한 마리 개가 고개를 젖히고 있는 모습이다. 목탄이나 연필로 스케치한 것처럼 경쾌하게 그린 사실주의적 그림이다. 능숙한 서양화법으로 그린 이 그림은 놀라운 묵필 소묘로서 세필로 치밀하게 대상을 묘사하고 있다.
다. 일본에서의 화풍전개
일본에서 외국에 유학한 화가들을 분류하면
가와무다 교요(川村淸雄) - 이탈리아
고쿠자와 규로(國澤九郞) - 영국
야마모토 보슈(山本芳翠) / 구로라 세이키(黑田淸輝) - 프랑스
이들은 서양을 모방하는 풍조로 그림을 그렸다.
다카하시 유이치의 연어, 1877, 140*46.5cm, 도쿄 예술대학 소장
일본의 예술풍조는 인상파와 구상화를 혼재한 것으로 대표적인 작가로 구로다를 들 수 있다.
구로다 세이키 – 1910년대 도쿄미술학교 교수이자 일본 아카데미즘을 지배, 파리에서 귀국 후 서양화과 주임교수, 당대 일본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문전의 운영위원,화풍은 서구 낭만주의 시대의 외광파적 사실주의, 고희동과 김관호 등이 구로다 세이키의 영향을 받음
당시 일본 유학파로서의 한국의 서양화가를 정리해 보면
라. 휴버트 보스와 레미옹
휴버트 보스(1855~1935)는 네덜란드 태생으로 브뤼셀의 아카데미 보자르를 나왔고, 1885년에서 1892년 사이 파리, 암스테르담, 브뤼셀, 드레스덴, 뮌헨 등지에서 폭넓게 전시회를 가진 사람이다. 인물화를 비롯하여 실내 및 풍경을 즐겨 그렸는데, 인물화에 발군의 실력을 인정받아 헤이그의 궁정화가가 되었고 영국왕립미술협회의 회원을 지내기도 했다. 보스는 1899년 5월경 서울에 와서 몇 점의 작품을 제작하였다. 파리 박람회에 출품할 작품 준비차 내한하여, 전 세계의 다양한 인종을 담아내려는 것이었다. 고종의 초상을 그린 흔적은 있으나, 불타버렸다. 뜻밖에도 보스는 2장을 그려 1장은 본인이 가져간 것이 90년 뒤에 발견되었다.
그는 그밖에도 황태자, 정부고관이던 민상호의 초상, 정동 부근에서 광화문을 바라본 서울풍경을 그렸다.
민상호 초상은 민상호의 얼굴 구석구석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치밀하게 묘사했다. 반짝이는 눈, 반듯한 코, 수염없는 턱에 한복을 입은 모습이 개화된 조선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한편 프랑스의 공예미술학교 교사인 레미옹은 프랑스와 문화교류의 일환으로 방한하여, 공예미술학교를 창설하기 위해 왔지만, 실패하고 돌아간다.
마. 고희동과 신미술
고희동(1886~1965)은 1903년 한성법어학교 재학시 레미옹이 불어 교사 마르텔의 얼굴을 연필로 스케치하는 광경을 목격하고 사실적 묘사에 감탄한 것을 계기로 서양화에 입문한다. 원래 조석진과 안중식에게 전통회화를 배웠지만, 전혀 다른 미술을 익히게 된 것이다. 아마도 전통 회화에서 찾아볼 수 없는 재현의 정확성, 명암법, 풍부한 색채감에 흥미를 느꼈을 것이다. 그는 도쿄미술학교에서 수학한 후, 귀국하여 휘문, 중앙, 중동학교에서 목탄화와 유화를 가르치고, 그 밑에서 윤희순, 이마동, 오지호 등 걸출한 화가들이 배출되었다.
고희동이 서양화로 바꾸게 된 소감은 다음과 같다. ‘그 당시 그리는 그림들은 모두가 중국인의 고금 화보를 펴놓고 모방하여가며, 어느 분수에 근사하면 제법 성가했다고 보는 것이며,..... 창작이라는 것은 명칭도 모르고 그저 중국 것만이 용하고 장하다는 것이며, 이 범위 바깥을 나가보려는 생각조차 없었다.’
고희동이 서화협회의 총무와 회장을 거쳐, 조선미술협회 조직, 전국 문화단체 총연합회 회장(1946), 대한미술협회 회장(1948), 국전 창설(1949), 국전 심사위원(1959, 8회까지), 예술원 종신 회원 겸 초대 회장(1954), 초대 참의원을 각각 역임했다.
바. 평양 출신 화가들
김관호(1890~1959)는 언론의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등장했다. 1916년 도쿄미술학교 졸업식에서 최우등상을 받았다는 소식 때문이다. 귀국 후에도 일본 문부성 주회의 ‘문전’에서 출품작 ‘해질녘’이 특선에 오르며 다시 주목을 받는다. 해질녘은 우리나라 최초의 나체화다. 해질 무렵의 고요한 대동강을 뒤로 끼고 붉게 물든 하늘을 배경으로 누드의 두 여인이 등을 보이는 작품인데, 당시 ‘매일신보’는 작품 사진을 즉각 입수하였으나, “여인이 벌거벗은 그림인고로 사진으로 게재치 못함”이란 사과문과 함께 다른 작품을 게재했다.
김관호, 해질녘, 1916, 127*127, 도쿄예술대학
고희동을 제외하고, 김관호, 김찬영, 이종우 등은 모두가 평양 출신이었다. 김관호는 1923년 제 2회 ‘선전’에 ‘호수’를 출품한 것 외 공식적인 활동이 발견되지 않는다.
김관호, 자화상, 1916, 60*50, 도쿄예술대학
‘호수’는 반라의 한 여인이 고개를 숙이고 사색에 잠긴 모습을 재현한 것이다. ‘해질 녘’과 비슷하나 구도가 균형을 잡지 못하고, 묘사도 서툴러 창작 생활에 전념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김찬영도 귀국하여, 평양을 중심으로 소성회미술연구소를 만들어 인재 양성에 나섰다. 1925년에 문을 열었는데, 김관호, 김찬영, 김윤보, 김광식이 강사로 나섰고, 수업 연한을 2년으로 하여, 목탄, 유화, 수묵, 담채 과목을 가르쳤다. 이 소성회는 공모전도 열었는데, 1929년 416점이 출품되었다고 한다.
사. 일본의 문명 개화
일본이 개화를 선언한 메이지 유신 직후에는 서구에서 무려 5천 명의 전문인들이 일본에 들어가 서구의 발달된 문명을 지도했다.
아. 고부미술학교
일본의 체계적인 미술 수업은 이탈리아에서 초빙된 세 명의 교사들이 지도했다. 1876년 창립된 고부미술학교는, 교과 과정을 회화와 조각으로 나누고, 회화는 소묘와 유화를, 조각은 다양한 물체 형상을 모델링하는 지도법으로 구성되었다.
안토니오 폰타네시(1818~1882)는 튜린의 왕립미술학교에서 교수를 지냈던 사람으로, 바르비종 양식의 소박한 풍경화를 그렸다. 빈첸조 라구사는 조각과 주임교수, 카펠레티는 기하학과 원근법, 그리고 장식을 가르쳤다.
쿠니사와 신쿠로(1847~1877)는 영국에 파견되어 런던에서 5년 동안 체류하며 유화를 배웠다. 이 기간에 ‘유럽의 여인’을 제작했다.
모모다케 카네이우키는 1876년 런던 주재 외교관으로 있으면서 회화를 익혔고, 가와무라 기요는 이탈리아에서, 하라다 나오지로는 독일에서 각각 수학했다.
이들 선구자 중에서 가장 출중한 인물은 구로다 세이키(1866~1924)였다. 그는 1884년부터 10년간 파리에서 라파엘 코랭의 지도 아래 그림을 배웠고, 근대 일본 미술계에서 부동의 자리를 차지했으며 가장 대표적인 화가로 평가받았다.
Raphael collin 작품
그러나 무차별적 모방이 성행하는 가운데, 미국인 페놀로사가 주도하는 반대 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는 일본의 전통미술을 연구하고, 불교미술과 카노파의 회화를 연구했다.
자. 도쿄미술학교
오카쿠라 덴신(1862~1913)은 외국으로 파견되어 만든 보고서에 일본의 전통 미술만을 교육시키기 위한 교육기관이 설립되어야 한다고 하여, 1887년 도쿄미술학교가 건립되었다. 서양위주의 고부미술학교는 1883년 폐교되었다. 서양식 유화나 연필 드로잉은 종적을 감추었다. 1882년 도쿄국립미술관을 건립했다. 그러나 대중의 서양 미술에 대한 관심으로, 1896년 그들의 성화에 못이겨 교과과정에 유화를 넣었고, 구로다 세이키와 구메 게이치로 등의 서양화가를 교수로 임용하게 되었다.
차. 근대적 교육기관
한국에서는 서화미술회, 기성서화회, 대구의 교남서화연구회, 고려미술원, 평양의 소성회미술연구소 등이 교육을 주도했다. 서화미술원은 문인화가였던 윤영기가 1911년 설립했고, 총독부로부터 보조를 받으면서 서화미술회로 개칭했다.
서화가 김규진은 해강서화연구회라는 단체를 1915년 발족했다. 1922년 발족된 교남서화연구회는 서병오를 회장으로 추대하여, 영남 일대의 이름있는 서화가들인 박기준, 정용기, 서병주, 이영면, 김재환, 김홍기, 서창규가 회원으로 가입하였다.
최초의 종합 연구 기관인 고려미술원은 1919년 11월 종로 YMCA에서 문을 열었다. 고려미술원은 유능한 인재를 배출하여 사람의 눈길을 끌었다. 제3회 선전(1924)에서 한국인 입상자들은 모두 8명이었는데, 5명이 고려미술원의 회원이었다. 그들은 김은호, 이종우, 나혜석, 박영래, 변관식이었고, 입선에는 고려미술원의 연구원인 중앙고보 5학년생 김용준도 이었다. 나중에 이응노, 김준엽, 이정만 등도 수상을 했다.
카. 이종우의 예술 도정과 방랑벽
이종우(1899~1981)의 부모는 출세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을 배우라고 일본 유학을 허락했으나, 집에는 법학을 공부하러 간다고 말하고 미술을 선택했다.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미술원과 중앙고보에서 실기를 지도했으나, 밀린 술값을 청산하기 위해서 파리 유학을 결심한다. 그 과정에서 파리로 가는 배 안에서 술을 마셔 유학비를 탕진해 버리는 일도 있었다.
1925년 파리의 수하이에프 연구소에 들어가서, 엄격한 해부학과 인체묘사를 배웠다. 1927년 살롱 도톤느에 출품한 ‘인형이 있는 정물’과 ‘모 부인상’이 입선하게 된다.
사에키 유조(1898~1928) – 이종우와 도쿄미술학교의 같은 클래스에서 공부한 사에키 유조는 역시 프랑스에서 대부분을 보내게 되는데, 살롱 도톤느에 출품하여 입선한다. 그는 점점 야수파 경향을 드러내면서, 31세에 사망한다. 일본의 고호, 파토스의 화가 등으로 불리는데, 그가 입선한 성 안느교회는 그런 경향을 보여준다.
이종우는 색이나 광선 위주가 아니라 모델의 실상 위주로 인물을 충실히 옮겨내는 화풍을 보였고, 해방 후에는 풍경화를 그리면서 계절의 감각과 색채 감각이 농후한 화풍으로 바뀌어간다.
차. 나혜석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제 1회부터 제 5회까지 입선하였고, 1921년 3월 경성일보사 건물 안의 내청각에서 한구 여성화가로서 최초의 개인전을 가졌다. 소설가로도 활약했다.
2. 신민화의 비탈길에서
가. 1930년대의 화단
1930년대 한국 화단은 개인이나 단체에 의한 창작활동이 밑받침되어 나름의 자생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1920년대 미국에서 귀국한 장발, 파리에서 귀국한 이종우, 나혜석, 임용련, 백남순 등은 각기 개인전을 열면서 화단 개척에 앞장을 섰다.##여러 단체의 소개는 92면 참조##
나. 무산 계급 미술
1925년 무산 계급 문화의 수립을 위해 결성된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프로예맹), 그 산하 기구로 만들어진 조선프롤레타리아 미술동맹(프로미맹)이 있다. 일부 미술인들은 목적 의식적 사회주의 문예 이론에 심취하여 사회혁명을 달성코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안석주는, ‘예술 그것은 그 시대인에게 아무런 반향이 없으면 자가 희롱물에만 그칠 것이다. 예술에는 그 시대인의 생활 그것이 간접으로 드러나서 다시 그것에게서 민중이 자기의 생활을 엿보아 자기를 알게 되는 것이다..... 또 말하자면 예술은 현실을 폭로시켜온 민중을 실재로 인도하는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1927년 김복진, 윤기정은, ‘예술은 무산계급성, 의식 투쟁성, 정치성을 지녀야 하며 무산 계급 예술가들을 조직하여 의식투쟁을 전개할 것을 주장했다’.
다. 김용준과 윤희순
김용준은, 예술을 선전과 선전 수단으로 이용하는 마르크스 주의의 ‘예술 도구론’ 밖에 없다면 사회운동과 예술운동은 본질적으로 상이할 게 없다는 반론을 했다. “선전을 위하여 쓴 작품이라도...... 훌륭한 예술품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선전을 예상하고 쓴 작품이라도 그것이 예술인 이상에는 예술적 관조와 예술 심리의 작용을 통하지 않으면 안된다.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예술적 지위를 보존할 수 없다. 아무리 과학적 요소를 주입하더라도 예술이 과학이 될 수는 없으며....”
김용준은 아카데미즘을 부르주아의 전유물로 보았으며 따라서 아카데미즘을 거부하는 것이 곧 부르주아에 대한 반항이요 프로 의식의 실현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아카데미즘의 거부를 촉구했다.
윤희순은 미술과 대중이 분리되었던 봉건적 미술에서 탈피하는 수단으로 리얼리즘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으며, 그리하여 예술 운동으로부터 일탈한 프로 미술의 가능성을 다시 예술의 영역에서 되찾으려고 했다.
나중에 윤희순은 민족의 대다수가 호흡하는 예술에 관심을 갖고 정신적 요소를 주는 평민적인 조형미를 강조했다.
미술이란 특정 계급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 노소, 성별, 피부색과 같은 구분을 넘어서 모든 인간을 감싸 안아야 한다. 인간을 바라보지 못하고 계급만을 바라볼 때 미술은 갈등의 화햑고로 변질되고 만다.
라. 향토색
1920녀대 중반부터 시작되어 1935년에 일제에 의해 중단된 농민 계몽 운동이 있다. 농민 계몽을 주도한 운동은 조선일보사의 생활개선운동, 동아일보의 브나르도 운동이었다. 생활개선운동은 귀향 학생의 계몽 학습을 주선하여 문맹 퇴치를 꾀했고, 브나르도 운동은 학생들로 하여금 야학을 개설하고 한글을 가르치며 각종 문화예술 활동을 펴 민족 의식을 고취하게 하기 위해 실시했다.
화가들이 향토적 이미지를 소재로 삼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 일본 유학생들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 녹향회
녹향회는 선전이나 협전에서 자유롭게 발표의 장을 갖지 못했던 화가들이 신선 발랄한 젊은이의 마음을 나타내기 위해 마련한 단체였다. 1928년 12월 장석표, 김주경, 심영섭, 이창현, 박광진, 장익이 결성하여, 나중에 오지호가 합류했다. 심영섭은, 평화로운 세계를 통하여 고향의 초록 동산을 창조하여 녹향할 것을 주장했다.
바. 동미회
도쿄미술학교 동문들인 김용준, 홍득순, 임학선, 길진섭과 함께 녹향회를 탈퇴하고 합류한 심영섭, 장석표 등이 1930년 4월 동아일보 사옥에서 제 1회 동미회 전람회를 열었다. 김용준이 서양의 것을 받아들이면서 아이덴티티를 찾으려 했다면, 홍득순은 모든 서구의 첨단 미술을 배격하면서 조선의 현실에 적합한 미술의 창조를 과제로 삼았다.
김용준은 향토색을 표현하는 작가를 두 부류로 나눈다. 하나는 김종태처럼 원색을 조선 특유의 색조로 사용하는 경우고, 또는 김중현처럼 조선적인 전설이나 풍속을 사용하여 향토색을 표현하는 경우다.(김중현의 실내, 김종태의 노란저고리)
김중현은 조선의 인물이나 풍속을 이용하여 향토색을 추구한 대표적인 화가였다. 김용준은 이 같은 경향을 서사적 기술이라고 부르면서, 민족 전체의 성격을 나타내기는 곤란하다고 결론지었다. 소재 중심의 그림은 조선인이 아니더라도 서양인도 얼마든지 그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림이 내용을 설명해 주기를 기다리는 것은 어리석다. 음악처럼 언어로서 해석을 듣지 않더라도 음의 고저로서 온갖 감정 상태를 느낄 수 있듯이 회화는 표현된 선과 색조로서 작품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 향토색의 다른 측면
선전의 심사위원인 일본인들은 노골적으로 미술인들에게 향토적인 화풍을 주문했다. 입상을 노린 출품자들이 향토색을 빙자해 민족적 감성에 호소하는 수준 낮은 작품을 내는 일이 빈번했다. 퇴락한 골목길의 풍정을 쫓은 시각이나 저녁 노을이 쓸쓸한 한때를 즐거이 선택하는 취향이나 맥없이 앉아 흘러간 옛날을 회상이나 하는 사람들의 빈 동공 등 소재주의적 경향은 민족적 패배의식이 곁들어져 한층 심화되어 가고 있었다.
최초의 조각가인 김복진은, 향토색이 조선 미술의 본질을 오히려 왜곡할 소지가 있다며, 특히 공예 부문에서 볼 수 있듯이 그것은 단지 외방 인사를 위한 향토생산물적 내지 수출품적 가치 이상의 것이 아니라고 통박했다.
윤희순은 향토색의 발휘는 그 나라의 문화를 살찌우는 것이다. 영국의 터너, 프랑스의 밀레, 유트리오, 인상파의 마네, 일본의 우다마 등을 거론하면서 한국에도 혜원같은 이가 조선 정조를 잘 드러낸 미술가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종태는 적토문제와 관련하여, 조선색을 낸다고 과거의 빨간 진흙산을 그려야 한다는 것은 인식 부족을 지나쳐서 난센스라고 반박했다.
아. 빛의 미술
한국의 그림은 인상파 본연의 의미에출실하면서도 우리의 풍토에 잘 결부해 정착되었다. 이런 움직임을 주도한 화가는 오지호와 김주경이었다. 두 사람도 실내에서 그림을 완성시키는 대신 야외로 나가 햇빛이 쏟아지는 산과 들을 화폭에 담았다. 살아 있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순도 높은 색을 주로 사용했으며, 스타카토식 경쾌한 붓질을 애용했다.
(김주경-북악산을 배경으로 한 풍경, 1927, 캔버스에 유채, 97*130, 국립현대미술관)
오지호와 김주경은 1937년 이인화집을 발간했다. 이 화집은 일본 최고수준의 석판 인쇄술을 빌려 발간했는데, 각각 작품 10점씩이 실려있다. 이 화집을 보고 놀란 후배 김용준은, “지호, 주경 두 분 앞에 무릎을 꿇고 절할 만한 의무를 느낀다”고 감탄했다.
오지호는, ‘회화는 빛의 예술이다. 태양에서 난 예술이다. 회화는 태양과 생명과의 관계요, 태양과 생명과의 융합이다. 그것은 빛을 통해 본 생명이 빛에 의해서 약동하는 생명의 자태다.’는 말로, 김주경은, ‘빛은 생명의 웃음이요 꽃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유기물도 빛이 없고는 미를 발휘할 수 없는 것이고, 무생물이라도 빛은 이를 미화할 수 있다’고 했다.
메이지 시대의 걸출한 화가 구로다 세이키는 1884년 유럽으로 법학을 공부하러 갔으나 계획을 바꿔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자. 오지호, 김주경, 이인성
오지호는 서양미술을 조선의 지리적, 기후적 여건에 맞게 발전시키려 하였다. 한국 산천의 발견이자, 그 산천이 지닌 고유한 아름다움의 발견이었다. 그의 대표작 사과밭은 시골 과수원의 풍경을 그린 유화로 강한 햇볕에 생기를 얻은 사과나무들이 화면을 가득 메운다. 화창한 봄날의 약동하는 기운을 거친 피치와 즉흥적인 표현, 그리고 색 대비로 전달한다. 특히 색에 대한 그의 감각이 유난히 돋보인다. 하늘의 파란색, 사과나무의 초록 잎, 흰꽃, 그리고 땅의 향토색이 핑크빛과 어울려 화려한 광경을 펼친다. 대상의 형태에 구애받지 앟고 넘실거리는 색채의 향연, 톤 위주의 부드러운 채색법, 자연을 애써 설명하려고 하지 않고 광선과 색깔이 어울려 빚어낸 영롱한 실재물로 바아들였다.(오지호, 사과밭, 1937, 캔버스에 유화, 73*91, 삼성리움박물관, 아래는 김주경의 사양, 1929, 77*93, 개인소장)
그는 일본과 조선의 기후 차이를 관찰하면서 빛과 색채의 중요성을 누차 강조했다.
일본의 자연에서 태양 광선의 광채는 이 수증기에 흡수되어 자연의 색채의 미묘한 색조와 섬세한 광택은 거의 소실되고 색과 색은 뽀얀 재색 베일에 덮인 듯, 확연한 구별이 없고 윤곽은 애매하여 안개 속으로 사라진다. 조선의 대기는 자연을 색채적으로는 거의 원근을 구별할 수 없도록 투명 명징한 것이다. 이 맑은 대기를 통과하는 태양 광선은 태양에서 떠나오 ㄹ때와 거의 같은 힘으로 물체의 오저에까지 투철한다. 그러므로 이때 물체가 표시하는 색채는 물체 표면의 색채만이 아니고 물체의 조직 내부로부터의 반사가 합쳐서 가장 찬란하고 투명한 색조를 발하게 되는 것이다.
이인성(1912~1950)은 원래 수채화가로 출발했는데 어릴 적의 경험이 바탕이 되어 유화를 그릴 때에도 수채화풍의 흔적을 남겼다. 투명하고 명랑한 색채감각, 작게 썰어놓은 듯한 붓질, 경쾌하면서도 날렵한 운필, 특히 풍경에서 돋보이는 능숙한 색깔 구사 등은 그 자신만의 그림을 만들어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의 솜씨는 다른 화가와 비교가 안 될 만큼 출중했으나 자기의 세계를 충분히 열어보이지도 못한 채 총기 오발 사고로 사망하고 말았다. 소년 시절 토쿄세계아동미술전에서 최고상을 수상하는 등 , 만 17세에 선전에 입선한 이래 연속 6회나 특선하는 등 두가을 나타내고, 1928년 다이헤이오 미술학교를 다니던 중 일본 제전에 입선하고, 특선도 했다. 선전의 첫 출품작 세모가경, ‘어떤 날의 오후’는 윤희순에게 향토색의 발현이 제재에 있지 않고 작가의 감각에 있다는 찬사를 받았다.(이인성, 가을의 어느날, 1934, 97*62, 삼성리움미술관)
이 그림은 수확의 계절을 맞아 누렇게 익은 들꽃과 열매들, 흰 구름이 떠도는 가을의 푸르른 하늘, 거기에 반라의 여인이 아이와 더불어 추수하는 광경이다. 그의 작품은 이렇게 야외의 목가적인 정경을 즐겨 그리면서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생각하게 하고 낭만적인 분위기가 무르익은 가을의 뜨락으로 달려가게 한다.
<이인성, 경주의 산곡에서, 1935, 캔버스에 유화, 개인소장>
<이인성, 여름 실내에서, 1934, 일본의 제국미술원 전람회 입선작>
차. 조선미술전람회
조선미술전람회는 1922년 첫 전시회가 열렸다. 1부에 동양화, 2부에 서양화 및 조각, 3부에 서를 각각 배정하였다. 제 1회 선전에는 동양화 165점, 서양화 115점, 조각 10점 등 368점이 출품되었다. 서양화부에는 한국인은 세 사람이 출품했다. 동양화부에 2등으로 허백련, 3등에 심인섭, 이한복, 4등에 김은호, 김용진, 이용우, 글씨 부분에 2등에 오세창, 3등에 김영진, 현채, 4등에 김용진, 안종원, 이한복이다. 서양화와 조각은 1925년 제 3회에서야 서양화부 3등에 나혜석, 4등에 이제창, 강신호, 이승만, 손일봉, 조각 3등에 김복진이 수상했다.
일본에서는 문부성미술전람회라는 문전이 프랑스 살롱전을 본떠 만들었는데, 1907년에 시작하여 1918년까지 지속되었다. 1919년부터 1934년까지는 제전이란 이름으로 열렸다. 1937년에는 신문전으로 개칭하여 1944년까지 열렸다.
(김복진, 소년, 1940, 석고, 작품망실:윤승욱, 피리부는 소녀, 1938, 국립현대미술관:김경승,소년입상, 1943, 국립현대미술관:
문석오, 여인입상, 1930 : 안규응, 방윤춘부, 1927, 목조: 윤효중, 현명, 1942, 나무, 국립현대미술관)
카. 일본화풍의 만연
선전에서 전통 회화를 한국화 또는 조선화라고 부르지 못하고, 동양화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로 인해 심각한 결과가 초래되었는데, 일본풍의 만연이었다. 화려하고 섬세한 채색, 세선 위주의 일본화가 전통회화를 압도해갔다. 선의 표현성과 자연스러움을 중시했던 인물화는 얼굴이나 자태를 강조하는 미인화로 바뀌었고, 영모, 화조화에서는 극채세화의 특성이 두드러졌다. 김은호, 이한복, 이영일, 김경원 그리고 정찬영 등에 이르기까지 그 여향을 받은 이가 많았다. 산수화에는 사생적 작품이 조선 시대부터 내려오던 관념산수, 문인화를 밀어냈다.
일본화풍의 만연으로 전통 화단은 급속하게 침식당해갔다. 종래에는 수묵화가 주된 경향이었으나 채색화가 유행하게 되었고, 일본화의 장식적이며 정취적인 감각이 성행하게 되었다.
1940년대 들어와 전통 회화는 중대한 기로에 선다. 일제는 동양화도 성에 차지 않아, 일본화라는 말을 강요하기에 이른다. 서양화는 어차피 일본도 유럽에서 들여왔기 때문에 입김이 덜했다.
타. 군국주의적 경향
1938년 일제는 국가총동원법을 공포하고 황국 신민화정책과 내선일체를 시국이념으로 내세웠다. 수많은 친일 협력 단체가 창설되었는데, 1941년 내선 일체 관민 합작의 총력 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조선미술가협회가 대표적이다. 이 단체에는 서양화의 심형구, 김인승, 배운성, 이종우, 장발, 일본화부의 김은호, 이상범, 이영일, 이한복, 그리고 조각부에 김경승이 가담했다. 이 때 나온 미술전이 성전미술전(1940), 반도 총후미술전(1942~1944), 결전미술전(1944) 이었다.
작품들은 순수한 풍경이나 인물 대신 전쟁을 고무하는 내용으로 채워졌다. ‘반도의 학도 소집’, ‘방공 준비’, 위문대, ‘필승 기원’, 구호반, ‘학병의 어머니’, ‘전사의 아들’ 등 제목만 보아도 성향을 알 수 있다.
파. 선전 출신의 서양화가들
선전을 중심으로 한 당시의 화풍은 묘사적 리얼리즘과 서정적 리얼리즘 두 가지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묘사적리얼리즘은 포즈 위주의 인물, 실내 풍경, 정물, 생활 주변의 풍경 등으로 나타나며 점차 모델 중심의 화실 내 작업으로 굳어진다. 서정적 리얼리즘은 자연을 배경으로 한 다감한 분위기의 설정이 두드러지며 후기로 가면서 목가적 내용으로 성숙되어진다. 묘사적리얼리즘은 김인승, 심형구가 대표적이고, 서정적 리얼리즘은 이인성이 독보적이다.
김인승
개성 태생으로 도쿄미술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귀국했다. 선전 제 16회(1937)에서 ‘나부’로 창덕궁상을 수상했고, 한국전쟁 후로는 국전 심사위원을 몇 차례 역임하여 한국 아카데미즘의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정확한 묘사, 굵은 필치, 견고한 구성 따위가 이 화가를 특징 짓는다. ‘습작’, ‘문학소녀’, ‘독서’ 등의 작품을 남겼다. ‘모범생도의 답안’이라는 비판(구본웅)을 받을 정도로 구성에서 완성 단계에 이르기까지 치밀성을 보였으며, 착상에서 구성, 터치 등 작업의 전 과정을 감정 이입없이 시종일관 싸늘하게 객관적으로 임했다. 한복을 입고 의자에 정숙하게 앉아 있는 여인상은 국전의 단골 포즈가 되었다. 1970년대 이후에는 ‘장미의 화가’로 불릴 정도로 장미를 많이 그렸으나 그의 모티브는 거의 인물화, 여인상으로 채워진다.
(김인승, 나부, 1936, 캔버스에 유화, 삼성리움미술관,
아래, 봄의 자락, 1942, 캔버스에 유화, 147*207, 한국은행)
심형구(1908~1962)
일본 가와바타미술학교에서 수학하고, 1938년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했다. 재학 중 제 15회 선전(1936)에 처음 두 점(좌상, 노어부)을 출품하여 모두 특선에 당선했고선전에 계속 입상하였다. 일본의 문전, 제전에도 여러 번 입상했다. 김인승의 육중한 무게에 비해 좀 가볍다는 인상을 주나 일본에서 성행한 신고전풍 양식을 거치고 있다. 19회 선전에 출품된 ‘소녀들’은 이전의 딱딱한 구도에서 벗어나 단발머리 소녀가 학교 안에서 문을 통해 바깥을 쳐다보는 광경을 그렸다. 오랜만에 햇살이 실내로 들어오고 소녀들 사이로 햇살의 밝은 빛과 그늘이 교차하고 있는 인물과 풍경을 절충한 유화다.(심형구,수변, 1938, 캔버스에 유채, 159*127, 한국은행)
도상봉(1902~1977)
도천 도상봉은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였고, 숙명여대교수와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심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한국의 대표적인 사실주의 서양화가로서 전통적인 예술세계를 지키는데 충실하였으며, 백자나 라일락을 소재로 한 많은 정물화와 풍경화를 부드러운 필치로 묘사하였다. 정적인 소재를 섬세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에서 온화하고 여성적인 독특한 미적 세계를 엿볼 수 있다.
(도상봉, 성균관풍경, 1954:1959)
김종태(1906~1935)
경성사범학교를 나와 초등학교 교사로 지내면서 꾸준히 선전에 출품하여, 제 6회 선전에 ‘아이’가 특선에 오른 이래 포즈(1928), 춘양(1930), 좌상(1933), 청장(1935)이 각각 특선했으며, 1935년에는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추천 작가가 될 정도였다.
그는 색채의 활용에 있어 조선적 향토성을 대표한다. 노랑, 초록, 빨강을 배합한 밝은 색채의 세계는 우리 고유한 색채 감수성에 가장 잘 부합하고 있다.
(김종태, 포즈, 1928, 캔버스에 유채, 개인소장) (김종태, 노란저고리)
김중현(1901~1953)
순수 독학파 출신이다. 1925년 제 4회부터 제 22회까지 입선 및 특선했는데, 1936년에는 서양화부와 동양화부에서 동시에 특선을 받아 눈길을 끌었다. 그의 작품은 대개 향토적 모티브를 가지고 있다. 조선 특유의 전설과 풍속 등 소재와 내용면에서 향토성을 추구해왔다.
이에 대해 김용준은 ‘가장 조선적인 것은 조선의 공기를 실은, 조선의 성격이 제대로 드러나는 것’이어야 한다고 함녀서, 한마디로 표현상 꾸밈이 없고 담담하다는 뜻의 ‘고담한 맛’이라고 정의를 내렸다.(김중현의 농악, 실내, 무녀도)
이마동(1906~1981)
우리나라 화가로는 처음으로 동경미대 서양화과 본과에 입학해서 공부한 화가이다. 당시만 해도 유학생들은 서양화과의 본과가 아닌, 선택과 혹은 특별학생으로 교육을 받았던 데 비해 정식으로 입학을 했다. 동경미술학교 시절, 그는 이미 형태를 중요시하는 미술가로 자신의 작품세계를 만들어 나갔으며, 다양한 기법을 통해 일상적인 소재들을 탁월한 감성으로 그려내는 능력이 있었다.
이마동, 남자, 1931, 국립현대미술관
꽃다발이 있는 정물, 1934, 국립현대미술관
하. 선전 출신의 동양화가들
선전을 통해 동양화 방면에서 여러 명의 능력있는 화가들이 배출되었다. 김은호, 김기창, 이상범, 변관식, 노수현, 허백련 등이다.
김은호(1892~1979)
이당 김은호는 특히 초상화에 뛰어난 재주를 지닌 화가였다. 20대의 젊은 나이에 고종과 순종의 어진을 그릴 만큼 탁월한 실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풍경, 화조 방면에서도 뛰어났다.
김은호는 남종화가 만연하던 시절에 극채화를 들고 나왔다. 사생의 중요성을 자각하고 있던 그로서는 사실성을 추구할 필요를 느꼈고 일상적 모티브를 카메라 앵글로 클로즈업시키듯이 실감나게 전달할 방법을 강구했던 것이다. 그의 그림은 대부분 일상의 단면을 아무런 재구성을 거치지 않은 채 그대로 수용한다. 눈으로 관찰한 결과를 세필로 재현하되 항상 극도로 정확한 대상 파악을 전제로 했다.
김은호는 1920, 30년대에 맹위를 떨쳤다. 1929년 제8회 선전에 출품한 ‘인물’은 극치에 가까운 필치를 보여주었다고 하며, 우리나라 동양화가로는 초유로 제전에 입선하였다. 친일 시비에 휘말리기도 했지만, 3.1운동 때는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다가 검거되어 서대문 감옥에서 1년 동안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후진 양성에 힘써서, 1936년 사재를 털어 후소회를 조직했는데, 1942년 제21회 선전에서 동양부 입선작 60점 가운데, 후소회원의 작품이 무려 21점이나 되었다.
김은호의 간성, 1927, 비단에 채색
간성이란 여자 아이들이 차던 노리개의 하나, 색 험겊을 둥근 모양이나 병모양으로 만들어서 두 쪽을 맞대고 수를 놓기도 하고, 다른 빛의 헝겊으로 알록달록하게 대기도 하여 끈을 매어 차고 다녔다.
김기창
김은호가 발굴한 제자 중 한 사람이 운보 김기창이다. 9세 때 열병을 앓아 귀가 들리지 않고 또 말조차 자유롭지 못한 그에게 특별한 재능이 있음을 알아차린 김은호는 그를 문하생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선전에 18세때 출품하여 입선했고, 24세 때인 1937년 제 16회 선전에 ‘고담’, ‘농가의 일우’를 내어 특선을 했다. 운보는 1937년 제16회전부터 19회전까지 4회 연속 특선으로, 1941년부터는 추천 작가가 되엇다. 불과 27세 때의 일이다.
그는 해방 전에는 김은호의 세밀화 묘법과 일본화의 채색방법을 따랐다. 그러나 해방 후, 그는 변혁을 시도하면서 꼼꼼함과 정교함에서 탈피, 거칠기 짝이 없는 자유분방한 화필과 대담한 묵법을 선보이게 된다. 김기창이 남긴 작품은 무려 2만점이 된다.
(김기창, 전복, 1934, 수묵담채,71*57, 구멍가게, 1952, 종이에 수묵담채, 55*69
힘찬 운필의 경향을 보이다 – 야생마의 움직임이 격정적 구도로 나타나는 대작 군마도와 전통 가면극을 작품화한 탈품 등 춤 연작으로 힘찬 운필을 구사했다.
힘찬 운필의 선과 점은 문자도라는 독특한 경향으로 발전하였으며, 60년대에 들어 아내 박래현과 미국 뉴욕으로 유학하면서 완전 추상의 경향을 추구하게 된다.(문자도, 태고의 이미지)
태양을 먹은 새
이상범
청전 이상범은 서화미술원 출신으로 노수현, 박승무, 최우석, 박승균과 같이 공부했다. 서화미술원에서는 조석진, 안중식에 의해 지도를 받았는데, 중국화보를 모방하는 수준에 그쳐 창의성이 떨어진다.
이상범은 1950년대가 되어서야 자신의 궤도를 찾게 된다. 그러나 그 전에도 한국 산야에 대한 독특한 시각으로 접근하는 일관성은 보여주었다. 그가 처음 특선을 차지한 제4회의 ‘소슬’을 비롯하여, 10년 동안 꾸준히 특선을 차지할 때도 한국산수를 소재로 한 수묵 산수화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았다.
다만 그의 출품작은 비슷한 소재에다 비슷한 묵법을 사용하여 지루하다는 평을 받았다.
“너무 변동과 차이가 없어 정조나 정조가 암시하는 세계가 항상 대동하다”, “반추도 비약도 몽상도 아무 것도 없이 다만 손에 익은 버릇을 되풀이한다”, 아무러한 야심을 가지지 않은 고운 그림”, “독특한 맛도 같은 것만 늘 맛보면 평범하여지는 셈같이 씨의 작품도 그러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상범은 초기의 모방단계를 벗어나 현장사생을 중시하면서, 조선조 사경 산수의 회복과 재생에 그 가치가 있다.
변관식
변관식은 소림 조석진 문하에서 7년 동안 그림을 배웠다. 소림은 변관식의 외조부였다. 선전에 제1회부터 제7회까지 출품하였다. 1927년 도일하여, 일본 우에노미술학교에서 4년 동안 그림 공부를 하고, 귀국한다. 금강산의 자태에 매료된 1950년대가 되어서야 방랑을 마치고 그림 활동을 한다. 이상범이 나지막한 야산을 배경으로 정적인 구도를 특징으로 삼았다면, 변관식은 험한 산세를 배경으로 하는 동적인 구도를 특징으로 삼았다.
(그림, 금강산 가을, 누각청류, 설경, 조춘)
노수현
노수현은 이상경을 추구하는 관념 산수에 빠져들었다. 2회전의 귀초가 3등을 수상하고, 5회전의 고사영춘은 특선을 차지했다. 선전 초기에 시각적 측면을 내세운 작품들을 출품했다. 1923년의 귀초는 험준한 산 앞에 흐르는 냇물을 소재로 대상을 낱낱이 묘사, 실제성을 살려내었다. 그의 회화의 본령은 관념 산수였고 시간이 흐를수록 양식화되는 양상이다.
허백련
의재 허백련은 1927년 제6회까지 선전에 출품한다. 선전 출품 작가들이 대개 조석진과 안중식의 문하였으나 그만이 호남 출신으로 일본에서 유학한 신진이었다.
허백련은 전형적인 남종화풍으로 수묵 담채로 고산유수의 엄격한 구도와 필법을 지켰다. 다른 미술가들이 사실화풍으로 흘러갔던 데 비해 홀로 남종화풍을 준수하며 고법을 존중하는 회화 기조에 기울었다. 후경의 뾰족한 산봉우리, 중경과 전경의 암석과 운무, 숲, 정자, 가옥, 인물 따위를 일상과는 거리가 먼 풍경으로 설정하는 등 관념적인 이상경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우아하고 정취 짙은 필치와 격조있는 표현으로 허백련 특유의 묘경을 실어냈다.(허백련, 춘하추동)
3. 신감각 회화를 꿈꾸며
가. 식민지 시대의 모던 아트
표현파, 야수파 계열의 구본응, 이중섭, 그리고 추상파 계열의 유영국, 이규상, 김관기를 들 수 있다. 기록상 처음으로 추상 미술을 시도한 사람은 미술 지망생 주경이었다. 1923년에 제작한 미래파 풍의 ‘파란’인데, 당시의 미술 경향과 비교해 볼 때 너무 앞서간 형식의 작품이었다.(주경, 파란, 1923, 캔버스에 유채,53*45,국립현대미술관)
‘파란’은 색과 면, 그리고 선에 의해서만 구성된 작품으로, 대상의 구체적 이미지를 발견하는 대신 순수 기하학적 요소의 종적, 횡적 그리고 평면적, 입체적 배열만을 발견할 수 있을 따름이다. 인상파도, 입체파도, 표현파도 없었을 때에, 한마디로 현대 미술의 무풍지대에 갑자기 추상화가 출현한 것이다.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 주경은 1921년부터 고희동에게서, 1923년부터 이종우에게서 각각 미술 수업을 받고 있었다. 그의 창작품이 아니라면, 이종우가 가져온 도판을 흉내내어 그렸을 수도 있다. 일본에는 1920년대부터 미래파미술협회가 창립되어 미래파 전람회가 활발한 편이었던 것이다.
주경에 의한 또 하나의 색다른 시도는, 1930년대에 제작된 ‘생존’이라는 작품이다.
노란 바탕으로 채색된 화면의 중심부에 대각선의 움직임을 준 추상 작품이다.
그 후 주경은 일본으로 건너가 가와바타미술학교 소묘과에 입학하여 데생을 익힌 다음, 14년 동안 일본에서 체류하다가 귀국했는데, 이후 선전에 출품한 작품들은 구상적인 화풍으로 채워진다. 추상 미술을 할 만한 치열한 의식이나 풍부한 내적인 정서를 갖지 못했다는 표시다.
당시 조류를 요약하면, 구본웅은 거친 터치에다 원색이 굽이치는 화면으로 길들여지지 않은 야수풍의 회화를, 이중섭은 강렬한 색채 구사와 힘있는 필선으로 표현주의 회화를 구축했다. 그리고 문학수는 환상적인 내용의 초현실적인 회화를 선보였다. 추상작가들로 결성된 일본 자유미술가협회의 영향을 받은 김환기, 유영국, 이규상은 순수 추상을 다각도로 연구했다.
구본웅
1927년 제6회 전전에 조각 ‘얼굴 습작’을 출품하여 특선을 받는 등 이미 예술적 능력을 인정받은 구본웅은 토쿄의 니혼대 예술학부 미학과, 다이헤이오미술학교 유화과를 거치는 등 근대 화가 중에서도 이론과 작품을 겸비한 몇 안되는 인물이었다. 그는 곱추였다.
작품경향은 대체로 표현주의적인 감각으로 채워져 있다. 즉 대상 세계에 중요성을 부여하기 보다는 자아 세계 속에 관류하는 미묘하고 섬세한 감각의 단편들을 끄집어내는 일에 비중을 두었다. 이는 구본웅 특유의 체내에 용솟음치고 있었던 야수적 기질, 신체적 불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의 표현주의는 선명한 원색조의 색조와 격렬한 행위의 노출, 단순화되거나 왜곡된 형태 따위로 구본웅의 내면 속에 잠재해 있었던 ‘감성의 기탄없는 외침’을 가장 잘 표출해 주었다. 1930년대 집중적인 작업에서, 표현주의 외에도 야수주의, 입체주의 등을 절충한 것이 많아 대체로 거칠고 침울한 표현을 중시하면서 그것을 통해 우수어린 내면 풍경을 표출하는 것이 특징이다.
(구본웅, 친구의 초상, 여자, 푸른 머리의 여인)
나. 추상화가들
이중섭이 실존적인 삶의 행로를 걸으면서 개인적 주관주의에 입각한 표현 세계를 구축했다면, 작품 자체의 내재성에 주목하면서 추상에 몰입한 화가로는 김환기, 유영국, 이규상, 그리고 김병기를 들 수 있다.
김환기(1913~1974)
수화 김환기는 우리나라 모더니즘의 1세대 작가로, 한국적 정서를 현대적 감각으로 양식화한 독특한 예술세계를 확립한 작가이자 대학교수로서 미술계의 중심에서 활동한 화가이다. 일찍이 20세에 도쿄 유학, 니혼대학 미술과를 졸업하였고, 홍익대학 교수로서 후진을 양성. 1956~59 3년간 프랑스에 체류하면서 서구 미술을 체험하였고, 귀국 후 홍대미대 학장,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김환기의 회화관 – 회화란 조형성의 절대적 조건을 갖기 때문에, 이 조형이라는 것은 시작적 문제에 그치지 않고 결국은 자연과 인생에 대하여 구체적 표현임을 반성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즉 조형적인 문제가 시각적 문제에 머물지 않고, 자연과 인간에 대한 구체적인 표현이 되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가 이중섭에 대해 한 말을 보면, “작품 거의가 소를 취제했는데, 침착한 색채의 계조, 정확한 데포름, 솔직한 이미지, 소박한 환희, 좋은 소양을 가진 작가이다. ...우리 화단에 일등 빛나는 존재....”라고 표현한다.
환기 블루
김환기의 추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추상미술의 원천이 된 도자기와 블루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김환기에 그림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조선백자다. 실내에 놓여 있는 정물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이후 실내의 도자기와 창밖에 보이는 달이 복합되기도 하면서 그림 속의 주된 모티브가 된다. 훗날 색과 점만 남은 추상세계의 김환기 작품은 주로 산, 달, 학, 매화, 조선백자 등과 같은 한국적 소재를 그린 그림에서 시작하여 매우 단순하게 소재를 그려내는 일면을 보인다. 그의 푸른 색은 환기푸른색이라 불릴 정도로 신비로우면서도 깊이가 느껴지는 그윽한 푸른 색에는 생명과 개성이 꿈틀거린다.
초기 – 도쿄 유학시절과 6.25전쟁 시기는 입체파, 구상파, 아르누보의 영향을 받아 추상미술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환기색이라는 푸른 색과 조선백자의 미학을 발견하여 민족의 아픔을 추상이라는 혁신적 방법을 통해 구현하였다.
(론도, 60*72, 국립현대미술관 – 주선율을 반복한다는 의미인 론도는, 사람을 연상시키는 이미지들이 중앙과 우측에 각각 자리잡고 있으며 노랑, 검정, 그리고 빨강의 색조로 분할된 기하학적 구성 경향을 띤다.
(피난열차, 1951, 37*53 – 전쟁으로 인해 부산으로 피난을 내려온 중에 그린 그림으로, 눈으로 목격하고 경험한 현상을 작가 나름의 감각으로 추상화, 단순화시킨 그림)
중기 – 서울과 파리 시대
광복 후 추상적 바탕에 자연적 이미지를 굴절, 변형시킨 독특한 화풍(반구상)을 선보였다. 특히 이 시기 한국적 소재를 발견하는데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그가 주로 다룬 소재는 달, 산, 항아리, 학, 매화, 산, 나무, 꽃, 여인 등 한국의 고유한 정서를 담은 것이었다. 이런 소재를 극히 단순화된 선과 도자기와 같은 둥글둥글한 형태로 화면을 채워가는 것이었는데, 이는 자연을 노래하고 자연에 귀의하려는 동양인의 정서를 양식화하였고, 청색으로 몽환적이고 한국을 대변하는 색깔로 만들었다.
여인과 매화와 항아리, 1956
영원의 노래, 1957
달밤의 화실, 1957
날으는 새 두마리, 1962
후기인 뉴욕시대 – 미국으로 건너가 작품활동을 하면서, 점과 선이 무수히 반복되면서 투명한 질감을 보이는 것처럼, 구체적인 대상은 지워지고 마치 점화와 같은 순수한 추상으로 바뀌게된다. 지금까지의 두터운 마티에르에서 벗어나 안으로 스미는 듯한 엷고 투명한 안료로 뒤덮이는 은은한 여운의 화면을 보여주고 있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리, 1970 : 10만개의 점, 1973)
평가 – 김환기는 동양의 직관과 서양의 논리를 결합하여 한국적 특성과 현대성을 동시에 표현한 한국의 대표적인 현대화가로, 전통미를 현대화시킨 화가, 민족을 상징하는 시적인 감정을 지닌 화가, 정신적 흔적을 통해 우아한 멋을 창조한 화가로, 한국 현대미술의 선구자라 할 수 있다.
유영국
1930년대 독립미술가협회에 참가한 추상화가인 유영국은, 논리적이고 직각적인 작업을 추구하던 터라 그 협회와는 맞지 않았다. 그에게는 감성의 표출보다 이지적이고 냉철한 논리에 지배되는 단체가 더 어울렸다고 보인다. 1930년대 자유전에 출품한 작품은 지금보아도 참신하리만치 현대적인 것이 많다. 콜라주의 수법을 도입한 것, 사진 매체를 응용한 것, 화면의 부조적 구성 등 재료 개념의 확대를 시도하는 작업에서부터 회화의 비색채와, 기하학적 형태의 관심등 점점 순수 추상의 세계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의 자품들은 극도로 세련된 도시풍의 현대적인 감각을 자랑한다. 뿐만 아니라 유기적인 형태를 잘라내 화면에 부착한 부조가 사전에 계획된 추상적인 구성과 잘 어울려 있다.단순하면서도 긴장감 도는 분위기에서 젊은 시절 유영국의 치밀하게 계산된 순수 조형에 대한 관심을 느낄 수 있다.
(작품 1938은 유연한 곡선과 흑백의 두 색조로 구성된 릴리프 형식의 추상회화다. 이미 대상 재현의 차원에서 떠나 전반적으로 구성주의와 신조형주의에서 착상을 얻은 것으로 보이는 순수 기하학의 세계에 도취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아래 작품404D인 작품릴리프-1940은 선과 면으로만 된 몬드리안 및 되스부르크의 신조형주의풍 작품이다. 합판을 붙이고 그 위에 백색으로 채색한 이 작품은 정확한 면 구획과 선 처리로 작품 각 요소들이 조형의 철저한 통제를 받고 있다.)
유영국의 회화는 유럽에서 선풍을 일으켰던 추상회화의 급류를 타면서, 대상의 과감한 제거, 순수 조형에 대한 관심, 회화적 요소 자체만으로의 구성, 순순시각성은 젊은 예술가의 현대 미술에 관한 흥미와 고조된 의식을 보여준다.
(유영국, 산-지형, 1959 : 작품1940)
김찬영 – 미술은 자연의 모방 이상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미술은 물상 자체를 옮기는 것이 아니라 재현된 물상의 감각을 보고 느낄 때 비로소 달성된다고 했다.
조오장 – 김찬영의 글이 나온지 17년이 지나서 나온 글, 추상회화를 고전적인 것과 낭만적인 것으로 분류하고, 세잔에서 시작되어 입체파, 기하학적 구성주의 등을 고전적인 추상, 고갱에서 출발하여 마티스와 칸딘스키 까지를 낭만적인 추상이라 하여, 전자는 지적, 구성적, 건축 형태적, 기하학적, 직선적인데 반해, 후자는 직관적, 감성적, 유기적, 생기 형태적, 곡선적, 장식적이며 신비성, 자발성, 비합리
성을 띤다고 분석했다.
정규 – 글이란 추상예술이다. 종이접기 등은 입체 기하학 형태의 조형이고 추상예술이다. 추상은 서구 전유물이 아니라, 동양의 그림에서도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다.
조우식 – 초현실성은 인간적인 욕망의 원리 가운데 깊이 결합시키며 개성적인 상징 가운데 초자연의 진실을 발견하는 것을 가장 커다란 과제로 삼으면서 전위 예술의 필연성을 역설했다.
4 광복 후 미술의 흐름
미 군정이 끝나고 정부가 수립된 지 1년만인 1949년에 대한민국미술전람회가 창립되어 많은 기대감을 주었으나 파벌, 학연, 정실, 정형화된 스타일 등에 얽혀 제 구실을 하지 못했다.
조선일보사의 현대작가 초대전은 초대전과 공모전을 병행 개최하여, 1950년 말에는 정규, 한묵, 남관, 이봉상, 박고석, 김영주, 박수근, 황유엽, 김흥수 등이 각자 개성적인 언어를 가지고 그 시대의 정황을 담아냈다.
1957년은 모던아트협회, 현대미술가협회, 신조형파, 미술창작가협회 등이 일제히 단체를 결성했다. 모던아트협회는 유영국, 이규상, 한묵, 박고석, 황염수, 문신, 김경, 이선종, 정점식, 임완규, 천경자 등이 온건하게 모더니즘을 전개했다면, 현대미협은 박서보, 문우식, 김영환, 김충선, 이철, 김창열, 하인두, 김서봉, 장성순, 김종휘, 조동훈, 조용민, 김청관, 나병재 등이 충돌을 불사하는 과격한 태도를 보여 주었다.
1967년에 열린 청년작가연립전은 기존 미술에 대해 안티테제의 깃발을 높이 올렸다. 이는 1969년에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협회)에 의해 결집된 전위운동으로 전개된다.
1970년대는 새로운 전환적 기운들이 점검된다. 김종학, 이강소, 박서보, 최재섭, 엄태정등 애꼴 드 서울이 창립된다.
또 1970년대 일군의 작가들이 모노크롬 회화를 꽃피운다. 권영우, 박서보, 서승원, 허황, 이동엽 등이다.
1980년대 극사실적 경향의 회화와 설치 작업이 형성된다. 이것들을 계기로 일상과 생활, 즉 대중사회의 이미지들과 평범한 주변의 소재 및 물건들도 미술의 소재가 됨을 보여준다.
광주사태 이후 민중미술이 창궐한다.
1990년 대 중반 이후 기존의 것을 일체 거부하는 세대에 의해 공격을 받았다. 감각적인 영상세대, 골치 아픈 것, 심각한 것이나 진지한 것을 회피하는 편리 세대 등이다.
21세기에 들어 오면서 진지한 예술의 고찰에 대해서는 인색하나 마이너리티라 불리는 동성애, 유흥과 환락, 몸, 욕망, 신비주의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관용적인 조류와 만나게 된다.
5 전통과 탈전통
가. 해방공간
1945년 조선미술가협회 창립되고, 여기서 제외된 일부 미술가들이 1946년 독립 미술 단체를 결성했다. 이 때 조선조형예술동맹, 조선미술가동맹 등 좌익계열과 조선미술문화협회, 단구미술원, 독립미술가협회 등 우익 계열로 나뉘어짐.
1947년 고희동을 중심으로 하는 미협은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에 가입했고, 송정훈은 앙데팡당전을 개최하여 예술의 탈정치화, 탈이념화 작업에 착수하였다.
1949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가 창립되어 1979년까지 30년이라는 장구한 기간동안, 국전이란 이름으로 이권 투쟁의 온산이 되었다.
나. 신사실파
추상회화를 포함한 일군의 모더니스트들로 결성된 신사실파는 1948, 1949, 1952년 모두 세 차례의 전시를 가졌다. 이후 신사실파는 이규상, 유영국, 문신, 박고석, 정규, 그리고 한묵 등이 중심이 되어 모던아트협회로 확대 발전되었다. 창립회원은 김환기, 유영국, 이규상 등이다.
(이규상, 컴퍼지션, 1959 : 백영수, 게, 1953 : 장욱진, 자동차가 있는 풍경)
나. 전쟁과 미술인들의 이동
전쟁으로 대구와 부산은 미술인들의 집결지가 되었다. 부산은 주요 화가들의 거점이나 다름없게 되었는데, 국립박물관에 임시 화랑을 차리고 전시 활동을 지속했는가 하면 허름한 찾집을 전시 공간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전쟁은 이들에게 가혹한 시련을 안겨주었다. 불안과 충격, 아사와 광기, 그리고 무수한 병균들이 득실거리는 음산한 항구의 거리였다. 밀다원이라는 찻집은 서울서 내려온 화가나 문인들의 쉼터로 자리잡았다. 김환기, 유영국, 이규상 등의 신사실파전, 이중섭, 한묵, 이봉상, 정규, 박고석 등의 기조전, 부산화가들의 토벽전이 열렸다.
이수억의 ‘폐허의 서울’은 폭격을 받아 산산조각이 난 건물 위로 죽음의 새들이 배회하고 내려앉은 모습을 통해 전화를 생생하게 전달한다. 무너진 집사이로 어지럽게 흐트러진 철근과 돌더미가 뒤편의 손상받지 않은 건물과 대비된다. 어둠과 밝음, 파괴된 것과 성한 것의 극적인 대비를 통해 평화의 중요성을 한층 더 일깨워주는 작품이다.
(이수억, 폐허의 서울 : 6.25 동란, 1987)
김원의 38선(1953)은 필사적으로 사선을 넘는 사람들의 탈출을 그린 것이다. 캄캄한 밤에 새벽의 자유를 좇아 남하하려는 피난민들이 언덕을 오르려 하나 세찬 바람에 막혀 걸음조차 떼기 힘들다. 그런데도 그들은 시선을 땅에 떨구지 않으며 있는 힘을 다해 앞으로 나아간다. 기운이 빠져 손을 내밀고 도움을 요청하는 아낙네, 아이를 품에 안고 힘겨워하는 한복 입은 여인, 환자를 등에 업은 사람 등이 제시된다.
다. 전후 미술의 과제
전후 김환기는 사재를 털어 종로화랑을 열었는데, 자기 그림을 팔기 위한 개인 화랑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다. 아세아 재단의 주선과 후원으로 생긴 반도화랑(1958)이 규모를 갖춘 화랑이었다. 반도호텔에 딸린 것으로 10호 미만의 그림을 30점 정도 걸 수 있는 규모였다. 반도호텔이 헐리면서 같이 없어졌다.
라. 박수근과 이중섭
이중섭(1916~1956)
(자화상, 1955, 종이에 연필로 그리고, 색연필로 서명, 48*31)
이중섭은 뛰어난 예술성에도 불구하고 작품 내용은 피로와 단념으로 일관된 현실 도피의 세계, 즉 설화성, 가공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중섭 자신의 우울증까지 겹쳐 그의 작품은 처절한 비극성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어떤 양식에도 매이기를 거부했는데, 이는 그 자신이 꿈과 환상을 더 중시했다는 심리의 반증이다.
이중섭에 대해서는 전통과 모던의 상관관계를 이해해야 한다. 소재 면에서 소와 게, 닭 등 우리에게 친숙한 동물과 우리의 풍경을 선택했으며, 꾸준하게 우리 미감과 기법, 분위기를 담아내었다.
또 서예의 필체를 연구한 결과, ‘달과 까마귀’에서 까마귀를 그려낸 표현은 서예의 비백과 같고, ‘흰 소’에서는 서예를 하듯 소를 그려내고 있다.
또 한편으로 강렬한 색과 선을 위주로 한 야수파 화풍을 수용하였으며, 경우에 따라 서구의 초현실주의적 화풍이 보이기도 한다.
그의 작품들은 놀랍게 힘차고,아름답고, 생명감에 넘치는 특징적이고 창조적인 선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중섭은 그러한 선의 완벽한 파악과 통어로써 독특한 회화를 창출하고, 그의 선들은 자연의 재현을 위한 방편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강한 생명을 갖는 표현성 또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색채 표현에서도 색을 재현적인 것이 아니라, 창조적 차원에서 사용하고 있다.(길떠나는 가족, 도원)
그는 서구의 어떤 경향에도 빠지지 않고, 철저하게 자신의 그림을 그렸다.
(두 어린이와 물고기, 봄의 어린이)
삶 – 육이오를 피하여, 평양, 원산, 부산, 제주, 통영, 대구, 서울을 중심으로 한 삶의 양상이 그의 작품에 투영되었고, 그의 작품은 그의 삶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으며, 그의 작품은 곧 그의 고통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서귀포 환상, 섬이 보이는 풍경, 1951, 아래 – 통영수원지, 남망산이 오르는 길이 보이는 풍경, 1954)
사랑
그는 일본에 유학중 마사꼬와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
봉황 그림
소 그림 – 1956년에 40세로 생애를 마칠 때까지 이중섭이 끊임없이 그린 소는 민족애와 향토애의 표상으로, 성나고 과격한 이미지의 소는 작가의 저항정신을 표시한다. 그는 뛰어난 관찰과 해부학으로 소의 격렬한 동세를 단숨에 파악하여, 단순한 외면의 묘사가 아니라 소의 내면까지 표현하고 있다.(흰소들)
(노을 앞에 울부짖는 소)
세계적인 가치와 명성 – 이중섭은 은박지 그림에서도 이런 애환을 표현하였으며, 특히 상감기법에서 유래한 것 같은 독특한 미감의 은박지 그림은 한국인의 작품으로 유일하게 미국 뉴욕의 모던아트 뮤지엄에 소장됨으로써 세계적으로도 창의적이고 인상적인 그림을 창조한 인물로 인식되고 있다.
박수근(1914~1965)
12세 때 인간의 노동을 신성화한 밀레의 만종을 원색도판으로 보고 매일 저녁 기도했다고 한다. 중학교 진학을 포기했으나 독학으로 그림을 배우며, 매일 가까운 산과 들로 다니며 연필스케치와 수채화 훈련을 쌓았고 농가에서 일하는 여인과 들에서 나물 캐는 소녀를 그리기도 했다. 수차례 국전에 입선하였고, 1940년 평안남도청 사회과의 서기로 취직하여 있다가, 6.25에 남하하였다. 1957년 심혈을 기울인 대작 ‘세 여인’이 국전에 낙선한 것에 크게 낙심하여 과음을 계속하여, 백내장으로 한쪽 눈을 실명, 간경화가 악화되어 51세로 세상을 떠났다.
작품경향
모노크롬의 회백색톤으로 화강암의 거친 질감을 응용, 그는 ‘우리나라 옛 석물 즉 석탑, 석불같은데서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의 원천을 느끼며 조형화에도 도입코자 애쓰고 있다’고 말했다.
평면화 및 단순화 – 모든 대상은 공간적 깊이가 없이 평면화 되어, 간결한 선묘를 통해 단순하게 표현된다.
독창성 – 존재론적 사실주의 – 이런 표현은 마치 바위에 각인된 듯한 이미지처럼 보이며, 그 이미지들에서 무엇인가 성스럽고 숭고한 기운마저 느껴진다. 대상이라는 현존하는 실재를 객관적으로 파악하여 그 구조적 질서를 표현하는데, 실재를 냉엄하리만큼 담담하게 표현함으로써 대상의 원형과 보편적 이미지를 추구하였다.
작품들
박수근의 ‘나무와 여인’은 매우 단순한 소재, 단순한 구도의 그림이다.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는 고목을 중심으로 좌우편에 각각 한복 입은 여인들을 배치시켰다. 작가는 이 작품을 세 점이나 제작했다. 1956년의 나무와 여인 1은 컬러를 넣어 제작한 것으로 선적인 윤곽선이 특징이다. 나무와 여인 2는 컬러가 없어지고 흑백톤으로 바뀌면서 선적 요소가 색면으로 흡수된 작품이다. 오른편의 바구니를 인 여인이 아래로 내려왔고 나무 줄기가 상단을 덮는다.
1962년에 제작된 나무와 여인 3은 가장 박수근다운 면모가 잘 표현된 작품이다. 화면 가운데 고목이 앙상하게 가지를 드러내고 있으며 표면의 질감이 흡사 화강암을 연상시키듯 투박하다. 두 여인의 높이를 같이 하여 동질감을 강조했다. 나무와 여인1이 종이 위에 필촉의 즉흥성을 살려 그린 것이라면, 2는 좀 더 양식화된 경우, 3은 철저한 양식화를 구현했다.
아기를 업은 소녀(1953)
흰 포대기로 아기를 업고 옆으로 서 있는 검은 저고리와 검붉은 치마의 어린 소녀는 원근법이 배제된 평면적 이미지이고, 뚜렷하고 경직된 검은 윤곽선을 통한 모습이 암울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우물가(1954)
우물은 여인들이 모이는 장소이다. 낡은 초가집 앞의 우물가에 나와 있는 두 여인과 소녀의 움직임을 주제로, 여인들 역시 흰옷의 모습, 빨랫줄에 걸린 이불보 같은 것도 흰 천과 검은 천, 밝은 색으로는 바랜 느낌의 소녀의 치마밖에 없다.
노인과 유동(1959)
박수근의 객관적 평가와 사회적 존중을 알린 작품이다. 1959년 제3회 현대작가미술전의 초대작가로 출품하였다. 주제 전개를 대담하게 상하로 구분하였고, 하단에는 흰 옷에 엷은 회색 조끼를 입은 두 노인이 무릎을 세워 쪼그리고 앉아 외롭고 무료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이다. 상단에는 단발머리의 세 소녀가 공기놀이를 하는 삼각구도로 설정하였고, 색이 바랜 흰빛, 노란 빛의 저고리에 청회색조의 치마을 입고 있다. 색상의 대비와 노소의 대비를 보여준다.
농악(1962)
기존의 작품과 다르게, 농악은 밝고 흥겨운 기운이 넘쳐나는 작품이기도 하다. 꽹가리와 장구잡이도 있는 여덟 명의 농군 농악패가 한바탕 놀아재치고 있는 것이다. 다섯 소고잡이와 한 명이 장구잡이를 가운데 몰아넣고, 그 오른편엔느 날라리 취주자가 그들을 향애 흥을 고조시키는 자세를 보이고 있으며, 구도상 좌우 균형을 확실하게 하고 있다.
마. 구세대와 신세대
5,60년대 미술 흐름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될 수 있는데, 첫째는 국전의 제도권에 안주한 아카데미 진영이고, 둘째는 지적인 구조 밑에 작업된 추상과 자연을 버리지 않는 구상이 서로 융합된 기성 모더니스트 그룹, 셋째는 전쟁 체험을 바탕으로 현실성이 강한 뜨거운 추상을 모색하는 젊은 세대였다.
바. 국전
1955년 제5회 때에 국전의 헤게모니를 놓고 힘겨루기가 발생했다. 고희동의 주도 아래 탄생한 대한미협과 장발을 중심으로 탄생한 한국미협 두 단체 였는데, 대한미협의 중심부에 있던 도상봉등의 중도세력과 손을 잡았던 홍대파와 소수세력으로 전락한 장발을 중심으로 한 서울대파가 서예계와 사진계 등을 포섭하여 한국미협이 된 것이다.
남관의 심사파동
15년 동안 파리 체류를 마치고 귀국한 남관은 국전의 문제를 미처 파악하지 못한 채 제17회 심사위원으로 들어갔는데, 서양화부의 남관과 공예부의 백태호를 제외한 나머지 심사위원들의 표가 약속이나 한듯이 서예, 조각, 동양화에 일제히 몰리자 처음 심사를 맡은 남관은 상의 배정이 사전 담합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이 사실을 언론에 폭로해 버렸다. 그는 또 제16회때 대통령상을 탄 김진명이 예선에서 탈락하는 등 심사의 비일관성, 무원칙성을 비판했다.
정부는 1969년 제18회 때부터 구조개혁을 하려고, 서양화를 구상과 추상으로 나누어 접수에서 심사에 이르기까지 분리 실시하자고 했으나, 예술원과 미협은 기득권 상실을 우려해 거부했다.
사. 객관적 사실화와 목가적 사실화
객관적 사실화는 일본 관학파 아카데미즘에서 비롯되었는데, 국전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목가적 사실화는 정감적인 구상화를 말하는데, 대상의 주관적 개입을 중시한다.
객관적 사실화의 대표적인 화가로는 고희동, 김관호, 김인승, 심형구, 이마동이고, 해방 후 김형구, 도상봉, 박득순, 손응성 등이 그 계보를 이어간다. 인물화를 그릴 때 주인공의 표정이나 동작의 특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기 위한 모델로 존재할 뿐이다.마네킹처럼 무표정하고 움직임도 없고 철저하게 즉물적인 묘사에 만족한다. 풍경화를 그려도 광선은 사라지고 핏기없는 중간톤으로 채색된다. 실외는 그림의 세트에 불과하고, 나무나 숲이라는 물상이 소도구로 장치되어 있을 따름이다. 객관적 사실화에는 작가 자신이 보거나 느낀 사실에 관한 언급이 없다.
목가적 사실화는 한국의 농촌과 근대화 이전의 한가로운 시골 풍경과 순박한 사람들, 형토적 풍물이나 풍속이 등장한다. 양달석, 박상옥, 박수근, 이봉상, 류경채, 김흥수 등이 이에 속한다. 장날 풍경, 세시 풍속, 절구질, 목동, 물동이, 초가집 등이다. 소재에 연연하고 작가의 주관이 감상주의적으로 굴절되어 있다는 지적을 받았다. 선전시절에는 김종태, 이인성, 김중현, 양달석, 박수근 같은 화가들이 그렸으며, 선전에는 출품하지 않았으나, 이중섭, 송혜수, 김환기의 작품에 그런 것들도 많다. 국전에 이르면 특별히 박상옥이라는 향토 화가가 등장한다.
박상옥(1915~1968)
박상옥은 토속적인 시골분위기를 재현하여 1950, 60년대 농촌상을 가감없이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채도 높은 색감으로 주제 의식을 표출하는 데에 성공하고 있다. 인물표현의 경우 세부 묘사보다 덩어리 표현에 치중했다.
(박상옥, 한일, 1949 : 후방의 아해들, 1958 : 소한, 1956 : 시장소견, 1957 : 소와소년, 1953)
목가적 사실화를 추구해 간 작가들의 면면으로 보면, 양달석과 홍종명은 동심으로, 최영림은 설화적인 내용으로, 장리석과 조병덕, 이달주는 복덕방 노인이나 해녀, 채반을 인 여인 등 서민층을, 박창돈은 피리부는 아이로 눈길을 끌었다.
윤중식의 회화 수법은 투박하면서도 표현적이다. 붉은 색과 노랑색, 그리고 주홍색 등 정열적인 색깔을 즐겨 사용하며 파랑과 하늘색을 번갈아 사용하기도 한다. 그에게는 이미지도 중요하지만 색채도 대등하게 중시된다. 강렬한 색상은 계절마다 뚜렷한 시골의 풍광, 그리고 토속적인 분위기를 잘 전달해준다.
(홍종명, 새야새야, 1988 : 박창돈, 성지, 1957 : 윤중식, 마을, 1974)
아. 전통 회화의 단절과 계승
6대가로 불리는 원로 김은호, 허백련, 이상범, 노수현, 변관식, 박승무 등은 건재함을 과시하고, 특히 변관식, 이상범은 경관이 빼어난 산천을 직접 찾아 다니며 사경산수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해방후 1950년대 중반 무렵 백양회의 김기창, 박래현 부부가 두각을 나타냈다. 출중한 감각의 소유자였던 박래현은 1956년 대한미협전에서 대통령상(이른아침)을, 제5회 국전에서 대통령상(노점)을 수상하면서 존재를 알리게 된다. 그녀의 그림은 단순한 생활의 현장을 기록한 풍속도가 아니다. 소재가 주는 짙은 생활의 정감에도 불구하고 대담하게 대상을 재구성하고 종합하는 시도를 확인하게 된다. 분석과 종합의 조형화, 그리고 단아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면서 조형의 순수성을 모색했다.
(박래현, 여인, 1942, 삼성미술관 : 금붕어, 1960 )
자. 김용준과 수묵화
김용준은 향토색을 논의하면서 조선 회화의 전통을 계승할 것을 누차 강조했다. 단원을 본뜨고 오원을 본받는 것은 현대라는 시대적 특수성을 무시하고 과거의 구태의연한 화풍을 고집하는 시대착오적 발상이다. 조선사람의 향토미가 나는 회화란 색채의 나열도 아니요. 조선의 풍물이나 풍속을 그린다고 디는 것도 아니다. 전통 회화의 묘미는, “뜰앞에 일수활르 조용히 심은 듯한 한적한 작품”, 그 속에서 우러나는 고담한 맛과 한아한 맛으로 특징지었다. 고담과 한아가 조선의 정조라면, 이에 걸맞는 미술은 전아하고 온화한 수묵화이다. 그는 색상에 있어서도, “복잡 현란한 빛깔보다도 단조하고 투명한 엷은 빛깔”을 민족 성향에 맞는 색깔로 보았다.
김용준은 특별히 수묵을 사용하는 서예와 사군자가 사물의 사실적인 묘사보다 주관의 정신성을 중시하며 특히 사의성과 기운 생동이라는 추상적인 화법 속에서 대상의 생명을 명확하게표현하기 때문에 서양의 표현주의와 동일한 정신을 지닌다고 여겼다.
차. 해방 후 제1세대 한국화가들
해방 후 제1세대로 일컬어지는 권영우, 박세원, 박노수, 장운상, 서세옥, 안상철 등은 모두 서울대에서 근원, 월전 그리고 심산 노수현의지도를 받았다. 전통 수묵화를 했던 박세원을 제외하면, 나머지 작가들은 수묵을 기초로 한 조형적 모색에 과감히 자신들을 던졌다.
서세옥, 박노수, 장운상 등은 제1회 국전부터 적극 참여해 왔고, 안상철, 서세옥, 장운상, 안동숙 등은 1962년 이후 심사위원으로 국전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도맡게 된다.
서세옥은 간결한 운필과 함축된 추상을 추구하였고, 선 위주의 회화를 선보였지만, 예리한 필치와 굵은 먹선만 보일 뿐 구체적인 대상이 점차 사라졌는데, 1960년대에 와서 추상적인 경향이 한층 심화되어 갔다.
(구름이 흩어지는 공간, 1962)
민경갑은 대담한 필선을 강조했다. 1959년 제8회 국전 출품작 ‘동열’은 1957년의 ‘강강수월래’를 더욱 단순화 한 것으로 거친 필치의 선조가 두드러졌으며, 1961년의 ‘파생’은 선조가 추상 표현적 경향으로 발전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작품은 선묘가 흐릿해지고 대신 컬러나 먹 톤이 강화되는 경향을 띠었다.
(동열, 1959 : 여명)
안동숙은 세대로는 박래현이나 천경자에 가까우나, 작품상으로는 오히려 후배들의 모임인 묵림회에 가깝다. 그가 보여준 회화는 추상 미술 중에서도 액션 페인팅이나 앵포르멜 비정형 회화 쪽에 속할 만큼 행위와 색채를 강조했다. 그의 그림에는 늘 신비로운 빛이 등장하며 그 빛은 어둠을 비추고 어둠의 틈바구니에서 나온다. 광명과 화평, 구속과 은총 같은 기독교적 주제를 그림의 내요으로 삼아왔다.
(안동숙, 은총)
정탁영은 유독 번지기 효과를 즐겨 사용했다. 물과 먹의 절묘한 배합으로 이루어지는 그의 화면은 물기가 얼마나 먹에 용해되어 바탕에 스며들고 번져나가고 겹쳐지는가가 작품의 성공 여부를 판정 짓는 관건이 된다. 비를 흠뻑 뒤집어쓴 수품처럼 그의 그림은 물기로 젖어 있으며 부드럽고 잔잔하며 단아, 고아한 정취를 풍긴다. 농담의 대비, 은은한 묵의 번짐이 그윽한 여운을 남긴다.
(정탁영-겨울2003~10)
송영방의 ‘작품1961’은 자유로운 운필 구사에다 우연한 번지기 효과를 곁들여 제작한 것으로 어떤 모티브나 이미지가 등장하지 않는데 종이와 먹이 대면하면서 빚어내는 임의적이고 예상치 못한 흐름에 주목했다.(아래그림은 송영방, 천주지골, 1967:쏘가리, 2000)
이규선은 한국 화가로서는 드물게 면 분할에 의해 기하학적 구성을 꾀했다. 화면을 직사각형 또는 정사각형의 네모로 나누고 그 위에다 먹색이나 원색을 채색, 바탕과 강한 콘트라스트를 이루게 한다.
신영상의 그림은 흡사 종기가 그을린 흔적을 보는 듯하다. 붓질을 절제할 뿐 아니라 ‘그린다’는 자체도 신중을 기하는 측면을 엿볼 수 있다. 화면 바탕에는 선과 묵점과 같은 기호들이 넘나들고 산수나 사군자 같은 재래의 전통적 이미지들은 발견되지 않는다. 이규선과 마찬가지로 물기와 먹의 조응에 신경을 썼으나 컬러와 면 분할이 배제되고 단지 선염과 선묘에 의해서만 화면이 지탱되고 있을 뿐이다.
빠른 속도의 붓질로 산과 나무를 그린 임송희는 종래의 산수화와는 다르게 골계미를 장조하며, 그 필치도 투박하고 거칠다. 선과 먹 톤의 구분이 따로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율동과 힘, 그리고 내면 표출에 심혈을 기울였다.
6. 현대미술, 여러 갈래로 뻗어가다
가. 모던아트협회
기성 세대로 구성된 모던아트협회는 국전의 안이한 소재 중심적 미술과 구별되게 반추상적인 회화를 선보였다. 1957년에 창립하여 모두 여섯 차례의 협회전(1960년이 마지막)을 치렀는데, 참여 작가는 유영국, 이규상, 한묵, 박고석, 황염수, 문신, 김경, 이선종, 정점식, 임완규, 천경자 등이다. 이들은 국전과는 별개로 미술의 재야에 머물면서 개성적이고 창의적인 미술을 타진했다. 신사실파를 계승했다는 의미에서 모던 아트의 기조를 이어갔다고 볼 수 있다.
나. 창작미협, 신조형파, 앙가주망
창작미협은 고화흠, 박창돈, 박항섭, 류경채, 이준, 장리석, 최영림, 황유엽 등이 주동이 되어 창립되었고, 재야의 길을 걸었던 모던 아트 계열의 작가들과 달리, 이 그룹은 국전의 특선작가 및 추천 작가로 구성되어 있어 대조를 이룬다. 나중에 표승현, 정린, 그리고 김형대 등이 들어오면서 감각적인 사실주의 내지 환영적인 추상을 대략의 작품으로 갖췄다. 1972년 제17회전부터는 한일교류전을, 1976년 제21회전부터는 공모전을 열었다.
신조형파는 1957년 5월 민족 예술의 전통을 계승하고 현대의 조형성을 추구하고자 창립되었다. 화가, 건축가, 디자이너 등이 망라된 종합적인 시각 예술 그룹으로, 김관현, 변영원, 변희전, 손계풍, 이상순, 황규백, 조병현 등이 가입했다.
앙가주망은 1961년 9월 국립도서관에서 창립전을 가졌다. 김태, 박근자, 안재후, 최경한, 필주광, 황용엽 등이었는데 집단적 정체성이 약한 단체였다.
1962년 창립된 신상회는 많은 회원으로 구성되었고, 재야에서 온건한 집결을 순순한 작가적 입장에서 추진하기 위해 결성되었다. 일찍부터 추상적 어휘를 탐색했던 유영국과 한봉덕, 시각적 설화를 모티브로 설정한 이준, 황규백, 구성과 표현의 정출을 꾀한 김창억, 임완규, 이규영, 이봉상, 힘찬 에너지를 발산한 문우식 등 여러 스타일의 작가들이 자신들의 기량을 발휘했다.
(류경채, 폐림지근방, 1949, 93*123, 국립현대미술관)
다. 현대미술가협회
1957년 5월에 창립전을 가진 후 1961년 해체되었다. 기간은 짧았으나 현대미협을 통하여 한국 화단은 추상 미술이라는 획기적인 전환을 이룩했을 뿐만 아니라 미술에 관한 통념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민중미술
임옥상, 새, 1983, 종이부조와 아크릴 215*269 토끼와 늑대, 1985, 종이부조, 85*106
박불똥, 돈쟁, 1991, 사진콜라주, 108*79
신학철, 한국근대사-3, 1981, 캔버스에 유채, 130*97
7. 감상할 화가들
송혜수(1913~2005)
평양출생, 20대 후반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도쿄제국미술학교에 입학했다. 1941년 제11회 일본 도쿄독립미술전에 입선했으며, 제6회 도쿄미술자유전에 입선했다. 육이오 이후 부산에 정착하여 살았다. 그의 초기 작품세계는 소나 말을 주제로 한 표현주의적 경향을 보였으며, 초현실적인 분위기의 작품을 통해서 일제 강점기의 절망 속에서 민족의 현실을 반영하는 암시와 상징을 담기도 했다.
(그림 ‘소와 여인’)
김하건(?~1951)
미술문화협회전에서 두드러지게 활약한 화가로, 제3회에 ‘녹의 교향악’, ‘19의 기원’, ‘항구의 설계’, ‘밤의 정거장’을 출품한 후 미술문화상을 수상했다. 왕성한 활동을 했지만, 현존하는 작품은 자화상 한 점 뿐이며, 사진으로 남아있는 제3회전 출품작 ‘항구의 설계-1942’를 보면 외딴 건물이 있는 한적한 바닷가를 배경으로 책상 위에 피라미드와 원구가 있어 데 키리코와 달리의 초현실 공간을 연상시킨다. 6.25 때 인민군으로 싸우다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장우성(1912~2005)
월전 장우성은 1937년 선전에 입선한 후, 1941~1943년 연속 특선하여 주목받기 시작했다. 1946~1961년 서울미대 교수로 재직하였고, 1963년에 미국 워싱턴에 동양예술학교를 설립, 1964년에는 미국무성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아산 현충사 및 정읍 충렬사 봉안 ‘이충무공영정’, ‘바티칸 궁정 소장 ‘성모자상’, 경주 통일전 ‘김유신장군 초상화’, 국회의사당 벽화 ‘백두산천지’, 예산 충의사 ‘윤봉길의사영정’, ‘고사도’, ‘김유신장군상’ 등이 있다.
해방 전까지만 해도 공필 채색화를 주로 그린 장우성은 김용준의 주장에 동조하여 수묵 담채화를 그리기 시작하였다. 특히 그의 작품은 필선이 갖는 격조를 살린 형식에 생활 주변의 일상적인 내용을 담아서 전통적 형식에 현대적 내용이라는 작품을 구현하였다.
이유태(1916~1999)
현초 이유태는 1940년 도쿄제국미술학교를 수료하였고, 1947년 이화여대교수로, 1969년에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운영위원, 1979년 대한민국 예술원회원이 되었다. 국민훈장 동백장, 예술원상, 문화예술상, 금관문화훈장을 수상, 한국화폐 1,000원 권의 ‘퇴계 이황영정’(1975)이 있다.
이응로
원래 김규진 문하에서 문인화를 공부했으며, 조선미술전에 입선을 했다. 1930년대 후반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화풍에 영향을 받아 섬세하면서도 서정적인 톤의 풍경화를 그렸다. 해방과 함께 그의 화풍은 현실적인 주변의 풍물을 문인화적인 일필휘지의 직관적 화법으로 묘사하기 시작혔다. 단순에 그린듯한 힘찬 붓질과 변화가 풍부한 먹의 농담은 문인화의 현대적 해석의 한 모범을 보인다.
(이응로의 새, 군상)
박노수-선소운, 1955
1945년 이상범의 제자로 입문하여 한국화의 정체성을 모색하던 해방 후 화단의 움직임에서 절제된 색채와 간결한 선묘로 채색과 수묵을 융합시킴으로써, 전통 속에 현대성을 구현해 낸 작가이다.
손응성(1916~1979)
배재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이던 1934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정물화를 입상하며 등단했고, 일본에 유학하여 태평양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 광복 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교수를 지내며, 한국전쟁 때는 종군화가로 참전했다.
창덕궁의 비원을 즐겨 그려 비원파의 창시자로 불리는 등 사실주의적 풍경화와 정물화를 많이 남겼다. 화풍은 편집광적이라는 평이 있을만큼 꼼꼼한 편이며, 정물화는 원근법을 무시하고 대칭적 구도나 평면성을 강조하는 현대적 기법을 사용하고 있어 고전주의적 사실주의와는 다른 느낌을 준다.(손응성, 가을 : 비원)
변시지(1926~)
서귀포 출생으로 일본 오사카에 정착, 1945년 오사카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다. 1947년 제33회 광풍회전에서 ‘겨울나무’로 입선하고, 문전에서 ‘여인’으로 입선, 1948년 제34회 광풍회전에서 ‘베레모의 여인’으로 최연소 최고상을 수상하고 광풍회전 심사위원이 된다. 서울대교수와 서라벌예대 교수를 거쳐 제주대 교수를 역임하였다.
약간 거친 터치로 대상을 정감적으로 표현했던 화풍이, 비원파에 합류하면서 나뭇잎 하나까지 세밀하게 그리는 극사실적 화풍으로 변했다. 제주도에 정착하여 제주의 풍물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변시지, 베레모를 쓴 여인 : 비원 애련정)
양달석(1908~1984)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수채화가 입선, 일본제국미술학교에 유학하면서 조선미술전람회와 일본의 독립미술전 등에 출품하여 여러차례 입상하였다. 광복 이후 부산에 거주하면서 동심이 깃든 향토적인 그림을 많이 남겼다. 한국전쟁 때 종군화가로 근무하였다.
주로 동화적인 내용을 그린 화가로, 들녘에서 뒹굴고 노는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주로 화폭에 담았으며, 그의 풍경은 모든 것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태초의 동산을 연상시킨다.
이봉상(1916~1970)
독학으로 그림공부를 하여 보통학교 6학년 때 제8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였으며, 이후 다양한 수상경력이 있다.
그의 회화세계는 초기에는 인상파적 사실주의 경향을 보였으나, 1950년대부터는 강렬한 색채, 거친 필치, 대담한 생략 등을 특징으로 한 야수파적이며 표현주의적 경향으로 바뀌었다. 1960년대에는 자연을 소재로 한 한국적인 설화성을 곁들인 주제를 즐겨 다루고 화면도 중후한 마티에르와 양식화된 구상세계를 보였다.
그의 목가적 성격은 주로 색채와 구성에서 그 정취를 강하게 풍긴다. 그가 즐겨 그리던 산은 산의 정기를 묘출한 것이었으며, 요약된 형태와 밝고 진득한 마티에르로 뒤덮인 예감의 풍경이라고 할 수 있다.
류경채
이인성의 목가적 리얼리즘은 류경채에 오면서 더욱 다감한 내용으로 무러익어 간다. 1회전 국전에서 ‘폐림지 근방’이라는 풍경화로 대통령상을 수상한 바 있는 그는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정취적인 취향은 더욱 심화되어 가는데, 작품들이 한편의 그림인 동시에 아름다운 서정시로서의 면모를 보인다.
최영림(1916~1985)
1944년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1958년 프랑스로 건너가 그랑쇼미에르미술연구소에서 공부했다. 1977년에 구상과 비구상, 한국화와 서양화의 요소를 하나로 융합한 조형주의회화를 발표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조형주의는 여성의 누드와 기하학적 도형으로 된 추상화를 대비시켜 그리는 등 이질적인 요소들을 조화롭게 꾸며 예술성을 이끌어내는 독특한 화풍이다.
김흥수(1919~)
1938년 일본 태평양미술학교를 졸업하고, 조선미술전람회에서 4회 입선하였다. 1950년대의 ‘흑색시기’라는 작품으로 추상과 반추상의 실험적 양식을 시도하고, 1960년대부터는 구상으로 되돌아와 한국인의 서정이 담긴 것들을 주제로, 토속적이고 해학적인 미를 표현하였다.
1970년대 들어와 설화적인 내용을 주제화함으로써 고향의 그리움을 은유적으로 구현하였으며, 우리의 고전을 회화의 주제로 삼은 ‘심청전’시리즈는 대표적이다.
권옥연(1923~)
1944년 도쿄미술학교와, 1960년 프랑스 파리아카데미를 졸업하였다. 파리 유학을 계기로 평면적인 풍경, 인물 작업에서 추상작업으로 전환했다. 기호의 이미지화, 토속적인 이미지 등을 작업했다.
유학 전에는 고갱의 영향을 많이 받아 양식화되고 평면적인 이미지로 풍경과 인물작업을 하였으나, 파리에서 체류하는 동안 상롱도톤, 레알리테 누벨등 당시 파리의 주요 전시회에 참가하였고, 추상실험에 열중하였다.
특히 갑골문자 연구를 통해 기호를 이미지화하는 작업을 시도하였으며, 비정형의 형태와 두터운 마티에르, 청회색으로 억제된 색채 등을 특징으로 하는 회화의 골격을 형성하였다.
이대원(1921~2005)
고교시절 선전에 2년 연속 입선하는 등 미술에 재능이 있었으나, 경성제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다녀왔다. 대학 졸업 후 노수현에게 사군자를 배우는 등 독자적인 미술 공부로 자신만의 독특한 경지를 이루었으며, 훗날 모더니즘을 수용하였다. 1940년대까지는 대상묘사보다 붓의 흐름에 맡기는 경향을 보이는데, 인상주의의 밝은 색채, 표현주의 또는 야수파의 화풍을 수용해, 대상의 사실성을 흐트리면서 모더니즘을 구사했고, 밝은 색채의 짧은 붓터치를 사용했다.
그의 그림의 주된 화제는 산과 들, 연못, 농원 등이다. 생명력 넘치는 자연의 감동과 빛의 향연을 선과 점으로 율동감 있게 표현한 작가의 작품에는 생동감과 리듬감이 느껴진다. 그의 작품에서 우리의 전원풍경은 밝고 따뜻한 색감과 경쾌한 터치가 인상적인데, 서양물감으로 그린 동양화라는 표현도 한다.
이쾌대(1912~1953)
휘문고보 재학중 제1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 후, 1939년 도쿄제국미술학교에 입학, 재학중 일제치하에서 고통받는 민족의 현실을 상직적으로 표현한 ‘운명’이 공모전에 입선되기도 했다. 1941년 도쿄에서 이중섭 등과 조선신미술가협회를 조직하여 모더니즘 미술활동을 전개했다. 광복 후 좌익미술단체에 참여하는 한편 김인승, 남관 등과 정치색이 배제된 조선미술문화협회를 조직하였다.
그의 화풍은 서구적 지성과 방법론을 토대로 하면서도 향토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색채가 농후했고, 인민군측 종군화가로 전선에 참가하던 중 포로가 되어 부산과 거제 포로수용소에수용되었다가, 북한을 선택해 갔다. 초기부터 인물화에 주력하였으며, 구도나 인물표현에 있어 단단한 해부학적 수련을 바탕으로 서양의 고전주의 기법을 이어받았다.
박항섭(1923~1979)
황해도 장연 출신으로 해주고등보통학교 3학년 때 조선일보 중등미술전에 수채화를 출품하여 입선했다. 1941년 도쿄 가와바타화학교에 입학하여 1943년에 졸업하고 귀국한 후 해주미술학교 교사로 있다가 한국전쟁 때 월남하였다.
무의식의 세계를 표출한 듯한 가상적 현실의 구상화를 그렸다. 앵포르멜 운동이 주도하던 화단에서 구상화를 고수하면서 대상을 해체하여 재구성하는 추상성을 띤 구상미술을 보여 주었다.
평소 화면이 감정의 쓰레기통이어선 안된다고 강조했는데, 독특하고 자유로운 화면 구성과 섬세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설화적인 내용, 인간의 내면을 읽어내는 깊이 등이 돋보이는 추상화로 한국 미술사에 이름을 올렸다.
박서보(1931~)
원형질 시리즈는 우리나라 최초의 추상표현주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1960년대 중반부터는 현대인의 번잡스러운 형상을 고발한 허상 시리즈를 발표하였고, 1970년대 이후부터는 묘법 회화를 추구하였는데, 손의 여행으로 일컬어지는 묘법은 그의 회화의 정점을 이루었다는 평을 듣고 있다.
박서보, 유전질, : 묘법 : 원형질
권진규(1922~1973)
권진규는 테라코타와 건칠을 이용한 두상과 흉상 작업을 통해 영원을 향한 이상세계를 추구하는 인간의 모습을 담아내고자 하였다. 그의 인물상은 종교적 내세관에 입각하여 구도자적인 내면의 상승감을 나타낸다. 그의 자소상을 비롯한 인물상과 말과 소를 비롯한 구상적 동물상들은 그의 내면에 존재하는 민족적 이미지를 구현한 것이다.
한묵(1914~)
1960년대 후반과 70년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기하학적 추상작가이다. 일본 천단미술학교에서 공부했고, 모던아트협회 창립회원으로 활동했다. 캔버스와 회화적 공간에 대한 다양한 탐구를 통해 한국 기하학적 추상미술의 거목으로 평가받고 있다.
변영원
정문규
1950~60년대를 중심으로 기하학적 추상양식을 추구하였다.
이우환
말과 물체, 1972, 도쿄 양국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