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원경으로 떠나는 4백년의 여행 - 프레드 왓슨
Stargazer: The Life and Times of the Telescope - Fred Watson
서평
우주를 향한 인류의 꿈은 맨 눈으로 밤하늘을 쳐다 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갈릴레오 시대 이후 망원경의 발명으로, 우주의 구조에 대한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다. 이 책은 우주를 인식하는 수단인 망원경이 인간의 사고를 얼마나 확장했는 지에 대한 여정을 보여준다.
망원경의 발전에 따른 역사를 차분히 따라 가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우리의 사고도 엄청나게 확장되었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오래 전에 벌써 발견된 거대 규몽의 망원경은 역시 자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우주를 인식하려는 개인의 의지가 가미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프롤로그
컴퓨터는 지루한 숫자 형태로 된 자료를 사람들보다 더 잘 기록한다. 현대인들은 기술적으로 더 작게 만든 물건을 선호하는 데에 비해 천문학자들은 더 큰 망원경을 선호한다.
1. 덴마크의 눈
1566년 12월 29일 티코 브라헤는 멘드럽과의 결투로 코가 베어져 나갔다. 그 뒤 그는 인공 보철 코를 달고 다녔다.
1561년 코펜하겐 대학생이던 티게는 자신의 이름을 라틴식으로 바꾸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Tycho로 바꾸었다.
1561년 말, 학업을 마친 티코는 기사의 상징인 황금 박차를 얻을 수 있는 외국의 궁전으로 가는 여행을 포기했다. 15세 소년 티코는 그 대신 외국 대학교를 계속 방문하면서 말로는 법학을 공부한다고 했지만,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티코는 라이프찌히에서 천문학에 처음으로 심각하게 다가섰다.
망원경이 없던 시절 태양과 달, 별이나 행성 같은 천체의 위치가 천문학의 전부나 마찬가지였다.
당시 톨레미의 관점은 1400년 동안 유행했는데, 이미 16세기 후반 코페르니쿠스의 새로운 모형이 나왔어도, 18세기 여전히 태양계의 지구 중심 이론을 가르쳤다.
태양계의 진정한 성질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행성들의 위치를 정확하게 측정한느 것이 중요했고, 티코는 평생 동안 이러한 연구를 했다.
티코는 평일에는 구리로 된 보철 코를, 일요일에는 은과 금의 합금으로 된 보철 코를 끼고 다녔다.
벤
외레순은 1959년 스웨덴에 편입된 지역인데, 그 앞에 벤 Hven섬이 있다. 이 섬은 길이가 4.5킬로미터, 폭이 2.4킬로미터이고, 가장 높은 곳이 해발 45미터이다. 인구는 362명에 불과하다. 그 가운데 티코가 살던 집은 Uraniborg 즉 우라니아의 성이라 부른다. 이곳에는 서재와 도서관, 화학 실험실이 갖추어져 있고, 수많은 관측 기기들이 가득했다. 그 속에 스테르네보르그라는 곳은, 티코의 핵심적 관측 장소이다.
1572년 11월 11일, 카시오페이아 자리에 새로운 별이 나타났다. 낮에도 보일 만큼 밝은 이 별은 오늘날 초신성이다. 그는 이 별이 다시 어두워졌는데도, 위치가 변하지 않는 것을 보고, 1573년 소책자를 발간하여, 항성구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덴마크의 프레데릭 2세는, 벤 섬에 티코가 연구할 수 있도록 평생 후원을 보장하면서 이 섬을 쓰라고 제의했다. 1580년 우라니보르그가 완성되었고, 1586년에 스네르네보르그가 완성되었다.
인간의 눈동자의 최대 지름은 7mm이고, 이 구경의 눈이 가질 수 있는 본래 분해능은 대략 20초쯤이다. 그러나 망망의 수용체의 크기에 의해 제한받으므로, 거의 60초, 즉 1분에 이른다. 티코는 끝없이 반복 관측하면서 대기의 미묘한 효과를 보정함으로써 유례없는 위치 정확도를 얻었다. 그의 정확도는 25초까지 이르렀다.
1585년, 대적도의식 혼천의 Great Equatorial Armillary가 세워졌다. 지구 자전축과 나란하게 만든 적도의로,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다.
유산
티코는 행성들과 태양, 달의 움직임을 도표로 만들고 하늘의 지도를 작성하는 일에집중했다.
1509년 57세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1415~1519)는 지구가 삼라만상의 중심에 있다고 확신했다. 레오나르도는 원으로 천체의 궤도를 나타내고, 그 원들의 중심에 지구를 놓았다.
1809년 아스트로노미아 노바 Astronomia nova라는 책이 출판되었다. 이 책이 행성들이 태양을 중심으로 하는 타원 궤도를 돈다는 사실을 증명하자, 모든 논쟁이 끝났고, 이 책의 저자가 요하네스 케플러이다.
케플러는 똑똑하지만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수학자였다. 케플러가 역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순전히 티코 덕분이다. 그는 특별히 화성 관측 결과를 이용했다.
요하네스 케플러는 1571년 12월 27일, 독일 남부 슈바벤에서 태어났다. 1600년 2월, 케플러는 티코 곁에서 모형을 보다가, 연역법을 사용해서 혜성이 타원 궤도를 따라움직일 수 있다고 하는 급진적인 결론을 내렸다.
티코가 망원경의 역사에 기여한 기술은 거대한 천문학 기기의 지지대를 고안한 정도이다.
망원경을 이용한 관측은 1670년대 들어서야 일반화되었다.
티코를 돋보이게 하는 것은 기술적인 혁신보다는 훨씬 덜 실체적으로 보이기 쉬운 그의 안목이다. 연구 중인 문제를 바라보는 그의 전체적인 안목과 그리고 그 문제를 다루기 위해 자원을 모으는 방식과 관련이 있다. 과학적 발견을 널리 알리려면 문자로 된 문서를 보급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티코는 우라니보르그에 인쇄소를 건립했다. 종이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자 큰 제재소도 건설했다. 또 제재소를 가동하는 데에 필요한 물을 대는 댐과 인공 저수지를 만들기도 했다.
1588년 프레데릭 2세가 사망하고, 아들 크리스티안 4세가 왕위를 계숭한 이후, 차츰 연구비가 줄어 들었고, 나중에는 연금마저 끊기고 말았다. 1597년 티코는 계속 후원이 없다면, 덴마크를 영원히 떠나겠다고 위협하고는 식구들을 코펜하겐으로 이주시켰다. 1597년 6월, 티코는 덴마크를 떠나 독일로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 뒤 티코는 1599년에서야 로마 교황인 루돌프 2세로부터 후원을 받고 프라하로 이사했다. 1601년 티코는 사망했다.
2. 수수께끼
고대 망원경의 속삭임
티코는 천문학 연구 결과를 철저하게 문서화해 두어 티코의 생애를 자세히 알 수 있다.
티코는 천문 기기 설계와 제작의 선구자이다. 그런데도 망원경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7년이 지나 1608녀에 망원경이 역사에 갑자기 등장한 것이다.
렌즈의 초점면에 우리 눈이 있다면, 그것은 혼란스럽게 번진 상태일 것이다. 우리 눈은 수렴하는 빛을 받아들이도록 만들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눈은 발산하는 빛이나 평행광을 더 좋아한다.
맨눈에 옷 입히기
17세기 이탈리아의 광학 기계사인 지오바니바티스타 텔라 포르타는, 1589년 출판된 자연의 마술에서 오목렌즈를 결합하는 기술을 선보였다. 볼록렌즈의 초점 안에 눈이 놓기게 하는 것은 같지만, 심하게 굽은 오목렌즈를 첨가한다. 오목렌즈는 정상적인 눈을 인공적인 원시로 만들어주기 때문에 볼록렌즈가 보여주는 뚜렷하고, 직립한, 확대된 상을 보는 데에 꼭 필요하다. 이러한 렌즈의 조합을 갈릴레오식 망원경이라고 하는데, 오늘날에도 오페라용 소형 망원경 형태로 남아 있다.
전설과 렌즈
프란시스코파 수사이자 옥스퍼드의 학자였던 로저 베이컨(1214~1294)은 오푸스 마이우스라는 책에서, ‘누구든 투명한 물체의 형체를 만들 수 있고, 우리가 바라는 방향으로 빛이 굴절되거나 꺾일 수 있게 배열할 수 있다. 그리고 가까이 있거나 멀리 있는 물체를 어느 각도에서도 다 볼 수 있다. 따라서 아주 먼 거리에서도 작은 글자를 읽을 수 있는 것은 물론 먼지와 모래까지 셀 수 있다’라고 썼다.
3. 개화
망원경의 등장
망원경은 17세기 초, 네덜란드의 국가 위기 상황에서 한몫 잡아보려던 안경 제작자와 안경 상인의 손에서 나왔다. 1608년 한스 리퍼라이라는 사람이 최초로 등장한다. 이를 넘겨받은 마우리츠는 한 시간 반과 세 시간 반 거리에 떨어진 델프트의 시계탑과 라이덴에 있는 교회 창문을 보았다고 한다. 이 도시들은 헤이그에서 직선 거리로 8.6킬로미터와 17.6킬로미터 떨어져 있었다.
소송과 반소
한스 리퍼라이는 네덜란드 국회에 자신의 특허권을 30년간 인정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로부터 2주 뒤에 네덜란드 북부 지역인 알크마르 출신 공구 제작자 야코프 아드리안존이 나타나서, 특허권을 주장했다. 또 새로운 제 3의 편지가 국회에 제출되었다.
공공연한 비밀
17세기 초 30년 정도에 만들어진 망원경들은 베네치아 유리로 렌즈를 만든 것들이다. 베네치아 유리는 거울을 만드는 데에 쓰이는 품질 좋은 유리로, 이 유리가 네덜란드로 보내져 1608년에 이렇듯 많은 망원경을 만들었을 것이다.
리퍼라이가 낸 특허는 너무 잘 알려져서 안되겠다고 거절당했다. 다만 역사는 리퍼라이에게 최초로 망원경을 발명한 사람이라는 영예를 주지 않았지만, 세계의 무대에 망원경을 처음으로 올려놓은 사람이라는 자격을 부여했다. 그리고 리퍼라이는 최초로 쌍안경을 만들었다고 보인다. 쌍안경을 만들려면 광축이 나란히 고정되고 눈의 거리와 같게 떨어져 있는 두 개의 동일한 망원경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만들기가 너무 어려워 그 후 2백년 동안 소수의 제작자들만이 시도했을 정도이다.
유리 프리즘을 사용해 빛의 경로를 꺾고 상의 방향을 보정하는 현대적 쌍안경이 만들어진 것은 1894년 이후였다.
4. 개화기
천재의 손길
1610년 갈릴레오가 만든 망원경은 역사를 바꾸게 된다. 사실 갈릴레오 전에, 토머스 해리엇이 1609년 7월 26일경 런던 근처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달을 관측한 후, 최초로 달 표면을 그렸다. 1609년 11월 독일 천문학자 시몬 마리우스는 목성과 동행하는 별들을 보았다.
별세계의 보고
갈릴레오는 망원경의 원리를 습득한 후, 20배율과 30배율 망원경으로 인류의 신기원을 여는 관측을 한 것이다. 그가 쓴 ‘시데레우스 눈치우스’에는 달의 어두운 부분에서 태양 빛을 받은 봉우리의 위치로부터 달에 있는 산의 높이를 계산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고, 은하수가 천상의 우유가 아니라 흐린 별들로 이루어졌고, 목성이 네 개의 위성과 함께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케플러의 행성 운동에 관한 법칙 중 두 가지는 1609년, 아스트로노미아 노바에 발표되었다. 즉 타원운동의 법칙과 같은 시간 같은 면적을 지난다는 법칙이다.
갈릴레오는 1610년 후반에 금성이 달처럼 초승달 모양에서 보름달 모양으로 위상이 변화한다는 것이었다.
갈릴레오는 1613년에 출판된 새 책 때문에, 결국 종교재판소에 회부되고 말았다.
티코의 문하생
케플러는 지독하게 빈정거림으로써 사람들을 비난했기 때문에 무례하기 짝이 없는 사람으로 소문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진정으로 뛰어난 사람으로서, 추상적 개념을 명쾌하게 이해하는 아주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티코는 자신이 평생 동안 연구한 것이 헛되지 않도록 케플러에게 자신이 하던 행성 관측 분석을 완수하라고 부탁했다.
1609년에 ‘새 천문학’을 발표하면서, 천문학의 신기원을 열게 된다.
케플러는 1611년 디옵트리스라는 작은 책에 자신의 광학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그는 새로운 종류의 망원경을 제시했다. 갈릴레오식 망원경의 약점은 볼 수 있는 경치가 대물렌즈의 지름에 의해 제한되어 시야가 좁다. 갈릴레오의 오목한 접안경을 빼어낸 뒤에, 평면에 상을 맺히게 한 후 접안렌즈를 다양하게 사용하여, 종이에 있는 상을 확대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촛점거리가 다른 두 볼록렌즈로 이루어진 망원경을 제시한 것이다. 그런데 이 망원경은 이제 위아래가 뒤집힌 상으로 나오게 된다. 이를 도립상 망원경, 케플러식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5. 진화
망원경이 극단으로 가다
케플러는 두 렌즈 사이에 적당한 위치에 세 번째 볼록렌즈를 삽입하면 정립렌즈로 만들 수 있다고 하였는데, 그러자면 정립렌즈 초점거리의 네 배만큼 더 길어져야 한다고 했다.
광학 기계상에게 도립식 망원경인 케플러식 망원경을 개량하라고 압력을 넣은 것은 천문학자들이었다.
1612년 12월, 220만 광년 떨어진 안드로메다 은하를 맨 처음 관측한 시몬 마리우스는 뿔을 통해 빛을 내는 촛불과 같다고 묘사했다.
렌즈 4개의 망원경이 유행하기도 했다.
이 렌즈들은 눈렌즈와 시야렌즈로 부른다. ##한국에서는 아이피스라는 접안렌즈의 표시, 광각렌즈라는 아이피스의 특수기능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부른다##
찰스 1세의 왕당파와 의회파 사이의 전쟁에서 1644년 24세의 나이로 전사한 윌리엄 개스코인 William Gascoigne의 이야기 - 그가 케플러 망원경을 이용해 관측하다가 대물렌즈와 접안경 사이에 거미줄을 보았는데, 우연히 접안경의 초점에 거미줄이 잡히자, 태양과 거미줄이 동시에 보였다. 그 때부터 십자선을 표시하게 되었다.
윌리엄 개스코인은 태양과 달의 지름과 가까이 있는 별들의 거리를 재는 기구를 발명했다.
별을 보는 관
렌즈에 발생하는 구면수차와 색수차로 인하여 망원경의 성능향상이 그렇게 진척되지는 못했다.
구면수차는 구면인 거울 또는 렌즈가 만드는 상의 결함이고, 색수차는 렌즈를 통과하는 빛의 파장에 따라 굴절되는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초점면에 만들어지는 상 주변에 해무리 같은 것이 나타나는 현상이다.
구면수차를 줄이기 위해서는 비구면, 쌍곡선으로 만드는 방법이 있다. 색수차를 줄이기 위해서는 렌즈를 겹쳐서 만드는 방법이 있다.
개선
1661년 4월 23일 크리스찬 호이겐스는 수성이 태양 면을 통과하는 모습을 관측했다. 호이겐스는 특정한 거리에 특정한 초점거리를 갖는 평철렌즈 두 개를 놓아서, 시야를 많이 개선했을 뿐 아니라 상의 질까지 개선해 성능을 극적으로 향상시켰다. 오늘날 호이겐스의 접안경으로 알려져 있다.
1675년 찰스 2세는 존 플램스티드를 왕립천문학자로 임명했다. 플램스티드는 1년에 100파운드를 받기로 하고, 초대 왕립 천문학자가 되었지만, 숙련된 조수가 없었다. 그는 사재를 털어 관측을 하였다. 결국 1725년 플램스티드 성표가 출간되었다.
공룡
발트해 연안 단치히 출신 양조업사였던 헤벨리우스는 공식적으로는 아마추어 천문학자였다. 그는 취미에 쓰기엔 매우 엄청난 개인 재산을 천문학에 투자했다. 1647년에 출판한 달 지도는 그가 12피트짜리 망원경으로 직접 관측한 결과물로, 매우 자세하고 호화스러웠다.
1675년 파리 천문대의 교수인 장 도미니크 카시니는 토성의 간극을 관측했는데, 이는 엄청나게 긴 굴절 망원경으로부터 나왔다.
헤벨리우스는 17세기 슈퍼 망원경 경쟁을 이끈 선도자로, 1670년 경에 만든 것 중, 초점거리가 150피터, 46미터 이상 되는 것도 있었는데, 이는 대형 범선의 장비와 유사했다. 긴 널빤지로 만든, 접합 부분품이 L자 모양으로 연결된 망원경 경통을 90피터, 27미터 높이의 돛대에 밧줄과 도르래로 매달았던 것이다.
호이겐스도 엄청나게 긴 망원경을 제작했는데, 최소한의 요구 조건만 필요하도록 접근했다.
6. 반사
망원경을 만드는 더 좋은 방법
빛이 렌즈 안으로 굴절될 때 빛의 방향은 오직 이 오차에 의해 영향을 받는데, 곡률의 3분의 1 정도만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빛이 반사될 때에는 오류의 효과가 두 배가 된다. 따라서 같은 광학적 표면의 부정확도는 굴절되는 빛보다 반사되는 빛에 적어도 여섯 배 이상 영향을 미친다.
즉 렌즈와 거울이 비교되려면, 거울의 정확도가 네 배는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상상 속의 망원경
오늘날 가장 뛰어난 망원경 설계자 가운데 한 명인 레이 윌슨 Ray Wilson에 따르면, 1672년에 발표된 반사 망원경의 이론은 1905년에 karl Schwazchild의 연구가 나오기까지, 더 이상 개선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벽한 이론이었다.
르네 데카르트는 1637년경 어떻게 렌즈와 거울에서 구면 수차가 사라질 수 있는지 수학적으로 해설한 책을 썼다. 그에 따르면 구면이 아니라 포물면을 사용해야 완벽한 상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망원경에 이 포물면 거울을 사용하면 구면 수차가 전혀 없는 상을 만들 것이다.
프란체스코 수사인 마랭 메르센은 포물면 거울을 이용한 망원경을 제안했다. 메르센이 발명한 것은 케플러의 굴절 망원경과 유사한 것이었다.
7. 거울상
반사하는 거울이 현실이 되다
1668년 에버딘의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29세의 젊은 제임스 그레고리는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 최초의 수학과 흠정 담당 교수가 되어, 미적분학과 급수 전개 등에 기여했다. 그는 천문학 관측을 통해 경도를 결정하는 방법을 연구했다. 그리고 갈매기 깃털을 통과하는 빛이 무지개 빛으로 분산되는 것을 발견했다.
1662년에 옵티카 프로모타라는 책을 출간했다. 여기서 그는 세 종류의 망원경을 평가했다. 렌즈로만 이루어진 망원경과 거울로만 이루어진 망원경, 렌즈와 거울이 함께 사용된 만원경을 비교했다. 갈릴레오식, 케플러식, 호이겐스식 망원경은 렌즈만 사용한 것이고, 메르센식 망원경은 거울만 사용한 것이다. 이 중에서 그가 오늘날 그레고리식 설계로 부르는 것이 현대적인 개념의 망원경인 것이다.
그레고리의 망원경은 구면 수차가 완전히 제거되고, 색 수차가 거의 없어지는 등 모든 장점을 다 갖추었다. 접안경 하나만 색수차를 만들기 때문이다.
작은 부경은 포물면이 아니라 타원면이었다.
그가 제작 의뢰한 망원경을 그 당시 유명한 제작업자 리처드 리브에게 맡겼지만, 실패하였다. 리브는 그 때 의뢰받은 원형으로, 로버트 후크에게 만들어 주었고, 이 것 때문에 뉴턴과 서로 비난을 하게 된다.
천재와 기술
리처드 리브는 런던 광학계의 거물이었다. 1614년 이후 리브는 그 시대의 선도적 과학자와 함께 조용히 일해 왔다. 이 때가 찰스 캐빈디시를 위해 쌍곡면 렌즈를 제작해 보던 때였다. 리브는 기술을 개발했을 뿐 아니라 견습생도 가르쳤다. 그러나 자신의 아내를 죽이고, 6개월 후 사면되었지만, 곧 사망하게 된다.
뉴턴은 갈릴레오가 죽던 1642년 성탄절에 태어났다. 그는 1669년 케임브리지 대학교 수학과 교수가 되었다. 그가 1687년 출판한 프린키피아는 이후 200년 동안 기초 과학의 연구 경로를 결정했다.
그는 반사경을 만들기 위한 연구에 착수했다. 거울을 직접 제작하고, 그 배치되는 부경을 평평한 거울로 구조화함으로써, 뉴턴식 망원경이 개발되었다.
완성된 이론
카세그레인은 1629년경 사르트르에서 태어나 그곳에 있는 대학의 목사이자 교사가 되었고, 1693년 사망했다. 오늘날 세계의 거의 모든 대형망원경이 카세그레인 망원경의 배치를 그대로 따를 정도로 아주 중요한 발명품이었다. 카세그레인식은 오목한 부경을 갖는 그레고리식과 달리 주경의 포물면으로부터 오는 빛을 상이 맺히기 전에 가로채는 볼록한 부경을 사용한다. 이것은 주경에 있는 구멍으로 되돌아 오는 빛을 수렴하는 빛으로 만들어 실상을 만들며, 뒤에 있는 일반 렌즈의 접안경으로 확대할 수 있다.
부경은 색다르게 쌍곡면이었는데, 그 시대의 기준으로는 얻기 힘든 모양이었다.
그런데 뉴턴은 카세그레인의 발명에 대해 통렬히 비꼬면서 실제로 만들어 보았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레고리는 이런 이야기를 전해 듣고, 왕립 학회와 교신하기 시작한다. 자신이 실패한 이유가 구면이었기 때문인지, 광택을 부정확하게 냈기 때문인지 하는 것이었다.
뉴턴은 프린키피아를 출판한 후 6년밖에 되지 않은 1693년 과학 연구에서 손을 떼고 공무원이 되었다. 조폐국 감독관 1696에서, 조폐국장 1699에 올랐다. 1705년 앤 여왕은 기사 작위를 주었고, 뉴턴은 1727년 84세의 고령으로 사망했다.
그레고리는 1674년 에든버러 대학교의 수학 석좌 교수로 옮겼지만, 1년 뒤 제자와 목성의 달을 관측하다가 뇌졸증으로 쓰러져 3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8. 중상 Scandal
망원경과 변호사
제임스 그레고리의 조카 데이비드 그레고리는 에든버러 대학교의 수학 교수였다가, 1692년 옥스퍼드의 수학과 사빌리안 Savilian 교수가 되었다. 그레고리는 같은 해에 왕립 학회 정회원으로 선출되었다. 데이비드는 여러 개의 투명한 재질로 이루어진 눈의 복잡한 구조가 망원경의 대물렌즈에 모형을 제공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체스터 무어 홀 Chester Moor Hall 변호사는 시간이 날 때마다 광학에 대해 생각했다. 에식스에 있는 자기 집에 광학 실험실을 꾸밀 만큼 심각한 취미를 가졌다. 그는 뉴턴의 옵틱스에서 색수차를 해결할 방법이 없다는 결론을 보고, 색수차를 해결할 망원경 대물렌즈를 만들 생각에 사로 잡혔다.
그는 두 장의 렌즈로 만들어진 것이 각각 다른 종류의 유리이고, 볼록과 오목이라면 색수차가 서로 상쇄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홀은 크라운 유리와 납유리(자연산 수정의 밀도와 광택을 가진 상대적으로 새로운 발명품)로 실험을 했다. 크라운 유리 볼록렌즈와 납유리 오목렌즈의 조합은 무색이 될 수 있다. 홀은 각 유리의 주문을 다른 제작자에게 의뢰했다. 그런데 이 제작자들이 하도급을 모두 조지 배스에게 주었다.
성공과 실패
Jesse Ramsden은 이 과정을 문서로 적어 놓았다. 그는 무색 망원경의 발명에 관한 관측이라는 문서를 남겼다.
이것을 재발견한 사람은 직조공에서 공학사로 직업을 바꾼 존 돌런드이다.아들 피터는 광학 기계상으로 사업을 시작하였고, 아버지 돌런드도 비단 짜는 일을 그만 두고 빛을 짜기로 동참했다. 돌런드와 아들 Dolland & Son이라는 회사는 아직도 영국에서 Dolland & Aitchison으로 사업을 하고 있다.
배스는 돌런드에게 자신이 예전에 홀에게 만들어 주었던 납유리 이야기를 함으로써 돌런드가 투명 유리를 시작하게 된다.
참을 수 없는 비통함
돌런드는 특허를 내게 된다. 그리고 돌런드에게 코플리 메달을 수여하고, 1761년 존은 왕립 학회의 정식 회원이 된다. 1760년 새국왕 조지3세는 돌런드를 전속 광학 기계상으로 임명했고, 그의 고객 중에는 토머스 제퍼슨, 프리드리히 대제 같은 사람이 생겼다.
결국 특허 무효 심판에서 런던의 광학제조업자들이 모두 패소하고 비참하게 생을 마치게 된다.
아들 피터는 렌즈 3개를 붙여서 더 또렷한 상을 만드는 망원경을 만들었다.##지금의 트리플렛렌즈를 가진 망원경의 시조로 보인다##
9. 하늘로 가는 길
반사 망원경의 시대가 오다
1672년, 뉴턴은 오목한 망원경 거울에 광택 작업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것은 50년 가까이 지속되었다.
1721년 갑자기 지름이 6인치 150밀리미터에 이르는 반사망원경이 등장했다. John Hadley는 유명한 수학자이자 과학 기술자였다. 그는 30대 중반에 거울을 연마하는 쪽으로 직업을 바꾼 사람으로, 오늘날에는 대기 순환 연구로 기억되고 있다. 하들리는 구면에서 불필요한 부분을 낮춰 비구면을 만드는 방법을 도입했다.
그는 항해용 팔분의와 지평선에서 태양의 각 높이를 측정하는 기구 그리고 선원들이 사용하는 육분의의 전신에 해당하는 것들을 발명했다.
하늘의 음악가
모든 시대에 걸쳐서 가장 위대한 천문학자가 아닐지는 몰라도, 모든 시대에서 가장 위대한 망원경 제작자임에는 분명하다는 사람은 윌리엄 허셸(1738~1822)이다.
허셸은 작곡가로서의 야망을 쫓기 위해 19세에 하노버에서 런던으로 이사했고, 1766년에는 바스에 있는 옥타곤 채플의 연주자가 되었다. 허셸은 1760년대 오케스트라 작품과 작은 협주곡, 기악 독주곡을 많이 남겼다.
1772년 8월, 허셸은 집에서 구박받는 여동생 카롤리네를 가수로 훈련시키기 위해 데려 왔다.
35세의 윌리엄이 하늘에 매력을 느낀 것은 캐롤린이 도착한 직후였다. 그는 제임스 퍼거슨이 쓴 천문학 책을 읽으면서 관심을 넓혀 갔다. 그는 직접 반사망원경을 만들어 보고자 직접 비구면 거울을 갈아서 광을 내고, 피겨링하는 일뿐 아니라 구리와 주석의 합금으로부터 금속거울을 주조하는 일까지 했기 때문이다.
그는 처음 1.7미터짜리 뉴턴식 망원경, 그리고 곧바로 2.1미터짜리 망원경을 만들었다.
1774년 더 큰 집으로 이사하면서, 거울 지름이 9인치, 길이가 3미터인 반사 망원경을 만들었다. 그리고 나서 길이가 6.1미터인 반사 망원경을 제작하여 1776년 7월에 완성했다.
1777년에 또 한 번 이사를 하였고, 1780년에 만든 20피트 망원경은 지름이 12인치에 달했다.
허셸은 망원경 지지대를 새로운 차원으로 개선했다. 그가 개선한 내용은 그림으로 볼 수 있다.
최상의 것
1774년 3월 1일, 본격적인 관측 여행을 시작했다. 달과 행성을 본 후, 이중성을 체계적으로 찾기 시작했다. 그는 1778년 후반에 배율이 227배인 7피트 망원경으로 계속 조사를 했다.
1781년 그는 원반 형태로 보이는 물체를 발견했는데, 그는 혜성이라고 생각했지만 행성이었다. 그 이름은 우라너스 Uranus였다.
그는 왕립 학회의 정회원 자격과 코플리 메달을 수여 받았다. 1782년 궁중 천문학자로 임명되면서 연간 2백 파운드씩 받게 되엇따.
허셸은 1781년 8월 지름이 36인치, 길이가 9.1미터인 거울의 주물을 뜨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그는 다시 시도하여 지름이 18.7인치인 거대한 망원경을 만들게 되었다. 이것은 경위식 설치였다.
허셸은 이 망원경으로 성운을 관측하여 개개의 별들로 분해하는 데 성공했다.
돌연한 비약
그는 40피트짜리 망원경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나중에는 에스파냐 왕을 위해 직경이 24인치인 7.6미터짜리 망원경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허셸의 여동생 캐롤린도 여러 개의 성운과 여덟 개의 혜성을 발견하면서 실력있는 천문학자가 되었다.
1822년 8월 25일 허셸은 천왕성과 위성 2개, 토성의 위성 2개, 1000개의 이중성, 2000개의 성운과 성단 그리고 은하수가 태양을 포함한 원반 모양의 집합체라는 사실을 알아 내었다.
캐롤린은 1848년 9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0. 예의없는 천문학자
망원경의 뒤섞인 운명
무색 대물렌즈를 만들려면 납유리로 된 오목렌즈가 있어야 했다. 영국의 유리 가공업자들은 요구되는 정도의 균일성을 가진 큰 납유리 덩어리를 도무지 만들지 못했다.
유럽에서는 1790년 말 스위스의 가구 제조업자 피에르 루이 구이난드가 지름이 5인치인 납유리 렌즈 덩어리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똘똘한 아이
뮌헨의 부유한 변호사이자 사업가였던 요제프 폰 우트자흐나이더는 14세의 고아 소년을 주목했다. 소년을 교육시켜, 1806년 우트자흐나이더의 수학과 기계 연구소에서 일하게 만들었다.
이 재능있는 소년이 요제프 폰 프라운호프이다. Joseph von Praunhofer
프라운호프는 스위스에서 이사온 구이난드로부터 핵심 기술을 배울 수는 없었다. 그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망원경 대물렌즈와 접안경의 새로운 설계, 천체 사이의 작은 각을 측정하는 새로운 방법을 생각했고, 빛의 성질까지 연구했다.
1812년 이미 7인치 대물렌즈를 제작했고, 7년 후 에스토니아 타르투의 도르파트에 있는 러시아 천문대에 9.5인치 대물렌즈 제작을 했다.
이 경통을 독일식 적도의에 올려 가동시켰다. 1824년 11월 16일 이 경통이 가동하자, 도르파트 천문대장은 울음을 터뜨릴 뻔했는데, 이가 바로 빌핼름 스트루배였다. 스트루베는 1초보다 더 가까이 있는 3천 개가 넘는 이중성을 측정하기 시작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베셀(1784~1846)은 별이 앞뒤로 움직이는 것을 처음 감지했는데, 프라운호퍼의 망원경 덕택이었다. 이것을 연주시차라 부른다.
1825년 우트자흐나이더와 프라운호퍼 회사의 사장이 되었다. 그는 1824년 기사 작위를 받았다. 그는 1826년 39세로 사망하였다.
전면적인 전쟁
구이난드는 1814년 뮌헨 연구소를 떠나 새로 유리를 제작하게 되었다. 그는 부드럽게 된 유리를 원형 주조 틀로 눌러 넣어서 큰 유리 원판을 만드는 새로운 기술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가 만든 유리로 인한 큰 논쟁이 붙게 된다.
제임스 사우스 James South (1785~18666)는 아마주어 천문학자이다. 이중성 측정에 대한 그의 연구는 높은 평가를 받았고, 프랑스로 이주하지 못하도록 1820년대 작위를 받게 되었다. 그는 주류 천문학자들을 비판했지만, 1829년부터 1831년까지 천문학회의 회장도 지냈다. 이 학회는 1831년에 왕립천문학회가 되었다.
리처드 쉽생크스 Richard Sheepshanks(1794~1853)는 요크셔 제분소 주인의 아들로, 케이믑리지에서 수학을 공부하여 수학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고, 법학을 공부해 변호사 일도 했으며, 영국 교회의 성직을 맡기도 했다. 1829년부터 1831년까지 학회 총무와 비서를 맡았다.
쉽생크스는 제임스를 비난하였다. 사인과 코사인도 구분하지 못하고, 로그표도 사용할 줄 모른다고, 제임스도 쉽생크스를 경멸했다.
1829년 후반 제임스경은 로베르-아글리 초서로부터 직경 11.75인치 대물렌즈를 구매했는데, 영국에서 가장 큰 렌즈였다. 이 경통을 설치하는 문제로 분쟁이 발생하여, 제작자인 스로우턴을 위하여, 제임스경에 대항하여 쉽생크스가 조언을 하게 된다.
결국 사우스는 이 렌즈를 더블린 대학교에 기증해 버린다.
11, 리바이어단
금속거울을 가진 괴물
19세기 중반은 아일랜드가 천문학에서 중요한 집단으로 부상하던 때였다.
Thomas Romney Robinson(1792~1882)이 이 진취적인 천문학자들을 조직하는 접착제 역할을 했다. 그는 1823년부터 긴 일생을 마칠 때까지, 알마천문대 대장이었다. 그의 주위에 Thomas Grubb(1800~1878)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에드워드 쿠퍼로부터 13.3인치 렌즈를 수납하기 위한 망원경을 주문받았다. 그는 성공적으로 설치했고, 이 망원경은 1834년 4월 쿠퍼의 소유진인 마크리에 세워졌다. 길이가 7.6미터인 경통은 프라운호퍼의 독일식 적도의 가대에 세워졌다. 돔이 없었기 때문에 전체 구조물은 검은 대리석으로 만든 삼각형 주춧돌 위에 받쳐졌다. 쿠퍼가 세상을 떠나고 결국 필리핀의 마닐라 천문대로 옮겨졌다.
Grubb은 이번에 새로운 15인치 반사망원경에 착수했다. 그는 반사경이 균형을 잡고 떠 있을 수 있게 하는 강철 거울통 개념을 도입했다. 최근 복원된 당시의 경통을 보면 현재의 망원경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1840년 그럽은 아일랜드 은행의 기술자가 되어 지폐를 조판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William Parsons(1800~1867)는 위대한 과학적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1841년 로스의 세 번째 백작이 되었다. 그는 아일랜드의 한가운데에 있는 파슨스타운의 버르 성에 딸린 소유지를 물려받았다. 1836년에는 요크셔의 브래드포드 교외 히튼 출신인 부유한 과부인 Mary Field와 결혼하여 풍부한 재산을 보장받았다. 메리는 초기 사진의 선구자로서 1859년 아일랜드 사진학회 취임식 때 은메달을 수상받기도 했다.
로스는 1839년에 36인치 뉴턴식 망원경을 완성한 후, 좀더 욕심을 내었다.
나선형 구조
1842년 로스는 1.8미터짜리 금속 거울을 주조했다. 로스경은 길이가 17미터에 이르는 나무 경통을 지지하기 위해, 길이가 21.9미터, 높이가 17.1미터인 큰 벽 사이에 매달았다. 벽은 남북으로 정렬되어 있는 데다 충분히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망원경은 천체가 자오선을 지나갈 때 동서 방향으로 한 시간쯤 따라갈 수 있었다. 별들의 고도가 변하는 것을 따라가기 위해 쇠사슬이 수직 방향으로 망원경을 끌어 올릴 수 있게 했다. 뒤로는 하늘의 북극까지 기울어질 수 있었다. 그리고는 서쪽 벽 높은 곳에 기대어 움직일 수 있게 만든 관측 회랑에서 접안경으로 보았다. 1845년 2월 레바이어단은 준비를 끝냈다. 그리고는 3월 초 성운을 충분히 관측했고 그것이 무엇인지만 몰랐다.
그들이 본 것은 M51이었다.
파슨스타운의 레아비어단은 이 나선 성운을 60개 이상 발견했다. 1845년에서 1848년 사이 발생한 감자 가문으로 1백만 명 이상이 굶어 죽었고, 또 다른 1백만 명은 고향을 떠나야 했다.
1908년 로스경의 장남인 로렌스가 세상을 떠나자 망원경은 곧바로 해체되어 유기된 경통과 돌 벽과 함께 남겨졌다.
1996년과 1998년 사이에 이 망원경은 새로 복원되어 알루미늄 거울과 수압으로 작동하는 현대적인 기계 장치가 장착되었다.
위로와 기쁨
19세기 중반, 맨체스터 근처 패트리크로프트에 James Nasmyth(1808~1890)라는 스코틀랜드 기술자가 있었다. 1839년 나스미스는 증기 망치를 발명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그의 망원경은 정말로 언급할 만하다. 그는 Flossie Russell과 혼외정사를 지속하여 1859년 딸을 낳기도 했다.
그는 예술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자 선구자적 사진작가였다. 그는 20인치 망원경을 독특하게 설계하여 천문학에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그가 만든 망원경은 관츠자가 앉는 의자가 회전판에 고정되어 있고, 망원경과 함께 회전하는 것이 특징이고, 편리하게 설치된 바퀴 손잡이로 망원경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었다.
훨씬 더 편리한 것은 망원경이 하늘의 어느 방향을 향하든 관측자가 언제나 같은 방향을 바라본다는 사실이었다.
그의 친구 가운데 Willaiam Lassel(1799!1880)이 있는데, 그도 양조자로 일하면서 돈을 모았다. 그는 외행성의 위성을 주로 연구했다.
그는 나스미스식의 복잡함을 싫어하고, 간단한 뉴턴식 구조를 좋아했다. 그는 리버풀에 거주하고 있었지만, 나스미스와 왕래하면서 증기로 움직이는 광택 기계를 만들려고 했다.
그는 1844년 로스경의 망원경을 보기 위해 파슨스타운을 방문한 이후, 24인치 망원경을 제작했다.
그는 1846년 9월 30일, 해왕성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런던에 도착한 지 2주도 안되어 해왕성의 큰 위성인 트리톤을 발견했다. 자신을 얻은 그는 깨끗하고 안정적인 대기 조건을 찾아 자신의 망원경을 몰타의 발레타로 가져갔다.
그는 더 최고의 경통을 위해 48인치 반사 망원경을 만들었다.
그가 만든 경통의 거울이 변색되는 것이 제일 문제였다. 나스미스가 거울 주변에서 공기가 자유로이 순환해야 온도가 안정적이 될 것이라고 조언하자 경통을 철 판금으로 된 열려 있는 구조물로 만들었다. 그는 무게추를 이용해서 거울의 평형을 유지했는데, 이를 무정위 지지라고 부른다.
그는 프라운호퍼의 독일식 적도의 설치는 크고 뚱뚱한 반사망원경에 적당하지 않다는 것을 깨다고, 포크식 설치로 알려진 것을 만들었다.
라셀은 이 훌륭한 망원경을 1860년에 완성한 후, 몰타로 옮겼다.
그는 행성과 위성을 관측하고, 60여 개의 성운의 목록을 만드느라 몰타에 3년 동안 머물러 있었다.
12. 마음 아픈 일
남반구 대형 망원경
당시 허셸의 아들 존 허셸이 1834년과 1838년 사이에 희망봉에서 했던 연구가 남반구에서의 유일한 체계적인 연구였다. 그는 18.7인치 경통으로 연구를 했던 것이다.
왕립학회는 희망봉에 대형 망원경을 설치하기 위해 위원회를 설립하였고, 위원 중에 롬니 로빈슨, 에드워드 쿠퍼, 로스경, 제임스 나스미스, 윌리엄 라셀, 존 허셸, 그리고 조지 에어리가 있었다. 토머스 그럽도 고문으로 참여했다. 그럽은 구경 48인치에 카세그레인 형식을 제안했다. 그러나 1854년에 발생한 크림전쟁으로 지원이 중지되었다.
그런데 1851년 호주에서 거대한 금광이 발견되면서 호주의 인구가 10년 만에 일곱 배나 증가했고, 호주에서는 멜버른에 천문대를 설립하게 된다.
공학적 대작 및 쇠퇴와 재난
거대한 멜버른 망원경은 별을 점광원이 아니라 클로버 모양에 가까운 상으로 보여주었다. 이는 거울통에 거울을 고정시키는 맞물림 장치를 느슨하게 함으로써 고쳐졌다.
호주 천문학자 벤 캐스코인은, “남반구의 성운을 손과 눈으로 그릴 목적으로 망원경을 세웠다는 사실이다. 이 시기에는 이미 사진이 성운 연구에서 혁신적인 도구로 유망했다. 1870년대에 민감한 사진 건판이 도래하면서 사진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이 되었다. 사진 관측이나 분광학 외에는 망원경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라고 코멘트한다.
1944년 결국 천문대는 폐쇄되었다.
이 경통은 50인치 내열유리 거울을 장착함으로써 광전측광 분야에서 쓰였고, 1990년대에는 암흑 물질 후보 가운데 못 찾은 별을 찾아내는 임무를 맡았다.
13. 꿈의 광학
큰 굴절 망원경을 회상하다.
에른스트 아베 Ernst Abbe(1840~1905), 이 사람은 튀링기아의 예나 대학교에 있던 광학 전문가이자 수리물리학자로, 브람스와 동시대인이었다. 그는 Carl Friedrich Gauss(1777~1855), 프라운호퍼(1787~1826), Joseph Petzval(1807~1891), Ludwig von Seidel(1821~1896) 등의 연구를 이용했다. 1870년대, 그는 광학 렌즈의 이용도에서 이론이 현실을 한참 앞지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1881년 아베는 화학과의 젊은 박사 오토 쇼트를 만났다. 이미 아베는 15년 동안 재능 있는 기구 제작자 Carl Zeiss와 일하던 중이었다. 이들은 1884년 예나에 쇼트 유리 공장을 세웠다. 그리고 1894년 아베는 프리즘 쌍안경을 만들게 되었고, 차이스와 독일 회사는 20세기의 첫 10년 정도 지름이 80cm인 천문학적 굴절망원경을 만들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굴절망원경의 시대는 끝나가고 있었다.
별빛을 채질하다.
1824년 출생의 호이겐스는 부유한 재산가로, 1850년대 중반, 가업을 정리하고 런던 남부 툴스 힐의 어두운 하늘 아래 새 집을 짓고 살면서 천문학에 헌신했다. 그는 배달받은 새로운 망원경으로 무슨 대단한 연구를 할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항성분광학 기술을 개척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1862년 그는 키르히호프가 태양 스펙트럼에 대해 분석한 결과에 대해 들었다. 그는 친구이자 킹스칼리지 화학과 교수인 윌리엄 밀러(1817~1870)의 도움을 받아, 망원경에 두 개의 프리즘 분광기를 장착하는 기계를 만들고 함께 관측하였다.
그들은 1864년 별의 스펙트럼 약 50개에 관한 결과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1864년 늦여름, 그는 성운들이 단색광으로 보이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들이 기체라는 것을 알아내었다. 결국 성운은 별로 이루어진 것과 기체로 이루어진 것, 두 종류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기록갱신
1870년 25인치 망원경이 완성되었을 때, 토머스 쿡은 세계에서 가장 큰 굴절 망원경을 만든 사람으로 기록되었다. 이 망원경은 아마추어 천문학자 로버트 스털링 뉴웰 (1812~1889)을 위해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1890년에 케임브리지 대학교로 넘겨졌고, 결국 아테네 국립 천문대에서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1872년 앨번 클라크가 워싱턴의 미국 해군 천문대에 22인치 굴절망원경을 완성했다.
1875년 하워드 그럽은 비엔나 천문대에 설치할 27인치 반사망원경을 완성했다.
1880년 36인치 대물렌즈 계약이 릭천문대를 위해 이루어졌다. 이 계약은 그럽이 아니라, 앨번 클라크와 이루어진 것이다. 그럽은 경통을 움직이는 시스템만 맡게 되었다.
1888년, 릭 망원경은 캘리포니아 산호세에서 동쪽으로 32키로미터 떨어진 해밀턴 산의 고도 1280미터에 있는 관측소에 세워졌다. 이는 아직도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굴절망원경이다.
1879년 완성된 여키스 천문대의 망원경은 40인치이다. 이는 조지 엘러리 헤일을 설득하여 만든 것이다.
14. 은과 유리
20세기 망원경
유리 거울에 은을 코팅하는 새로운 기술은 금속거울을 간단히 이기게 된다. 유리 거울은 무게가 금속거울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았고, 은으로 표면을 덮으면 훨씬 더 반사도가 높아서 금속거울보다 빛을 두 배나 더 많이 모을 수 있었다. 게다가 은은 변색되더라도 화학적으로 다시 코팅하기가 매우 쉬워서 위험한 광택 연마작업을 할 필요도 없었다.
푸코는 망원경 제작에서 또 다른 중요한 큰 발전을 이루었다. 1859년 광학작업자가 거울 표면을 검사할 때 오류를 아주 정밀하게 표시할 수 있는 칼날검사를 개발했다.
1880년 중반까지 사진이 중요한 관측도구가 되었다. 사진 건판이 하늘에 무엇이 있는지에 대한 정확하고 영구적인 기록을 제공하며, 인간의 눈은 한번 본인 것만 인지하지만, 사진 건판이나 사진 필름은 오랜 기간 동안 상을 천천히 만드다는 점에서, 맨눈으로는 절대 볼 수없는 아주 세세한 것까지 기록할 수 있다.
이로써 지구가 자전함에 따라 적도의식 망원경이 하늘의 같은 장소를 계속 지향해야 할 필요성이 새로이 제기된다.
성운 모양
1901년은 시카고 대학교 여키스 천문대의 망원경 제작 책임자로 있던 리치가 23.5인치 반사 망원경을 만든 직후였다.
리치가 깨달은 것은, 성운이나 혜성과 같이 펼쳐져 있는 천체가 기록되는 속도는 망원경의 구경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F수에 달려 있다고 하는 사실이다. 믿기 어렵지만, 민감도가 구경에 달려 있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리치가 새로 만든 23.5인치의 망원경은 f/3.9인데, 여키스 망원경은 f/18.6으로서 성운 사진 관측에서 새 반사 망원경이 굴절망원경을 이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리치는 1908년 60인치 망원경을 설계하여, 캘리포니아의 파사데나 근처 1740미터 산꼭대기에 세웠다.
John D. Hooker (1837~1910)는 헤일에게 설득당해 망원경 자금을 댄 사람이다. 후커 망원경은 60인치 망원경처럼 f/5로, 리치의 23.5인치 망원경보다 조금 느리다. 허블은 이런 망원경을 가지고 성운 천문학에서 위대한 발전을 이룬다.
허블은 1919년부터 1924년까지 후커 망원경으로 찍은 사진들을 사용해 안드로메다와 삼각형 자리에 있는 두 개의 밝은 나선 성운에서 주기적 변광성을 발견했다.
더 넓은 전망
리치의 망원경은 코마수차가 있는데, 이는 시야의 중심에서 1도 보다 조금 짧은 거리에 있는 포물면 거울에서 나타난다. 매우 넓은 시야각이 필요한 사진 관측에서는 쓸모가 없는 것이다.
이를 해결한 사람은 천재 Bernhard Vodlemar Schmidt였다. 그는 1879년 3월 30일, 핀란드 만의 나르겐이라는 에스토니아 섬에서 태어났다. 1935년 12월 1일, 함부르크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광학 기계상으로 살았다. 집에서 만든 화약을 넣은 금속관이 손에서 터진 사건으로 오른쪽 엄지손가락과 집게 손가락을 다쳤는데, 병원 외과의사가 팔뚝 전체를 절단해 버렸다.
그는 작은 독일 마을 미트바이다로 옮겨 공부를 계속하면서, 질높은 포물면 거울을 만들어 크게 성공했다.
1926년, 실용적인 광학 기술을 가진 슈미트는 함부르크 천문대에 자원봉사자로 일했다. 그가 천문대에서 만난 사람은 20세기 중엽 가장 위대한 천문학자 중 한명인 Walter Baade (1893~1960)였다. 바데는 슈미트에게 진정한 광시야를 가진 빠른 반사망원경을 설계해 보라고 했다.
슈미트카메라는, 코마 때문에 포물면 거울의 제한을 인식하고, 구면 거울을 조사했다. 슈미트는 들어오는 빛이 구면 거울의 곡률 중심에 위치한 조리개에 의해 제한되면 우선권이 있는 축이 없어지므로 구면수차가 존재하지 않게 되고, 사진 건판의 어느 부분이나 다소 같은 크기의 구면수차만 남게 된다고 생각했다. 슈미트는 이 구멍 대신 유리로 만든 얇은 보정판을 대치해 구면수차를 보정했다.
그는 14인치의 견본 망원경을 f/1.7로 만들었다. 시야가 15도인 이 망원경은 매우 뛰어나게 작동했다.
1948년에 48인치 팔로마 슈미터 망원경이 만들어졌다.
남반구에서 가장 큰 슈미트 망원경은 호주에 있는 1.2미터 영국 슈미트 망원경이다. 초점비 2.5이고, 면적이 14제곱인치인 유리건판 한 면에 6.6도의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사진 한 장에 50만 개의 흐린 별들과 은하를 담는 정도이다.
팔로마와 그 후
록펠러 재단이 200인치 망원경을 건설하고 운영하기 위한 6백만 달러의 연구비를 제공하자, 1934년 주조되어, 1948년 완공된 망원경을 헤일망원경이라 한다. 남부 캘리포니아의 샌디에고 북쪽 80킬로미터에 있는 팔로마 산 정상에 서 있다. 직경이 42미터인 이것은 판유리가 아니라, 코닝사에서 개발한 파이렉스로 만들어졌고, 15톤 정도가 된다. 알루미늄 코팅을 한 것은, 은 코팅보다 색이 덜 변하고, 자외선 빛을 더 효율적으로 반사한다.
그 뒤 1991년 하와이 마우나케아 정상에 세워진 켁 망원경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공장 마루에서
1970년대와 그 이후 세워진 4미터짜리 망원경 8대가 아직도 중요하다. 북반구에 5대, 남반구에 3대가 있다. 제조회사 - 더블린에 있는 하워드 그럽회사는 파산할 지경에 이르러 그럽 파슨스라는 회사가 되었고, 1950년 데이비드 스캐처드 브라운이 데이비드 신든과 콤비를 이루어 만들어 가고 있다. 5년 뒤 세인트앤드루스 대학을 졸업한 물리학자인 저자가 이 회사에 입사한다.
그러나 변신에 실패하여 그럽 판슨스는 대형 반사망원경을 만든지 150년이 지난 1985년에 문을 닫았다.
15. 은하와 함께 걷기
5백 년을 향해
1932년, 칼 구데 잰스키는 은하수로부터 나오는 14.5미터 파의 전파를 발견했다. 1937년 지름이 10미터인 반사식 전파망원경이 선보였다.
Grote Reber(1911~2002)는 10년 가까이 세계에서 단 한 명뿐인 전파천문학자였다.
1942년 4.2미터 파장에서 작둉하는 영국 육군 레이더가 태양에서 나오는 전파를 우연히 감지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단일 접시는 푸에르토리코 아레치보에 있는 200미터 망원경으로 자연적으로 움푹 팬 땅에 고정된 접시를 세웠다.
2010년 호주의 중앙 지역에 만들어질 망원경은 1백만 제곱미터 집광면적으로 지름 1000킬로미터인 전파망원경으로 합성될 것이다.
우주 망원경
1967년 미국 공군은 불법 핵무기 실험에서 나오는 감마선 섬광을 감지할 목적으로 발사한 인공위성에서 종종 빛의 폭발을 보게 되었고, 1997년 광학망원경으로 후속 관측을 한 결과 그 섬광은 수십억 광년 떨어진 곳에 있는 물체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밝혀 내었다.
IRAS는 Infrared Astronomy Satellite의 약자
허블우주망원경(1990년 발사), 콤프톤 감마선천문대(1991년 발사되어 2000년에 임무를 마침), 찬드라 엑스선 천문대(1999년에 발사됨), 스피처 우주망원경(2003년에 적외선 관측을 위해 발사)
1979년 애리조나 킷픽 국립천문대의 2.1미터 망원경으로 이중퀘이사를 발견했다. 이것은 하늘에서 6초만큼 떨어져 있는 동일한 스펙트럼 성질을 갖는 물체 두 개로 이루어져 있다.
1980년에는 거대한 은하단 근처에서 희미한 빛의 원호가 발견되었다.
이것들은 중력 자체가 빛을 구부리는 효과이다. 중력렌즈 현상
16. 강력한 망원경
국제 심포지엄에 참여해 보라.
지름 1미터인 망원경은 0.1초보다 조금 더 큰 크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지름 4미터인 거울은 4분의 1만큼 더 분해해 볼 수 있다.
완벽하게 안정적인 공기에서 가장 좋은 시상은 지름이 0.3초쯤 되는 별의 상을 말하는데, 시상이 나쁠 때는 별이 3초 또는 그 이상 퍼진다.
허블망원경은 직경 2.4미터인데, 그 제작과 발사, 수리에 들어간 최종 비용은 1990년 기준 20억 달러이다.
2011년에 발사할 제임스 웹 우주망원경은 ## 2018년에 발사하기로 수정되었음 ## 지름 6.5미터에 적외선에서 작동할 것이다.
천문대의 위치로 완벽한 후보지는, 미국의 남서부, 하와이의 빅 아일랜드, 카나리아 제도의 라팔마 섬 등이다. 남반구에서는 북부 칠레의 산악 지역과 남부 아프리카의 높은 건조 고원지대가 유망하고, 남극대륙 남극 주위에 있는 고원은 적외선 관측을 하기에 아주 좋은 조건을 갖고 있다.
큰 망원경들이 높은 산 부지에 세웠을 때 일반적으로 얻을 수 있는 시상은 0.5에서 1초이다.
적응광학이라고 알려져 있는 기술은 작고 변형 가능한 거울로 단순히 상의 번짐을 중화시키는 것이다. 이 거울은 입사된 뒤틀린 빛과 정확히 반대로 일치해 휘어진다.
1970년대에 8미터 망원경이 시도되었다. 가격은 1억 달러에 가깝웠다.
VLT - Very Large Telescope 8미터짜리 망원경 네 대를 통합해 독자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고, 함께 연결해 16미터짜리 단일 망원경처럼 사용할 수도 있다.(남미 칠레 체로 빠라날산 정상에 있다)
ELT - Extremely Large Telescope 지름 25미터의 망원경은 컴류터가 조정하는 작은 조각 거울들로 구성되어 있다.
칼텍은 CELT - 캘리포니아 극대망원경, 스웨덴 대학연합체는 SELT, MAXAT는 최대구경망원경 Maximum Aperture Telescope, GSMT는 거대 분할 거울망원경 Giant Segmented - Mirror Telescope
그러나 이러한 제안은 CELT만이 자금을 지원받을 가능성이 있다.
좋은 포스팅 감사합니다. 천체망원경의 역사와 관련된 내용을 공부하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 글을 참고해서 영상을 제작해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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