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 29일 일요일
생명의 기원 - 폴 데이비스
생명의 기원 - 폴 데이비스
The Fifth Miracle - Paul Davies
천년의 역사는 약 40세대이다. 우리들 각자는 2명의 부모, 4명의 조부모, 그리고 8명의 증조부모를 갖는다. 각 세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조상의 수는 2배로 된다. 이 규칙을 이용하면 우리는 천년 전의 조상으로 2의 40승, 즉 1조명의 조상을 가지게 된다. 이것은 지구상에 살았던 모든 인구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이다.
11001001000011111101101010100010001000010110100011~
이것은 정말 마구잡이 서열이지만, π를 이진법으로 50개까지 나타낸 것으로서 이 서열은 거의 정보를 함유하고 있지 않다.
이제 우주가 열역학적 평형에 있지 않기 때문에 정보를 함유한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다. 정보는 초기 입력의 일부로서 최초에 그곳에 존재해야만 했다. 우주는 나아가라는 단어로부터 정보나 음의 엔트로피를 저장하게 되었다.
현재 우주는 단지 1비트의 정보(온도)만을 열역학적 평형 상태를 완전히 나타내는데 제공한다.
일정한 온도와 최대 엔트로피에서 열역학적 평형을 이룬다고 생각되는 기체가 중력작용 아래에서는 추가적인 변화를 일으켜서 열이 흐르고 엔트로피가 더 증가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별빛의 흐름은 실제 엔트로피와 최대엔트로피의 틈새를 메꾸려는 시도의 한 과정이다.
모든 생명은 중력이 창조한 엔트로피 틈새에서 생겨한 것이다. 생물학적 정보와 질서의 최종 원천은 중력이다.
서평
물리학자가 쓴 생명의 기원에 대한 탐구는 생물학자들과 확실히 다른 시각을 보여 준다. 머리 속에 체득된 수많은 물리법칙의 개념을 가지고, 기본적으로 어떤 이론이 있을 법 한지 아닌지 순식간에 파악하고, 가능성있는 이론에 대해서만 논리를 전개한다.
데이비스의 이 책을 읽어 가면, 기존의 생물학자나 진화론자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대담한 발상을 보여 준다. 즉 DNA 구조라는 것은 단순히 생물계 내에서만 통용되는 것이 아니고 우주의 일반법칙일 가능성, 우주에도 적용가능하고 증거를 찾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래서 현재 우주가 보여주는 정보는 1자리 수에 불과하지만, 아직도 토해낼 정보가 남아있다는 통찰은 신선했다. 실로 엄청난 발상이 아닐 수 없고 책을 따라 읽어 가다 보면 수긍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브라이언 그린이 우주의 구조에서 보여준 생명에 대한 언급은 물리학적 결합에 지나지 않는다는 소견이었지만, 같은 물리학자로서 데이비스는 생명에 대한 진지한 접근을 보여주고 있다.
아마존닷컴에서 베스트셀러로 꼽혔던 책을 다시 읽으면서 과거에 놓쳤던 좋은 아이디어를 발견하는 즐거움은 이미 많은 책을 읽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제1장 생명의 의미
가장 오래된 동물의 화석은 오스트레일리아 아델레이드 북쪽의 Flinders Ranges에 존재하는데, 연대가 약 5억 6천만년 된 것이다. Ediacara라고 알려진 그것은 해파리와 비슷한 생물체를 함유하고 있다. 그러나 약 십억 년 전에만 해도 생명은 단세포 생물로 제한되어 있었다.
자연의 법칙은 단독으로는 어떻게 생명이 시작되었는지 답할 수 없는데, 원자 집단을 정밀하게 처방된 조립 순서를 따르도록 만들 수 있는 법칙은 전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생명의 특징 - autonomy 자율성은 생명의 중요한 특징이다. reproduction 번식은 역시 중요하다. 그러나 결정이나 잔목 숲의 불과 같은 무생물도 번식할 수 있지만 정작 바이러스들은 그들 스스로 번식할 수 없다. 연속되는 자손은 원본에 대한 단순한 팩시밀리 이상이다. 그것은 복제장치의 복사물도 포함하고 있다. 유전자를 다음 세대로 전달하기 위하여 유전자 자체가 복제될 뿐 아니라 그 방법도 복제되어야만 한다. metabolism 대사과정이 있어야 한다. 화학물질 가공과 에너지 획득을 대사라고 한다. nutrition 영양도 대사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complexity 복잡성이 있어야 한다. 박테리아 같은 단세포 생물도 수백만 가지 성분을 필요로 하는 매우 복잡한 것이다. 생물체의 예측 불가능성을 보장하는 것이 이런 복잡성이다. organization 조직화는 복잡성 그 자체를 의미있게 하는 요소이다. growth and development 성장과 발달, information content 정보함량, hardware/software entanglement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뒤얽힘 - 핵산은 생명의 소프트웨어를 저장한다. 단백질은 실제의 일꾼이며 하드웨어를 구성한다. permanence and change 영구성과 변화
생명이 정상적인 물리적 법칙을 따르는 평범한 물질 이상의 특별한 구성 성분을 필요로 한다는 믿음이 생기론이다. 과거부터 생명을 공기와 연결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나중에는 혈액이 생명을 주는 물질로 믿었다. 과학적 지식이 증가함에 따라 생명력은 더 세련된 개념들과 결합되었다. 그것이 플로지스턴이나 에테르, 18세기에 이르러 전기가 생명력의 근원으로, 19세기 후반에는 방사능이 전기를 대신하였다.
오늘날 화학의 주제가 유기와 무기로 나뉘고 있다. 알코올, 포름알데히드,요소 같은 유기물질들은 살아있는 생명체로부터 분리된 후에도 생명의 본질을 내포하고, 소금과 같은 무기물질은 말 그대로 정말로 죽은 것이다.
1828년 Friedrich Wohler 뵐러가 무기 물질인 시안산암모늄으로부터 요소를 합성하게 된 것은 생기론자들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생명 자체가 유기물질로 올 필요가 없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무엇이 생명을 그렇게 독특하게 만드는가, 무엇이 무생물로부터 생물을 구별하게 만드는가 하는 것은 생명체가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는가가 아니라 그것들이 어떻게 함께 모여서 전체로서의 기능을 가지게 되었는가에 대한 것이다.
신체의 한 세포에서 DNA를 뽑아낸다면 그것은 약 2m 정도 될 것이다. 정말로 큰 분자이다.
지구상의 거의 모든 다른 생물들과, 심지어 곰팡이에서 파리, 박테리아에서 곰까지 생물들은 그들의 DNA 메시지에 따라서 생겨난다. 개개의 DNA는 같은 종 안에서도 서로 다르며 다른 종 사이에서는 더 다르다. 그러나 필수적인 구조 - 화학적 구성, 이중나선 구조는 보편적이다.
DNA는 믿기 어려울 만큼 오래된 분자이다. 그것은 거의 35억년 전에도 존재했다. 다른 커다란 유기 분자와 구별되는 DNA의 중요한 성질은 스스로 복제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 복제에서 실수가 발생하면 그것을 이어받은 생물체의 돌연변이로 드러난다.
다윈주의 진화는 어떤 종류의 생명이 이미 존재해야만 작용할 수 있다. 다윈주의는 가장 중요한 첫 단계, 즉 생명의 기원에 대해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한 숟가락의 흙 속에 만여 종의 다른 종의 박테리아가 10조 마리가 들어 있다(John Holt). 지구상의 미생물의 질량은 약 수백조 톤에 달하며 이것은 눈에 보이는 모든 생체들을 합한 것보다도 더 많은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박테리아는 산소성이면서 광합성 박테리아이지만 이십억 년 전에는 지구상에 산소가 거의 없거나 존재하지 않았다. 미생물들은 다양한 거주지에서 번성하였으며 알코올을 발효시키고 메탄을 생성하고 황산을 환원하였다.
2장 조류에 대항하여
열역학 제2법칙은 perpetuum mobile 완전기관의 창조를 금지하고 있다.
생물체가 발달을 하거나 번식을 할 때는 질서가 증가한다. 이것은 열역학 제2법칙에 어긋난다. 배아의 성장, DNA 분자의 형성, 새로운 종의 등장 및 전체적인 생물권의 정교화는 질서가 증가하고 엔트로피가 감소하는 예들이다.
환경이 자유 에너지를 공급할 수 있는 한 생물계는 쉽게 엔트로피를 감소시킬 수 있으며, 국부적 주변에서는 질서를 증가시킬 수 있다.
가솔린 연료 기체와 공기의 혼합물이 완벽하게 섞인다 하더라도 최대 엔트로피 상태가 아니다. 두 기체는 더 안정한 물질을 생성하고 열을 방출하여 엔트포피를 증가시키고자 반응하기를 좋아한다. 이런 종류의 깨지기 쉬운 안정성을 가지는 상태를 준안정 상태라고 한다.
생명은 항상 이용할 수 있는 준안정한 자유에너지원을 얻으려고 한다.
준안정한 원천을이용하기 위하여 생물체는 무기 에너지 방출을 막는 활성화 장벽을 극복해야만 한다.
생명은 주위로부터 정보(음의 엔트로피)를 받아 들임으로써 열역학 제2법칙을 통한 붕괴를 회피한다.
실수파국 (Manfred Eiggen)
고등생물은 약 1억 비트의 정보를 저장할 수 있는 약 십만 개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들 각각이 복제 실수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한번 복제당 1억분의 1 이하이면, 실수파국은 면하게 된다. 반대로 훨씬 더 적은 유전자를 가진 박테리아는 많은 실수비율을 가지고도 살아갈 수 있다. 자연은 아이겐의 법칙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와 같은 세포는 실수비율을 약 10억분의 1로 감소시키지만, 박테리아는 훨씬 높아서 약 1백만분의 1이다.
아이겐의 법칙에 따르면 최초 생물의 게놈이 실수 파국을 피하려면 그 길이가 매우 짧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약간의 모순은, 게놈이 너무 짧다면 그 자신의 복제 기구를 구성하는데 필요한 정보를 충분히 저장하지 못한다.
복잡한 게놈은 믿을만한 복사를 필요로 하며 믿을만한 복사는 복잡한 게놈을 필요로 한다.
구문론적 정보는 단순히 원시 자료이며, 의미론적 정보는 어떤 종류의 전후관계나 의미를 갖는다.
생물학적 정보의 눈에 띄는 특징은 그 자체로 의미가 충분하다는 것이다.
생명을 완전히 설명하자면 단순하게 자유에너지나 음의 엔트로피 원천이라고 확인하거나 생물학적 정보를 제공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생물체의 환경만이 의미론적 정보의 원천이 될 수 있다.
1980년대에 우주의 총에너지는 실제로 영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발견되었고, 따라서 그것이 nothing-for-nothing 무에서 무로이다. 우주가 10의 50승톤의 물질을 함유하면서도 제로 에너지를 가질 수 있는 이유는 이것의 중력장이 음의 에너지를 가지기 때문이다.
우주에서 정보의 자발적 등장은 우주의 엔트로피의 감소와 같기 때문에 제2법칙의 위배이며 기적이 된다.
이제 우주가 열역학적 평형에 있지 않기 때문에 정보를 함유한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다. 정보는 초기 입력의 일부로서 최초에 그곳에 존재해야만 했다. 우주는 나아가라는 단어로부터 정보나 음의 엔트로피를 저장하게 되었다.
천문학적 관찰로부터 초기 우주의 정보함량을 알게 되는 것은, 우주 배경복사는 대폭발의 정보를 함유하고 있다. 현재의 열역학적 평형은 새넌 연결을 통하여 최소 정보를 함유하는 최대 엔트로피 상태이다. 단지 1비트의 정보(온도)만을 열역학적 평형 상태를 완전히 나타내는데 제공한다.
제2법칙은 우주 정보의 총함량이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은 초기 우주라는 것으로부터 진화하면서 계속 증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일정한 온도에서 기체가 담겨있는 플라스크의 경우 기체를 건드리지 않고 그대로 둔다면 전혀 일을 하지 못하고 평형에 남게 된다. 그런데 기체의 질량이 매우 커서 중력이 중요해지는 경우가 있다. 이 계는 불안정해지고, 수축하면서 밀도가 높은 물질 덩이들이 여기저기 축적된다. 덩이들 중심의 수축은 기체를 뜨겁게 만들며, 온도차가 생기고 열이 흐르게 된다.
일정한 온도와 최대 엔트로피에서 열역학적 평형을 이룬다고 생각되는 기체가 중력작용 아래에서는 추가적인 변화를 일으켜서 열이 흐르고 엔트로피가 더 증가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중력으로 유발되는 불안정이 정보의 원천이 된다.
중력은 게임의 법칙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
균일한 기체 구름은 중력 과정을 통해서 내놓을 수 있는 많은 자유에너지를 여전히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성단이나 은하는 그것을 나타내는 많은 정보를 필요로 한다. 아직 잘 알려지지 않는 방법으로 분명히 거대한 양의 정보가 모양을 갖추지 못한 균일한 기체의 조용한 중력장에 비밀스럽게 놓여 있다. 계가 진화함에 따라 기체는 평형으로부터 벗어나고 정보가 중력장으로부터 물질로 흐른다.
이런 중력과정의 결말은 우주에서 실제 엔트로피와 가능한 최대 엔트로피 사이의 틈새가 생긴다는 것이다. 별빛의 흐름은 그 틈새를 메꾸려는 시도의 한 과정이지만 실제로 지구 내부의 화학적 에너지와 열에너지를 포함한 모든 자유에너지의 원천은 그 틈새로부터 생길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생명은 중력이 창조한 엔트로피 틈새에서 생겨한 것이다. 생물학적 정보와 질서의 최종 원천은 중력이다.
자기 복잡화 또는 자기조직화
중력은 양자 과정을 통하여 생체분자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Roger Penrose). 생명은 우리의 국부적 생태계에서 최소한 은하까지 확장되는 자기조직화된 계의 차례로 포개어진 위계의 일부이다(Lee Smolin).
정보개념은 생물학과 열역학 뿐 아니라 계산학과 물리학의 여러 분야에 등장하고 있다. 물질의 파동 성질이 파동함수라고 알려진 수학적 방법에 의하여 기술된다. 즉 그 상태의 정보함량을 나타낸다.
상대성 이론에 있어서 입자가 빛보다 빠르게 운동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지만, 허용하지 않는 것은 빛보다 더 빠른 정보의 전달이다.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은 정보는 국지적인 물리적 양이라기보다는 전체적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3장 진흙에서 나와서
천년의 역사는 약 40세대이다. 우리들 각자는 2명의 부모, 4명의 조부모, 그리고 8명의 증조부모를 갖는다. 각 세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조상의 수는 2배로 된다. 이 규칙을 이용하면 우리는 천년 전의 조상으로 2의 40승, 즉 1조명의 조상을 가지게 된다. 이것은 지구상에 살았던 모든 인구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이다.
실제로 과거로 가계를 추적하는 어느 순간에 가계는 교차되고 재교차된다. 유전자와 왕가 혈통은 지구 전체로 교차되어 확산되고 우리 모두는 먼 사촌이 된다.
가계도는 과거로 무한대로 퍼져나갈 수도 없고, 일정한 시점에서는 수렴을 해야 한다. 십만년 전에 지구에는 몇 명의 인류 Homo Sapiens만이 존재하였다.
세포의 대사 경로는 근본적으로 같다. 세포가 유전정보를 기록하고 번식하는 방법도 모든 생명에서 공통적이다.
공통 조상에 대한 증거는 물질의 분자적 손대칭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손대칭성은 chirality 키랄성이라고 한다. 대부분의 유기분자들은 대칭이 아니다. DNA는 오른손잡이 나선으로 감겨있고, 그것의 거울상은 왼손잡이 나선이다.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모든 살아있는 생물은 똑같은 한 가지 키랄성을 가진다.
실제로 살고 있었던 모든 종들의 99% 이상이 현재는 멸종했다.
미생물의 공생 - A가 B 속으로 들어가서, B가 이기고 A가 죽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먹어치운다고 한다. A가 이기고 B가 죽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감염이라고 한다. 우연히 무승부가 되고 공존하면, 그것들은 공생관계로 남는다.
시토크롬 c라는 단백질 - 이것은 20가지 아미노산을 약 100개 정도 함유하고 있다. 서로 다른 종에서 얻은 시토크롬c의 아미노산 서열을 비교함으로써 우리는 서로가 얼마나 떨어져 있었는지 진화거리를 추정할 수 있다. 사람의 시토크롬c는 붉은털 원숭이의 것과 단 하나의 아미노산만 제외하고는 모두 같다. 그러나 사람의 시토크롬c와 고래의 것 사이에는 45개의 아미노산이 다르다.
생물의 3가지 구역을 archea 고대세균령, bacteria 진정세균령, eucarya 진핵생물령으록 구분한 선구자는 일리노이 대학의 Carl Woese 칼뵈제이다. 이 3개의 영역은 이미 30억 년 전에 분기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Pilbara 지역은 가장 덥고, 황폐한 지역으로 지구상에서 인구가 가장 적은 지역 중 하나이다. Mable Bar라는 작은 도시의 서쪽으로 약 40킬로미터 지역에 NorthPole이라는 장소가 있다. John Dunlop이 1980년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화석을 발견한 곳에서 가까운 곳이다. 이곳에는 스트로마톨라이트라고 하는 흙무더기가 있다. 이 구조는 시아노박테리아 침전물이 광물 알갱이 매트 위에 층층히 쌓여서 방석 모양의 혹을 형성할 때 형성된다. 이곳에서 500킬로미터 떨어진 Shark Bay에서는 지금도 형성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스트로마톨라이트는 약 35억년 정도 되었다고 한다.
생물이 암석에 흔적을 남겨 놓을 수 있는 또 다른 더 미묘한 방법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화학적 조성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린랜드의 Isua에서는 매우 오래된 띠 모양의 철 형성으로 나타났다. 이런 암석의 탄소 함량을 조사해보면 샘영체가 필바라 화석이 생기기 3억년 전에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근 캘리포니아의 스크립스 해양연구소의 Gustaf Arrhenius가 이끄는 연구진은 이수아 암석의 탄소 동위원소 비를 연구하는 데 개량된 방법을 사용하여, 이것이 최소 38억 5천만년 전의 것이라는 것을 밝혀 내었다.
과학은 기적을 배척한다. 정확한 것은 몰라도 간단한 화합물에서 생명에 이른느 그럴듯한 화학적 경로를 추정할 수는 있다.
정확한 화학적 서열이 무엇이든 생명은 어떤 종류의 분자 자기조립의 결과로서 형성되었음에 틀림없다.
다윈은 소위 자발적 발생이라는 것을 지지해 준다고 생각되는 어떤 증거도 만날 수 없었다고 하며, 1871년의 편지에서는, 모든 종류의 암모니아, 인산염, 빛, 열, 전기 등을 갖춘 작고 따뜻한 연못을 생명의 발원지로 상상하였다.
1920년대 Alexander Oparin과 영국의 J. S. Haldane은 원시수프의 개념을 언급하였다. 생명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물질이 포함되어 있고 화학반응을 유도하는 에너지원에 노출되어야 하는 물을 필요로 한다는 주장이 대세가 되었다.
홀데인이 수프의 화학에 초점을 맞춘 반면에 오파린은 세포우선주의자였다.
오파린의 이론은 세포의 물리적 구조가 먼저 생기고 그 속에서 어떤 분자적인 기적이 진행할 수 있는 천연적인 용기를 제공하였다는 것이다.
중수소 발견으로 노벨상을 수상한 미국의 화학자 Harol Urey는 실험실에서 원시수프 이론을 실험하기로 하고, 1953년에 그 일을 시작하였다. 유리는 메탄, 수소, 암모니아의 혼합물로 실험을 시작하면서 Stanley Miller를 고용하였다. 그들의 실험에서 아미노산이 발견되었고, 그 반론들도 많았지만 아미노산을 만든 것은 확실하였다.
복잡한 생체분자의 합성은 열역학적으로 말하면 ‘조류에 대항하는 것’이다. 아미노산이 여러 가지 조건에서 쉽게 생성되기 때문에 이것이 모순같지만, 더 큰 무질서나 엔트로피가 주위로 전달된다면 한 곳에서 질서가 나타날 수 있다.
결정성 고체는 액체보다 더 질서를 가진 원자 배열이며 따라서 엔트로피가 더 작다. 그러나 결정의 형성은 주위로의 열의 방출이 수반되며 이것이 엔트로피를 증가시킨다.
생명의 두 번째 단계 또는 단백질에 이르는 길은 아미노산들이 서로 연결되어 펩타이드라고 하는 분자를 형성하는 것이다. 각 펩타이드 결합이 생성되려면 사슬로부터 물분자가 제거되는 것이 필요하다. 수용성 수프는 분자 해체를 위한 방법은 되지만 자기조립의 방법은 아니다.
벽돌을 쌓을 때 벽돌기둥이 높아질수록 흔들리고 부서지기 쉽다. 마찬가지로 아미노산으로 연결된 긴 사슬도 매우 부서지기 쉽다. 일반적으로 유기물에 열을 가하면 교묘한 기다란 사슬 분자보다는 타르 덩어리를 얻게 될 것이다. 이것은 바베큐를 만들면서도 시험할 수 있다.
열역학 제2법칙의 구속으로부터 탈출하는 한 가지 방법은 열역학적 평형 조건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미국의 생화학자 Sidney Fox는 아미노산 혼합물을 강하게 가열하여, 물이 수증기로 나간 뒤에 아미노산들이 펩타이드로의 결합이 훨씬 잘 일어났고, 프로테노이드라고 하는 기다란 폴리펩타이드가 만들어졋다. 실제 단백질은 왼손잡이 아미노산만으로 만들어지지만 프로테노이드는 같은 양의 왼손잡이와 오른손잡이 아미노산으로 만들어진다.
단백질은 생명에 필요한 특별한 화학적 성질을 가진 매우 특별한 아미노산 서열로 구성되어 있다. 작은 단백질도 20가지 서로 다른 아미노산을 백여개 이상 함유하고 있다. 이 길이의 분자에서 아미노산을 배열하는 방법은 10의 130승 가지나 된다.
##물론 우연히 형성된 아미노산 배열을 가진 단백질을 이용할 수 있도록 생체가 적응해 왔다면 확률은 아주 높아질 것이다##
생물체에서 발견되는 복잡한 분자들 자체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분자는 단지 분자일 뿐이다. 살아있거나 죽었거나 할 수는 없다. 생명은 수백만 개의 분자가 놀랍고도 새로운 방법으로 협동하고 있는 특별한 분자들의 총체적 공동체와 결합된 현상이다.
세포는 정교한 화학적인 수선과 구축메커니즘, 오르막 과정을 유도하는데 필요한 화학적 에너지의 손쉬운 원천 및 조각들을 복잡한 분자로 조립할 수 있는 특별한 성질을 가진 효소들을 갖추고 있다. 또 단백질들은 물분자가 그들의 미묘한 화학 결합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방어적인 구형으로 접힌다.
조잡한 기계는 정교한 기계보다 더 튼튼하다. 기계가 더 정교해질수록 구성성분들에 의하여 더 취약해진다.
생명이 화학적 요행에 의하여 형성되었다면, 아미노산이 무작위로 섞여서 단백질 분자가 되어야 하는데, 순순한 우연에 의하여 단밸질이 생성되는 가능성은 10의 40000승분의 1이 된다.
우주에 생명을 가진 행성이 하나만 존재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것이 되어야 한다. 요행에 의지하는 것은 최후의 수단으로 생각되어야 한다.
4장 기계 속의 메시지
각 세포는 기술자의 지시서로부터 바로 만들어진 작은 구조로 차 있다. 작은 집게, 가위, 펌프, 모터, 지렛대, 밸브, 관, 사슬 및 심지어 운반장치까지 풍부하다.
자연은 뒤범벅이 된 기초 재료들만을 이용하여 우리가 살아있는 세포라고 부르는 정교한 기계를 구성하는 방법을 발견하였다.
살아있는 세포의 복잡성은 정교한 활동성 수준에서는 도시와 비슷하다.
핵산에 있어서 주위에 자유롭게 떠다니며 운동하고 있는 A, G, C, T가 있다면 A는 T에, C는 G에, T는 A에, G는 C에 맞아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런 종류의 줗ㅇ복제는 복사기와 비슷하다기보다는 음화를 이용하는 사진과 더 비슷하다.
복제 실수는 자연 선택이 이용하는 세대들 사이의 변이의 원천이 된다. 대장균같은 간단한 박테리아도 1000페이지짜리 책 한 권 분량은 된다. 사람의 DNA는 도서관 하나가 필요할 것이다.
생명은 4-문자 언어의 연속에 지나지 않는다.
생명은 DNA와 단백질 사이에 일어난 서로 이익이 되는 거래의 결과이다.
단백질은 세포벽과 같은 것을 만드는 구성 물질과 화학반응을 감독하고 가속시키는 효소로서도 사용될 수도 있기 때문에 DNA에게는 뜻하지 않는 선물이다.
DNA 자료은행의 많은 부분이 단백질을 어떻게 만드는가에 대한 메시지를 저장하는데 사용된다. DNA는 생물체가 필요로 하는 모든 단백질의 요청목록을 가지고 있다. 문자배열이 단백질의 제조법이 되는데 보통 수백 개의 염기쌍으로 구성된다.
RNA의 경우 A, G, C, U가 있다. U는 우라실을 나타내는데, T와 비슷하다.
mRNA의 경우 DNA로부터 처방을 읽어서 단백질을 만드는 세포의 조그만 공장에 운반한다. 리보솜이라고 하는 이 작은 공장들은 여러가지 RNA와 단백질로 구성된 복잡한 기계이다. 리보솜은 mRNA를 빨아들이는 좁은 홈을 가지고 있는데, 초기 컴퓨터의 펀치테이프와 비슷하다.
지구상의 생물들은 20가지의 아미노산으로 단백질을 만들며, mRNA는 정확한 배열을 기록하고 있어ㅓ 리보솜은 그것들을 바른 순서로 결합시킬 수 있다.
각 특정한 tRNA 분자는 한 종류의 아미노산만을 리보솜 공장에 운반하여 생산라인의 끝 쪽에 전달한다. 단백질 합성이 끝나면 리보솜은 mRNA 테이프로부터 종결 신호를 받고 사슬을 잘라낸다.
생명을 장대한 복잡성에서 이해라려는 것은 단순한 분자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며, 수준의 위계성 및 대형 조직화와 함께 생물체를 전체로서 생각함을 의미한다.
유전자는 삼차원 공간의 특별한 물체 형태이지만 동시에 어떤 것을 하게 하는 메시지이다.
DNA 사다리의 가로대 서열 3개씩이 단백질의 정확한 아미노산 서열을 결정하게 된다. 64개 삼중자를 20개 아미노산으로 번역하는 것은 각 삼중자(코돈)가 아미노산을 지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지정을 유전암호라고 한다. 핵산 언어로 쓰여진 암호화 메시지를 아미노산 언어로 바꾸는 것이다. 유전 암호는 지금까지 알려진 모든 생명형태에 공통적이다.
왜 생명은 20가지 아미노산과 4가지 뉴클레오사이드 염기만 사용할 까. 암호가 선생물적 단계 같은 생명의 역사에서 매우 초기 단계에 발생하였다면 4와 20이라는 숫자는 그 단계에 적절한 화학적 이유들을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었을 수 있다. 아미노산 수가 증가하면 번역 실수의 위험이 증가하는 것이다.
실제 암호는 꽤 임의적인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그것은 더 이상의 깊은 의미를 가지지 못하고 마구잡이로 채워 들어간 것이 굳어진 우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타스매니아 대학의 Peter Jarvis와 동료들은 보편적 암호가 원자핵 에너지 수준과 비슷한 추상적인 서열을 숨기고 있으며 초대칭이라고 하는 아원자 입자의 미묘한 성질을 포함하고 있을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유전자료는 그 자체로는 단순한 구문이다. 암호화된 유전 정보의 놀라운 유용성은 아미노산이 그것을 이해한다는 것에서부터 생긴다.
DNA 자체는 하드웨어이지만 중요한 특징은 그 재로가 아니라 DNA는 염기쌍으로 적혀진 메시지로 구성된다는 점이다.
0과 1로된 문자열을 들어보자
10101010101010101010101010101010101010101010101010
이 배열의 총정보 함량은 10을 25번 인쇄라는 간단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즉 반복적인 배열의 정보는 간단한 식으로 압축할 수 있다. 수학에서는 이 서열의 정보를 알고리듬이라고 한다. 컴퓨터 알고리듬은 어떤 결과를 얻어내기 위한 단순한 처방전 또는 기계적 절차에 불과하다. 1과 0의 문자열이 유형이 전혀 없다면, 즉 그것이 마구잡이라면 그것을 나타내는 요약문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11001001000011111101101010100010001000010110100011~
이것은 정말 마구잡이 서열이지만, π를 나타낸 것으로서 이 서열은 거의 정보를 함유하고 있지 않다.
마구잡이 서열은 정보함량을 간단한 식으로 요약할 수 없기 때문에 정보가 풍부한 서열이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태양의 일식의 경우, 연속된 각 일식 날짜를 이진법으로 적어 놓는다면 마구잡이로 보이는 1과 0의 문자열을 얻게 될 것이다. 일식에 대한 모든 정보, 매년 매달의 지구와 달의 위치에 대한 정보는 짧은 알고리듬에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지구 태양 달 계는 비교적 정보가 적으며, 심오한 유형과 규칙성을 나타낸다.
게놈이 생물학적 기능이 필요로 할 만큼 정보가 풍부하다면 마구잡이로 이룽져야 한다.
상당량의 정보를 함유하기 위해서는 마구잡이여야 하며 생물학적으로 관련된 정보이기 위해서는 특별하여야 한다. 단순한 마구잡이가 아니라 확정되고, 극도로 특별하고, 예정된 마구잡이 유형이 되어야 한다.
짧은 마구잡이 게놈을 오랜 시간에 걸쳐서 긴 마구잡이 게놈으로 연장시키는 마구잡이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은 생물학적 정보를 발생시키는 확실한 길이다.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정보 개념이 합리적으로 생물계에 적용되며 그것들이 에너지 같은 자연적 양인 것처럼 기꺼이 의미론적 정보를 다룬다. 과학에는 인간 세상사에서 유도된 개념을 마치 그것이 자연 자체에 존재하는 것처럼 자연 범주에 투영하는 위험이 존재한다.
5장 닭과 달걀문제
DNA는 매우 자랑스러운 긴 수명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에 대하여 많은 것을 할 수 없는데, 그것은 화학적으로 무력하기 때문이다. 단백질은 그들을 암호화해주는 DNA, 메시지를 전사하는 mRNA, 그것들을 조립하는 리보솜이 없이 만들어질 수 있었는가. 단백질이 이미 존재하고 있지 않았다면 어떻게 DNA, 리보솜 그리고 모든 나머지 장치들이 처음으로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복잡한 계는 자신을 비가역적으로 의존성 순환에 빠뜨릴 수 있다.
단순하고 조직적이지 못한 시초로부터 다른 방법으로 정교한 기술 순환으로 진화할 수 있다. 그러나 일단 순환이 확립되면 그것은 신속하게 개선된다. 그런 일이 일어나면 원시 기술 흔적은 거의 남지 않는다.
인과 되먹임은 극적인 증폭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우연히 갑이 을을 개선시킬 수 있는 ㄱ방향으로 개선이 이루어지면 을이 갑을 개선시키고, 이런 식으로 되어 개선이 빨리 증강된다.
1960년대 캘리포니아 라욜라에 있는 솔크연구소의 Leslie Orgel은 RNA가 DNA보다 먼저, 그리고 단백질보다도 먼저 등장했다고 제안했다. 단백질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엇이 효소역할을 하였는지에 대한 답은 1983년 등장하였다. 콜로라도 대학의 Thomas Cech 연구진과 예일대학의 Sidney Altman 연구진은 RNA가 자체적으로 약한 촉매로 작용할 만큼 화학적으로 활성이 충분하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RNA 분자는 유전 정보 저장소로뿐 아니라 적당히 삼차원적으로 접히면 촉매로서도 작용한다. 같은 종류 부나 안에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 이론은 RNA세계라고 알려지게 된다.
Q의 베타바이러스에 대한 실험에서, 일리노이 대학의 Sol Spiegelman은 복제도중 복사실수가 일어난 바이러스를 분석하여, 살아가기 위한 작업에 대한 의무와 단백질 외투를 만드는 것에 대한 필요성에서 해방된 과보호된 RNA 가닥은 가냘퍼지기 시작하여서 더 이상 필요하지 않거나 단순히 장애물이라고 판명된 게놈 부분들으 떼내 버렸다. 74세대 후에 4500 뉴클레오티드 염기로 시작하였던 RNA 가닥이 단지 220 염기의 난쟁이 게놈으로 끝나게 되었다.
RNA 세계의 의문점은, 제한된 RNA 세계가 핵산과 단백질이 유전암호로 연결된 현재와 같은 이중체계로 진화하였겠는가이다. tRNA는 시간에 따라서 거의 진화하지 않았다는 점과 tRNA의 역할이 단백질 재료인 적당한 아미노산을 연결시킨다는 점이다.
RNA는 단백직을 만들고, 단백질은 더 많은 RNA 생산을 촉진하고, 더 많은 단백질이 생기고 ...등등으로 계속된다. 가장 효과적으로 RNA 복제를 도와주는 단백질은 자신의 수가 증가되는 보상을 받는다.
RNA 세계 시나리오가 희망적으로 보이지만, 중요한 반응들은 조심스럽게 고안된 실험 절차와 특별한 촉매의 도움이 없이는 거의 진행되지 않으며, 핵산 사슬은 아주 깨지기 쉬우며 효소로서 작용하는데 필요한 염기쌍인 50개 정도에 도달하기 훨씬 전에 절단되기 쉬운 점을 볼 대, 이 시나리오가 맞을 것같지 않다는 비판이 있다.
지구상의 모든 생물이 똑같은 키랄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은 단순한 호기심 이상의 것이다.
과보호된 RNA는 능숙한 복제자가 될 수 있지만, 에너지를 내놓는 대사경로가 적당하게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런 풍부한 분자 가닥들은 곧 유전적 탈락자가 될 것이다.
RNA 나중설
샌디에고의 스크립스 연구소에 있는 Raza Ghadiri는 작은 펩타이드 사슬들이 실제로 자기복제를 할 수 있음을 발견하였고 복제 실수를 교정까지 할 수 있는 것을 밝혔다.
영국의 소 숫자를 1할이나 감소시킨 광우병 BSE - BSE는 박테리아나 바이러스가 아닌 복제하고 전염될 수 있는 단백질 조각에 의하여 생긴다.
단백질 우선설의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 근무하던 Freeman Dyson은 생명이 두 가지 기원을 가진다고 한다. 단밸질 대사는 할 수 있지만 적절하게 복제를 할 수 없는 것과 복제는 할 수 있지만 대사를 가지지 못한 원시생명이 있었다. 세포는 게놈이 없기 때문에 다윈식 진화를 선택할 수 없지만, 여전히 화학적 수단에 의하여 진화한다. 다이슨 모형에서 중요한 것은 분자들이 다른 분자들의 생성과 돌연변이를 촉매할 수 있다는 가정이다.
글래스고 대학의 MIke Russell은, 화산구로부터 좀 떨어진 대양저의 영역에 초점을 맞춘다. 물이 암석으로 스며들어서 수 킬로미터까지 들어가고, 대류가 일어나서 다시 표면으로 나오면 풍부한 무기물이 녹아있게 된다. 분출되는 물은 염기성이며 매우 뜨거워서 200도에 이른다. 반대로 그 위의 해수는 이산화탄소가 녹아 있어서 산성이며 훨씬 차다. 두 가지 액체들의 접합부는 황화철로 만들어진 콜로이드막의 형성을 촉진한다. 철과 황은 초기생명에 강력하게 연관된 두 가지 화학물질이다. 그는 삼투압과 수압이 기포를 부풀케하고 그것을 쪼갠다고 믿었다. 또 산성-막-유체의 접합부가 건전지처럼 작용하여서 초기 대사를 유도할 내적 동력원을 제공할 수 있다고 한다.
Graham Cairns Smith는 핵산이 일차적으로 소프트웨어로 작용하였으므로, 그것들의 특별한 화학적 형태는 상관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점토로부터 핵산이 형성되는 원리를 설명한다. 그는 저급기술에서 고급기술 생명으로의 전환을 나타내기 위하여 석조 아치의 비유를 한다. 아치는 scaffold 비계를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현재 비계는 제거되고 그 후부터 흔적이 없어졌다고 한다. 일단 어떤 종류의 생명이 자리를 잡으면 그 다음은 다윈식 진화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순조롭게 된다.
생명은 우연한 복잡성이 아니고 조직화되어 있다. 나선형 은하, 무지개, 레이저 광선의 회절무늬 등은 모두 복잡하고 조직화되어 있다. 무생물계가 단지 물리적 법칙만을 따라서 조직화된 복잡성을 자발적으로 만들 수 있다면 시초에라도 그럴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벨기에의 화학자 ILyaPrigogine이다. 자발적인 질서화는 계가 열려 있기 때문에 열역학 제2법칙에 저촉되지는 않는다. 질서 증가를 보상하기 위하여 엔트로피가 주위로 나오게 된다.
컴퓨터 모형은 추분한 성분들과 상호작용을 갖는 모든 그물망이 자발적으로 조지고하된 복잡성 상태로 도약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리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자기물질을 연구하는데서 보았으며, 경제학자드은 세계금융시장에서 보았다.
생명은 실제로 자기조직화의 예가 아니다. 생명은 실제로 특정화된 조직이다. 대류세포의 질서는 계의 주위에 의하여 외인적으로 주어진다. 반면에 살아있는 세포의 질서는 그 유전자에 의한 내적 조종으로부터 유발된다.
질서와 조직화 사이를 조심스럽게 구별할 필요가 있다.
6장 우주연관성
간단한 통계학에 의하면 우리 신체 중에는 천년 이상 전에 죽은 유기물질에서 1밀리 그램마다 약 1개씩의 탄소가 들어있다. 한 때 예수, 케사르, 부처 또는 보리수 나무에 속했던 원자를 십 억 개 정도 지니고 있다.
많는 성간분자들은 유기분자이다. 일산화탄소가 가장 흔하지만 아세틸렌, 포름알데히드 및 알코올도 흔하다.
우주티끌은 1밀리미터의 천분의 1정도 되는데, 그 조성은, 자외선 복사선, 성풍, 충격파, 우주선과 같은 많은 물리적, 화학적 영향을 받은 결과의 산물이다. 그 속에는 규산질, 얼음, 흑연같은 탄소질 물질 뿐 아니라 많은 유기물도 들어있다.
태양계가 형성될 때, 지구는 여러 물체들과 충돌하면서 만들어졌는데, 그 중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는 지구의 중심까지 헤치고 들어가서 철핵을 만들었다.
목성의 경우 이런 얼음 덩어리들이 모여서 목성의 씨를 만들었고, 지구 질량 10배정도의 임계 크기에 도달하게 되자 급속하게 성장하면서 이의 강력한 중력장은 성운의 넓은 띠에서 잔해물들을 빨아들이거나 소산시키게 되었다.
해왕성 너머 궤도에서는 행성을 만들기에는 미행성체들이 너무 띄엄띄엄 분포되어 있었다. 그 너머에서는 Kuiper belt라는 곳에서 태양 주위를 선회하는 것이 많이 있다.
거대한 외행성의 중력장은 많은 작은 얼음 천체들을 성간공간으로 내던졌고, 나머지는 결국 오르트 구름이 된 곳까지만 내던져졌다.
충돌된 얼음조각들이 지구 지각에 물을 운반했는데, 현재 대양의 몇 배에 해당하는 막대한 양의 물을 운반해 준 것이다. 초기 지구가 가지고 있지 않았던 많은 휘발성 물질들도 물과 함께 왔는데, 그 중에는 생명을 촉진하는 유기물도 들어 있었다. 그 당시에는 지구가 지금보다 훨씬 더 빠르게 자전하였다.
대부분의 지구 충돌의 분화구들은 침식에 의하여 소멸하였다. 그러나 호주에서만 최소한 25개의 충돌자리들이 양성으로 확인되었다.
지구의 충돌기록을 재구성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달을 연구하는 것이다.
1986년에 우주선 지오토가 핼리혜성에 접근했을 때, 탄소, 수소, 질소 및 황을 함유하는 타르형의 검은 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우주선 앞 부분 티끌입자중 3분의 1이 유기물질이었다. 벤젠, 메탄올, 아세트산 같은 일반적인 물질 외에 핵산의 구성 단위중 일부도 검출되었다.
때때로 혜성이 태양계 안쪽으로 통과할 때, 그 궤도가 목성이나 다른 행성에 의하여 교란되어 주기적으로 돌아오게 된다.
6500만 년 전에 일어난 우주 충돌의 증거로는, 희귀원소인 이리듐층의 전세계적인 발견이다. 이것은 그 당시의 점토층에 축적되어 있다. 1900년에 멕시코ㅔ서 석회층 아래에 묻힌 당시의 거대한 분화구는 너비가 최소한 180킬로미터 이상이 되어서 직경이 약 20킬로미터가 되는 물체의 충돌 때문에 만들어졌다고 보인다.
38억년 전에 달은 직경이 90킬로미터나 되는 물체와 충돌하여 영국 크기 정도의 거대한 충돌 바닥을 생성하였다.
최근에 발견된 소행성인 카이론은 토성 근처의 불안정한 궤도에 있으며 너비가 180킬로미터에 달한다.
스탠퍼드 대학의 Norman Sleep 의 연구에 의하면, 직경이 500킬로미터인 물체가 충돌하면 너비가 1500킬로미터, 최소한 깊이가 50킬로미터인 구멍이 생긴다. 표면온도는 300도 이상으로 오르고, 대양은 말라버린다. 정상적인 비는 천년 후에야 내리고, 그 후 2000년 동안 억수같은 비가 내려서 결국 대양을 채우게 된다.
생물은 멸종 충돌 효과가 끝나자마자 갑자기 출현하였다. 이것은 생명이 우주로부터 왔거나 일단 조건이 절반정도 갖추어지면 재빠르게 등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7장 슈퍼박테리아
2마이크론미터 길이의 길쭉한 막대형 박테리아는 하수구 안에서 고체 콘크리트를 먹어치워서 그것을 수주 안에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이것은 콘크리트를 먹는 황 막대라는 이름의 Thiobacillus concretivirous라고 명명되었는데, 실험실에서 시험한 결과 황산을 생산하였다.
Halobacterium halobioum은 전혀 생명이 존재하지 않으리라 생각되는 사해에 존재하고 있다. 사해는 물이 요르단강을 통해서 흘러 들어온 후 증발하고 염만 남게 되는 곳으로 이 박테리아의 서식지이다. Plectonema는 사람의 손을 심하게 손상시킬 수 있는 알칼리 용액에서 살아간다. Micrococcus radiophilus라는 박테리아는 방사선에도 견딜 수 있다. 대장균 같은 흔한 박테리아도 수백 기압의 압력을 아무런 손상도 받지 않고 견디어 낸다. Streptococcus mitis는 Surveryer 3호 우주선의 카메라집에 붙어서 완전한 진공상태에서 2년을 견디어 냈다.
70도에도 편안하게 살아가는 박테리아가 있다. 퇴비더미, 목초 사일로탑, 가정용 온수통에서도 발견되는 thermophile 고온성 박테리아라고 명명되었다. 이들은 특별히 안전한 단배질을 이용하며 정상적인 지방이 아닌 방열 왁스형으로 만들어진 세포막으로 둘러싸여 있다.
1969년 인디애나 대학의 Thomas Brock은 옐로우스톤 국립공원의 섭씨 80도 온천에 살고 있는 Thermus aquaticus라는 슈퍼박테리아를 발견했다.
1970년대 후반 Woods Hole 해양연구소의 심해탐사선 Alvin은 태평양의 갈라파고스 균열을 따라서 해저를 탐사하였는데, 해저 약 2.5킬로미터에서 온도가 350도까지 올라가는 근처에 게와 tube worm 서관충이 살고 있고, 검은 굴뚝 부근에는 온도가 110도 가까이 되는 분출구에 사는 박테리아를 발견하였다. 이들을 heperthermophile 초고온성박테리아라고 하는데, 20종 가까이 발견되었고, 이들은 모두 고대세균류 박테리아이다.
미생물들은 화산으로부터 나오는 뜨거운 화학 용액으로부터 직접 생체 에너지를 획득하여 일차 생산자 역할을 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유기물질을 섭취하지 않고 직접 자신의 생체량을 만들어내는 생물을 독립영양 생물이라고 한다. 또 빛에너지가 아니라 화학에너지를 이용하는 것을 화학독립영양생물이라고 한다.
지하로 1킬로미터씩 내려갈수록 온도는 20도가 증가한다.
시카고대학의 지질학자 Edson Bastin은 1920년대에 황화수소를 함유하는 유전에서 왜 물이 추출되는지 의문을 품었다. 그는 원유가 저장된 깊숙한 곳에 살고 있는 황 환원박테리아가 기체를 생성한다고 제안했다.
핵저장물의 경우, 과학자들은 미생물이 대수층을 침투하여 지하의 핵폐기물에 도달하여 저장용기를 부식시키고 결국 폐기물을 방출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미국 지질조사협회의 Francis Chapelle은 깊은 지하수에서 살고 있는 미생물을 연구하여 철을 분해하는 박테리아가 구멍을 만들고 물의 흐름을 증가시키며 황화물을 생성하는 박테리아는 녹은 철을 다시 침전시켜 구멍을 막는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지하에 있는 생물들은 위에서부터 암석을 통과하여 지하수를 따라서 들어갔을지, 옛날에 최초로 퇴적층이 형성될 때 그곳에 갇힌 것일까, 아니면 반대방향으로 올라오는 중인 것일까.
밀러와 유리는 지구의 원시대기가 환원성 기체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가정하였지만, 현재 지질학자들은 이산화탄소와 질소의 혼합물을 더 선호하며 표면 수프설은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워싱턴 대학의 Everett Shock는 심해 열수공 근처의 에너지와 엔트로피 수치를 계산하였다. 해수와 열수공 유체는 평형에서 멀이 위치하기 때문에 더 안정한 상태로 혼합되고 이동하면서 유기화합물 합성을 위한 막대한 열역학적 추진력이 존재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생명이 뜨겁고 깊은 곳에서 시작되었다는 강력한 증거는 화학이 아니라 유전학으로부터 나온다. 어떤 군의 생물이 오랜 시간 동안에 가장 덜 진화하였으며 따라서 초기 생명과 가장 유사한지를 추론하면, archea 고대세균령을 지적해 준다. 고대세균령 중 일부는 유전적 변화를 축적시키는데 있어서 가장 느린 것으로 두드러진다. 이것들은 Pyrodictium과 Thermoproteus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karl Stetter와 Susan Barns는 16S rRNA 분석이라는 기술로 분석하여 고대세균령이 가장 아래의 가장 짧은 가지를 고온성 박테리아와 초고온성 박테리아들이 차지한다고 발표했다.
초고온성 박테리아는 단순하고 원시적인 화학회로를 사용하여 특이한 방법으로 탄소를 동화한다. 이들은 화산 주위에서 생기는 온도 변이로부터 보호받기 위하여, 특별한 열-충격 단백질을 이용하고 있다. 이런 단백질은 확산 분출물에 흔한 아연과 몰리브덴 같은 금속을 함유하고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지구는 생물학의 요구에 들어맞게 변형되고 적응되었다.
슈퍼박테리아들은 황을 수소와 결합시켜서 황화수소를 합성하여 황으로부터 에너지를 얻는다.
황철광은 흔히 바보의 금이라고 하는 것으로서, 황과 결합되어 흔히 발견된다. 독일의 화학자 Gunter Wachterhauser는 황철광을 생물발생을 위한 중요한 촉매로 제안하였다. 황철광은 지금도 화학영양생물인 Thiobacillus ferro-oxidans의 식량이며 철과 황 성분 모두로부터 산화에의하여 에너지를 얻고 있다. 이 것은 구리, 주석, 심지어 우라늄 같은 다른 광물의 황화물까지도 소화할 수 있으며 광물 정제에 상업적으로 이요오디어 왔다. 또 철을 먹는 것은 Gallionella라고 하는데 철이 풍부한 강에 서식한다. 그것은 녹아있는 제일철 염을 녹지 않는 제이철 상태로 만들어서 물을 독특한 녹색깔로 만든다.
황환원박테리아인 Pyrodictium은 110도에서도 생존이 가능한 지하 고온성 박테리아의 조상임을 암시한다.
초고온성 박테리아의 위치는 생명이 반드시 뜨겁고 깊은 곳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단지 지구의 생명이 연속적인 운석 충격에 의하여 만들어진 온도 병목을 통과해야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혼합영양생물인 녹황박테리아의 경우는 빛을 에너지원으로 하거나 황이나 수소의 환원처럼 화학반응을 에너지원으로 이용할 수 있다.
초기세포들은 거친 암석포식자로서, 물에 녹아있는 이산화탄소와 암석에서 필요한 것을 직접 만들어 냈다.
초기 발달에 있어서 열쇠는 일부 생물체가 화학물질로부터 빛으로 에너지원을 바꾼 것이었다.
태양광을 포획하는 것은 무기물로부터 전자를 뽑아내어 태양광의 광자로 들뜨게 만들어서 저장된 에너지를 유기물질로 만드는 방법을 찾아낸 박테리아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정교한 과정의 중요한 성분은 식물을 푸르게 만드는 엽록소이었다. 단지 물, 이산화탄소 및 빛만을 필요로 하게 되면서 널리 이용되게 되었다.
8장 화성은 붉은 죽음의 별인가
화성은 온도는 항상 빙정이하이며 영하 140도가지도 내려간다. 주로 이산화탄소와 아주 적은 흔적의 산소와 질소로 구성된 대기는 매우 얇다. 기압은 7.5밀리바로서 지구에서는 고도 35,000미터에 해당한다. 바라밍 불기 시작하면 시속 650km까지 도달하여 먼지는 50km 높이까지 솟구친다.
우주탐사선에 의한 실험으로, 기체-교환 실험이 있었다. 그것은 영양배지액을 토양 실에 붓고 발생하는 기체를 분석하는 것이었다. 이 단계에서 격렬한 반응이 일어나서 막대한 양의 산소가 방출되고 약간의 질소와 이산화탄소도 방출되었다.
다음은 표지-방출 실험이었다. 이는 양성결과를 나타내었고, 탄소-동화 실험에서 탄소를 흡수하는지 알아보려는 실험이었다. 이것도 양성이었다. 학자들은 일치해서 생명이 없다고 결론내렸다.
화성의 남반구는 거대한 빙하였다는 강력한 증거가 있다.
1911년 이집트의 작은 마을 나클라에서 하늘에서 암석 덩어리가 떨어져 개를 죽였는데, 10년 후 그것은 화성의 조각이라는 것을 알아내었다. 화성의 암석을 SNC라고 하는데, 1980년대 초기에 측정해 보면, 그 나이는 1어8천만 년에서 13억년 사이였다.
화성의 암석을 떼어낸 충격파가 대기층으로부터 암석 안으로 아르곤을 집어넣었음에 틀림없다고 추론했다.
ALH84001 David Mittlefehldt, EETA79002
영국이주자들이 토끼를 오스트레일리아에 풀어 놓았을 때 그것들은 생태학적 대파괴를 가져왔었다.
9장 포자범재설
독일의 우주의학연구소 과학자들은 NASA의 장기노출장치를 이용하여 Bacillus subtilis 포자가 진공에만 노출되었지만 2%가 그대로 생존해 있었다. 당분이나 염분이 존재하면 성공가능성은 훨씬 증가되었다.
1969년 9월 28일 오스트레일리아 남동부의 Murchison 마을 근처에 운석이 떨어졌다. Melburne 대학의 John Lovering은 그것이 탄소질 구립운석으로 유기물이 풍부하였고, 독특한 냄새가 났다. 운석 안에서 발견된 수많은 유기물질 가운데 아미노산도 있었다. 지구상 생명체가 우선성 DNA를 만드는데, 그것은 좌선성 아미노산들만을 이용하였다.
화성의 암석이 지구에 도착할 확률 - 화성에서 이탈되는 암석의 7.5%가 지구에 휩쓸리고, 비슷한 정도가 금성으로 가게 된다. 38%는 태양으로, 9%는 화성과 다시 충돌, 나머지 대부분은 목성 쪽으로 간다. 지구로 운반되는 암석의 약 1/3이 천만년 안에도착한다. ALH84001은 1천 5백만년, EETA는 70만년의 측정값을 갖고 있다.
박테리아는 영양분이 결핍되면 천천히 노화하고 대사는 멈추며 크기는 작아지며 번식을 중단한다.
어느 단계에서 지구 생명체가 화성에 도달한다는 것도 필연적이었고, 35~38억년 전 화성의 조건이 지구형 생명체가 번성하기에 적당한 조건이었다는 것은 매우 그럴듯하다. 화성의 생명에 대한 증거의 원천 그 자체가 독립-기원 이론을 손상시키고 있다.
오랜 과거에서 행성간의 상호 오염 가능성은 화성의 생명에 대한 증거를 축적하는 중요한 인자이다.
지구생물체도 우주로 올라가서 수백 만년 후에 돌아와서 지구를 다시 식민지로 만들었을 수 있다.
호일과 위크라마싱은 건조된 대장균의 적외선 스펙트럼이 성간 입자의 것과 닮았다는 점을 인용하고 있다.
10장 우주는 생물친화적인가?
우주의 법칙들은 확률 법칙에 반하여 생명을 부추기도록 교묘하게 설계되어 있다는 논의가 있다.
생명이 필연적이라면 운명의 사건들에도 불구하고 달성해야 할 특별한 목표가 있는 것은 확실하다.
미생물이 우주를 가로질러서 퍼졌다면 진보된 지능을 가진 생명체도 그럴 수 있다.
생명과 우주가 항상 존재하였다는 이론에 논리적인 잘못은 없겠지만 어느 것에 대해서도 전혀 설명을 해주지는 못한다.
필연에 대한 극단적인 예는 결정의 구조이다. 결정은 필연적으로 그들이 가지는 형태를 가진다.
우연의 극단은 핀볼 기계이다.
모노는 생명의 불확실성은 진화의 마구잡이와 무방향성 본질뿐만 아니라 최초로 생명을 만들어낸 물리적 과정에도 적용된다고 주장하였다.
지구에 생 명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주 전체에 생명이 흔해야한다는 믿음은 생물학적 결정론 또는 예정설이라고 한다.
1960년대에 펜실베니아 대학의 Gary Steinman과 Marian Cole은 아미노산이 마구잡이로 펩티드 사슬을 형성하는지 시험하였다. 그들은 고수준의 조직화에서 선호되는 상호작용이 관찰되고, 어떤 유형의 내장된 예정이 생물학적 질서의 여러 수준에서 확인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Sidney Fox도 아미노산들은 축합되면 스스로 순서를 결정한다고 하였다.
Cyril Ponnamperuma도 합성을 지시하는 것으로 보이는 성질이 원자와 분자에 고유하게 존재한다고 믿었다.
원자 과정이 생물체에 유리한 내장된 편향성을 가진다고 주장하는 것은 원자물리학 법칙이 효과적으로 생명의 청사진을 포함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게놈은 다소간 무작위한 염기쌍 서열이며 바로 이 무작위성이 게놈이 진화할 수 있고 정보가 풍부한 분자역할을 하려면 필수적이라고 지거한다.
법칙은 자료를 알고 알고리듬적으로 압축하는 방법이며 겉으로 보이는 복잡성을 간단한 식이나 과정으로 요약하는 것이다. 어떤 간단한 법칙도 홀로 무작위한 정보가 풍부한 거대분자를 질서있게 만들 수는 없다. 우리가 아는 자연법칙은 생물학적 정보를 만들어 내지 않을 것이며, 보통의 법칙은 단지 입력 자료를 출력 자료로만 변환한다.
생명은 화학의 방향성에 굴복함으로써가 아니라 화학적으로 그리고 열역학적으로 자연스러운 것을 회피함으로써 그 마술을 작동한다.
화학반응이 쉽고 열역학적으로 유리하다면 생명은 기꺼이 그것을 이용하지만, 생명이 부자유스러운 화학의 수행을 필요로 한다면 그것은 방법을 찾는다. 그것은 열역학적 기울기에 거슬러서 추진하기 위하여 이상한 반응을 진행하는데 필요한 촉매를 만들고 때로는 복잡한 조합을 이루어서 적절한 에너지를 가진 분자를 만든다.
생명의 비밀은 화학적 편향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용하는 논리와 정보 규칙에 있다.
프랙탈은 무한하게 불규칙적이고 복잡하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기유사성이라고 하는 간단한 수학적 성질을 가진다. 만텔브로세트는 매우 간단한 알고리듬에 의하여 컴퓨터로 만들 수 있다.
드두브는 우연이 역할을 하지만 예정된 목표로서 생명을 갖추고 전체적인 방향성을 강요하는 여러가지 물리적 제약에 의하여 우연은 조절된다고 생각한다.
카우프만은 복잡계의 예상된 총체적 성질은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이다. 그는 생명에 이르는 경로는 많으며, 그 기원은 심오하지만 단순하다고 말한다.
무작위적 복잡성과 특이성이 함께 발생하는 것이 가능할까. 많은 연구자들은 복잡계의 행동 방법을 지배하는 보편적인 수학적 원리가 존재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이런 법칙은 물리학의 기본법칙들로부터 유도될 수 없는데, 보통 의미에서는 물리학 법칙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종류의 자기조직적인 물리적 과정이 어떤 복잡성의 문턱값 이상에서 물리적 계를 발생시킬 수 있기 때문에 계의 복잡성을 갑자기 증가시키는 일련의 전이가 될 것이다.
물리학 법칙이 단순히 주위 정보를 섞는데 비하여 복잡성 법칙은 실제로 정보를 창조하거나 최소한 그것을 환경으로부터 캐내서 물질 구조에 새겨 넣는다.
이러한 세계관에서는 힘은 물질의 무반응성 입자들 사이에서 작용하고 정보는 이차적인 유도 개념으로 취급된다.
정보는 물질이 물리학적 힘들에 의하여 돌아다닐 수 있는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정보력에 의하여 교환될 수 있는 실제 물리량이라는 것을 수용하는 것이다.
나는 정보법칙 작용 아래서만 유전 암호와 결합된 정보 통로 또는 소프트웨어 조종이 등장할 수 있었다고 믿는다.
우리가 정보의 기원을 가져오는 자연 법칙인 알고리듬을 발견하는 것이 임무이다(아이겐).
우연만으로 작은 복제 분자를 비교적 빠르게 생성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진화에서 진보는 때때로 특이성과 정보를 제공해 주는 조직화 원리에 의하여 도움을 받거나 심지어 무시될 수 있다.
의미심장하게도 파동은 정보나 소프트웨어로 확인될 수 있는데 그것이 계에 대하여 알려진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양자역학에서는 일종의 하드웨어-소프트웨어 얽힘이 존재한다. 정보 또는 지식은 하향식 힘을 가진다. 단백질이나 핵산같은 생물학적 분자를 형성하는 원자간 힘은 실제로 그 본질이 양자역학적이다.
슈뢰딩거는, 유전의 단위는 비주기적 결정이라고 제안하였다. 이것을 통해서 거대분자 구조는 그 형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충분히 안정되지만 많은 정보를 간직할 수 있도록 매우 복잡하다.
DNA 분자는 구조적 안정성을 가진다. 염기 서열이 대부분 무작위적이기 때문에 비주기성이 생겨나고 따라서 정보가 풍부하다.
준결정은 이상한 5겹 대칭을 가지고 있고 72도씩 회전하면 똑같게 보인다.
5겹 대칭은 간단한 반복 무늬를 가지지 못하지만, 펜로즈는 무한한 벽이 뚱뚱한 것과 가는 마름모꼴의 두 가지 다른 모양의 타일을 사용하여서 5겹 대칭으로 바둑판 모양을 빈틈없이 붙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준결정은 천연적으로 존재하는 펜로즈타일 유형의 삼차원적 유사물이다.
준결정은 옳은 조각을 옳은 자리에 학실하게 맞추기 위하여 어떤 종류의 장거리 조직화를 필요로 한다.
준결정은 5겹 대칭 때문에 배열에는 저장된 정보가 거의 없지만 비주기적 선형 서열 안에는 무제한의 정보를 가진다.
인간에게는 적당히 잘 발달한 시각이나 청각보다도 지능이 어떤 절대적인의미에서 더 좋은 것일까. 생명은 번성하게 내버려두면 이용가능한 곳을 채우고, 새롭고 더 나은 가능성을 탐험하고 항상 더 정교한 형태를 발달시키며 성장의 에스컬레이터를 탄다.
어두운 동굴에 살면서 눈의 사용을 잃어버린 물고기처럼 많은 생물체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덜 복잡해지도록 성장한다. 좋은 조건에서 RNA는 더 빨리 복제하기 위하여 원래의 바이러스 크기의 조각으로 자신을 줄여간다.
생명은 간단한 미생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이 어느 쪽으로 가더라도 그것은 필연적으로 더 복잡성이 큰 방향으로 가게 될 것이다.
한 생물체가 살아있으면서도 가질 수 있는 단순성의 정도에는 한계가 있다. 그것이 굴드의 벽이다.## 스티븐 제이 굴드 작 풀하우스에서 4할대 타자가 사라진 것을 보라##
선택은 환경에 덜 유리하게 적응된 그런 생물들을 여과해 내고 더 잘적응된 것들에게는 보상을 주어서 필연적으로 더 잘 적응된 방향의 경향을 유도한다. 그러나 더 잘 적응되는 것은 복잡성 증가를 포함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의식은 자연의 법칙에 근본적인 방법으로 쓰여져 있다고 암시한다.
지구상에서 생명의 역사는 승리자보다는 실패자가 훨씬 더 많은 어마어마한 복첨이었다.
2012년 4월 24일 화요일
정신세계의 병리와 해부 - 빅터 프랭클
Arztliche Seelsorge von Viktor E. Frankl
성적 용구의 좌절이 신경증의 원인이 되는 것처럼, 의미를 추구하는 의지의 좌절도 신경증의 원인이 되고, 이를 실존적 욕구좌절이라고 한다.
언어능력이나 개념적 사고 혹은 직립보행 보다도, 그 존재의 의미를 문제삼는 계기야말로 인간과 동물의 본질적 차이의 기준으로 한층 중요하다.
사육되는 동물은 사람이 그들을 사육하는 목적을 알지 못한다. 그렇게 사람이 삶의 최종 목적으로써 우주가 갖는 초의미가 무엇인가를 포착할 수 없다. 다만 추정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한 인간이 살아간 소설은 글로 쓴 로망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만큼 위대한 창작적 업적이다.
창조적 활동 속에 실현되는 것을 창조적 가치라 부른다. 가치 이외의 다른 체험 속에 실현되는 것과 같은 체험적 가치도 존재한다.
제 3의 가치 유형으로, 삶이 창조적으로 훌륭한 것도 아니며 체험이 풍부하지 않아도 근본적으로 다른 한 의미가 있다. 이를 태도적 가치라고 한다.
가치는 창조나 인생의 즐거움 속에서 뿐만 아니라 고뇌함으로써 실현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은 활동을 통해서 창조적 가치를, 체험을 통해서 체험적 가치를, 또 고뇌를 통해서 태도적 가치를 실현하고 있다.
인생은 어떤 것이 아니라 어떤 것에 대한 기회에 지나지 않는다(헵벨-Hebbel)
서평
히틀러 당시에 유대인 수용소에 수감되어 극적으로 살아난 프랑클은, 자신의 전공을 바탕으로 수용소에 수용된 사람들의 심리를 바탕으로 깊은 연구를 한 끝에 극한 상황에서의 연구를 발표하였다. 이미 이 책에 나온 로고데라피는 인간이 자신의 존재의미를 찾는 것을 치료하는 방법이지만, 기존의 정신의학자가 연구하는 단순한 병리현상과는 다른 병을 대상으로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가 이 책에는 깊게 언급하지는 않지만, 절망의 상황에서 인간을 계속 살아가게 해 주는 것은 희망이고, 그래서 희망의 철학을 전파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에서 전개되는 내용을 읽다보면, 인생의 의미를 숙고하고 찾으려는 사람이 과연 정신질환자로 취급되어야 할 것인지, 구도자들은 모두 이런 대상에 속할 것인지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얌념으로 실전에서 사용해 볼 수 있는 역설적 관념법의 일반론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서론
사람이 산다는 것이 사실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인지? 의사가 의학의 영역에 철학을 도입하려고 시도한다는 비난을 받는데,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환자 자신이 철학적 문제를 가지고 의사를 찾아가고 있다.
의사는 자기 존재의 의미를 찾는 사람들이 경험하는 정신적 고통은 병리적 증후가 아니라고 속이면서 쉽게 안심시킬 수가 있다.
인간은 육체, 정신 및 영혼으로 이뤄진 세 개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 인간세계에서는 영혼의 차원을 무시할 수가 없다.
영적 고뇌는 정신적 질병과 전혀 다르다. 인간세계에서 영혼의 차원을 이해하는 사람이 아니면 그에 대한 올바른 진단을 내릴 수가 없다.
인간이 쾌락원리를 추구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가능한 많은 가치를 실현시키고, 자기의 삶에 대하여 가장 큰 의미를 주는 내적 욕망은 의미를 추구하는 의지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의미를 추구하는 의지야말로 무엇보다도 가장 인간적인 현상이다. 심리치료의 영역에서는 이 의미를 추구하는 의지를 곧 신경증적 갈등과 같이 다루어 인간의 약점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강제수용소에서의 경험으로 보건데, 산다는 것은 무엇을 기다린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한 가지 일에 대한 목적은 곧 인생의 목적이 된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이런 것에 대한 해결방법을 로고데라피, Logotherapy, 혹은 생존을 위한 심리치료법이라고 한다. 로고데라피는 기존의 심리치료법을 보완하여 인간상의 전체성을 그려 보겠다는 것이다.
삶의 의미에 실상을 안겨주는 것을 실존적 신경증리가고 하고 그와 상반되는 것을 임상적 신경증이라고 한다. 성적 용구의 좌절이 신경증의 원인이 되는 것처럼, 의미를 추구하는 의지의 좌절도 신경증의 원인이 되고, 이를 실존적 욕구좌절이라고 한다.
신경증 환자의 20%는 그 본질과 기원으로 보아 정신발생적 신경증으로 간주할 수가 있다.
심리치료에서는 사람이 가진 일할 수 있는 능력과 삶을 즐길 수 있는 능력에 관심이 있다. 그런데 의료봉사에서는 고통을 참고 견디는 능력에 관심이 있다.
사람들은 자기가 창조적 가치라고 부르는 것을 실현함으로써 자기의 삶에 대하여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또 경험적 가치를 실현함으로써 자기의 삶에 대하여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활동할 수도 없고 창조할 수도 없는 가장 고통스런 가운데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사람들까지도 삶의 가치를 실현하고 있다. 그러나 그에 의미가 부여되었다는 것은 경험하지 못한다. 그는 그에게 주어진 피할 수 없는 고통을 겪음으로써 그의 가치를 실현하고 있는데, 이것을 태도적 가치라고 부른다.
주저하지 않고 운명에 직면하는 것과 같은 고통은 인간에게 부여된 최고의 공적이다.
고통을 겪음으로써 의미를 성취하는 태도적 가치는 그 고통이 회피할 수도 없고 도피할 수도 없을 때에 실현된다.
사람이란 삶을 통해서 무엇을 얻을 것인가를 문제삼지 말고 삶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내가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문제삼지 말고 삶을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느냐고 자문을 해보아야 한다.
종교인은 자신이 존재하는 것은 단순한 과업으로써가 아니라 하나의 사명으로 여기고 있다.
심리치료법이 영혼을 보다 건전하게 치료하는 것이라면 종교는 영혼을 구제하는 것으로써 서로 다르다.
궁극에 가면 로고데라피는 책이맘에 대한 교육에 지나지 않는다.
집합적 신경증의 증후는 네 가지가 있다.
삶에 대한 뚜렷한 계획이 없이 그날그날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첫째 증후이다. 삶에 대한 숙명적 태도가 둘째 증후이다. 집합적 사고가 셋째 증후이다. 즉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어떤 대중 속으로 몰아넣으려는 경향이 있다. 광신이 넷째 증후이다. 집합주의자들은 자신 자신의 인격을 무시하는 데 반해 광신자들은 다른 사람을 전적으로 무시해 버린다.
이 네 가지 증후의 원인은 책임감에 대한 공포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 대한 공포에서 찾을 수가 있다.
양심의 갈등인 도덕적 갈등은 실존적 신경증의 원인이 된다. 사람이 양심의 갈등만 극복할 수만 있다면 광신과 집합적 신경증에 대한 면역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집합적 신경증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은 양심의 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에 괴로워할 수 있고 또 그것을 극복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실존적 신경증은 집합적 신경증을 치료할 것이다.
신체적 질병은 전쟁에서 오는 전형적인 결과이며 정신적 질병은 전쟁을 유발시킨 잠재적 원인이다.
사람의 실존은 인간의 영혼성, 자유성 및 책밍감의 세 가지 요인으로 특징지을 수가 있다.
자유에는 본능, 유전적 소질 및 환경의 세 가지 측면이 있다. 우리는 결심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그런 본능을 받아 들일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다. 유전적 소질은 일란성 쌍둥이라도, 하나는 범법자가 되고 하나는 범죄학자가 되는 것으로 보아 악도 아니요, 선도 아니다. 환경의 경우 환경이 사람을 창조하지는 못한다. 동일한 사태에 직면해도 어떤 사람은 타락하는데 어떤 사람은 숭고성을 유지한다.
사람은 단순한 유전과 환경의 산물이 아니다. 결심이라고 하는 제3의 요소가 있다. 사람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위해서 결심을 한다. 결국 결심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도록 가르키는 것이 교육이다.
사람의 영혼성과 자유성 다음에 오는 것이 책임성인데, 첫째 자기의 양심에 대한 책임이 있다. 오늘날의 정신분석자드은 진정한 도덕성이란 초자아의 개념에 바탕을 둘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람이란 자신이 믿고 있는 것보다 훨씬 비도덕적일 뿐만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도덕적이다(프로이드).
아우슈비쯔의 가스방은 사람이 유전과 환경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론을 체험하는 데 충분하였다.
제1 심리치료법에서 로고데라피로
정신분석과 개인심리학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는 심리치료법을 논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 위대한 심리치료법의 체계는 프로이트와 아들러가 독자적으로 창안하였다.
무의식의 세계에 묻혀 있는 사실들은 억압에서 벗어나 다시 되살아 나야 한다.
신경증 환자가 자신은 죄가 없다는 것을 주장하는 과정이 타협이다. 무의식의 세계로 추방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이 책임을 면하려고 하는 것이다.
의식으로써 자아를 제한하는 것이 정신분석의 신경증에 대한 견해라면, 책임감각으로써 자아를 제한하는 것이 개인심리학의 신경증에 대한 견해이다.
정신분석이나 개인심리학은 인간 존재의 일면만을 보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모든 것은 가상이며, 이상이며, 표상이라고 하는 유아론의 주장은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진리, 현실 및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에 대응하는 개념 또한 소실되기 때문이다.
개인심리학은 그 정신병리학적 측면을 보다 좁게 보는 과오를 범하고 있다. 그들은 정신적 투쟁의 순수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정신적 현상과 신경증적 표현 그 자체가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부정함으로써 정신적 실체는 의미가 많고 또 다양하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개인심리학과 달리 신경증적 증후는 목적에 대한 수단만이 아니고 여러 가지 정신적 투쟁의 직접적인 표현이다.
정신분석이 성취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편으로는 무의식의 요구와 또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성이 요구하는 것을 타협시키는 것이다. 개체는 자기의 개인적 추동을 외적 세계에 적응시켜 현실과 조화시키려고 시도한다.
인간의 외면적 생활형성과 내면적 충족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생활형성이 외연적 크기라고 한다면 생활충족은 벡타적인 크기이다. 즉 그것은 개개 인간의 인격에 부여된 가치가능성에 관계되는 것으로써 이 가능성을 실현한다는 것이 인생에 있어서는 중요하다.
내면적 충족은 놀랄만한 업적으로 수행하는데 최선을 다 함으로써 인생의 의의를 발견한다.
과학의 개척지에 있는 이론가는 이 세상의 한 복판에 있는 보다 활동적인 사람보다 더 훌륭한 영웅적 봉사를 하고 있다. 즉 그는 거기서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을 위임받고 있으며, 그 독자성에 있어서 다른 사람과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순수하게 연역에 의존하는 심리치료법은 학문적 영역에 있어서는 공백이라고 할 수 있다.
신경증 환자가 요구하는 것은 그가 철학적 고찰을 하는데 있어서 가지는 내재적 비판이다. 그의 논쟁에 대하여 성실한 반대론을 전개해야지, 사회학적 영역이나 생물학적 영역에서 근거를 찾는 이질적인 논쟁은 피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내재적 비평을 피해야 하고, 그런 문제가 생신 정신적 평면을 버려야 하고, 정신적 태도를 위한 싸움을 정신적 무기로써 극복해서는 안된다. 일종의 대등한 세계관에서 동일한 무기를 포함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환자의 생각이 옳다면 환자는 심리치료를 받을 필요가 없다. 환자의 생각이 옳지 못하다면 심리치료법으로는 그 교정이 불가능하다. 여러가지 영적 현상에 대해서는 종래의 심리치료법으로 접근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심리적 전체성에 대한 접근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영적 현실의 독립성을 추구하는 것도 용납되지 않는다.
세계관에 대한 정신병리학이나 세계관에 대한 심리치료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존재하는 것은 세계를 보는 자, 그의 마음 속에서 세계관이 형성되는 구체적 인간의 정신병리학내지는 심리치료법이다.
어떤 세계관을 가진 사람에 대하여 심리적으로 건전하다 혹은 건전하질 못하다고도 말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모든 정신적인 것은 자기법칙성을 결코 부정되어서는 안된다. 신의 개념은 자연력에 대한 원시인의 불안에서 생겼다는 사실에서 신적인 것이 존재하느냐에 대한 논쟁을 벌이는 것은 인식론적으로 허용될 수 없는 하나의 철학적인 도박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시야의 특수성, 모든 세계의 일면성은 사실은 본질과 가치 세계의 객관성과 상대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
건강하므로 진이며, 반대로 병이기 때문에 위(가짜)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로고데라피는 영적 용어를 쓰는 심리치료법이다.
심리주의는 결국 인식적 소여와 정신적 과제로부터의 도피이며 따라서 인간의 현실성과 가능성으로부터의 도피이다. 그것은 가면 이외의 아무 것도 찾아내지 못한다. 그리고 가면의 배후에는 신경증적 동기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모든 것이 그에게는 진실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예술은 결국 생활이나 사람으로부터의 도피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종교는 자연의 폭력에 대한 원시인의 공포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는다.
심리주의는 가치를 타락시키는 경향이 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인간상은 많은 제약성 때문에 인간의 무력함이 강조되고 몹시 왜곡되었다. 즉 생물학적인 것, 심리학적인 것, 하회학적인 것으로 속박되어 왔다.
인간이 그러한 것들의 제약에 동조하지 않을 때 비로소 그의 도덕적 판단가능성이 싹트게 된다.
제2. 정신분석에서 실존분석으로
|. 일반실존분석
심리치료법에서는 본능적인 것을 의식하게 하는 데 반해, 로고데라피에서는 영적인 것을 의식하게 하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1. 삶이란 무엇인가
영적 갈등으로 괴로워하는 환자는 흔히 부딪치게 되는데, 의사가 그것을 화제로 삼는 것이 아니라 환자가 의사로 하여금 그러한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게 만드는 것이다.
언어능력이나 개념적 사고 혹은 직립보행 보다도 그 존재의 의미를 문제삼는 계기야말로 인간과 동물의 본질적 차이의 기준으로 한층 중요하다.
인간존재는 무엇보다도 본질적으로 역사적 존재이다.
현재적 존재란 모든 미래지향성을 포기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인생에 대한 태도를 말한다(슈트라우쓰).
서구 사람들은 본래 그 자신이 창조적으로 실현해야 할 여러가지의 명령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본래 자기 자신의 활동에 도취하여 마비되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은 가치 실현의 수단을 위해 최종 목적인 가치를 망각하고 있다(쉘러-Scheler).
일요신경증 환자는 정신적 의미에 있어서 일종의 공허감을 메꾸기 위해 어떤 도취상태로 도피한다.
순전히 외인적 이유에서 그 심적 균형을 상실한 사람에게 로고데라피가 적합하다. 친근자를 잃고 불안해진 나머지 그래도 자신의 생활이 의미를 갖는가를 의심해 본다. 이 순간에 그 존재의 의미성에 위기가 오는 비참한 경우가 있다.
사육되는 동물은 사람이 그들을 사육하는 목적을 알지 못한다. 그렇게 사람이 삶의 최종 목적으로써 우주가 갖는 초의미가 무엇인가를 포착할 수 있을까?
자유의지 - 사육되는 동물도 그 동물적 본능 때문에 살고 있으나 사람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 본능을 이용하고 있다.
한 인간이 살아간 소설은 글로 쓴 로망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만큼 위대한 창작적 업적이다. 시간이나 혹은 삶의 과거는 그 의미와 가치를 조금치도 변화시킬 수가 없다.
윤리적 니힐리즘에 빠진 환자는 곧 모든 삶의 의미는 쾌락적인 것이라고 쉽게 단정해 버린다. 모든 인간의 행동은 결국에 가서는 행복에 향한 노력에 의해 지배되고 모든 심리적 행동은 순순한 쾌락원리에 의하여 규정된다는 사실에 논거를 두는 것이다.
그러나 쾌락원리는 심리학적 가공물이다. 쾌락원리를 받아들이려고 하는 것은 도덕적인 점에서는 인간의 가능한 목적설정의 평균화를 초래한다.
현실에 있어서 사람이 사는 데에는 쾌 불쾌는 직접적으로 그렇게 중요하질 않다.
만일 우리가 단순한 쾌락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면 삶은 결국 무의미하게 됮 않을 수가 없다. 쾌락이란 하나의 상태이다. 죽음에 직면해서는 어떠한 인간의 어떠한 쾌감도 다같이 무의미하다.
정상인들은 매일 평균적으로 쾌감보다는 비교할 수 없는 정도의 불쾌감을 경험하고 있다.
물리적인 엔트로피에 버금가는 것으로 심리적인 열반을 들 수 있다. 모든 불쾌감에서 해방하려는 모든 심리적 긴장의 해소는 대우주적인 엔트로피에 대한 소우주적인 등가물로써의 열반은 내면에서 내다 본 엔트로피이다.
즐거움 그 자체가 의미를 지니고 있을 때만 삶의 의미로 충만시킬 수 있다. 즐거움은 항상 어떤 대상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주관적 상태는 어떤 가치를 인정하기 위한 조건이며 주체의 어떤 태도가 가치파악에 필요한 매개임은 확실하다. 그러나 이는 절대적 가치의 객관성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고 그를 전제로 하고 있다.
창조적 활동 속에 실현되는 것을 창조적 가치라 부른다. 가치 이외의 다른 체험 속에 실현되는 것과 같은 체험적 가치도 존재한다. 체험적 가치는 세계를 수용함에 있어서 자연미와 예술로 귀의시킴으로써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다.
사람이 존재함에 있어서 일정한 순간의 현실적 의미가 활동에 의하지 아니하고 단순한 체험 속에 오는 것이 있다.
산맥의 높이는 계곡의 높이로써가 아니라 최고봉의 높이에 의해서 측정되는 것과 같이 인생에 있어서도 그 의미성에 관해서는 최고점이 결정적인 것으로 짧은 한 순간이 후에 가서 생각해 보면 전생애에 의미를 부여하는 수도 있다.
제 3의 가치 유형으로, 삶이 창조적으로 훌륭한 것도 아니며 체험이 풍부하지 않아도 근본적으로 다른 한 의미가 있다. 이를 태도적 가치라고 한다.
가치실현의 완성이 어떻게 제한된다고 해도 태도적 가치를 실현한다는 것은 가능하며 또 존속한다. 이렇게 해서 인간존재는 의식성 존재와 책임성 존재라는 출발 명제에서 도덕적 타당성에 의해서 확인되는 것이다.
시시각각으로 인생에 있어서는 가치추구의 기회가 달라진다. 어떤 가치를 실현할 것인지 그 상황에 맞는 것이 필요하다.
심한 죽음의 괴로움을 약물로써 완화시키려고 하는 것은 안락사와는 다른 것으로써, 안락사의 문제는 모든 삶에 대한 말살을 법률적으로 공인하려고 하는 시도이다.
정신병 환자의 경우, 의사는 그의 병든 의지 대신 죽음에 이르도록 해서는 안된다. 로고테라피스트의 입장에서는, 의사는 환자의 삶의 의지와 삶의 권리라는 의미에서 그에 봉사하면서 행동해야 한다. 그로부터 그의 의지와 권리를 박탈해서는 안된다.
자살자가 갖는 삶에 대한 권태는 하나의 감정이지만, 이는 논증되지 않는다. 윤리적으로 이와 같은 권태에 빠져도 되느냐가 문제가 된다.
사람의 자유는 이미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로 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에의 자유라는 것, 즉 책임을 질 자유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해야 한다.
자살을 선택한 사람은 인생의 규칙을 위배한 것이다. 어떠한 대가를 치뤄도 이겨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싸움에서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요구된다.
왜 사는가를 알고 있는 사람은 어떤 삶도 참고 견디어 나간다(니체).
자살하는 사람은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그러나 삶을 무서워 한다.
인생은 그것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그만큼 의미가 충만되고 있다고 하는 통찰이 생긴다.
인간의 실존이 본질적으로 구체적이며 주관적이라는 점을 밝힌 점은 현대실존철학의 커다란 공적이다.
미래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은 곧 장래의 행동에 대하여 영향을 주므로 미래를 예언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다.
인간의 도덕적인 자기 비난은 어떤 인격적 이상과 인격적 당위를 이미 예상하고 있다. 그 경우 이 인간은 어떤 가치를 인정하고 가치의 세계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평생을 두고 성취해야 할 일은 항상 존재하며 원칙적으로는 사람의 능력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신경증 환자에게 그의 사명을 색출하는 본능적 확실성은 결여되어 있다.
삶의 의미에 대하여 비판할 때 우리는 극단적인 입장을 취하게 된다.
(1) 죽음이란 무엇인가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은 사람으로써 할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질문이다. 인간생존의 유한성 자체가 동시에 삶의 의미를 말살시키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으로서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우리가 죽지 않는다면 우리는 과연 모든 행위를 무한으로 연기할 수가 있을까? 그것을 지금 행하든, 내일, 모래, 1년 후, 혹은 10년 후에 행하든 같은 것이다.
유한성, 즉 시간성은 본질적 특징만이 아니다. 의미에 있어서 결정적인 것이다. 인간 실존의 의미는 그 전도가능한 것 속에 기반을 두고 있다. 따라서 한 인간이 가지는 삶의 책임은 시간성과 단일성을 갖는 것이라고 이해할 때에만 실로 이해되는 것이다.
삶이란 사실상 소비될 수가 없는 실질이지만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서 실질을 망각하고 그 기능에 변화가 오며 종말에 가서는 각자의 행위나 체험이 고뇌 속으로 성숙되어 가는 것이다.
마일 삶이 의미를 지니고 있다면 그때 그것은 그 장단이나 자손의 유무와는 무관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혹은 만일 삶이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언제까지 계승되거나 혹은 무한하게 자손을 남긴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반짝이는 것은 연소하는 것을 감내하지 않으면 안된다(빌트간쓰-Wildgans). 연소한다는 것은 고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것이 끝까지 연소되어 없어질 때까지 참고 견디어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삶은 그 의미를 정신적, 윤리적, 그리고 미학적인 비생물학적인 여러 영역에서 처음으로 얻게 된다.
본능적 충족과 생물적인 자녀를 갖는다는 것은 결혼의 두 가지 측면에 지나지 않으며 결코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사랑이 갖는 영적 요인이 보다더 중요하다.
인간이 고도로 분화되면 될수록 그만큼 일반적 의미에 있어서나 이상적 의미에 있어서나 평균과는 멀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평균적 특징을 희생하는 대신 개성적 특징을 얻게 된다.
개인적 실존이 의미를 가지려면 공동체가 필요하고, 공동체가 스스로 의미를 지니려면 개인적 실존을 필요로 한다. 공동체는 본질적으로 대중과 구별하게 된다. 대중은 어떠한 개성을 다 망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인적 실존은 대중 속에서 그 의미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중 속으로 도피함으로써 인간은 가장 고유한 것 즉, 책임을 상실한다. 그러나 공동체가 그에게 짐을 지워주고 있으며 그는 그 속에서 살아가려는 사명 때문에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대중 속으로 도피하는 것은 결국 개인적 책임으로부터의 도피이다.
전체주의는 사람을 판단할 때 과오를 범한다. 책임있는 인격 대신 단순한 유형만을 본다. 인격적 책임 대신 인간 유형에 묶여 있는 것을 보려고 한다. 어떤 유형에 의해서 평가할 때 개인을 고려할 필요가 없다.
도덕적 영역에 있어서 전체주의의 입장에 따르면 사람을 평가하거나 비난하는 경우에는 집합적 죄의식을 갖게 된다.
실존분석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 실존의 단일성과 독자성에 대한 책임을 의식하게 한다. 인간의 실존은 그 유한성에 대한 책임성 존재이다.
운명에 대한 반역의 배리성은 분명하다. 어떤 사람의 경우 그가 자기 아버지로부터 태어난 것이 아니고 다른 아버지로부터 태어났다고 할 때 운명에 대한 배역의 역설적 본질은 분명해진다. 그의 경우 이미 자기자신이 아니고 운명을 쥐고 있는 사람은 전혀 다른 사람이며 따라서 그는 자기의 운명을 운운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가장 극단적인 자기의문시 즉, 자살을 결단하는 그 가능성 및 자기자신의 존재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인간의 자유는 인간의 모든 다른 존재와는 구별되는 것으로 동물의 존재양식과도 대조를 이룬다.
의지의 자유를 정말로 의심삼는 것은 결정론적인 철학적 이론에 빠진 사람이나 혹은 망상형 정신분열증 환자이다. 이들의 의지는 자유가 아니며 작위적으로 제한된다.
인간은 순간순간 많은 가능성 속에서 하나를 찾아내어 그것을 실현하여 과거로 돌려보내고 또 그것을 확보하는 것으로써 생활하고 있다.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나 지나가 버린 것은 남아 있는 것으로, 그것이 지나가 버린 것인데도 불구하고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지나가 버림으로써 남아있다.
현재가 저장하고 있는 가능성을 과거 속에 영원히 저장되는 현실에 이송되면 순간은 영원해지는 것이다.
운명적인 것은 세 가지 형태로 주어져 있다. 신체적 운명으로 소질이 하나. 외적 상황의 총체로써 그 상태가 둘, 소질과 상태는 공동으로 인간의 위치를 형성한다. 인간은 그 위치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는 것이다.소질은 인간의 생물학적 운명을 형성하고, 상태는 그 사회학적 운명을 형성한다. 마지막으로 심리학적 운명이 있다.
영혼의 위력과 자연의 위력을 무한히 대립시키는 것은 의미가 없다. 우리는 이미 양자가 모두 인간에게 예속되어 있다는 것과, 양자가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예술적이라고 하는 것은 어려운 생물학적 소재가 자유로운 의지에 의하여 형성된 것을 의미한다.
정신분석은 심리적 사실의 결정적 측면을 강조하는데, 심리적인 사실을 어떻게도 할 수 없는 메카니즘의 산물로 보고 있다. 편견없는 관찰에 의하면, 본능은 동의를 하는 것으로, 자아가 그 동기를 결정한다고 하는 것이 현상학적 사실임이 분명하다.
정신분석을 성적 본능을 윤리적 의지로 변화시키려고 하는 지적 연금술(쉘러 - Scheler)
연금술의 본질은 배가 바람에 의해서 그냥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항해의 기술은 오히려 바람의 힘을 자기가 뜻하는 방향으로 움직여서 어떤 경우에는 바람과는 거꾸로 배를 달리게 하는 것이 가능할 때 처음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인간의 의지박약의 배후에 숨어 있는 그 자신의 자유를 은폐하려고 하기 쉽다. 여자정신분열증 환자에게 당신이 의지박약이냐고 물었더니, “ 내가 되고 싶으면 나는 의지박약이고, 내가 바라지 않으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였다.
로고데라피는 의사가 환자의 괴로운 고뇌는 우울증의 주요원인이 되며, 투쟁을 걸어오는 것임을 환자로 하여금 알게할 필요가 있다.
같은 정신병 환자라도 정신적 태도에 따라 다르게 행동한다는 점은 정신과 의사가 잘 알고 있다.
(2) 강제수용소내에서의 심리적 변화
수용소에 수감될 때 수용쇼크라는 현상이 있다. 새로 수용되는 죄수는 안경을 제외하고는 이전에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빼앗긴다. 제2의 단계에서는 죄수 자신에 의해 조정되는 것으로서 무감동은 자기방어의 기제이다. 이런 독특한 환경에 대한 일종의 심리적 적응현상이 문제된다. 그 환경에서 일어나는 일이 약화되어 의식되고 감정생활은 퇴화된다.
그 뒤 점점 모든 높은 수준의 흥미는 감퇴해 버리고, 예외적으로 정치적 관심과 종교적 관심이 높아지는 것은 당연하고도 주목할 만하다. 그것을 빼놓고는 죄수는 동면상태에 들어간다.
수용소의 생활이 원시적으로 변하면서 음식부족이 모든 생각이나 원망의 주된 내용이 되고, 성에 대한 관심은 현저하게 상실된다. 강제수용소에서는 성충동이 꿈에서도 나타나지 않는다.
수용소 생활에서는 본능이 보다 원시적 구조로 퇴화하고 있다. 많은 죄수들로부터 무감동뿐만 아니라 불안정성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사실을 발견했다.
파수꾼이 되는 몇몇은 점차적으로 황제망상을 갖게 된다.
개인의 자유가 극히 제한된 사회환경이지만, 그의 실존은 어떤 형태로 형성되든, 최후의 자유가 존재하고 있다.
강제수용소내에서 생기는 성격변화는 생리적 상태변화(기아, 수면부족 등)의 결과이며, 또 심리학적 소재(열등감)의 표현인 동시에 본질적으로는 영적 태도에 의해서 결정된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환경의 영향에 따라 혹은 그와 상관없이 태도를 결정할 수 있는 자유와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수용소에서는 인간실존에 있어서 수용소의 생활이 문제될 뿐만 아니라 기한없는 예비적 생활이 문제가 된다. 그는 철조망 외부의 세계에 대하여 점차적으로 소외감을 갖게 된다. 그는 철조망을 통해서 외부의 사람이나 사물은 이 세상과는 먼 것같이 보여 마치 죽은 자가 먼 세계에서 내다보는 것같이 비현실적이며 감지할 수 ㅇ벗는 것같이 느낀다.
영적 의지처가 없을 때 정신적 붕괴는 완전히 무감동에 빠지는 수가 있다. 죄수는 어느 날 갑자기 바라크 속 그의 자리에 누워버린다. 점호에도 나가지 않고 노동도 식사도 세면도 하지 않는다. 아무리 충고해도, 아무리 위협해도 그는 무감동 상태에서 해방되지 않고, 어떠한 벌을 주어도 그는 움직일 수가 없게 된다.
삶에 대한 용기, 혹은 삶에 대한 싫증, 환멸이나 밝은 희망은 저항력과 깊은 관계가 있다.
자살하기로 결심한 두 죄수가 말한 것 가운데, “이제 인생에서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게 되었구나"하는 감정에 지배되고 있다는 공통점들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석방한 뒤에, 그는 먼저 기뻐하는 것을 다시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그것을 다 잊었다. 자유가 된 첫날은 현실이 아름다운 꿈과 같이 생각되지만 곧 과거가 악몽처럼 생각될 뿐이다.
2. 고뇌란 무엇인가
창조적 가치는 행동에 의해서 실현되고 체험적 가치세계(자연, 예술)의 수동적 수용에 의해서 자아 속에서 실현된다. 이와 달리 태도적 가치는 어떤 변화되지 않는 것, 어떤 운명적인 것이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안 될 경우에 이르렀을 때 실현된다.
이것이 곧 가치는 창조나 인생의 즐거움 속에서 뿐만아니라 고뇌함으로써 실현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희생이라고 하는 도덕적 문제에 직면할 때 공리적 윤리학을 저지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은 분명하다. 희생이 타산적으로 되면 윤리적 의미를 잃게 된다.
성과가 없었다는 것이 의미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사람드은 그가 체험한 쾌 불쾌의 특성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사람은 활동을 통해서 창조적 가치를, 체험을 통해서 체험적 가치를, 또 고뇌를 통해서 태도적 가치를 실현하고 있다.
고뇌는 인간에게 그래야만 된다는 것을 직감케 하여 무섭고 혁명적인 긴장을 불러 일으킨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슬퍼한다는 것은 그를 어떤 형태로든지 생존시키는 것과 같다.
비애는 그것을 현재화시키는 기능을 갖는다. 그에 대한 회한은 쉘러가 말한 바와 같이 어떤 죄를 씻어 버린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고난과 퇴굴 사이를 시계의 추와 같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다(쇼펜하우어)
고뇌는 인간을 무감동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심리적 응고로부터 보호해 주고 있다. 우리는 고뇌하는 한 심리적으로는 생생하게 살아 있다.
태도적 가치의 본질은 인간이 변화시킬 수 없는 것에 대처하고 있는 그 속에서 찾을 수 있다. 따라서 태도적 가치의 참된 실현의 전제는 실제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이 문제일 때 생긴다.
행동이나 인내에 의하여 고귀화시킬 수 없는 어떠한 상황도 존재하지 않는다(괴테).
인생은 어떤 것이 아니라 어떤 것에 대한 기회에 지나지 않는다(헵벨-Hebbel).
질병은 인간에게 고뇌의 기회를 부여한다.
한편 모든 질환과는 거리가 먼 인간의 고뇌가 존재한다.
3. 노동이란 무엇인가
구체적 직업이 충족감을 주지 않는 경우 죄는 인간에게 있는 것이지 직업에 있는 것이 아니다.
구체적인 직업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 실존의 독자성을 형성하는 인격적인 것이 직업활동 속에서 삶을 의미있게 해 주느냐가 문제이다.
하는 일 그 자체에서가 아니라 그가 종사하는 태도에서 개인의 불가피성, 불변성, 단일성과 독자성을 찾아 낼 수가 있다.
실업신경증은 그 주증후로 나타나는 것이 우울이 아니라 무감동과 무관심이다.
실업은 신경증의 온상이 된다.
실업신경증은 신체적 증후형성의 수반현상도 되며 많은 경우 동시에 존재하는 영양부족의 결과이다. 무감동은 목적에 대한 수단이 된다. 즉 이미 존재하고 있던 신경증이 실업에 의해 악화되거나 재발된 것이다.
실업은 신경증의 소재가 되고 신경증의 내용이 되어 신경증적으로 진행된 것이다.
훌륭한 실업자라면, 남아 돌아가는 시간을 의미있게 형성하여 그들의 의식, 시간, 생명을 내용이 충만한 것으로 만든다. 그들은 인간 생활의 의미가 직업활동으로 끝이 나지 않는다는 것, 따라서 실업을 해도 생활의 의의가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람이 적절한 직업을 갖게 되면 심리적 활동 구조에 영향을 준다. 더 나아가 생물의 활동 구조와 조직에 까지 영향을 준다.
사람이 임무를 준 서어커스단에서 훈련받은 동물은 동물원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는 동물에 비하여 보통 수명이 길다.
만일 사랑이 결핍되어 있다면 노동은 대용물이 되고, 만일 노동이 결핍되어 있다면 사람은 아편이 될 것이다(알리스 리켄스-Alice Lyttkens).
직업생활과 창조적 생활이 같지 않다. 실존본래의 무내용성이나 의미의 빈약성은 그의 직업생활이 잠시나마 정지될 때, 일요일에 곧 나타나게 된다.
자기 일에 전적으로 얽매인 채 아무 것도 못하는 사람에게는 주말에는 부산한 활동이 필요하다.
인생의 목표가 없는 사람은 인생행로를 급속도로 달리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 목적이 없다는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다. 미친 듯이 뛰는 부산한 생활이 멈추고 나면 무목적성, 무의미성, 실존의 허무감이 다시 나타난다.
그는 일요일에 이러한 체험을 회피하기 위해서, 환락가로 도피, 댄스에 주의를 집중, 운동으로 도피 기타 등등. 그러나 마음 속의 공허감을 감출 수가 없다.
등산한다는 것은 적극적 참여를 의미한다. 신체적 힘이 닿는 한 어느 지점에 도달하려는 순순한 업적이 있다. 등산가가 위험 그 자체를 찾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스포츠뿐만이 아니라 예술도 신경증적으로 남용된다.
참된 예술이나 예술체험은 인간을 풍요하게 하고 그를 가장 고유한 가능성에로 인도한다. 이와는 달리 신경증적으로 오용된 예술은 인간을 그 자신으로부터 유리시켜 버린다. 이렇게 되면 예술은 자기를 마취시키는 가능성과 기회에 지나지 않게 된다.
스릴에 굶주리고 있는 사람에게 가장 큰 센세이션을 의미하는 것은 죽음이다. 그는 자극이 점점 강하지 않으면 만족할 수 없다. 결과적으로 그에게 중요한 것은 죽음뿐이라고 생각한다.
삶의 끝장으로서의 죽음은 그 시간에 충실하지 못했던 사람에게는 타격이 가고 그는 그에 직면할 수가 없게 된다.
소설세계에로의 신경증적 도피, 신경증 환자는 거기에서 그의 허구적 히로인과 동일시한다.
자신을 마비시킴으로써만 우리는 인생이 우리들의 양심 속에 느끼게 하는 영원의 자극에 대하여 스스로 무감각하게 되는 것이다.
4.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을 에로스의 의미로 파악한다면 그것은 체험적 가치가 특별한 양식으로 실현되는 영역이다. 즉 사랑은 다른 사람을 그의 독자성과 단일성에 의해 체험한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받은 인간은 본질적으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포착되어 그가 파악된 다른 자아의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랑에 대한 풍부한 가치성에 대하여 인간적인 공감성을 높여 주는 것이며 모든 가치에 대한 눈을 뜨게 해 준다.
사랑은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력을 강화시켜 가치를 냉철하게 볼 수 있게 한다.
인간은 사랑하는 자로서 신체적-심리적-영적 전체에 대해서 여러가지 태도를 취하게 된다. 가장 원시적인 태도는 신체적 층으로서 그것은 성적 태도이다. 상대방에 대한 보다 높은 태도는 에로틱한 태도이다. 에로틱한 태도를 취하는 사람은 단순히 성적 태도를 취하는 사람보다 더 깊은 심리적 구조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사랑은 그것이 상대방의 인격구조 속에 가장 깊이 파고 들어가 영적인 것에 이르게 되면 최고의 유형이 된다.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신체적 성적 관계는 그 영적 관계의 표현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보고 정신적 관계가 본래 그의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표현수단으로서의 성적 관계는 영적 행위로서의 사랑에서 처음으로 그 인간적 존경을 받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성적 행위는 영적 지향의 표현이다.
잠옷도 그 자체는 남자들에게 영향을 주지 못한다. 남자는 사랑하는 여자가 그 옷을 입고 있을 때 비로소 그것을 아름답게 생각한다.
만일 삶의 의미가 사랑의 행복을 체험했는지 못했는지에 있다면 우리의 존재는 비참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이 아니고 삶은 무한히 풍부한 가치를 실현하는 기회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우리가 창조적 가치 실현의 우위성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태도적 가치 때문에 창조적 가치실현을 포기하면 안되듯이, 사랑의 체험적 가치도 너무 빨리 체험하면 그에 따른 위험은 크다.
여자는 자기와 함께 있는 남자들에게 괴로움을 주지 않기 위해 자기의 개인적인 본질을 숨기려고 하고 그가 찾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녀는 하나의 성을 값진 사랑으로 받아들여지기를 희망하고 있기 때문에 먼저 자신의 신체를 그냥 내 맡긴다. 그녀는 개성을 상실해 버리고, 어떤 형태의 유형이라도 에로틱한 허영에 휩쓸리게 되어 버린다.
체험적 시간에 나타나는 것은 오히려 영원성에 대한 체험이다. 사랑은 영원히 존속될 때에만 체험되는 것이다. 우리가 참된 사랑을 체험하는 순간에 그것은 영원히 타당한 것으로서 체험하는 것이다.
불행한 짝사랑이란 논리적으로는 모순되는 것같지만 심리적으로는 일종의 애수의 표현이다.
질투하는 사람은 그가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마치 자기의 소유물과 같이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질투하는 사랑은 그가 두려워하고 있는 사랑의 소멸을 가져온다.
남녀 부실에 대한 평가가 다르다는 것은 사회학적 근거가 있다. 처에 대해 부실한 남성은 그의 아내만이 성실하다면 누가 아기의 아버지인지는 알 수가 있다.
에로틱한 유물론적 사상은 상대방을 소유물로 보지 아니하고 애로티즘 자체를 상품으로 본다.
매춘부는 정신병리학에서 별로 가치가 없는 성격유형을 가지고 있는 정도로서 문제는 별고 크질 않다. 매춘부의 사례를 심리학적으로 분석해 보면 거의 모든 경우 패덕성이 정신병질적 인격특성으로서 나타나고 있다. 고객의 심리성향이 문제다.
말더듬이에게는 발성하여 사고하기 위해 입이 자연스럽게 움직인다고 생각하게 해주는 것으로써 치료는 충분하다.
성적으로 예민하여 실패에 대한 기대불안은 스스로 성적 실패를 가져온다. 성신경증 환자는 이미 상대방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행위 그 자체를 지향하고 있다.
모범적 인간의 특징은 그가 쉽게 당혹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청년기의 성적 특성은 신체적 사상에 대한 정신적 반사로서 내분비적 변화에 심리적 결과 혹은 내분비적 긴장의 심리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처음 성적 충동이 이성의 배우자와 접촉함으로써 긴장상태의 해방이라고 하는 목적을 갖게 된다.
성숙된 인간은 그가 사랑할 때에만 비로소 성적으로 갈망하게 된다.
정상적인 성숙과정에서 여자는 남자보다 쉽게 이상적 목적에 도달할 수 있다. 여자는 심리적 영적 욕구가 신체의 표현욕구와 결합될 때 비로소 성적욕구가 생기는 것이다.
성에 대한 계몽은 결코 집단적으로 행해져서는 안된다. 그에 대한 개인적 교육이 유일한 이상적 방법이다.
〢 특수실존분석
1. 불안신경증의 심리
신경증적 불안의 배후에는 공포증후에서 특수한 형태로서 나타나는 실존적 불안이 존재한다.
인간이 삶에 대해서 죄의식을 느끼고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에 죽음은 마음에서 떠나서 신체의 특수한 기관에 대한 두려움으로 나타난다.
근원적 불안 그 자체가 구체적 내용을 찾게 되는데 어떤 것은 죽음 혹은 생명과 같은 것을 찾는데 이것이 곧 한계상황이며, 상징적 표현이다.
광장공포증은 가두, 무대공포증은 무대가 상징적 기능을 갖는다.
미녀로 사교계를 풍미하던 여자는 미모에 대한 자신을 상실하게 되자, 삶의 목적도 삶의 내용도 없는 자기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때 그녀에게는 삶의 내용을 찾기 위해서는 미적 효과나 사회적 세력을 멀리하여 삶의 의미를 도덕적으로 타당한 세계 속에서 찾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불안 즉 신경증적 심장반응은 영적 불안의 표현이다.
2. 강박신경증의 심리
증후적 치료와 로고데라피에 의해서 증후가 완화되는 것은 엄격하게 구별해야 한다. 로고데라피의 기법을 쓰는 치료자는 증후 하나하나를 치료하지도 않고 그러한 질병을 다루지도 않는다. 오히려 자기의 신경증에 대한 신경증적 태도를 변화시키는데 주력한다.
강박신경증과 정신병 사이에는 어떤 길항관계가 있으며 그렇게 됨으로써 강박신경증 환자는 그 강박적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정신병에 대한 면역이 된다.
환자가 정신병에 대한 공포를 갖지 않게 되면 그것만으로도 심리적 압박으로부터 해방된 것은 분명하다.
우리가 운명이라고 받아들이게 교육시키면 시킬수록 도움을 줄 수 없는 증후의 잔재는 소실되어 버린다.
강박신경증 환자는 비합리적인 잔재에서 도피할 수가 없고 그것을 초월하여 사고를 계속할 수가 없다. 강박신경증 환자가 갖는 명증감정에 대한 기능부전에는 비합리적인 것에 대한 관용성이 결여되어 있다.
강박신경증 환자는 존재와 당위 사이의 긴장을 감당하지 못하는 특징이 있다.
절대에 대한 요구를 충족시킨다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강박신경증 환자는 그것을 생활의 특수한 영역에 집중시키지 않을 수가 없다. 100%의 완전성은 실현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충족될 수가 있는 일정한 영역, 즉 손을 깨끗하게 하는 행동으로 한정시켜 압축하는 것이다.
안전에 대한 추구 - 정상인이 추구하는 것은 곧 안전에 대한 투쟁 그 자체이다. 그러나 신경증 환자는 안전의 내용 그 자체와는 거리가 멀다. 그는 결과적으로 절대적 안전을 갈망한다. 그러나 절대적 안전이라는 것은 달성하기가 불가능한 것이므로 불안신경증은 단순한 느끼는 것으로 만족하도록 강요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그는 대상과 객관적 실체를 떠나서 주관의 세계로 도피할 것을 탐색한다. 어떤 재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신경증은 그의 안전감에 대해서 가식적으로 좋아하는 척한다. 현실세계로부터 도피함으로써 죄의식이 생긴다. 이는 곧 보상을 요구하는데, 안전에 대한 주관적 투쟁이 비인간적으로 확대된 데에서만 발견할 수가 있다.
정상인은 보통 상대적 안전을 추구하는데 신경증은 절대적 안전을 추구한다. 정상인은 주위의 세계를 대략만 알고 넘기려고 하는데 강박신경증은 명증감을 추구하기 때문에 그로 인해서 무한한 운동템포로 끌려가고 있는 것같이 느낀다.
강박신경증은 현실을 경멸하지만 강박신경증으로 고생하지 않은 보통 사람은 그것을 실존적 자유의 도약대로 삼고 있다.
행동하는 사람은 양심이 없고, 관조하는 사람만이 양심을 갖는다(괴테).
3. 우울증의 심리
정신병 환자의 현재 행동은 영적 태도의 표현이다. 이 태도는 자유로운 태도이며, 따라서 수정이 가능하다. 이런 의미에서도 정신병은 인간에 대한 시련의 시도이며 정신병 환자의 인간성에 대한 시도이다.
우울성 불안은 주로 죽음에 대한 불안이며 또 양심에 대한 불안이다. 우울증의 불안감정과 죄에 대한 체험은 인간존재의 양식으로서 파악할 때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인적 요소가 곧 질병을 전파시키고 우울증을 경험하게 하는데 이것은 인간존재양식에 지나지 않는다. 우울증의 저변에 깔려 있는 질병은 정신근육운동 혹은 분비선의 억제와 같은 증후를 유발시킨다.
인간 특유의 우울증에 수반되는 특유한 죄의 감정이나 자기비난, 자책감정 같은 것은 동물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다.
동물도 불안을 느낀다. 그러나 양심의 불안 혹은 열등의식 감정을 느끼는 것은 사람뿐이다.
우울증의 경우 정신신체적 기능부전감은 인간에게만 독자적인 형태로서 체험된다. 즉 자기존재와 자기당위 사이의 긴장으로서 체험된다.
우울증 환자는 그의 인격과 이상 간의 거리를 초자연적인 것으로 체험한다.
어떤 사람이 우울증 환자가 되면 양심의 불안이나 죄에 대한 감정은, 무엇을 소유할 것인가에 집중된다. 이러한 병질적 조건은 공포를 일으킨다.
환자의 고백 - 현재는 없어져 버렸다. 나는 과거의 생활 속에 살고 있다. 미래에 대한 감정상실과 함께 삶은 끝이 나고, 시간은 이미 탕진되었다.
정신분열증 환자의 실존적 체험은 ‘예기했던 주검'이고, 우울증은 ‘영속되는 심판일'에 대한 체험이다(크론펠드-Kronfeld).
우울증환자는 당위에대한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체험에 대하여 조증 환자는 능력이 당위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해서 조증 환자의 권력감정은 우울증 환자의 죄악감에 대응한다. 조증환자는 마치 미래 속에서 살고 있는 것같다.
우울증 환자는 자기 자신을 가치가 없는 것으로 보며 또 자신의 삶을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때때로 자살하기도 한다.
우울증의 증후는, 영원한 벌은 받는 관념, 비존재의 관념, 그리고 죽음이 불가능한다는 관념이다(코다트-Cotard).
죽지 않는다는 망상은 에헤주리어스 우울증 - Ahasuerus라고 한다. 그는 이 기능부전체험으로부터 이미 그에 대응할 능력이 없다고 느끼고 있는 생활과제나 사명은 무한하게 살아도 충족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생각할 때, 나는 영원히 생존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왜 그런가 하면 나의 죄를 보상하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나에게 연옥과 같이 생각된다고 한다.
4. 정신분열증의 심리
자신의 거동이 촬영되고 있다는 촬영망상은 야스퍼스의 말로는 참된 지식의 환각이다. 그룰레 Gruhle는 이것을 일차적 망상양감정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공통적으로, 인간은 자기 자신을 대상내지 객체로서 체험하고 있다. 즉 극히 다양한 다른 사람의 지향적 행위의 대상으로 체험되는 것이다.
환자는 자기 자신을 마치 주체가 객체에로 변화되어 가는 것과 같이 체험한다. 모든 행위나 지향, 이들의 정신적 기능이 마치 수동형으로 바꿔진 것같이 체험한다. 그는 주목당하고 있으며, 남이 생각하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정신분열증 환자는 정신적 기능의 체험적 수동화 현상이 생기는 것으로 공통되는 심리적 사실이다.
환자들이 무리하게 타동사를 쓰는 것을 보면 그들이 경험하는 수동화현상을 이해할 수 있다. 자신이 잠을 깨는 감정은 없고, 남이 나로 하여금 잠에서 깨게 한다.
동사를 무리하게 명사적 구성으로 많이 쓴다.
자폐적 정신분열증 환자의 특이한 언어는 자신의 환상에서 오는 것으로 외부의 세계에 대해서는 전혀 반응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벨베는 분열증을 과정성 증후와 결함성 증후로 구분하고 있다.
꿈 속에서 사고하는 것은 잠이 들 때 사고하는 것과 다르다. 꿈 속에서는 상징적 언어가 지배하는 한 사고가 존재한다. 잠들 때에 의식 수준은 의식성보다 낮은 단계로 이동하는 것이고, 꿈을 꾸기 시작하면 그것은 더 낮은 의식수준에 이른다.
정상인의 경우에 내적 언어가 사고에 있어서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청각적 요소가 분열증 환자에 있어서는 수동적으로 체험된다. 자기 자신의 것이나 내적인 것이 마치 남의 것, 외부에서 작용하는 것으로서 체험되어 마치 그것이 지각인 것같이 체험된다.
지식은 항상 어떤 것에 대하여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또 이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하는 자신에 대한 지식이며 다시 그것이 자기에서부터 나왔다고 하는 지식이다.
지식 혹은 사고라고 하는 정신적 행위는 2차적 반사행위로서 그것은 1차적 행위와 또 그 가운데에 1차적 행위의 출발점으로서 자아를 대상으로 한다. 따라서 주체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지나친 자기관찰은 이인증 체헝과도 같다. 과도한 긴장에 의한 정신적 기능과 자아와의 연관이 장애를 받고 있다고 하는 체험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다. 지나친 자기관찰이라고하는 반사행위는 1차적 행위와 능동적 자아와의 체험적 연관을 상실한다.
정신분열증과 분열성 정신병질성격에서 나타나는 강박신경증 증후가 정신병질성격의 지나친 자기관찰에서 오는 의식의 긴장저하가 자아장애를 수반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강박증 환자는 적응기능의 부전과 지속적이며 과도한 의식성 때문에 번민하고 있으며, 정신분열증 환자는 심적 능동성의 기능부전에 의한 의식의 긴장저하로 번민하고 있다.
따라서 정신분열증은 전인간적 존재 그 자체가 정신병적 프로세스에 의해서 이상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우울증 환자의 이상체험은 인간적인 것으로부터 질환과정의 형성으로 해석될 때에만, 이해 가능하고, 정신분열증은 이 인간존재자체가 이환되고 있는 것으로서, 그 자신이 질환과정에 의해서 형성되고 있다.
제3 심리치료법으로서의 로고데라피
심리치료법에서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나 왓슨 Watson의 행동주의 심리학을 부흥시키는 새로운 운동의 하나로서 실존주의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여러가지 중에서 로고데라피만이 치료기술을 계승받은 유일한 실존정신의학이라고 한다.
1. 역설적 관념법
기대불안의 개념 - 적면공포증 환자 - 이들은 불안발작에 의해서 신체가 쇠퇴하지나 않을까 - 쇄퇴공포증, 심장이 경색되지나 않을까 - 경색공포, 대뇌마비의 결과가 아닌가 - 피해공포
정신병적 공포증, 죄업공포증
자기 자신의 강박관념을 실현할까 하는 두려움에 싸인 강박관념을 가진 환자도 역시 자기의 강박관념에 대하여 투쟁한다. 이 경우 자살공포증 혹은 살인공포증이라 한다.
기대불안은 환자가 두려워했던 사실을 틀림없이 극복할 수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으나, 로고데라피에서 과다의도라고 부르는 지나친 욕심은 환자가 하고 싶은 것을 해내지 못하는 경우로 본다.
공포증에 미리 선수를 치는 것이 역설적 관념법이다.
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불안이 야기되는 상황에서 회피하려고 하지만 강박신경증 환자는 억압하려고 한다.
자기 자신을 보고 웃을 수 있는 환자는 자기를 통재할 수 있고 아마도 치료할 수 있다(골든 올포트 Allport, Gordon).
역설적 관념법은 그 자체가 급성환자에게 단기치료로 적합하다(겔즈Gerz).
레더먼 박사가 시사한 최면술, 베지 교수가 시사한 슐즈의 긴장이완훈련, 빌하우프가 시사한 울피의 행동치료, 크라토크빌 박사가 소개한 보자노브스키와 클로우프코바의 활성화훈련 등이 로고데라피와 병행시키는 것은 타당하다.
역설적 관념법은 기대불안의 기제가 작용하고 있는 공포증에 대한 단기치료에 특히 효과가 있다.
역설적 관념법의 태도를 취함으로써 자아는 징벌적 초자아를 속이게 된다.
신경증 환자는 자기 자신의 무기로써 투쟁을 하는 것이다.
로고데라피는 지적 저항심을 바탕으로 하는 것으로 이는 특히 인간이 자기 자신을 자기의 세계뿐만을 아니라 자기 자신과 격리시키는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역설적 관념법은 이 기본적인 인간의 잠재능력을 발동시켜서 신경증과 투쟁하게 한다.
2. 사고중단법
카메레온에 대해서 10분간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 10분 동안 카멜레온만 생각하게 된다.
사고중단법으로는 환자로 하여금 긍정적 측면에 대하여 각성할 수 있게 할 수 있을 뿐이다.
3. 정신병 환자에 대한 로고데라피
로고데라피는 근본적으로 건전한 인격측면을 대상으로 한다. 병든 측면은 약물치료와 전기충격치료의 대상이다.
4. 내인성 우울증
정신병적 우울증에는 역설적 관념법이 적용될 수가 없다.
5. 정신분열증
사고중단법이 유일한 방법이다.
6. 결어
이러한 방법은 훈련이 필요하다.
2012년 4월 14일 토요일
정신과 자연 - 그레고리 베이트슨
정신과 자연
보론 : 이중구속이론을 중심으로 한 7편의 논문들 - 그레고리 베이트슨
Mind and Nature - A Necessary Unity
Steps to an Ecology of Mind 중에서 7개 장 번역
Social Planning and the Concept of Deutero-Learning
A Theory of Play and Fantasy
Toward a Theory of Schizophrenia
Minimal Requirement for a Theory of Schizophrenia
Double Bind
우리들은 음악이라는 예외를 제외하고는 패턴이라는 것을 고정적으로 받아들이도록 훈련받았다.
영원의 눈으로 바라보면 만물을 무한의 공간과 무한의 시간 속에 놓고 파악하게 되며 모든 사건을 전부 스터캐스틱한 연속 속에 놓게 될 것이다.
생물체의 구조와 기능부터가 결코 자신의 내적 일관성을 무너뜨리지 않는 하나의 가설설정 시스템이라고 볼 수 있으며, 생물을 둘러싼 환경도 내적일관성을 갖춘 가설설정 시스템이다.
논리라는 것이 현상계의 활동을 파악하는 데는 너무나도 빈약하다.
서평
그레고리 베이트슨이 제시하는 패턴이라는 개념은 단순히 시스템이라는 차원을 넘어서 세상을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새로운 사고의 유형이다. 인간이나 각종 생물이 인지하는 방법이 원래 패턴인데, 서구 철학이나 방법론이 고정된 단어적인 지식의 습득을 강요하여 인간의 지능 또한 그렇게 발달해 온 것이라는 것이다. 이 책에서 제시하는 각종의 주제를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저자가 사유해 온 고민의 흔적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책이다.
근래에 보기 드문 지혜와 통달이 엿보이는 책이고, 누구나가 이 책의 사유 방법을 받아 들여서 자기화하기를 바란다. 단순히 이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사물의 이치를 깨닫는 또다른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기에 현실생활을 하는 개개인에게 생활 자체에 적용가능한 자기만의 방법을 가르쳐 줄 것이므로, 지대한 가치를 지닌 책이라 보인다.
제1장 서론
현재의 제도교육은 해안이나 미국삼나무숲과 사막 또는 초원 등과 같은 자연에 대해 거의 아무 것도 가르쳐주지 않고 있다.
정신은 사고하는 인간의 외부에 있는 자연계의 커다란 부분 또는 수많은 부분들의 반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나치게 단순한 사상이 세련된 사상을 구축하고 조악하고 적의에 찬 것이 아름다운 것을 구축해 버린다. 그러나 아름다운 것은 여전히 존재한다.
생명이 있는 세계와 당구공이나 은하계와 같은 생명이 없는 세계가 어떠한 근본적인 개념에 의해 구분되고 있는가, 이 2개의 세계를 융은 생명이 있는 크레아투라 creatura와 생명이 없는 플레로마 pleroma라고 부른다. 힘과 충격이라는 개념으로 충분히 설명이 가능한 플레로마의 물리적 세계와 차이와 특징없이는 무엇하나 이해할 수 없는 크레아투라의 세계의 차이는 무엇인가?
학습하는 사항을 연결시키는 패턴을 파괴하는 것은 곧 모든 질을 파괴해 버리는 것이 된다. 게와 새우를 연결시키는 패턴은 무엇일까? 살아있는 모든 것을 연결시키는 패턴은 무엇일까?
미적이란 연결시키는 패턴에 대해 예민하게 감응한다는 의미이다.
게의 집게발이 크다는 것이 생명의 증거일까? 좌우 집게발의 크기가 다르지만 어느 쪽이나 같은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은 크기와 같은 것이 1차적이고 근본적이며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는 보잘 것없는 사고를 정중하게 쓰레기통에 버리고, 연결시키는 패턴에 눈을 돌리는 것이다.
게의 구조는 반복이 많으며 리드미컬하게 이루어져 있다. 실제로 머리에서 몸통 끝 쪽을 향해 훑어 내려가면 그 구조와 시간의 흐름이 대응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의 다리뼈와 말의 다리뼈가 형태적으로 닮았다고 하는 클래스를 생물학에서는 계통발생적인 상동homology이라고 한다. 게의 부속기관과 새우의 부속기관의 형태적인 유사도 이러한 예에 속한다.
연속적 상동 serial homology는 몸통의 위에서 아래로 향해, 각 부속기관마다 나타나는 변화를 수반한 리드미칼한 반복을 말하는데, 좌우대칭도 이러한 클래스에 속한다.
게의 각 부분은 좌우대칭, 연속적 상동 등 다향한 패턴에 의해 서로 연결되어 있다.
사람이나 말에게 눈을 돌려보면 각각에 좌우대칭과 연속적 상동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에서도 형태와 패턴과 관계가 크기보다 본질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서로 연결시키는 것이 패턴이다.
수면의 소용돌이나 은하수, 회오리바람 이외의 자연계의 나선은 모두 생물에 의해 만들어졌다. 피보나치 수열과 홤금분할의 예를 생각하면 당연할 것이다.
나선이란 형태를 유지하면서 성장방향을 따라 1차원적으로 성장할 때 생기는 형태이다.
그러므로 모든 대칭성과 체절구성은 성장의 결과이며 귀결이며, 성장은 고유의 형태적 특징을 만들어내고, 나선이라는 형태에 의해 이 두 가지 중 어느 한쪽이 만족된다.
소라껍질에는 이 생물이 그 발생과정에서 어떠한 패턴 형태로 형태상의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해 왔는가 하는 기록이 그려져 있다. (프로크로니즘 prochronism)
우리들은 음악이라는 예외를 제외하고는 패턴이라는 것을 고정적으로 받아들이도록 훈련받았다. 서로 연결시키는 패턴을 시작하기 생각했을 때 올바른 길은 그것이 1차적으로 상호간에 서로 반응하는 부분이 연출해내는 하나의 춤이라는 것과 2차적으로는 여러 가지 물리적인 한계와 각 생물체가 갖고 있는 고유한 장애에 의해 고정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학습한 것이 무엇이든 나의 학습은 중요한 타인의 행위에 의해 내 경험의 연속 안에서 일어난 것이다. 바라 보는 것을 어떤 컨텍스트 안에 놓고 보지 않으면 아무 것도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이 바라봄을 전이 transference라고 하는데, 이것은 인간관계에서도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통상적으로는 상동의 사실을 증거로 삼아 진화가 존재한다고 증명하고 있으나 진화의 존재를 전제로 상동의 본질을 탐구해 보자.
코끼리의 경우 코라는 것은 양쪽 눈 사이와 입 위에 있는 것을 코라고 정의하지만, 냄새맡는 기능으로 코를 정의하려는 사람도 있다. 기능을 생각한다는 것은 그 기관이 생물과 환경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에 의해 주어진 역할을 한다고 보므로, 시간적 컨텍스트라고 부르는데, 공간적 컨텍스트와 결국은 동일한 지점에 이른다. 컨텍스트의 시간적 분류와 공간적 분류가 서로 교차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말해 코끼리 태아의 코는 아무런 냄새도 맡을 수가 없다. 발생이란 형태적 formal 이다.
명사가 사물이나 장소나 물건의 이름, 동사가 동작을 나타내는 말이라는 한심스러운 것을 배우지 말라. 명사란 술어와 어떤 관계를 가지는 말이며 동사란 그 주어진 명사와 어떤 관계를 가지는 말이라는 식의 교육방식을 학생들이 따라오지 못할 리 없다.
동식물의 형태는 메시지의 변형에 불과하다. 언어도 그 자체가 정보전달의 한 형태이다. 생물체의 구조는 모두 메시지를 만드는 물질적 재료의 변형이며 그곳에서 일어나는 형태구성이 컨텍스트에 의한 것이라면 생물체 구조 속에도 문법에 상당하는 것이 반드시 있다는 것, 컨텍스트에 의한 형태구성이란 문법의 별칭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대조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동떨어진 인식론이라도 최종적 통일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서로 비슷하다.
미적 통일성의 상실이 우리들의 인식론상의 커다란 잘못이었다.
논리는 언제나 회귀적인 순환을 논할 경우 자기 모순에 빠지지 않을 수 없으며 양은 엄밀하게 말해 정보전달체계들의 복합물이 아니다.
제2장 학교다니는 아이라면 모두 ~~~ 알고 있다.
과학은 전제를 토대로 한다.
학생들의 교육받은 결과로 사고에 필요한 어떤 도구의 결핍이 드러난다. 이들에게 결여된 것은 과학의 전제뿐 아니라 일상생활의 전제에 대한 인식이다.
카톨릭계의 학생들과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하는 학생들에게는 이러한 인식의 결여가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과거 2500년간의 인간 사상에 대해서 스스로 생각해본 적이 있거나 남들로부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믿고 있는 올바른 전제에 너무나도 큰 중요성을 부여하고 이단적인 생각은 파문의 위협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단을 위험시하는 인간은 당연히 자신의 전제에 대해 애써 의식을 하려고 하며 이러한 일에 대해서 나름의 안목을 키우게 된다.
1. 과학은 아무 것도 증명하지 못한다.
2,4,6,8,10,12 다음에 오는 수는 14일 수도 있지만, 27일 수도 있다.
2,4,6,8,10,12,27, 2,4,6,8,10,12,27, 2,4,6,8,10,12, 27
그 다음에 오는 수는 2라고 말할 것이다.
이는 오캄의 면도날 Occam’s razor라 불리는 전제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즉 사실에 부합하는 가장 단순한 추측을 선호하는 절약의 법칙 때문인 것이다.
불행하게도 다음에 오는 사실을 결코 미리 손에 넣을 수는 없다. 고작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단순했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또한 다음에 오는 사실은 언제나 우리들을 한 단계 더 높은 복잡한 수준으로 이끌고 갈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다.
패턴은 추가와 반복에 의해서 또는 그 패턴을 새롭게 지각할 것을 강요하는 그 어떤 사건에 의해서 바뀌거나 파괴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결코 절대적인 확신을 갖고 예측할 수 없는데, 그것은 그들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절대 확실한 예측이란 결코 있을 수 없다. 과학은 일반화된 명제를 결코 증명할 수 없다. 기술된 내용을 점검해감으로써 최종적인 사실에 도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과학은 지각하는 방법이며 우리의 지각에서 의미라고 불리는 것을 만들어가는 방법이라고 전제한다. 그런데 차이가 없으면 지각은 생기지 않는다. 우리가 받아들이는 정보는 어떠한 경우에도 차이의 전달과 다름없는 것이다.
지각하는 방법으로서의 과학은 사실일지도 모르는 것의 외재적이고 가시적인 기호를 모으는 것 이상은 불가능하다. 과학은 탐색할 뿐 증명하지 않는다.
2. 지도는 땅 그 자체가 아니며 사물의 이름은 그 사물 자체가 아니다.
지도 작성도 본질적으로는 일종의 이름 짓기나 다름없는 것이다.
3. 객관적 경험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경험은 주관적이다.
외계의 경험은 항상 어떤 특정의 감각기관과 신경통로에 의해 전달된다. 그런 의미에서 사물에 대한 나의 경험은 주관적인 것으로서 객관적일 수 없으며 곧 사물은 나의 창조물이다.
4. 이미지 형성 과정은 무의식적이다.
우리들이 지각의 과정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의식되는 것은 지각의 산물일 뿐이다. 내가 의식해서 보고 있는 이미지는 무의식 속에서 형성된 것이며, 이 무의식적 과정에서 내가 사용하고 있는 다종 다양한 전제는 이미 형성된 이미지 속에 짜넣어져 있다는 것, 경험적 인식론의 시작은 이 2가지 일반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자신들이 보고 있는 이미지가 뇌나 정신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으나 이것을 단지 지식으로서 알고 있는 것과 실제로 느끼고 깨달아서 알고 있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우리가 눈을 통해서 외계를 바라볼 때 우리들은 5개의 주요한 단서들을 사용하여 우리가 만들어내는 상에 원근감을 주고 있다.
크기는 망막에 비친 물리적인 상의 크기로서, 물체의 양끝과 안구의 중심이 만드는 각도라는 편이 더 정확할지 모른다. 시신경에 전달되는 것은 시각의 변화로 이 변화의 정도가 눈에서 물체까지의 거리를 만드는 단서가 될 것이다.
밝기의 대조도 마찬가지다. 즉 크기, 밝기, 중복, 양쪽 눈에 의한 시차, 머리의 이동에 의한 시차, 이 5가지가 원근감을 만들어내는 단서이다. 가장 강력하게 작용하는 것은 머리의 이동에 의한 시차이다.
##실험방법은 49면##
멀리 있는 것은 작게 보인다는 누구나 익히 알고 있는 우주의 법칙이 실은 지각과정 속에 깊이 묻혀 있다. 자연사 수준에서 형성되어온 인식론 epistremology은 거의 대부분이 무의식적인 것이며 바꾸려고 해도 그렇게 간단히 바꿀 수 없다.
사다리꼴 방의 실험에서, 훈련을 쌓아가며 능숙해짐에 따라 시각상 자체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고, 방이 실제 사다리꼴 모양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지각이 정신의 눈에 비추고 있는 상의 지배는 직접적인 것으로 자유의지의 개입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부단한 훈련과 자기 수정에 의해 그러한 상들을 부분적으로 바꾸어 나가는 것은 가능하다.
결론적으로 정보가 어떠한 영역을 통해서 전해질 때는 상의 형태가 편리하고 경제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5. 지각되는 세계가 부분과 전체로 나누어지는 것은 편리하고 필연적일지도 모르지만, 어떻게 나눌 것인가 하는 결정에 필연은 작용하지 않는다.
이 도형이 어떤 도형인지 언어로 기술하라는 문제에서, 장화라든지, 극단적인 대답을 한다. 이와 같은 유추적 도상적 기술로서는 그것을 들은 사람이 원래의 도형을 재생하기란 어려운 것이다.
압도적으로 많이 나오는 답은 직사각형과 6각형으로 이루어졌다고 보고, 2개의 부분으로 나누어서 기술한다.
극히 소수의 사람은 정육각형의 존재를 예측한다. 그들은 상상력으로 어떤 존재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사용해서 지각되는 규칙성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일종의 과학적 가설을 마련한 것과 다름없다.
6. 발산되는 연속은 예측할 수 없다.
유리창에 돌을 던질 때, 방사상으로 깨지는 조건하에서 깨지는 방향의 진행을 예측하거나 혹은 어떤 특정한 파손을 유도할 수 있도록 돌을 던지는 것은 불가응하다. 흥미로운 점은 실험 정도를 높여감에 따라 결과의 예측 불가능성도 높아진다는 것이다.
유리표면에 굵힌 자국을 만들어두거나 처음부터 흠이 있는 유리를 사용할 경우, 어느 정도 대략적인 예측을 세울 수 있다. 이유는 알지 못하지만 유리의 균열은 흠집에서 1인치의 1/100 벗어난 곳에서 흠집과 평행을 이루며 생긴다고 예측하면 일단 틀림없다.
어떤 일정한 사회적인 힘과 긴장상태 속에서 어떤 형태로든 도화선에 불을 당기는 개인이 반드시 나타나게 되는데, 그것이 누구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7. 수렴하는 연속은 예측할 수 있다.
방산하는 연속에서 중요한 것은, description이 개체, 특히 개개의 분자를 주제로 한다는 점이다.분자의 브라운 운동도 예측할 수 없는 발산의 연속이다.
확률의 법칙은 개체의 행동에 관한 description과 큰 집단의 행동에 관한 description과의 중간역할을 맡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의 역사관은 사회 전체의 변동과정이 각각의 독자성을 지닌 개개인의 사건으로 수렴된다고 하는 근본적으로 무리한 이론을 적용시키려는 불행한 노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8. 무에서 유는 생기지 않는다.
질량보존의 법칙, 에너지 보존의 법칙, 실험실에서 새로운 생명의 출현을 기대할 수 없다는 파스퇴르에 의해 입증된 원칙, 그리고 새로운 질서 또는 패턴은 정보 없이는 만들어낼 수 없다는 원칙이 그것이다.
메시지가 아무에게도 읽혀질 수 없게 되었을 때 그것은 메시지로서의 기능을 잃어버린다. 고대 이집트 문자도 로제타스톤이 없이는 파피루스나 바위에 그려진 우아한 장식문양에 지나지 않는다. 의미를 이루기 위해서는 모든 규칙성이 그것을 보완하는 별도의 규칙성 혹은 기능과 만나지 않으면 안된다.
메시지에 반응하는 기능의 발생이 진화과정의 또 한 측면을 형성하고 있고, 이것이 연계진화 co-evolution이다.
모순되게도 정보와 유기체의 세계에서 ‘무에서 유는 생기지 안는다’는 심오한 진리가, 정보가 되는 사건이 전혀 없는 것이 하나의 메시지가 될 수 있다. 진드기의 유충이 나무 위에서 땀 냄새에 따라 가지에서 떨어져 포유류에 기생하는데, 몇 주를 기다려도 땀 냄새가 나지 않을 경우 역시 떨어져서 다른 나무 위로 올라간다.
편지를 쓰지 않는 것, 사죄하지 않는 것 등은 충분하고 효과적인 메시지가 될 수 있고, 0도 컨텍스트 - 문맥에 따라 의미를 갖게 된다.
관념적으로는 발생은 공리와 정의만 정해지면 그후에는 아무 것도 추가되지 않는 복잡한 토톨로지의 성립과정과 유사하다. 피타고라스의 정리는 유클리드 기하학의 공리와 정의와 공준을 사용하여 쌓아올린 형태로 되어있다. 인간에게는 풀어가는 순서에 관한 지식이 필요하다.
발생과 토톨로지는 반복과 모방의 세계를 구성하는 한편, 창조, 예술, 학습, 진화로 이루어진 세계에서는 변화의 과정이 무작위한 것을 양식으로 삼아 진전된다. 발생의 본질은 예측할 수 있는 반복이며 학습과 진화의 본질은 탐구와 변화이다.
문화의 전달에서 인간은 항상 모방을 시도한다. 그러나 문화의 전달이 DNA에 의해서가 아니라 학습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실패한다.
하여튼 2개의 세계를 연결하는 것으로서 설명이란느 문화현상이 존재한다. 설명이란 익숙하지 않은 사건의 연쇄의 토톨로지 위에 지도를 그리는 것이다.
생물이 새로운 돌연변이를 모으는 것은 무작위의 세계로부터이며, 스토캐스틱한 학습이 해답을 모으는 것도 무작위의 세계로부터이다.
학습은 정신을 포화상태로 이르게 한다.
9. 수와 양은 다른 것이다.
수는 센다고 하는 행위의 산물이며, 양은 측정한다는 행위의 산물이다. 정수 사이에는 불연속이 있지만, 양의 경우에는 비약이 존재하지 않는다. 비약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어떠한 양도 정확하지 않다.
토마토가 세 개 있다고는 할 수 있으나, 물이 딱 3리터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양이란 항상 실물에 근사할 뿐이다.
수와 양 이외에 패턴이라고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개념이 있다. 모든 수가 세는 행위의 산물은 아니다. 작고 그러므로 일상적인 수는 흔히 셀 수는 없지만 한눈에 봤을 때 패턴으로서 인지되는 경우가 많다.
수는 패턴과 형태 gestalt와 디지틀 계산의 세계에 속하며, 양은 유추계산과 확률계산의 세계에 속한다.
생물계에 나타나는 여러가지 수에 대해서 그것이 형태의 예인지, 수를 센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단순한 양인지 의문을 제기해 본다. 홑장미가 꽃잎이 5장, 꽃받침이 5장, 5방향으로 대칭을 이룬다라는 description과 수술을 112개, 가지고 있다는 진술에는 두드러진 차이가 있다.
생물의 성장과정이 고정된 과정으로 다룰 수 있는 수의 상한선, 즉 그 선을 넘으면 양으로서 취급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생각하게 된다. 동식물이 대칭, 특히 방사상 대칭을 이루는 경우 2,3,4라고 하는 수가 가장 일반적인 것 같다.
비교적 큰 수가 규정받는 것은, 포유류의 등뼈, 곤충의 복부체마디, 지렁이의 전부 분절등의 직선적으로 연속된 마디를 이루고 있는 것들이다.
생물에서 어느 부분이 일정 수의 방사상 대칭을 이루는 경우 그 수가 다른 부분에도 다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백합은 꽃받침이 3장, 꽃잎이 3장, 수술은 6개, 암술에는 씨방이 3개 있다.
10. 양은 패턴을 결정하지 않는다.
패턴은 양이 작용하기 이전부터 그 시스템 속에 잠재하고 있다. 패턴은 양적 변화의 작용을 받기 이전부터 잠재해 있다가, 패턴이 바뀔 때 그 변화는 순간적이고도 비연속적이다.
11. 생물학에서 단조의 가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단조의 가치 monotone value란 상승 또는 하강만을 계속하는 가치이다. 생물이 갈망하는 물질, 물체, 패턴 혹은 생물이 어떠한 의미에서 좋다고 느끼는 경험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다. 즉 최적량이 존재한다.
이 생물적 가치의 특성은 돈에 비교할 수 없다.
전투가 없는 관계는 생기가 없고 전투가 지나치면 관계는 독성을 가지게 된다.
12. 때로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
물체를 하나로 연결시켜 고정시키는 힘과 중력에 의한 힘이 동일한 양적 규칙성을 따르지 않는데서 구조적 불안정성이 생겨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물리적 세계에서 작은 이유로 불안정해지는 경우가 있다. 표면적과 중량이 비선형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어떤 물질이든 용해시킬 때에는 잘게 부수는 것이 능률적인데, 작은 덩어리일수록 체적에 대한 표면적의 비율이 커져 그만큼 액체로부터 작용을 쉽게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큰 덩어리는 오래 견딘다.
참돌고래는 몰길이 약 1미터, 지방층의 두께 약 3센치, 표면적이 0.5평방미터의 동물인데, 북극해에서 알맞은 체온을 유지한다. 이 돌고래의 약 10배의 길이로, 100배의 표면적, 1000배의 체적을 가진 대형 고래에게는 두께 30센치의 지방층이 있는데, 어떻게 체온의 균형을 유지하는지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고래는 모두 혈액을 등지느러미와 꼬리로 보내 열을 방출하는데, 이 대형고래는 우리들의 이해범주를 넘어선 뛰어난 기호논리학을 구사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야자나무의 경우는 높이가 높아져도 그에 맞추어 몸통을 조절하지 않는다. 떡갈나무는 성장조직을 나무와 나무껍질 사이에 지니고 있어 일생 동안 높이와 굵기를 늘려간다. 그런데 코코야자나무는 성장조직이 줄기의 맨 꼭대기 부분 - 억만장자의 샐러드라는 부분으로, 이곳을 잘라버리면 죽어버린다.- 밖에 없으므로 오직 위를 향해 자랄 뿐이다.
백년초(유카-용설란의 일종)같은 식물은 몇십 년이나 사는데, 이는 연어와 마찬가지로 생식을 하는 동시에 죽어간다. 맨 꼭대기에 꽃이 많은 가지를 내는 것을 제외하면 유카에는 가지가 없다. 그 가지를 낸 꽃이 곧 유카 줄기의 끝이다.
고등동물에서는 생장이 조절된다. 어떤 일정한 크기, 연령, 단계에 달하면 더 이상 생장을 하지 않는다. 세포는 통제 아래서 성장과 분열을 멈춘다. 메시지의 발신이나 수신에 장애가 생겨서 그 통제가 이루어지지 않게 된 결과가 암이다.
13. 논리는 인과관계의 빈약한 모델이다.
삼단논법에서 사용되는 논리인 만약~이라면과, 인과관계에서 사용되는 만약~이라면과는 전혀 다르다.
원인과 결과의 연쇄가 순환을 이룰 때 그 연쇄를 무시간적인 논리로 바꾸어 기술하거나 지도화하려고 하면 모순에 빠지게 된다. 순순한 논리로는 처리할 수 없는 모순이 발생하는 것이다. 전체 생물계에서 보이는 몇백만 개의 항상성의 하나하나의 예가 이러한 모순을 안고 있다.
스위치로 전류를 흘러 보내는 시스템에서 인과적 관계를 나타내는 ~이면 ~이다에는 시간이 포함되어 있으나, 논리의 ~이면 ~이다에는 시간이 포함되어 있지 않으므로, 접촉이 이루어지면 접촉은 끊어진다라는 결과가 된다. 즉 논리는 인과관계의 모델로서 불완전한 것이다.
14. 인과의 역전은 있을 수 없다.
논리의 세계에서는 거짓도 참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으나, 결과는 절대로 원인에 선행할 수 없다.
생물학자들을 괴롭힌 문제는 적응이라는 문제였다. 게의 집게발이 물건을 집기 위해서 있다고 한다면, 집게발의 목적에서 출발하여 집게발의 발생의 원인으로 논리를 역행시키게 된다.
15. 언어는 통상 상호반응의 한쪽 편만을 강조한다.
언어는 주어와 술어라고 하는 구조에 의해 사물이 어떤 속성이나 성질을 갖고 있다라고 규정한다. 보다 정밀한 화법으로는, 그 내적인 관계들 및 다른 사물이나 화자와의 관계들 속에서의 행위에 의해 사물이 생산되며, 또 다른 사물과 구별되어 보이며 실재하고 있다고 표현해야 할 것이다.
16. 기술description의 각 부분은 안정 또는 변화라고 기술된다.
서커스의 외줄타기는 균형의 무너짐을 지속적으로 시정함으로써 안정을 유지한다.
지각 과정 자체 속에 단순함을 선호하는 오컴의 면도날 원칙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은 지각의 소재에 무엇인가 보다 철학적인 소재가 얽혀 있음을 의미한다.
제3장 세계의 변형들
1. 차이인 경우
정보가 전해지기 위해서는 그 상호관계 속에 차이가 내재할 수 있는 2개의 존재가 있어야만 한다.
2. 양안 시각의 경우
좌우 망막 위의 시신경은 놀랍게도 모두 수직으로 깎은 듯이 서있는 경계면에 의해 2개의 장치로 분리된다. 그런데 합성된 정보에는 수직경계면의 흔적이 모두 사라져 있다.
뇌가 이러한 두 개의 눈으로부터 들어온 정보를 공들여서 처리한 이유는 2가지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먼저 사물의 가장자리나 명암차에 대한 선명도가 더욱 뚜렷해져 작은 글자를 읽을 수가 있으며 어두운 빛 아래에서도 사물을 파악할 수 있고, 사물의 원근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형식논리학의 표현방법에 따르면 한쪽 망막에서 얻은 정보와 또 다른 망막에서 얻은 정보의 차이가 다른 논리계형 logical type에 속하는 정보 그 자체가 된다고 할 수 있다.
3. 명왕성의 경우
1930년 대학원 학생이던 윌리엄 톰보가 명왕성을 발견할 때, 이미 해왕성은 불규칙한 궤도를 나타낸다고 알려졌으므로, 해왕성 바깥쪽을 도는 작고 희미한 혹성의 존재를 어떻게 발견할 것인가의 문제를 해결했다. 천체의 다른 물체와 구별되는 점이라고는 인간의 눈으로는 지각하지 못하는 매우 느린 속도로 움직이는 것을 안다는 사실 뿐이었다.
그는 블링커 blinker라 부르는 장치로, 해당 천체를 시간 간격을 두어 사진에 담고, 2장의 사진을 재물대 형식의 건판에 두고, 레버를 순간적으로 움직여서 겹쳐진 사진 위에 똑같은 항성과 다른 존재를 알아낸 것이다.
4. 시냅스 가중의 경우
시냅스의 가중 synaptic summation이란 뉴런 C가 뉴런 A와 뉴런 B의 결합에 의해 비로소 발사되는 사례를 나타내는 신경생리각의 용어이다. 이 경우 곱셈에 가까운 논리를 생각해 낸다.
5. 환각 단검의 경우
하나의 감각에 의한 정보와 또 하나의 별개의 감각에 의한 정보를 비교하고 거기에 시각상의 변화를 결합시킴으로써 그는 자신의 결합이 환영이라는 메타 정보를 얻기에 이른다.
6. 이어동의의 경우
대수와 기하라고 하는 2개의 언어가 상호 번역 가능하다는 발견도 그 자체로서 이미 계발이다.
1에서부터 시작해서 10개의 홀수의 합은 얼마인가?
이 때
1에서부터 1개의 홀수의 합은 1
1에서부터 2개의 홀수의 합은 4
1에서부터 3개의 홀수의 합은 9
1에서부터 4개의 홀수의 합은 16
1에서부터 5개의 홀수의 합은 25
그러면 곧 방법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도형을 이용하여 알려주는 방법도 있다.
작은 사각형 하나와 세 개를 더하면, 큰 4개짜리 사각형 하나가 만들어지고,
작은 사각형 5개와 앞의 4개짜리 사각형 하나를 합치면 9개짜리 큰 사각형이 된다.
그런 식으로 시각화를 하면 더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97면##
7. 2개의 성sex의 경우
기계가 자기 복제를 할 때에는 2대가 협력하여 행하는 것이 필요조건일 것이라고 폰 노이만이 말한 적이 있다.
분열은 외관상 반드시 융합에 의해 끝이 난다.
만일 2개의 배우자로부터 실 모양의 물질의 차이가 너무 크면 수정이 일어날 수 없다.
8. 맥놀이와 모아레 현상의 경우
리듬 패턴의 경우 2개의 패턴이 결합하여 제3의 패턴을 만든다.
모아레현상 moire phenomenon은 2개의 서로 다른 주파수를 갖고 있는 음이 결합되어 발생하는 유명한 맥놀이 현상디ㅏ.
모아레 현상에는, 어떤 패턴도 2개가 적절하게 결합될 때에는 제3의 패턴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들 3개의 패턴 중 2개의 패턴으로 나머지 패턴도 기술할 수 있다.
시, 무용, 음악이라는 미적 경험의 본질에 접근해 가는 의문들은, 이러한 리드미컬한 현상은 아주 옛날부터 산문 이전에 인간과 함께 있었다고 보인다.
9. 기술 Description, 토톨로지, 설명의 경우
설명은 의심할 여지없이 아주 중요하며 또한 확실히 description에 포함된 이상의 통찰력을 보너스로 주는 것 같다.
기술과 설명이라는 2가지 유형의 정보조직을 연결시키는 것을 바로 토톨로지라고 부른다.
토톨로지에는 어떠한 정보도 일체 포함하지 않으며 설명은 description 속에 존재하는 정보밖에 포함하지 않는다. 설명은 description을 토톨로지 위에 지도화하는 것이다.
거울에 상을 비칠 때, 상과 하는 바뀌지 않지만, 좌우는 바뀐다. 상과 하가 외적인 언어임에 비해 좌와 우는 내적인 언어에 속하기 때문이다. 동과 서, 상과 하는 동일한 언어에 속하며, 좌와 우는 다른 언어에 속한다. 좌와 우라는 말은 정의하기 곤란한 것이다.
##좌와 우는 인간이 눈이 두 개이기 때문에 생기는 변이가 아닐까##
우리는 정보가 아닌 우리들 자신이 정한 만약 ~이라면의 세계로부터 빠져 나올 수는 없다.
우리들의 공준은 하나의 차원을 역전시키면 반드시 좌우 역전체stereo-opposite가 생긴다는 것이다.
몰리에르의 희극에 나오는 수면소 dormitive principles - 아편이 잠을 유발하는 효과가 있는 것은, 아편 속에 수면소가 있기 때문인가. 아편이 수면소를 함유한다는 명제를 참이라고 정해 버리면, 이러한 형태의 표현을 다른 많은 현상들에도 적용할 수 있다.
인간의 사고방식에는 2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모든 생물류에 공통된 자연의 사고이고, 하나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관례적-논리적 사고이다.
양안 시각의 예에서 보듯이, 탐구의 방법은 이중 또는 다중 비교의 방법을 사용하자.
제4장 정신과정의 기준들
만약 어떠한 현상의 집합체 곧 시스템이 목록화된 그 모든 기준들을 충족시킨다면 나는 주저없이 그 집합체를 정신이라고 말할 것이다.
기준1. 정신은 상호반응하는 부분 또는 구성요소들의 집합체이다.
정신과정은 항상 각 부분들 사이의 상호반응의 연속이다. 정신현상에 대한 설명은 항상 부분들의 조직화와 상호반응의 방식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기준2. 정신의 각 부분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반응의 방아쇠는 차이에 의해 당겨진다.
정신을 기술하는 것은 보통 물질세계를 기술할 때와는 전혀 다른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관념의 세계에서는 두 부분 사이에 혹은 시각1의 어떤 부분과 시각 2의 같은 부분 사이에 어떠한 관계가 존재함으로써 비로소 수신체라고 하는 제3의 구성요소가 활성화된다. 즉 수신체는 차이 혹은 변화에 대해 반응하는 것이다.
비생물세계에서 A가 B와 C의 차이에 대해 반응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변화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그것에 대해 움직이지 않는한 지각되지 않는다.
우리 눈은, 안구는 극소진탕 micronystagmus라 불리는 진동을 끊임없이 하고 있다. 안구는 항상 2도나 3도 각도로 호를 그리며 흔들리고 있으며, 그 때문에 망막에 비친 상은 감각말단기관인 간상체와 원추체에 대해 항상 운동상태에 있다.
우리는 구별을 힘들여 이끌어내어 사물을 인식한다. 이끌어내지 않는 구별은 존재하지 않는다.
완만한 변화와 무변화를 구별하는 데에는 별개의 정보, 즉 시계와 같은 것이 필요하다.
변화를 특징으로 하는 현상의 추세를 파악하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정원으로 날아드는 나비나 새들의 숫자가 놀라울만큼 감소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 힘들다. 그러한 변화는 큰 것임에도 지각이 새로운 사태라고 보고하기 전에 우리들은 그것에 익숙해져 버린다.
상대가 왼쪽 주먹을 뻗으려는 것처럼 페인트 모션을 쓰고는 왼쪽 주먹이 나오지 않으면 우리는 왼쪽으로는 치지 않을 것이라고 믿어버린다. 그러다 왼쪽 주먹을 얻어맞게 되므로 의외의 불쾌함을 맛보는 것이다.
정신은 차이의 소식만을 수용할 수 있기 때문에 완만한 변화와 정지상태의 구별이 잘 되지 않는다.
차이는 관계의 본질이 되므로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위치를 정할 수 없다.
자극이라는 말은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오는 한 묶음의 정보의 각 구성요소를 가리키는 말이다.
기준3. 정신과정은 방계에너지를 요구한다.
정신과정은 차이에 의해 방아쇠가 당겨진다는 것과 차이란 에너지가 아니며 보통 에너지를 포함하지 않는다.
당구공들 사이에 부딪히는 행위도, 주는 행위도, 반응하는 행위도, 사용하는 행위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표현방식은 사물을 의인화하는 습관에서 나온 것인데, 이러한 난센스가 인간의 의물화라는 더욱 한심한 넌센스로 발전해 버린다.
켜진 상태에 있는 스위치는 다른 곳에서 생긴 에너지의 통로가 될 뿐이다. 수도꼭지를 쥐고 있는 사람이 부분적으로나마 결정할 수 있는 것은 물이 나오면 어떤 통로로 나오게 하겠다는 정도이다. 실제로 물이 흐르느냐 마느냐는 우리가 간섭할 수 없다.
기준4. 정신과정은 순환적 결정의 연쇄가 필요하다.
암석과 생물은 생존경쟁의 참가방식이 서로 다르다. 즉 암석은 변화를 거부한다. 높여진 상황에서 변화하지 않은 채 그대로 유지한다. 이에 비해 생물은 변화를 수정하고 변화와 더불어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며 스스로 자기 안의 지속적 변화를 포용하는 방법으로 변화를 극복한다.
인간이 타인이나 사회의 통합을 파괴하려 할 때 에너지는 거의 들지 않는다.
전기회로의 일부분으로서의 스위치는 켜진 상태에 있을 때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회로의 관점에서 보면 스위치와 그 앞뒤의 전선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또한 꺼진 상태일 때에도 스위치는 회로의 시점에서 보면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스위치란 교체의 순간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스위치라는 개념은 시간에 대해 특별한 관계를 가진다. 그것은 물체라는 개념보다도 변화라는 개념과 더 밀접하다.
감각의 말단기관은 스위치와 유사하다. 외계에서 충격을 받은 그 순간만 켜지게 된다.
기준5. 신경과정에서, 차이의 결과는 그것에 선행하는 차이의 변형들로 볼 수 있다.
지도란 결국 지형에서의 차이의 소식을 조직하는, 일종의 최종 결과로서의 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디지틀 시스템은 수를 포함하는 시스템과 유사하며, 아날로그 시스템은 양에 보다 강하게 의존한다. 디지틀 형의 뉴런에서 아날로그 양상을 띠는 시스템을 만들어내는 것도 가능하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 지각은 항상 부분에 대한 지각이라 할 수 있으며 뒤에 오는 다른 부분이 제시됨으로써 전체에 대한 우리의 추측은 계속해서 입증되거나 혹은 모순되기도 한다. 우리들 앞에 전체가 제시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기준6. 이러한 변형과정의 기술과 분류는 그 현상에 내재하는 논리계형의 분류단계를 나타낸다.
메시지를 만들어내는 사건과 메시지 자체는 다르다.
A가 B에게 지시를 할 때, A에게서 오는 메시지를 어떻게 기호화해야 할 지 B에게 가르쳐주거나, B는 또 다른 정보의 클래스가 존재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클래스에 속하는 메시지는 A와 B에 대한 메시지가 아닌, 메시지의 기호화에 대한 것이다. 같은 형태의 행위나 발성이라도 컨텍스트 - 문맥에 따라 의미하는 바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학습과 유전이 만나는 것도 극히 추상적인 수준일 것이다. 유전자는 아마도 동물이 어떻게 학습의 컨텍스트를 지각하고 분류해야 할지 그 방법을 결정할 때 영향을 줄지도 모른다.
과거 성격이라 불렀던 것은, 우리가 자신과 만난 컨텍스트에 부여하는 해석의 시스템으로서, 유전자와 학습 양쪽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다.
인간관계에서 유머라는 단순한 사실 하나만 보더라도 계형 type들이 다중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에서 얼마나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인가를 명백히 보여준다. 논리계형에 혼동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유머가 생겨날 필연성도 없어진다.
인간은 고양이와의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마치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메시지의 단편들을 짜맞추어 고양이의 의도를 이해해 버린다.
서로 다른 종간의 커뮤니케이션은 어떠한 경우에나 각각의 종이 만들어낸 컨텍스트를 서로 수정해 나가는 학습 컨텍스트의 연쇄이다.
파블로프의 개에 대한 실험에서, 개가 2개의 자극을 구별하는 것과, 개의 구별이 붕괴한다라는 표현방식이 가능하다. 개의 구별이라는 표현방식으로의 비약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개개의 사건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부터 구별이라는 시각을 넘어선 추상의 세계로 들어가 개 내부에 있는 존재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로지칼타입의 비약을 무시한 점에 파를로프 학습의 오류가 있다. 개가 구별하는 것을 보는 것은 가능하나, 개의 구별을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개는 이것이 구별의 컨텍스트이다라고 배운 것이다.
컨텍스트의 차이를 구별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 개의 머리는 이러한 훈련을 시작한 연구자의 머리와 다를 바가 없다.
하와이 해양연구소에서 암돌고래를 이용하여 실험을 한다. 어떤 동작을 하면, 먹이를 주게 되는데, 돌고래는 하나의 패턴, 하나의 컨텍스트적인 구조, 정보의 결합방법에 대한 일련의 규칙을 호각, 수조, 조련사 등에 연결하는 단순한 몇 개의 규칙을 습득했다. 조련사들은 돌고래의 훈련법을 계속 보여주고 싶어 단일한 패턴을 무너뜨려서 에피소드가 모아진 클래스에 대처시키려고 했다. 돌고래는 게임의 규칙을 알게 되자, 15번째 시도에서 갑자기 8가지의 연기를 정성들여 해보였다.
하나의 로지칼타입에서 그 다음의 한 단계 높은 로지칼타입으로의 진보는 개개의 사건에 관한 정보에서 사건의 클래스에 관한 정보로, 혹은 개개의 클래스를 생각하는 것에서 클래스의 클래스를 생각하는 것으로의 진보인 것이다.
아무리 벌을 주어도 쥐가 학습하는 것이라고는 한 번 전기쇼크를 받은 상자에 한해서 코를 디밀지 않겠다는 것뿐이며, 상자라고 하는 것 속에 코를 디밀어서는 안된다는 것은 전혀 배우지 못한다.
탐구의 목적은 탐구 자체의 옳고 그름을 아는 것이 아니라 탐구대상에 관한 정보를 얻는 것이다.
범죄란 실제로는 탐구와 마찬가지로 행위의 조직방법인 것이다.
한 생물의 성질을 바꾸려는 진지한 노력과 한 생물의 개개의 행동을 바꾸려는 노력 사이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다.
컨텍스트의 변화를 잘못 인식했기 때문에 벌을 받은 파블로프의 개나 행위의 조직방식이 나빴음에도 불구하고 개별행위에 대해서만 처벌을 받은 기결수들에게는 정신이상이 초래될 가능성이 있음을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자연이 꾸며대는 인과의 순환에서 죽음의 은유를 보는 우리들은 직선적 논리에 매달려 사후의 세계를 상상하고 더 나아가서는 환생의 관념까지 이끌어내어 죽음이라는 단순하고도 정상적인 현상을 애써 부정하고 있다.
정신과정의 논리적 일관성이 무너져 버린 후의 세계는 진정 죽음을 생각케 한다.
자연계의 모든 생명활동 회로의 하나하나에 죽음의 그림자가 엿보인다.
정신은 지도에 영향을 받지, 결코 땅에서 영향을 받지는 않는다. 따라서 수신된 정보를 근거로 주변 세계나 자기 자신에 대해 무엇인가를 증명할 수는 없다.
학습하는 것, 기억하는 것, 부의 엔트로피를 축적하는 것 등은 모두 경험적 방법과 시행착오라고 불리는 스토캐스틱한 게임에 의해 행해진다.
제5장, 관계의 다양한 변형들
정신은 그 안에 아무 것도 포함하지 않는다. 있는 것은 관념 즉 차이에 관한 정보 뿐이다. 정신 안에는 시간도 없고 공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관념이 있을 뿐이다.
자신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변화시키는 학습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먼저 상호작용의 단위와 성격에 관한 학습의 단위는 동일하다. 생활의 컨텍스트 학습은 한 생물의 내부가 아니라, 두 가지 생물간의 외적인 관계로서 논해야 한다.
개인의 프라이드를 끄집어내어 그 사람의 오만스러운 행동을 설명하는 것과, 공격성을 끄집어내어 그 사람의 공격적 행동을 설명하려는 것은 얼마나 공허하고 무의미한 일인가를 깨닫게 해준다.
프라이드를 논하는 경우라면 두 사람의 인간 혹은 2개의 집단을 이끌어내어 둘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을 논하지 않으면 안된다.
양쪽 눈으로 원근이라는 새로운 차원의 정보를 얻는 것처럼, 관계를 통해 행동을 이해함으로써 새로운 로지칼타입에 속하는 학습을 얻을 수가 있다.
상호작용의 최소단위는 3개의 요소인데, 자극, 반응, 강화이다. 학습자의 반응은 가르치는 사람이 주는 자극을 강화한다.
프라이드란 상대방이 주는 조건부 칭찬 더하기 행위자의 반응 더하기 더 한층의 칭찬 더하기 그 칭찬의 수용~` 등이다.
프라이드가 강한 사람일수록 상대의 경멸을 두려워한다.
1. 너 자신을 알라
이 말은 여러 수준에서 신비스러운 지혜를 보여주며 동시에 극히 단순하고 보편적이며 실용적이라 할 수 있는 측면을 갖고 있다.
우리들은 자신에 관한 여러 가지 견해를 외계에 투영한다.
게임과 게임의 조작은 동일한 현상이다. 게임은 그 행위의 연쇄 안에 계획에 들어 있지 않은 어떤 독창적인 부분이 없으면 이미 게임으로서의 의미가 상실되어 버린다.
탐구란 언어적으로나 비언어적으로나 자신에 대한 제1차 description이다. 탐구는 자기 강화적이다. 탐구자에 의해 기쁨이든 괴로움이든 상관없이 자동적으로 강화되어간다.
육체의 나약하고 자기 연민적인 불평과 고통의 소리들을 듣지 않는 것이 등산가에게는 가장 큰 단련이다. 그것은 등산가의 만족감, 자신이 자신을 정복했다는 기쁨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본다.
2. 토테미즘
자신이 부분이 되는 시스템과, 동물과 식물 그리고 인간 모두를 포괄하는 생태학적이고 생물학적인 시스템의 유사에 그들의 사회시스템을 비춘다.
그런 것은 환상에 의해 억지로 짜맞추어진 부분도 있으며 또 환상이 사회 구성원에게 부과하는 행동에 의해 실제로 두 시스템이 비슷해지는 부분도 있다.
서양인들은 신화의 체계를 빌어 가문을 드러내 보였는데, 토테미즘이 가지는 이러한 자기 과시성이 확대됨에 따라 자연계와의 결합이라는 본래의 웅대한 세계관을 상실하고 하찮은 말장난만 무성해지는 사태가 발생했다.
토테미즘이 이렇게 타락해가는 세속화과정의 배경에는 우리가 더 이상 인간과 사물과의 관계를 파악하지 않고 한쪽 끝의 관계되는 사물이나 인간에게 관심을 집중시킨다는 의미가 자리잡고 있다. 그리하여 이미 자연과 인간을 함께 둠으로써 얻을 수 있었던 새로운 정보나 계시를 잃어버리고 살벌한 인식론만이 뒤에 남았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아이들에게 하찮은 자연의 역사와 예술을 주입시킴으로써 아이들은 동물적이고 생태학적인 본성과 생의 미학을 망각한 채 훌륭한 비즈니스맨을 목표로 삼고 있다.
현대는 자연의 역사를 이솝화한 것이고, 종교는 이기적인 권위가 아닌 오락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3. 가설설정
우리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계에 너무 익숙해져 그 세계를 보잘 것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고방시에 갇혀 있다. 이로 인해 가설설정이 가능하다. 즉 세계의 어떤 사건이나 사물을 먼저 describe하고, 그 description을 위하여 고안한 것과 똑같은 규칙에 들어맞는 비슷한 예를 찾아가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이 얼마나 경탄스러운 일인지 거의 느끼지 못하고 살아간다.
가설설정을 행할 수 없는 세계에서는 사고가 모두 정지해 버릴 것이다.
터무니없는 공상일지라도 그들의 자연관은 사회체계에 의해 지탱되고 있으며, 반대로 그 사회체계는 그 자연관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
자연에 대해서나 사회에 관점을 바꾸는 것이 몹시 어려운 일이 되었다. 안정을 얻은 대신에 경직성마저도 떠맡게 된 것이다. 서로를 지탱하는 전제가 엮어내는 한 없이 복잡한 네트워크 속에 갇혀서 태어나는 것, 이는 모든 인간의 공통된 숙명이다.
생물체의 구조와 기능부터가 결코 자신의 내적 일관성을 무너뜨리지 않는 하나의 가설설정 시스템이라고 볼 수 있으며, 생물을 둘러싼 환경도 내적일관성을 갖춘 가설설정 시스템이다.
생물체의 내적 요청은 구석구석에 이르기까지 보수적이다.
제6장 거대한 스터캐스틱한 과정
학습에서나 유전에서나 어떤 국면에서든 무작위적인 사건의 흐름이 있으며 또한 그 무작위한 사건중 일부만을 뽑아 다른 부분보다 오랫동안 존속시키는 작위적인 선택과정이 있다고 생각한다. 무작위성 없이는 새로운 것은 생겨나지 않는다.
진화와 체세포적인 변화는 근원적으로 유사하며 양쪽 모두 본질적으로는 스터캐스틱한 과정이고 양자의 차이는 과정 작동의 기준이 되는 관념이 속해 있는 로지칼타입의 차이에 불과하다.
2개의 과정중 하나는 개체의 내부에 있는 시스템인데, 이를 학습이라 부르고, 유전과 개체군에 내재하는 시스템으로 이를 진화라 부른다.
1. 라마르크 학설의 오류
아우구스트 바이스만은 체세포와 생식질 사이에는 커뮤니케이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가 생식질이라 보르는 흐름, 즉 한 세대에서 그 다음세대로 계승되어가는 원형질의 연속적 흐름이 있으며 이 생식질에서 세대마다 분파된 것이 체세포 또는 표현형으로서의 신체가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RNA가 DNA의 어떤 부분의 각인을 동일 세포 내의 다른 부분으로 전달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이두박근에서의 화학적 변화의 각인이 생실질에 전달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만은 아니다.
라마르크가 말한 유전이 자연계의 법칙이라고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일반적인 사건이라고 한다면 유전과 학습을 복합한 스터캐스틱한 과정으로서 전체 시스템은 정지해버린다는 이론이다.
2. 용과 불용
생물계를 둘러볼 때 용과 불용의 결과가 대대로 전해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누구의 눈에나 분명할 것이다. 그러나 이를 사실로서 받아들이면 개체의 자유로운 적응능력이 몇 세대도 되지 않아 완전히 상실되어버릴 것이다.
용과 함께 나타나는 체세포 변화는 일반적으로 적응성이 있기 때문에 그와 같은 변화에 어떠한 형태로든 기여하는 유전적 제어는 유익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변하지 않는 환경 조건에 체세포적 변화로써 적응하는 경우가 있다. 고산지대에 정착한 종은 고산지대 특유의 기후나 낮은 기업에 대한 적응을 유전적 결정에 맡기더라도 손해는 없다.
반대로 변동과 역행을 반복하는 상황에의 적응은 체세포적 변화에 의존하는 것이 훨씬 이익이다.
즉 일시적인 긴급상황에서 직접적이고도 가역적인 체세포 변화로써 대응하는 편이 적합하다.
순화 acclimation - 순화는 수많은 전선 - 심장, 헤모글로빈, 흉부근육조직- 에서의 수많은 변화에 의해 쟁취되는 데 비해 긴급조치는 보통 개별적으로 그 국면에 한정된다. 순화한다는 것은 생물이 보다 심각한 경직성에 대한 대가로 표면적인 유연성을 사는 것이다.
생물은 항상 유전적 변수에 의해 이완되는 스트레스를 어느 정도 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기존의 스트레스를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유전적 변화를 작용시키는 것은 곤란하다. 변수의 허용한계치를 상하로 이동시켜주는 유전적 변화가 필요하다.
80톤이나 되는 왕고래에게 왜 200그램 정도의 넓적다리밖에 달려있지 않은가는 더 이상 수수께끼가 아니다.
유전적 메시지는 동사나 명사로 표기되는 우리의 언어와는 전혀 다른 형태로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진화를 생각할 때에는 한 번에 하나의 결과밖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으나 그 단일한 결과의 배후에는 몇 가지의 원인이 서로 협력하여 작용하고 있다.
3. 유전적 동화 genetic assimilation
체세포적 변화는 유전적 변화에 선행할 수 있으며 따라서 유전적 변화를 모방자로 보는 편이 적절할 때가 있다.
개체 단계에서 환경과 경험이 체세포적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개체의 유전자는 이 단계에서는 영향을 받지 않는다. 획득형질의 직접 유전은 있을 수 없다. 선택없이 획득형질을 유전시키는 것은 체세포적 변화가 가지는 유연성을 비가역적으로 소모시키는 것이다.
개체군 단계에서 적절한 표현형 선택이 이루어질 때 환경과 경험은 그 선택망에 걸린 적응도가 높은 개체를 만들어낼 수가 있다. 이러한 범위에서 개체군은 라마르크적인 유전의 단위로서 행동한다.
4. 체세포적 변화와 유전적 제어
메타변화를 수행하는 능력은 유전적으로 결정될지도 모르지만 변화의 능력을 변화시키는 능력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학습하는 것을 학습하는 것은 가능하다. 학습해 대해 학습하는 것을 다시 학습하는 것도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그 이상은 무리이다.
5. 무에서 유는 생기지 않는다는 발생설
진화의 학습이 필연적으로 발산적 divergent이고 예측 불가능한 것임에 비해 발생은 수렴적 convergent이어야 한다.
정자는 전형적으로 적도의 조금 아래에서 알 속으로 들어오게 되는데, 그 점과 2개의 극을 포함하는 면이 개구리의 좌우대칭의 축면이 된다. 알은 맨 처음 그 면을 경계로 해서 분열한다. 그리고 정자가 들어온 쪽이 배가 된다.
분열과 성장을 위해서라면 정자는 필요치 않다. 차이의 표시자로서 작동하며, 어떠한 차이를 표시하는가는 문제되지 않는다. 차이의 표시가 없으면 배는 생기지 않는다.
외배엽과 중배엽은 완별할 정도로 대칭적이지만, 내배엽인 소화관, 간장, 췌장 등은 완전히 비대칭적인 점은 모든 척추동물에 공통적이다.
내장 역위의 경우 개구리에게도 발생하지만, 확률은 낮다. 인간의 경우 100만명중 1명 꼴이다.
현실적으로 역위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기관의 좌우 배분이 분자의 좌우 비대칭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님을 나타낸다.
왼쪽과 오른쪽을 사전에서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언어뿐 아니라 어떠한 디지틀 시스템으로도 이 문제는 해결할 수 없다.
6. 상동 homology
어떤 변화는 확률이 높아 간단하게 일어나며 또 어떤 변화는 너무 어려워 일어나기 어렵다. 이러한 세계에서 완만하게 진행되는 변화는 뒤에 남겨져서 상동의 기반을 이룬다.
곤충의 유충은 성충에 뒤지지 않게 놀랄만큼 다양성을 나타내 보인다.
일반적으로 유사가 차이보다 시간적으로 더 오래되었다. 유사가 상동보다 오래된 점이야말로 각 생물이 분지수 branching trees 위의 점들이나 자리들로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가설을 증명한다.
고양이 크기밖에 되지 않는 바위너구리는 하마와 비슷하며, 사자도 고양이와 상당히 비슷한 면을 갖고 있다.
차이라는 광대한 영역을 분류할 때 전통적으로 이용되어온 이분법은, 패턴의 특징이냐 양의 특징이냐로 보는 것과 연속적인 특징이냐 비연속적인 특징이냐로 보는 방법이 있다.
톰슨은 형태가 크게 다른 두 생물이 관련되어 있는 것을 보여주는 모자이크도를 제시한다
변형이 그렇게 단순하면서 일률적인 것은 양자의 표현형 사이의 차이, 비교적 소수의 유전자형의 차이에 의해 나타난다는 사실을 뜻한다.
변형이 동물의 몸 전체에 일률적으로 미치고 있다는 것은 또한 그러한 유전자가 다면적으로 나타나며 변형이 몸 전체의 조화를 담당하고 있음을 추측케 한다.
표현형을 결정하는 유전적 메시지나 고정적인 신호 속에 유형론적인 사고와 통합론적인 사고를 나누는 신택스가 내포되어 있는 추정을 한다.
동물은 비교적 유사토폴로지컬한 패턴을 갖고 있다.
7. 적응과 탐닉
무작위적인 유전적 변화로부터 종에 보탬이 되는 것만이 자연선택에 의해 선별되거나 무작위적인 시행 착오에 의한 사고과정으로부터 개체에 보탬이 되는 것만이 강화에 의해 선별되는 일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또한 개인차원에서 환영될 만한 것이 그대로 사회적으로 생존적 가치를 갖느냐 갖지 않느냐 혹은 반대로 사회를 대표하는 구성원들이 선호하는 정책이 개개인의 생존을 이롭게 하느냐 등은 모두 앞으로의 역사전개가 결정할 문제이다.
8. 스터캐스틱한 과정, 발산과정, 수렴과정
영원의 눈으로 바라보면 만물을 무한의 공간과 무한의 시간 속에 놓고 파악하게 되며 모든 사건을 전부 스터캐스틱한 연속 속에 놓게 될 것이다.
우리들은 우주의 극히 한정된 영역 안에서 극히 일순간의 삶을 살고 있을 뿐이다. 그러한 우리들에게 시스템이 발산한다는 것은 아주 현실적인 문제이며 무질서로의 타락이냐 혁신으로의 상승이냐 하는 절박한 의미를 안고 있다.
각 세대에서 행해지는 유성생식은 새로운 개체의 DNA 청사진이 이전의 개체와 너무 달라지지 않도록 제어하고 있다. 발생은 수렴적 시스템이며 보수적인 시스템이다.
9. 2개의 스터캐스틱한 과정의 비교와 결합
2개의 구성요소는 먼저 무작위적인 요소가 있고 이어 무작위적으로 생겨나는 것을 선별하는 선택과정이 있다.
발생은 토대를 이루는 것과 그 위에 부가되는 것과의 결합의 연쇄, 즉 양립성 검열의 연쇄이다.
새로운 것이 이전의 것보다 더 나쁘지 않다는 것, 이것이 언제나 중요하다.
환경과 생리적 기능이 체세포적 변화를 제안한다. 그 생존의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것은 유전적으로 결정된 그 시점에서의 유기체의 상황이다.
게놈은 적응 선택 통로의 기억장치라 할 수 있다.
다윈은 후에 획득형질의 유전이나 진화가 진행되기 위해서는 지질학적인 시간으로 부족하다는 데 생각이 미쳐 종의 기원 후기 판에서는 라마르크학설을 받아들인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이 진화에 필요한 시간은 도브잔스키가 발견한 것처럼 진화의 단위가 개체군이며 개체군 안에 광범한 유전 가능성이 저장되어 있다고 하면 대폭 단축될 것이다.
모든 생물의 세포는 놀라운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모든 세포 유기체를 하나로 연결시키는 패턴이 세포에 있다는 사실은 먼저 세포의 상동으로부터 패턴이 확보됨을 말한다.
배우자 형성에서부터 수정 직후까지 생물의 초기단계에 상동이 가장 많이 나타난다고 주장하는 것은 상동의 정도를 양적으로 결정하려는 태도이다. 즉 염색체의 수, 유사분열의 패턴, 좌우대칭, 5개의 발가락, 중추신경시스템 등의 각 특징에 어떤 가치를 부여하려는 것이다. 양이 결코 패턴을 결정하지 않는 세계에서 이와 같이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지나치에 인위적인 일이다.
배의 형태 패턴의 유사성이 성체의 형태 패턴 유사성보다 큰 것은 어떤 이유일까?
체세포적 변화는 일반적으로 적응성을 갖고 있다.
체세포적 적응은 언제나 유전적 변화의 컨텍스트를 만들어내고 있으나 실제로 유전적 변화가 일어나느냐 아니냐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창조적 사고는 반드시 무작위적인 요소를 포함한다.
사고나 관념을 검열해 보는데 2가지 방법이 있다.
일관성의 검열 - 새로운 관념이 이미 알려져 있거나 통용되는 관념과 서로 견주어볼 때 의미가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검열이다. 의미라는 것도 천차만별이지만, 논리라는 것이 현상계의 활동을 파악하는 데는 너무나도 빈약하다.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 자체는 이미 보유하고 있는 관념의 교체나 재구성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한다.
사고과정에서의 엄밀성은 진화에서의 내적일관성과 같은 것이다.
문화사 학자들은 몇 세대에 걸친 형태적 유사를 세계 문화사에서 엿보게 되었으며, 동물학자들이 추구한 상동과 같은 문화의 패턴을 찾아내었다.
생물의 행위는 모두 어느 정도 시행착오적이다.
제7장 분류에서 과정으로
설명의 한 종류는 과정 또는 현상집합체에 하나의 추상적인 토톨로지를 제시하고 그 위에 description을 지도화한다.
뇌는 뇌 자체를 구성하는 신경통로와스위치 시스템과 신진대사물 이외에 아무 것도 포함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하다.
또한 정신 속에는 뉴런도 없고 있는 것이라고는 돼지나 코코넛에 대한 관념 뿐이다.
이름은 이름지어진 사물 자체가 아니며 돼지에 대한 관념도 돼지 그 자체는 아닌 것이다.
개나 고양이는 논리를 구축하고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나 그들도 세계를 아무런 추론 없이 받아들이는 것만은 아니다. 본래 지각과정 자체가 하나의 로지칼타입을 설정하는 행위이다. 이미지 하나하나가 몇 개의 단계를 걸쳐 복잡하게 기호화되고 지도화된 그 집대성이라 할 수 있다.
사물들 및 살아있는 것들조차 서로를 직접 경험할 수는 없다.
대칭형을 이루는 상호작용과 상보형을 이루는 상호작용이 서로 상쇄적으로 작용한다.
체세포적인 상황이 유전자 구조에 직접적인 작용을 미치게 되는 것을 허용한다면 생물체 내의 조직의 상하단계는 붕괴해 버리고 말 것이다.
윌리엄 블레이크 - 현명한 사람은 윤곽을 본다.
제8장 그래서?
훌륭한 인간일지라도 너무 오랫동안 변하지 않으면 해독을 끼치는 쓸모없는 인간이 된다.
사슴이나 퓨마가 자신의 존재를 변명할 필요가 있을까
나는 오랫동안 멍청한 것이 종교의 필요조건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들은 신앙을 설교하고 복종을 설교한다.
마술로부터 종교가 발생했다는 것은 전통적인 사고방식인데, 실은 종교가 타락해 마술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야비한 물질주의를 벗어나는 것은 기적이 아니라 미 beauty이다.
미의 문제에 대해서나 의식의 문제에 대해서 아직 한 사람도 답하지 못했다는 것은 이유가 있다. 있지도 않은 거위 사냥에 나선 것이 되었을 수 있다.
정신이란 일종의 부분들의 조직화 안에 내재한다.
외계에서는 정적인 차이라도 우리가 그 차이들과 관련하여 움직이면 사건이 발생할 수 있다.
가장 아름다운 답은 가장 어려운 문제를 묻는데 있다.
의식이 개처럼 혀를 내밀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니까 어정쩡한 물음에 야비한 답이 나오려 한다. 이런 것을 시니시즘 cynicism-냉소주의 라고 한다. 성스러움의 본질이나 미의 본질을 의식으로 파악하려는 것은 축소주의의 어리석음이다.
부록 혼돈의 시대
로마카톨릭교회가 라틴어의 공용을 포기한 반면에 젊은이들은 산스크리트어를 암송하는 현실은 결코 우연한 일만은 아니다.
달리는 자전거의 균형의 법칙을 운동신경이 거의 무의식적으로 인지할 때만이 자전거를 타고 자유롭게 달릴 수 있다.
생물에게서는 내적인 선택작용이 항상 이전의 상황과 양립성을 유지한다는 점, 그리고 그 작용이 오랫동안 진화해 오면서 일관되게 나타난 것이 상동이다. 바꾸어 말하면 내적 선택의 보수성이 발생의 절차와 추상적인 형태의 고수에 가장 강력하게 발휘된다는 것이다.
보수적, 급진적, 진보적 이런 이름에는 어떤 인식론의 진리가 작용하고 있다. 이 진리는 사람들을 분류하는 이 대조의 극이 실제로 살아있는 세계를 구성하는 변증법적인 대조의 극이라는 점을 주장하고 있다.
생물 진화에서의 규칙은 간단명료하다. 개체가 직접 받게 되는 몸의 기능적 변화가 그대로 개체의 유전적 기호를 좌우하는 것을 막는 한편,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의 차이는 자연선택의 검열을 통해 능력이 모자라는 것은 도태되어 결과적으로 개체군 전체로서 변화해 나간다.
단순히 구조적 변화를 촉진시키는 것이나 또는 단순히 기능적 변화를 억제하는 것만으로는 시대에 뒤떨어짐을 피할 수 없다.
보론 : 이중구속이론을 중심으로 한 7편의 논문들 - 그레고리 베이트슨
Mind and Nature - A Necessary Unity
Steps to an Ecology of Mind 중에서 7개 장 번역
Social Planning and the Concept of Deutero-Learning
A Theory of Play and Fantasy
Toward a Theory of Schizophrenia
Minimal Requirement for a Theory of Schizophrenia
Double Bind
우리들은 음악이라는 예외를 제외하고는 패턴이라는 것을 고정적으로 받아들이도록 훈련받았다.
영원의 눈으로 바라보면 만물을 무한의 공간과 무한의 시간 속에 놓고 파악하게 되며 모든 사건을 전부 스터캐스틱한 연속 속에 놓게 될 것이다.
생물체의 구조와 기능부터가 결코 자신의 내적 일관성을 무너뜨리지 않는 하나의 가설설정 시스템이라고 볼 수 있으며, 생물을 둘러싼 환경도 내적일관성을 갖춘 가설설정 시스템이다.
논리라는 것이 현상계의 활동을 파악하는 데는 너무나도 빈약하다.
서평
그레고리 베이트슨이 제시하는 패턴이라는 개념은 단순히 시스템이라는 차원을 넘어서 세상을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새로운 사고의 유형이다. 인간이나 각종 생물이 인지하는 방법이 원래 패턴인데, 서구 철학이나 방법론이 고정된 단어적인 지식의 습득을 강요하여 인간의 지능 또한 그렇게 발달해 온 것이라는 것이다. 이 책에서 제시하는 각종의 주제를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저자가 사유해 온 고민의 흔적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책이다.
근래에 보기 드문 지혜와 통달이 엿보이는 책이고, 누구나가 이 책의 사유 방법을 받아 들여서 자기화하기를 바란다. 단순히 이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사물의 이치를 깨닫는 또다른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기에 현실생활을 하는 개개인에게 생활 자체에 적용가능한 자기만의 방법을 가르쳐 줄 것이므로, 지대한 가치를 지닌 책이라 보인다.
제1장 서론
현재의 제도교육은 해안이나 미국삼나무숲과 사막 또는 초원 등과 같은 자연에 대해 거의 아무 것도 가르쳐주지 않고 있다.
정신은 사고하는 인간의 외부에 있는 자연계의 커다란 부분 또는 수많은 부분들의 반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나치게 단순한 사상이 세련된 사상을 구축하고 조악하고 적의에 찬 것이 아름다운 것을 구축해 버린다. 그러나 아름다운 것은 여전히 존재한다.
생명이 있는 세계와 당구공이나 은하계와 같은 생명이 없는 세계가 어떠한 근본적인 개념에 의해 구분되고 있는가, 이 2개의 세계를 융은 생명이 있는 크레아투라 creatura와 생명이 없는 플레로마 pleroma라고 부른다. 힘과 충격이라는 개념으로 충분히 설명이 가능한 플레로마의 물리적 세계와 차이와 특징없이는 무엇하나 이해할 수 없는 크레아투라의 세계의 차이는 무엇인가?
학습하는 사항을 연결시키는 패턴을 파괴하는 것은 곧 모든 질을 파괴해 버리는 것이 된다. 게와 새우를 연결시키는 패턴은 무엇일까? 살아있는 모든 것을 연결시키는 패턴은 무엇일까?
미적이란 연결시키는 패턴에 대해 예민하게 감응한다는 의미이다.
게의 집게발이 크다는 것이 생명의 증거일까? 좌우 집게발의 크기가 다르지만 어느 쪽이나 같은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은 크기와 같은 것이 1차적이고 근본적이며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는 보잘 것없는 사고를 정중하게 쓰레기통에 버리고, 연결시키는 패턴에 눈을 돌리는 것이다.
게의 구조는 반복이 많으며 리드미컬하게 이루어져 있다. 실제로 머리에서 몸통 끝 쪽을 향해 훑어 내려가면 그 구조와 시간의 흐름이 대응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의 다리뼈와 말의 다리뼈가 형태적으로 닮았다고 하는 클래스를 생물학에서는 계통발생적인 상동homology이라고 한다. 게의 부속기관과 새우의 부속기관의 형태적인 유사도 이러한 예에 속한다.
연속적 상동 serial homology는 몸통의 위에서 아래로 향해, 각 부속기관마다 나타나는 변화를 수반한 리드미칼한 반복을 말하는데, 좌우대칭도 이러한 클래스에 속한다.
게의 각 부분은 좌우대칭, 연속적 상동 등 다향한 패턴에 의해 서로 연결되어 있다.
사람이나 말에게 눈을 돌려보면 각각에 좌우대칭과 연속적 상동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에서도 형태와 패턴과 관계가 크기보다 본질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서로 연결시키는 것이 패턴이다.
수면의 소용돌이나 은하수, 회오리바람 이외의 자연계의 나선은 모두 생물에 의해 만들어졌다. 피보나치 수열과 홤금분할의 예를 생각하면 당연할 것이다.
나선이란 형태를 유지하면서 성장방향을 따라 1차원적으로 성장할 때 생기는 형태이다.
그러므로 모든 대칭성과 체절구성은 성장의 결과이며 귀결이며, 성장은 고유의 형태적 특징을 만들어내고, 나선이라는 형태에 의해 이 두 가지 중 어느 한쪽이 만족된다.
소라껍질에는 이 생물이 그 발생과정에서 어떠한 패턴 형태로 형태상의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해 왔는가 하는 기록이 그려져 있다. (프로크로니즘 prochronism)
우리들은 음악이라는 예외를 제외하고는 패턴이라는 것을 고정적으로 받아들이도록 훈련받았다. 서로 연결시키는 패턴을 시작하기 생각했을 때 올바른 길은 그것이 1차적으로 상호간에 서로 반응하는 부분이 연출해내는 하나의 춤이라는 것과 2차적으로는 여러 가지 물리적인 한계와 각 생물체가 갖고 있는 고유한 장애에 의해 고정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학습한 것이 무엇이든 나의 학습은 중요한 타인의 행위에 의해 내 경험의 연속 안에서 일어난 것이다. 바라 보는 것을 어떤 컨텍스트 안에 놓고 보지 않으면 아무 것도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이 바라봄을 전이 transference라고 하는데, 이것은 인간관계에서도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통상적으로는 상동의 사실을 증거로 삼아 진화가 존재한다고 증명하고 있으나 진화의 존재를 전제로 상동의 본질을 탐구해 보자.
코끼리의 경우 코라는 것은 양쪽 눈 사이와 입 위에 있는 것을 코라고 정의하지만, 냄새맡는 기능으로 코를 정의하려는 사람도 있다. 기능을 생각한다는 것은 그 기관이 생물과 환경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에 의해 주어진 역할을 한다고 보므로, 시간적 컨텍스트라고 부르는데, 공간적 컨텍스트와 결국은 동일한 지점에 이른다. 컨텍스트의 시간적 분류와 공간적 분류가 서로 교차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말해 코끼리 태아의 코는 아무런 냄새도 맡을 수가 없다. 발생이란 형태적 formal 이다.
명사가 사물이나 장소나 물건의 이름, 동사가 동작을 나타내는 말이라는 한심스러운 것을 배우지 말라. 명사란 술어와 어떤 관계를 가지는 말이며 동사란 그 주어진 명사와 어떤 관계를 가지는 말이라는 식의 교육방식을 학생들이 따라오지 못할 리 없다.
동식물의 형태는 메시지의 변형에 불과하다. 언어도 그 자체가 정보전달의 한 형태이다. 생물체의 구조는 모두 메시지를 만드는 물질적 재료의 변형이며 그곳에서 일어나는 형태구성이 컨텍스트에 의한 것이라면 생물체 구조 속에도 문법에 상당하는 것이 반드시 있다는 것, 컨텍스트에 의한 형태구성이란 문법의 별칭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대조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동떨어진 인식론이라도 최종적 통일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서로 비슷하다.
미적 통일성의 상실이 우리들의 인식론상의 커다란 잘못이었다.
논리는 언제나 회귀적인 순환을 논할 경우 자기 모순에 빠지지 않을 수 없으며 양은 엄밀하게 말해 정보전달체계들의 복합물이 아니다.
제2장 학교다니는 아이라면 모두 ~~~ 알고 있다.
과학은 전제를 토대로 한다.
학생들의 교육받은 결과로 사고에 필요한 어떤 도구의 결핍이 드러난다. 이들에게 결여된 것은 과학의 전제뿐 아니라 일상생활의 전제에 대한 인식이다.
카톨릭계의 학생들과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하는 학생들에게는 이러한 인식의 결여가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과거 2500년간의 인간 사상에 대해서 스스로 생각해본 적이 있거나 남들로부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믿고 있는 올바른 전제에 너무나도 큰 중요성을 부여하고 이단적인 생각은 파문의 위협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단을 위험시하는 인간은 당연히 자신의 전제에 대해 애써 의식을 하려고 하며 이러한 일에 대해서 나름의 안목을 키우게 된다.
1. 과학은 아무 것도 증명하지 못한다.
2,4,6,8,10,12 다음에 오는 수는 14일 수도 있지만, 27일 수도 있다.
2,4,6,8,10,12,27, 2,4,6,8,10,12,27, 2,4,6,8,10,12, 27
그 다음에 오는 수는 2라고 말할 것이다.
이는 오캄의 면도날 Occam’s razor라 불리는 전제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즉 사실에 부합하는 가장 단순한 추측을 선호하는 절약의 법칙 때문인 것이다.
불행하게도 다음에 오는 사실을 결코 미리 손에 넣을 수는 없다. 고작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단순했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또한 다음에 오는 사실은 언제나 우리들을 한 단계 더 높은 복잡한 수준으로 이끌고 갈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다.
패턴은 추가와 반복에 의해서 또는 그 패턴을 새롭게 지각할 것을 강요하는 그 어떤 사건에 의해서 바뀌거나 파괴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결코 절대적인 확신을 갖고 예측할 수 없는데, 그것은 그들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절대 확실한 예측이란 결코 있을 수 없다. 과학은 일반화된 명제를 결코 증명할 수 없다. 기술된 내용을 점검해감으로써 최종적인 사실에 도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과학은 지각하는 방법이며 우리의 지각에서 의미라고 불리는 것을 만들어가는 방법이라고 전제한다. 그런데 차이가 없으면 지각은 생기지 않는다. 우리가 받아들이는 정보는 어떠한 경우에도 차이의 전달과 다름없는 것이다.
지각하는 방법으로서의 과학은 사실일지도 모르는 것의 외재적이고 가시적인 기호를 모으는 것 이상은 불가능하다. 과학은 탐색할 뿐 증명하지 않는다.
2. 지도는 땅 그 자체가 아니며 사물의 이름은 그 사물 자체가 아니다.
지도 작성도 본질적으로는 일종의 이름 짓기나 다름없는 것이다.
3. 객관적 경험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경험은 주관적이다.
외계의 경험은 항상 어떤 특정의 감각기관과 신경통로에 의해 전달된다. 그런 의미에서 사물에 대한 나의 경험은 주관적인 것으로서 객관적일 수 없으며 곧 사물은 나의 창조물이다.
4. 이미지 형성 과정은 무의식적이다.
우리들이 지각의 과정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의식되는 것은 지각의 산물일 뿐이다. 내가 의식해서 보고 있는 이미지는 무의식 속에서 형성된 것이며, 이 무의식적 과정에서 내가 사용하고 있는 다종 다양한 전제는 이미 형성된 이미지 속에 짜넣어져 있다는 것, 경험적 인식론의 시작은 이 2가지 일반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자신들이 보고 있는 이미지가 뇌나 정신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으나 이것을 단지 지식으로서 알고 있는 것과 실제로 느끼고 깨달아서 알고 있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우리가 눈을 통해서 외계를 바라볼 때 우리들은 5개의 주요한 단서들을 사용하여 우리가 만들어내는 상에 원근감을 주고 있다.
크기는 망막에 비친 물리적인 상의 크기로서, 물체의 양끝과 안구의 중심이 만드는 각도라는 편이 더 정확할지 모른다. 시신경에 전달되는 것은 시각의 변화로 이 변화의 정도가 눈에서 물체까지의 거리를 만드는 단서가 될 것이다.
밝기의 대조도 마찬가지다. 즉 크기, 밝기, 중복, 양쪽 눈에 의한 시차, 머리의 이동에 의한 시차, 이 5가지가 원근감을 만들어내는 단서이다. 가장 강력하게 작용하는 것은 머리의 이동에 의한 시차이다.
##실험방법은 49면##
멀리 있는 것은 작게 보인다는 누구나 익히 알고 있는 우주의 법칙이 실은 지각과정 속에 깊이 묻혀 있다. 자연사 수준에서 형성되어온 인식론 epistremology은 거의 대부분이 무의식적인 것이며 바꾸려고 해도 그렇게 간단히 바꿀 수 없다.
사다리꼴 방의 실험에서, 훈련을 쌓아가며 능숙해짐에 따라 시각상 자체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고, 방이 실제 사다리꼴 모양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지각이 정신의 눈에 비추고 있는 상의 지배는 직접적인 것으로 자유의지의 개입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부단한 훈련과 자기 수정에 의해 그러한 상들을 부분적으로 바꾸어 나가는 것은 가능하다.
결론적으로 정보가 어떠한 영역을 통해서 전해질 때는 상의 형태가 편리하고 경제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5. 지각되는 세계가 부분과 전체로 나누어지는 것은 편리하고 필연적일지도 모르지만, 어떻게 나눌 것인가 하는 결정에 필연은 작용하지 않는다.
이 도형이 어떤 도형인지 언어로 기술하라는 문제에서, 장화라든지, 극단적인 대답을 한다. 이와 같은 유추적 도상적 기술로서는 그것을 들은 사람이 원래의 도형을 재생하기란 어려운 것이다.
압도적으로 많이 나오는 답은 직사각형과 6각형으로 이루어졌다고 보고, 2개의 부분으로 나누어서 기술한다.
극히 소수의 사람은 정육각형의 존재를 예측한다. 그들은 상상력으로 어떤 존재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사용해서 지각되는 규칙성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일종의 과학적 가설을 마련한 것과 다름없다.
6. 발산되는 연속은 예측할 수 없다.
유리창에 돌을 던질 때, 방사상으로 깨지는 조건하에서 깨지는 방향의 진행을 예측하거나 혹은 어떤 특정한 파손을 유도할 수 있도록 돌을 던지는 것은 불가응하다. 흥미로운 점은 실험 정도를 높여감에 따라 결과의 예측 불가능성도 높아진다는 것이다.
유리표면에 굵힌 자국을 만들어두거나 처음부터 흠이 있는 유리를 사용할 경우, 어느 정도 대략적인 예측을 세울 수 있다. 이유는 알지 못하지만 유리의 균열은 흠집에서 1인치의 1/100 벗어난 곳에서 흠집과 평행을 이루며 생긴다고 예측하면 일단 틀림없다.
어떤 일정한 사회적인 힘과 긴장상태 속에서 어떤 형태로든 도화선에 불을 당기는 개인이 반드시 나타나게 되는데, 그것이 누구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7. 수렴하는 연속은 예측할 수 있다.
방산하는 연속에서 중요한 것은, description이 개체, 특히 개개의 분자를 주제로 한다는 점이다.분자의 브라운 운동도 예측할 수 없는 발산의 연속이다.
확률의 법칙은 개체의 행동에 관한 description과 큰 집단의 행동에 관한 description과의 중간역할을 맡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의 역사관은 사회 전체의 변동과정이 각각의 독자성을 지닌 개개인의 사건으로 수렴된다고 하는 근본적으로 무리한 이론을 적용시키려는 불행한 노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8. 무에서 유는 생기지 않는다.
질량보존의 법칙, 에너지 보존의 법칙, 실험실에서 새로운 생명의 출현을 기대할 수 없다는 파스퇴르에 의해 입증된 원칙, 그리고 새로운 질서 또는 패턴은 정보 없이는 만들어낼 수 없다는 원칙이 그것이다.
메시지가 아무에게도 읽혀질 수 없게 되었을 때 그것은 메시지로서의 기능을 잃어버린다. 고대 이집트 문자도 로제타스톤이 없이는 파피루스나 바위에 그려진 우아한 장식문양에 지나지 않는다. 의미를 이루기 위해서는 모든 규칙성이 그것을 보완하는 별도의 규칙성 혹은 기능과 만나지 않으면 안된다.
메시지에 반응하는 기능의 발생이 진화과정의 또 한 측면을 형성하고 있고, 이것이 연계진화 co-evolution이다.
모순되게도 정보와 유기체의 세계에서 ‘무에서 유는 생기지 안는다’는 심오한 진리가, 정보가 되는 사건이 전혀 없는 것이 하나의 메시지가 될 수 있다. 진드기의 유충이 나무 위에서 땀 냄새에 따라 가지에서 떨어져 포유류에 기생하는데, 몇 주를 기다려도 땀 냄새가 나지 않을 경우 역시 떨어져서 다른 나무 위로 올라간다.
편지를 쓰지 않는 것, 사죄하지 않는 것 등은 충분하고 효과적인 메시지가 될 수 있고, 0도 컨텍스트 - 문맥에 따라 의미를 갖게 된다.
관념적으로는 발생은 공리와 정의만 정해지면 그후에는 아무 것도 추가되지 않는 복잡한 토톨로지의 성립과정과 유사하다. 피타고라스의 정리는 유클리드 기하학의 공리와 정의와 공준을 사용하여 쌓아올린 형태로 되어있다. 인간에게는 풀어가는 순서에 관한 지식이 필요하다.
발생과 토톨로지는 반복과 모방의 세계를 구성하는 한편, 창조, 예술, 학습, 진화로 이루어진 세계에서는 변화의 과정이 무작위한 것을 양식으로 삼아 진전된다. 발생의 본질은 예측할 수 있는 반복이며 학습과 진화의 본질은 탐구와 변화이다.
문화의 전달에서 인간은 항상 모방을 시도한다. 그러나 문화의 전달이 DNA에 의해서가 아니라 학습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실패한다.
하여튼 2개의 세계를 연결하는 것으로서 설명이란느 문화현상이 존재한다. 설명이란 익숙하지 않은 사건의 연쇄의 토톨로지 위에 지도를 그리는 것이다.
생물이 새로운 돌연변이를 모으는 것은 무작위의 세계로부터이며, 스토캐스틱한 학습이 해답을 모으는 것도 무작위의 세계로부터이다.
학습은 정신을 포화상태로 이르게 한다.
9. 수와 양은 다른 것이다.
수는 센다고 하는 행위의 산물이며, 양은 측정한다는 행위의 산물이다. 정수 사이에는 불연속이 있지만, 양의 경우에는 비약이 존재하지 않는다. 비약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어떠한 양도 정확하지 않다.
토마토가 세 개 있다고는 할 수 있으나, 물이 딱 3리터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양이란 항상 실물에 근사할 뿐이다.
수와 양 이외에 패턴이라고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개념이 있다. 모든 수가 세는 행위의 산물은 아니다. 작고 그러므로 일상적인 수는 흔히 셀 수는 없지만 한눈에 봤을 때 패턴으로서 인지되는 경우가 많다.
수는 패턴과 형태 gestalt와 디지틀 계산의 세계에 속하며, 양은 유추계산과 확률계산의 세계에 속한다.
생물계에 나타나는 여러가지 수에 대해서 그것이 형태의 예인지, 수를 센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단순한 양인지 의문을 제기해 본다. 홑장미가 꽃잎이 5장, 꽃받침이 5장, 5방향으로 대칭을 이룬다라는 description과 수술을 112개, 가지고 있다는 진술에는 두드러진 차이가 있다.
생물의 성장과정이 고정된 과정으로 다룰 수 있는 수의 상한선, 즉 그 선을 넘으면 양으로서 취급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생각하게 된다. 동식물이 대칭, 특히 방사상 대칭을 이루는 경우 2,3,4라고 하는 수가 가장 일반적인 것 같다.
비교적 큰 수가 규정받는 것은, 포유류의 등뼈, 곤충의 복부체마디, 지렁이의 전부 분절등의 직선적으로 연속된 마디를 이루고 있는 것들이다.
생물에서 어느 부분이 일정 수의 방사상 대칭을 이루는 경우 그 수가 다른 부분에도 다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백합은 꽃받침이 3장, 꽃잎이 3장, 수술은 6개, 암술에는 씨방이 3개 있다.
10. 양은 패턴을 결정하지 않는다.
패턴은 양이 작용하기 이전부터 그 시스템 속에 잠재하고 있다. 패턴은 양적 변화의 작용을 받기 이전부터 잠재해 있다가, 패턴이 바뀔 때 그 변화는 순간적이고도 비연속적이다.
11. 생물학에서 단조의 가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단조의 가치 monotone value란 상승 또는 하강만을 계속하는 가치이다. 생물이 갈망하는 물질, 물체, 패턴 혹은 생물이 어떠한 의미에서 좋다고 느끼는 경험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다. 즉 최적량이 존재한다.
이 생물적 가치의 특성은 돈에 비교할 수 없다.
전투가 없는 관계는 생기가 없고 전투가 지나치면 관계는 독성을 가지게 된다.
12. 때로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
물체를 하나로 연결시켜 고정시키는 힘과 중력에 의한 힘이 동일한 양적 규칙성을 따르지 않는데서 구조적 불안정성이 생겨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물리적 세계에서 작은 이유로 불안정해지는 경우가 있다. 표면적과 중량이 비선형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어떤 물질이든 용해시킬 때에는 잘게 부수는 것이 능률적인데, 작은 덩어리일수록 체적에 대한 표면적의 비율이 커져 그만큼 액체로부터 작용을 쉽게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큰 덩어리는 오래 견딘다.
참돌고래는 몰길이 약 1미터, 지방층의 두께 약 3센치, 표면적이 0.5평방미터의 동물인데, 북극해에서 알맞은 체온을 유지한다. 이 돌고래의 약 10배의 길이로, 100배의 표면적, 1000배의 체적을 가진 대형 고래에게는 두께 30센치의 지방층이 있는데, 어떻게 체온의 균형을 유지하는지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고래는 모두 혈액을 등지느러미와 꼬리로 보내 열을 방출하는데, 이 대형고래는 우리들의 이해범주를 넘어선 뛰어난 기호논리학을 구사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야자나무의 경우는 높이가 높아져도 그에 맞추어 몸통을 조절하지 않는다. 떡갈나무는 성장조직을 나무와 나무껍질 사이에 지니고 있어 일생 동안 높이와 굵기를 늘려간다. 그런데 코코야자나무는 성장조직이 줄기의 맨 꼭대기 부분 - 억만장자의 샐러드라는 부분으로, 이곳을 잘라버리면 죽어버린다.- 밖에 없으므로 오직 위를 향해 자랄 뿐이다.
백년초(유카-용설란의 일종)같은 식물은 몇십 년이나 사는데, 이는 연어와 마찬가지로 생식을 하는 동시에 죽어간다. 맨 꼭대기에 꽃이 많은 가지를 내는 것을 제외하면 유카에는 가지가 없다. 그 가지를 낸 꽃이 곧 유카 줄기의 끝이다.
고등동물에서는 생장이 조절된다. 어떤 일정한 크기, 연령, 단계에 달하면 더 이상 생장을 하지 않는다. 세포는 통제 아래서 성장과 분열을 멈춘다. 메시지의 발신이나 수신에 장애가 생겨서 그 통제가 이루어지지 않게 된 결과가 암이다.
13. 논리는 인과관계의 빈약한 모델이다.
삼단논법에서 사용되는 논리인 만약~이라면과, 인과관계에서 사용되는 만약~이라면과는 전혀 다르다.
원인과 결과의 연쇄가 순환을 이룰 때 그 연쇄를 무시간적인 논리로 바꾸어 기술하거나 지도화하려고 하면 모순에 빠지게 된다. 순순한 논리로는 처리할 수 없는 모순이 발생하는 것이다. 전체 생물계에서 보이는 몇백만 개의 항상성의 하나하나의 예가 이러한 모순을 안고 있다.
스위치로 전류를 흘러 보내는 시스템에서 인과적 관계를 나타내는 ~이면 ~이다에는 시간이 포함되어 있으나, 논리의 ~이면 ~이다에는 시간이 포함되어 있지 않으므로, 접촉이 이루어지면 접촉은 끊어진다라는 결과가 된다. 즉 논리는 인과관계의 모델로서 불완전한 것이다.
14. 인과의 역전은 있을 수 없다.
논리의 세계에서는 거짓도 참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으나, 결과는 절대로 원인에 선행할 수 없다.
생물학자들을 괴롭힌 문제는 적응이라는 문제였다. 게의 집게발이 물건을 집기 위해서 있다고 한다면, 집게발의 목적에서 출발하여 집게발의 발생의 원인으로 논리를 역행시키게 된다.
15. 언어는 통상 상호반응의 한쪽 편만을 강조한다.
언어는 주어와 술어라고 하는 구조에 의해 사물이 어떤 속성이나 성질을 갖고 있다라고 규정한다. 보다 정밀한 화법으로는, 그 내적인 관계들 및 다른 사물이나 화자와의 관계들 속에서의 행위에 의해 사물이 생산되며, 또 다른 사물과 구별되어 보이며 실재하고 있다고 표현해야 할 것이다.
16. 기술description의 각 부분은 안정 또는 변화라고 기술된다.
서커스의 외줄타기는 균형의 무너짐을 지속적으로 시정함으로써 안정을 유지한다.
지각 과정 자체 속에 단순함을 선호하는 오컴의 면도날 원칙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은 지각의 소재에 무엇인가 보다 철학적인 소재가 얽혀 있음을 의미한다.
제3장 세계의 변형들
1. 차이인 경우
정보가 전해지기 위해서는 그 상호관계 속에 차이가 내재할 수 있는 2개의 존재가 있어야만 한다.
2. 양안 시각의 경우
좌우 망막 위의 시신경은 놀랍게도 모두 수직으로 깎은 듯이 서있는 경계면에 의해 2개의 장치로 분리된다. 그런데 합성된 정보에는 수직경계면의 흔적이 모두 사라져 있다.
뇌가 이러한 두 개의 눈으로부터 들어온 정보를 공들여서 처리한 이유는 2가지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먼저 사물의 가장자리나 명암차에 대한 선명도가 더욱 뚜렷해져 작은 글자를 읽을 수가 있으며 어두운 빛 아래에서도 사물을 파악할 수 있고, 사물의 원근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형식논리학의 표현방법에 따르면 한쪽 망막에서 얻은 정보와 또 다른 망막에서 얻은 정보의 차이가 다른 논리계형 logical type에 속하는 정보 그 자체가 된다고 할 수 있다.
3. 명왕성의 경우
1930년 대학원 학생이던 윌리엄 톰보가 명왕성을 발견할 때, 이미 해왕성은 불규칙한 궤도를 나타낸다고 알려졌으므로, 해왕성 바깥쪽을 도는 작고 희미한 혹성의 존재를 어떻게 발견할 것인가의 문제를 해결했다. 천체의 다른 물체와 구별되는 점이라고는 인간의 눈으로는 지각하지 못하는 매우 느린 속도로 움직이는 것을 안다는 사실 뿐이었다.
그는 블링커 blinker라 부르는 장치로, 해당 천체를 시간 간격을 두어 사진에 담고, 2장의 사진을 재물대 형식의 건판에 두고, 레버를 순간적으로 움직여서 겹쳐진 사진 위에 똑같은 항성과 다른 존재를 알아낸 것이다.
4. 시냅스 가중의 경우
시냅스의 가중 synaptic summation이란 뉴런 C가 뉴런 A와 뉴런 B의 결합에 의해 비로소 발사되는 사례를 나타내는 신경생리각의 용어이다. 이 경우 곱셈에 가까운 논리를 생각해 낸다.
5. 환각 단검의 경우
하나의 감각에 의한 정보와 또 하나의 별개의 감각에 의한 정보를 비교하고 거기에 시각상의 변화를 결합시킴으로써 그는 자신의 결합이 환영이라는 메타 정보를 얻기에 이른다.
6. 이어동의의 경우
대수와 기하라고 하는 2개의 언어가 상호 번역 가능하다는 발견도 그 자체로서 이미 계발이다.
1에서부터 시작해서 10개의 홀수의 합은 얼마인가?
이 때
1에서부터 1개의 홀수의 합은 1
1에서부터 2개의 홀수의 합은 4
1에서부터 3개의 홀수의 합은 9
1에서부터 4개의 홀수의 합은 16
1에서부터 5개의 홀수의 합은 25
그러면 곧 방법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도형을 이용하여 알려주는 방법도 있다.
작은 사각형 하나와 세 개를 더하면, 큰 4개짜리 사각형 하나가 만들어지고,
작은 사각형 5개와 앞의 4개짜리 사각형 하나를 합치면 9개짜리 큰 사각형이 된다.
그런 식으로 시각화를 하면 더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97면##
7. 2개의 성sex의 경우
기계가 자기 복제를 할 때에는 2대가 협력하여 행하는 것이 필요조건일 것이라고 폰 노이만이 말한 적이 있다.
분열은 외관상 반드시 융합에 의해 끝이 난다.
만일 2개의 배우자로부터 실 모양의 물질의 차이가 너무 크면 수정이 일어날 수 없다.
8. 맥놀이와 모아레 현상의 경우
리듬 패턴의 경우 2개의 패턴이 결합하여 제3의 패턴을 만든다.
모아레현상 moire phenomenon은 2개의 서로 다른 주파수를 갖고 있는 음이 결합되어 발생하는 유명한 맥놀이 현상디ㅏ.
모아레 현상에는, 어떤 패턴도 2개가 적절하게 결합될 때에는 제3의 패턴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들 3개의 패턴 중 2개의 패턴으로 나머지 패턴도 기술할 수 있다.
시, 무용, 음악이라는 미적 경험의 본질에 접근해 가는 의문들은, 이러한 리드미컬한 현상은 아주 옛날부터 산문 이전에 인간과 함께 있었다고 보인다.
9. 기술 Description, 토톨로지, 설명의 경우
설명은 의심할 여지없이 아주 중요하며 또한 확실히 description에 포함된 이상의 통찰력을 보너스로 주는 것 같다.
기술과 설명이라는 2가지 유형의 정보조직을 연결시키는 것을 바로 토톨로지라고 부른다.
토톨로지에는 어떠한 정보도 일체 포함하지 않으며 설명은 description 속에 존재하는 정보밖에 포함하지 않는다. 설명은 description을 토톨로지 위에 지도화하는 것이다.
거울에 상을 비칠 때, 상과 하는 바뀌지 않지만, 좌우는 바뀐다. 상과 하가 외적인 언어임에 비해 좌와 우는 내적인 언어에 속하기 때문이다. 동과 서, 상과 하는 동일한 언어에 속하며, 좌와 우는 다른 언어에 속한다. 좌와 우라는 말은 정의하기 곤란한 것이다.
##좌와 우는 인간이 눈이 두 개이기 때문에 생기는 변이가 아닐까##
우리는 정보가 아닌 우리들 자신이 정한 만약 ~이라면의 세계로부터 빠져 나올 수는 없다.
우리들의 공준은 하나의 차원을 역전시키면 반드시 좌우 역전체stereo-opposite가 생긴다는 것이다.
몰리에르의 희극에 나오는 수면소 dormitive principles - 아편이 잠을 유발하는 효과가 있는 것은, 아편 속에 수면소가 있기 때문인가. 아편이 수면소를 함유한다는 명제를 참이라고 정해 버리면, 이러한 형태의 표현을 다른 많은 현상들에도 적용할 수 있다.
인간의 사고방식에는 2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모든 생물류에 공통된 자연의 사고이고, 하나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관례적-논리적 사고이다.
양안 시각의 예에서 보듯이, 탐구의 방법은 이중 또는 다중 비교의 방법을 사용하자.
제4장 정신과정의 기준들
만약 어떠한 현상의 집합체 곧 시스템이 목록화된 그 모든 기준들을 충족시킨다면 나는 주저없이 그 집합체를 정신이라고 말할 것이다.
기준1. 정신은 상호반응하는 부분 또는 구성요소들의 집합체이다.
정신과정은 항상 각 부분들 사이의 상호반응의 연속이다. 정신현상에 대한 설명은 항상 부분들의 조직화와 상호반응의 방식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기준2. 정신의 각 부분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반응의 방아쇠는 차이에 의해 당겨진다.
정신을 기술하는 것은 보통 물질세계를 기술할 때와는 전혀 다른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관념의 세계에서는 두 부분 사이에 혹은 시각1의 어떤 부분과 시각 2의 같은 부분 사이에 어떠한 관계가 존재함으로써 비로소 수신체라고 하는 제3의 구성요소가 활성화된다. 즉 수신체는 차이 혹은 변화에 대해 반응하는 것이다.
비생물세계에서 A가 B와 C의 차이에 대해 반응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변화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그것에 대해 움직이지 않는한 지각되지 않는다.
우리 눈은, 안구는 극소진탕 micronystagmus라 불리는 진동을 끊임없이 하고 있다. 안구는 항상 2도나 3도 각도로 호를 그리며 흔들리고 있으며, 그 때문에 망막에 비친 상은 감각말단기관인 간상체와 원추체에 대해 항상 운동상태에 있다.
우리는 구별을 힘들여 이끌어내어 사물을 인식한다. 이끌어내지 않는 구별은 존재하지 않는다.
완만한 변화와 무변화를 구별하는 데에는 별개의 정보, 즉 시계와 같은 것이 필요하다.
변화를 특징으로 하는 현상의 추세를 파악하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정원으로 날아드는 나비나 새들의 숫자가 놀라울만큼 감소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 힘들다. 그러한 변화는 큰 것임에도 지각이 새로운 사태라고 보고하기 전에 우리들은 그것에 익숙해져 버린다.
상대가 왼쪽 주먹을 뻗으려는 것처럼 페인트 모션을 쓰고는 왼쪽 주먹이 나오지 않으면 우리는 왼쪽으로는 치지 않을 것이라고 믿어버린다. 그러다 왼쪽 주먹을 얻어맞게 되므로 의외의 불쾌함을 맛보는 것이다.
정신은 차이의 소식만을 수용할 수 있기 때문에 완만한 변화와 정지상태의 구별이 잘 되지 않는다.
차이는 관계의 본질이 되므로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위치를 정할 수 없다.
자극이라는 말은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오는 한 묶음의 정보의 각 구성요소를 가리키는 말이다.
기준3. 정신과정은 방계에너지를 요구한다.
정신과정은 차이에 의해 방아쇠가 당겨진다는 것과 차이란 에너지가 아니며 보통 에너지를 포함하지 않는다.
당구공들 사이에 부딪히는 행위도, 주는 행위도, 반응하는 행위도, 사용하는 행위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표현방식은 사물을 의인화하는 습관에서 나온 것인데, 이러한 난센스가 인간의 의물화라는 더욱 한심한 넌센스로 발전해 버린다.
켜진 상태에 있는 스위치는 다른 곳에서 생긴 에너지의 통로가 될 뿐이다. 수도꼭지를 쥐고 있는 사람이 부분적으로나마 결정할 수 있는 것은 물이 나오면 어떤 통로로 나오게 하겠다는 정도이다. 실제로 물이 흐르느냐 마느냐는 우리가 간섭할 수 없다.
기준4. 정신과정은 순환적 결정의 연쇄가 필요하다.
암석과 생물은 생존경쟁의 참가방식이 서로 다르다. 즉 암석은 변화를 거부한다. 높여진 상황에서 변화하지 않은 채 그대로 유지한다. 이에 비해 생물은 변화를 수정하고 변화와 더불어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며 스스로 자기 안의 지속적 변화를 포용하는 방법으로 변화를 극복한다.
인간이 타인이나 사회의 통합을 파괴하려 할 때 에너지는 거의 들지 않는다.
전기회로의 일부분으로서의 스위치는 켜진 상태에 있을 때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회로의 관점에서 보면 스위치와 그 앞뒤의 전선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또한 꺼진 상태일 때에도 스위치는 회로의 시점에서 보면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스위치란 교체의 순간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스위치라는 개념은 시간에 대해 특별한 관계를 가진다. 그것은 물체라는 개념보다도 변화라는 개념과 더 밀접하다.
감각의 말단기관은 스위치와 유사하다. 외계에서 충격을 받은 그 순간만 켜지게 된다.
기준5. 신경과정에서, 차이의 결과는 그것에 선행하는 차이의 변형들로 볼 수 있다.
지도란 결국 지형에서의 차이의 소식을 조직하는, 일종의 최종 결과로서의 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디지틀 시스템은 수를 포함하는 시스템과 유사하며, 아날로그 시스템은 양에 보다 강하게 의존한다. 디지틀 형의 뉴런에서 아날로그 양상을 띠는 시스템을 만들어내는 것도 가능하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 지각은 항상 부분에 대한 지각이라 할 수 있으며 뒤에 오는 다른 부분이 제시됨으로써 전체에 대한 우리의 추측은 계속해서 입증되거나 혹은 모순되기도 한다. 우리들 앞에 전체가 제시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기준6. 이러한 변형과정의 기술과 분류는 그 현상에 내재하는 논리계형의 분류단계를 나타낸다.
메시지를 만들어내는 사건과 메시지 자체는 다르다.
A가 B에게 지시를 할 때, A에게서 오는 메시지를 어떻게 기호화해야 할 지 B에게 가르쳐주거나, B는 또 다른 정보의 클래스가 존재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클래스에 속하는 메시지는 A와 B에 대한 메시지가 아닌, 메시지의 기호화에 대한 것이다. 같은 형태의 행위나 발성이라도 컨텍스트 - 문맥에 따라 의미하는 바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학습과 유전이 만나는 것도 극히 추상적인 수준일 것이다. 유전자는 아마도 동물이 어떻게 학습의 컨텍스트를 지각하고 분류해야 할지 그 방법을 결정할 때 영향을 줄지도 모른다.
과거 성격이라 불렀던 것은, 우리가 자신과 만난 컨텍스트에 부여하는 해석의 시스템으로서, 유전자와 학습 양쪽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다.
인간관계에서 유머라는 단순한 사실 하나만 보더라도 계형 type들이 다중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에서 얼마나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인가를 명백히 보여준다. 논리계형에 혼동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유머가 생겨날 필연성도 없어진다.
인간은 고양이와의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마치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메시지의 단편들을 짜맞추어 고양이의 의도를 이해해 버린다.
서로 다른 종간의 커뮤니케이션은 어떠한 경우에나 각각의 종이 만들어낸 컨텍스트를 서로 수정해 나가는 학습 컨텍스트의 연쇄이다.
파블로프의 개에 대한 실험에서, 개가 2개의 자극을 구별하는 것과, 개의 구별이 붕괴한다라는 표현방식이 가능하다. 개의 구별이라는 표현방식으로의 비약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개개의 사건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부터 구별이라는 시각을 넘어선 추상의 세계로 들어가 개 내부에 있는 존재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로지칼타입의 비약을 무시한 점에 파를로프 학습의 오류가 있다. 개가 구별하는 것을 보는 것은 가능하나, 개의 구별을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개는 이것이 구별의 컨텍스트이다라고 배운 것이다.
컨텍스트의 차이를 구별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 개의 머리는 이러한 훈련을 시작한 연구자의 머리와 다를 바가 없다.
하와이 해양연구소에서 암돌고래를 이용하여 실험을 한다. 어떤 동작을 하면, 먹이를 주게 되는데, 돌고래는 하나의 패턴, 하나의 컨텍스트적인 구조, 정보의 결합방법에 대한 일련의 규칙을 호각, 수조, 조련사 등에 연결하는 단순한 몇 개의 규칙을 습득했다. 조련사들은 돌고래의 훈련법을 계속 보여주고 싶어 단일한 패턴을 무너뜨려서 에피소드가 모아진 클래스에 대처시키려고 했다. 돌고래는 게임의 규칙을 알게 되자, 15번째 시도에서 갑자기 8가지의 연기를 정성들여 해보였다.
하나의 로지칼타입에서 그 다음의 한 단계 높은 로지칼타입으로의 진보는 개개의 사건에 관한 정보에서 사건의 클래스에 관한 정보로, 혹은 개개의 클래스를 생각하는 것에서 클래스의 클래스를 생각하는 것으로의 진보인 것이다.
아무리 벌을 주어도 쥐가 학습하는 것이라고는 한 번 전기쇼크를 받은 상자에 한해서 코를 디밀지 않겠다는 것뿐이며, 상자라고 하는 것 속에 코를 디밀어서는 안된다는 것은 전혀 배우지 못한다.
탐구의 목적은 탐구 자체의 옳고 그름을 아는 것이 아니라 탐구대상에 관한 정보를 얻는 것이다.
범죄란 실제로는 탐구와 마찬가지로 행위의 조직방법인 것이다.
한 생물의 성질을 바꾸려는 진지한 노력과 한 생물의 개개의 행동을 바꾸려는 노력 사이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다.
컨텍스트의 변화를 잘못 인식했기 때문에 벌을 받은 파블로프의 개나 행위의 조직방식이 나빴음에도 불구하고 개별행위에 대해서만 처벌을 받은 기결수들에게는 정신이상이 초래될 가능성이 있음을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자연이 꾸며대는 인과의 순환에서 죽음의 은유를 보는 우리들은 직선적 논리에 매달려 사후의 세계를 상상하고 더 나아가서는 환생의 관념까지 이끌어내어 죽음이라는 단순하고도 정상적인 현상을 애써 부정하고 있다.
정신과정의 논리적 일관성이 무너져 버린 후의 세계는 진정 죽음을 생각케 한다.
자연계의 모든 생명활동 회로의 하나하나에 죽음의 그림자가 엿보인다.
정신은 지도에 영향을 받지, 결코 땅에서 영향을 받지는 않는다. 따라서 수신된 정보를 근거로 주변 세계나 자기 자신에 대해 무엇인가를 증명할 수는 없다.
학습하는 것, 기억하는 것, 부의 엔트로피를 축적하는 것 등은 모두 경험적 방법과 시행착오라고 불리는 스토캐스틱한 게임에 의해 행해진다.
제5장, 관계의 다양한 변형들
정신은 그 안에 아무 것도 포함하지 않는다. 있는 것은 관념 즉 차이에 관한 정보 뿐이다. 정신 안에는 시간도 없고 공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관념이 있을 뿐이다.
자신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변화시키는 학습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먼저 상호작용의 단위와 성격에 관한 학습의 단위는 동일하다. 생활의 컨텍스트 학습은 한 생물의 내부가 아니라, 두 가지 생물간의 외적인 관계로서 논해야 한다.
개인의 프라이드를 끄집어내어 그 사람의 오만스러운 행동을 설명하는 것과, 공격성을 끄집어내어 그 사람의 공격적 행동을 설명하려는 것은 얼마나 공허하고 무의미한 일인가를 깨닫게 해준다.
프라이드를 논하는 경우라면 두 사람의 인간 혹은 2개의 집단을 이끌어내어 둘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을 논하지 않으면 안된다.
양쪽 눈으로 원근이라는 새로운 차원의 정보를 얻는 것처럼, 관계를 통해 행동을 이해함으로써 새로운 로지칼타입에 속하는 학습을 얻을 수가 있다.
상호작용의 최소단위는 3개의 요소인데, 자극, 반응, 강화이다. 학습자의 반응은 가르치는 사람이 주는 자극을 강화한다.
프라이드란 상대방이 주는 조건부 칭찬 더하기 행위자의 반응 더하기 더 한층의 칭찬 더하기 그 칭찬의 수용~` 등이다.
프라이드가 강한 사람일수록 상대의 경멸을 두려워한다.
1. 너 자신을 알라
이 말은 여러 수준에서 신비스러운 지혜를 보여주며 동시에 극히 단순하고 보편적이며 실용적이라 할 수 있는 측면을 갖고 있다.
우리들은 자신에 관한 여러 가지 견해를 외계에 투영한다.
게임과 게임의 조작은 동일한 현상이다. 게임은 그 행위의 연쇄 안에 계획에 들어 있지 않은 어떤 독창적인 부분이 없으면 이미 게임으로서의 의미가 상실되어 버린다.
탐구란 언어적으로나 비언어적으로나 자신에 대한 제1차 description이다. 탐구는 자기 강화적이다. 탐구자에 의해 기쁨이든 괴로움이든 상관없이 자동적으로 강화되어간다.
육체의 나약하고 자기 연민적인 불평과 고통의 소리들을 듣지 않는 것이 등산가에게는 가장 큰 단련이다. 그것은 등산가의 만족감, 자신이 자신을 정복했다는 기쁨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본다.
2. 토테미즘
자신이 부분이 되는 시스템과, 동물과 식물 그리고 인간 모두를 포괄하는 생태학적이고 생물학적인 시스템의 유사에 그들의 사회시스템을 비춘다.
그런 것은 환상에 의해 억지로 짜맞추어진 부분도 있으며 또 환상이 사회 구성원에게 부과하는 행동에 의해 실제로 두 시스템이 비슷해지는 부분도 있다.
서양인들은 신화의 체계를 빌어 가문을 드러내 보였는데, 토테미즘이 가지는 이러한 자기 과시성이 확대됨에 따라 자연계와의 결합이라는 본래의 웅대한 세계관을 상실하고 하찮은 말장난만 무성해지는 사태가 발생했다.
토테미즘이 이렇게 타락해가는 세속화과정의 배경에는 우리가 더 이상 인간과 사물과의 관계를 파악하지 않고 한쪽 끝의 관계되는 사물이나 인간에게 관심을 집중시킨다는 의미가 자리잡고 있다. 그리하여 이미 자연과 인간을 함께 둠으로써 얻을 수 있었던 새로운 정보나 계시를 잃어버리고 살벌한 인식론만이 뒤에 남았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아이들에게 하찮은 자연의 역사와 예술을 주입시킴으로써 아이들은 동물적이고 생태학적인 본성과 생의 미학을 망각한 채 훌륭한 비즈니스맨을 목표로 삼고 있다.
현대는 자연의 역사를 이솝화한 것이고, 종교는 이기적인 권위가 아닌 오락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3. 가설설정
우리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계에 너무 익숙해져 그 세계를 보잘 것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고방시에 갇혀 있다. 이로 인해 가설설정이 가능하다. 즉 세계의 어떤 사건이나 사물을 먼저 describe하고, 그 description을 위하여 고안한 것과 똑같은 규칙에 들어맞는 비슷한 예를 찾아가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이 얼마나 경탄스러운 일인지 거의 느끼지 못하고 살아간다.
가설설정을 행할 수 없는 세계에서는 사고가 모두 정지해 버릴 것이다.
터무니없는 공상일지라도 그들의 자연관은 사회체계에 의해 지탱되고 있으며, 반대로 그 사회체계는 그 자연관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
자연에 대해서나 사회에 관점을 바꾸는 것이 몹시 어려운 일이 되었다. 안정을 얻은 대신에 경직성마저도 떠맡게 된 것이다. 서로를 지탱하는 전제가 엮어내는 한 없이 복잡한 네트워크 속에 갇혀서 태어나는 것, 이는 모든 인간의 공통된 숙명이다.
생물체의 구조와 기능부터가 결코 자신의 내적 일관성을 무너뜨리지 않는 하나의 가설설정 시스템이라고 볼 수 있으며, 생물을 둘러싼 환경도 내적일관성을 갖춘 가설설정 시스템이다.
생물체의 내적 요청은 구석구석에 이르기까지 보수적이다.
제6장 거대한 스터캐스틱한 과정
학습에서나 유전에서나 어떤 국면에서든 무작위적인 사건의 흐름이 있으며 또한 그 무작위한 사건중 일부만을 뽑아 다른 부분보다 오랫동안 존속시키는 작위적인 선택과정이 있다고 생각한다. 무작위성 없이는 새로운 것은 생겨나지 않는다.
진화와 체세포적인 변화는 근원적으로 유사하며 양쪽 모두 본질적으로는 스터캐스틱한 과정이고 양자의 차이는 과정 작동의 기준이 되는 관념이 속해 있는 로지칼타입의 차이에 불과하다.
2개의 과정중 하나는 개체의 내부에 있는 시스템인데, 이를 학습이라 부르고, 유전과 개체군에 내재하는 시스템으로 이를 진화라 부른다.
1. 라마르크 학설의 오류
아우구스트 바이스만은 체세포와 생식질 사이에는 커뮤니케이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가 생식질이라 보르는 흐름, 즉 한 세대에서 그 다음세대로 계승되어가는 원형질의 연속적 흐름이 있으며 이 생식질에서 세대마다 분파된 것이 체세포 또는 표현형으로서의 신체가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RNA가 DNA의 어떤 부분의 각인을 동일 세포 내의 다른 부분으로 전달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이두박근에서의 화학적 변화의 각인이 생실질에 전달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만은 아니다.
라마르크가 말한 유전이 자연계의 법칙이라고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일반적인 사건이라고 한다면 유전과 학습을 복합한 스터캐스틱한 과정으로서 전체 시스템은 정지해버린다는 이론이다.
2. 용과 불용
생물계를 둘러볼 때 용과 불용의 결과가 대대로 전해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누구의 눈에나 분명할 것이다. 그러나 이를 사실로서 받아들이면 개체의 자유로운 적응능력이 몇 세대도 되지 않아 완전히 상실되어버릴 것이다.
용과 함께 나타나는 체세포 변화는 일반적으로 적응성이 있기 때문에 그와 같은 변화에 어떠한 형태로든 기여하는 유전적 제어는 유익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변하지 않는 환경 조건에 체세포적 변화로써 적응하는 경우가 있다. 고산지대에 정착한 종은 고산지대 특유의 기후나 낮은 기업에 대한 적응을 유전적 결정에 맡기더라도 손해는 없다.
반대로 변동과 역행을 반복하는 상황에의 적응은 체세포적 변화에 의존하는 것이 훨씬 이익이다.
즉 일시적인 긴급상황에서 직접적이고도 가역적인 체세포 변화로써 대응하는 편이 적합하다.
순화 acclimation - 순화는 수많은 전선 - 심장, 헤모글로빈, 흉부근육조직- 에서의 수많은 변화에 의해 쟁취되는 데 비해 긴급조치는 보통 개별적으로 그 국면에 한정된다. 순화한다는 것은 생물이 보다 심각한 경직성에 대한 대가로 표면적인 유연성을 사는 것이다.
생물은 항상 유전적 변수에 의해 이완되는 스트레스를 어느 정도 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기존의 스트레스를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유전적 변화를 작용시키는 것은 곤란하다. 변수의 허용한계치를 상하로 이동시켜주는 유전적 변화가 필요하다.
80톤이나 되는 왕고래에게 왜 200그램 정도의 넓적다리밖에 달려있지 않은가는 더 이상 수수께끼가 아니다.
유전적 메시지는 동사나 명사로 표기되는 우리의 언어와는 전혀 다른 형태로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진화를 생각할 때에는 한 번에 하나의 결과밖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으나 그 단일한 결과의 배후에는 몇 가지의 원인이 서로 협력하여 작용하고 있다.
3. 유전적 동화 genetic assimilation
체세포적 변화는 유전적 변화에 선행할 수 있으며 따라서 유전적 변화를 모방자로 보는 편이 적절할 때가 있다.
개체 단계에서 환경과 경험이 체세포적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개체의 유전자는 이 단계에서는 영향을 받지 않는다. 획득형질의 직접 유전은 있을 수 없다. 선택없이 획득형질을 유전시키는 것은 체세포적 변화가 가지는 유연성을 비가역적으로 소모시키는 것이다.
개체군 단계에서 적절한 표현형 선택이 이루어질 때 환경과 경험은 그 선택망에 걸린 적응도가 높은 개체를 만들어낼 수가 있다. 이러한 범위에서 개체군은 라마르크적인 유전의 단위로서 행동한다.
4. 체세포적 변화와 유전적 제어
메타변화를 수행하는 능력은 유전적으로 결정될지도 모르지만 변화의 능력을 변화시키는 능력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학습하는 것을 학습하는 것은 가능하다. 학습해 대해 학습하는 것을 다시 학습하는 것도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그 이상은 무리이다.
5. 무에서 유는 생기지 않는다는 발생설
진화의 학습이 필연적으로 발산적 divergent이고 예측 불가능한 것임에 비해 발생은 수렴적 convergent이어야 한다.
정자는 전형적으로 적도의 조금 아래에서 알 속으로 들어오게 되는데, 그 점과 2개의 극을 포함하는 면이 개구리의 좌우대칭의 축면이 된다. 알은 맨 처음 그 면을 경계로 해서 분열한다. 그리고 정자가 들어온 쪽이 배가 된다.
분열과 성장을 위해서라면 정자는 필요치 않다. 차이의 표시자로서 작동하며, 어떠한 차이를 표시하는가는 문제되지 않는다. 차이의 표시가 없으면 배는 생기지 않는다.
외배엽과 중배엽은 완별할 정도로 대칭적이지만, 내배엽인 소화관, 간장, 췌장 등은 완전히 비대칭적인 점은 모든 척추동물에 공통적이다.
내장 역위의 경우 개구리에게도 발생하지만, 확률은 낮다. 인간의 경우 100만명중 1명 꼴이다.
현실적으로 역위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기관의 좌우 배분이 분자의 좌우 비대칭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님을 나타낸다.
왼쪽과 오른쪽을 사전에서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언어뿐 아니라 어떠한 디지틀 시스템으로도 이 문제는 해결할 수 없다.
6. 상동 homology
어떤 변화는 확률이 높아 간단하게 일어나며 또 어떤 변화는 너무 어려워 일어나기 어렵다. 이러한 세계에서 완만하게 진행되는 변화는 뒤에 남겨져서 상동의 기반을 이룬다.
곤충의 유충은 성충에 뒤지지 않게 놀랄만큼 다양성을 나타내 보인다.
일반적으로 유사가 차이보다 시간적으로 더 오래되었다. 유사가 상동보다 오래된 점이야말로 각 생물이 분지수 branching trees 위의 점들이나 자리들로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가설을 증명한다.
고양이 크기밖에 되지 않는 바위너구리는 하마와 비슷하며, 사자도 고양이와 상당히 비슷한 면을 갖고 있다.
차이라는 광대한 영역을 분류할 때 전통적으로 이용되어온 이분법은, 패턴의 특징이냐 양의 특징이냐로 보는 것과 연속적인 특징이냐 비연속적인 특징이냐로 보는 방법이 있다.
톰슨은 형태가 크게 다른 두 생물이 관련되어 있는 것을 보여주는 모자이크도를 제시한다
변형이 그렇게 단순하면서 일률적인 것은 양자의 표현형 사이의 차이, 비교적 소수의 유전자형의 차이에 의해 나타난다는 사실을 뜻한다.
변형이 동물의 몸 전체에 일률적으로 미치고 있다는 것은 또한 그러한 유전자가 다면적으로 나타나며 변형이 몸 전체의 조화를 담당하고 있음을 추측케 한다.
표현형을 결정하는 유전적 메시지나 고정적인 신호 속에 유형론적인 사고와 통합론적인 사고를 나누는 신택스가 내포되어 있는 추정을 한다.
동물은 비교적 유사토폴로지컬한 패턴을 갖고 있다.
7. 적응과 탐닉
무작위적인 유전적 변화로부터 종에 보탬이 되는 것만이 자연선택에 의해 선별되거나 무작위적인 시행 착오에 의한 사고과정으로부터 개체에 보탬이 되는 것만이 강화에 의해 선별되는 일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또한 개인차원에서 환영될 만한 것이 그대로 사회적으로 생존적 가치를 갖느냐 갖지 않느냐 혹은 반대로 사회를 대표하는 구성원들이 선호하는 정책이 개개인의 생존을 이롭게 하느냐 등은 모두 앞으로의 역사전개가 결정할 문제이다.
8. 스터캐스틱한 과정, 발산과정, 수렴과정
영원의 눈으로 바라보면 만물을 무한의 공간과 무한의 시간 속에 놓고 파악하게 되며 모든 사건을 전부 스터캐스틱한 연속 속에 놓게 될 것이다.
우리들은 우주의 극히 한정된 영역 안에서 극히 일순간의 삶을 살고 있을 뿐이다. 그러한 우리들에게 시스템이 발산한다는 것은 아주 현실적인 문제이며 무질서로의 타락이냐 혁신으로의 상승이냐 하는 절박한 의미를 안고 있다.
각 세대에서 행해지는 유성생식은 새로운 개체의 DNA 청사진이 이전의 개체와 너무 달라지지 않도록 제어하고 있다. 발생은 수렴적 시스템이며 보수적인 시스템이다.
9. 2개의 스터캐스틱한 과정의 비교와 결합
2개의 구성요소는 먼저 무작위적인 요소가 있고 이어 무작위적으로 생겨나는 것을 선별하는 선택과정이 있다.
발생은 토대를 이루는 것과 그 위에 부가되는 것과의 결합의 연쇄, 즉 양립성 검열의 연쇄이다.
새로운 것이 이전의 것보다 더 나쁘지 않다는 것, 이것이 언제나 중요하다.
환경과 생리적 기능이 체세포적 변화를 제안한다. 그 생존의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것은 유전적으로 결정된 그 시점에서의 유기체의 상황이다.
게놈은 적응 선택 통로의 기억장치라 할 수 있다.
다윈은 후에 획득형질의 유전이나 진화가 진행되기 위해서는 지질학적인 시간으로 부족하다는 데 생각이 미쳐 종의 기원 후기 판에서는 라마르크학설을 받아들인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이 진화에 필요한 시간은 도브잔스키가 발견한 것처럼 진화의 단위가 개체군이며 개체군 안에 광범한 유전 가능성이 저장되어 있다고 하면 대폭 단축될 것이다.
모든 생물의 세포는 놀라운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모든 세포 유기체를 하나로 연결시키는 패턴이 세포에 있다는 사실은 먼저 세포의 상동으로부터 패턴이 확보됨을 말한다.
배우자 형성에서부터 수정 직후까지 생물의 초기단계에 상동이 가장 많이 나타난다고 주장하는 것은 상동의 정도를 양적으로 결정하려는 태도이다. 즉 염색체의 수, 유사분열의 패턴, 좌우대칭, 5개의 발가락, 중추신경시스템 등의 각 특징에 어떤 가치를 부여하려는 것이다. 양이 결코 패턴을 결정하지 않는 세계에서 이와 같이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지나치에 인위적인 일이다.
배의 형태 패턴의 유사성이 성체의 형태 패턴 유사성보다 큰 것은 어떤 이유일까?
체세포적 변화는 일반적으로 적응성을 갖고 있다.
체세포적 적응은 언제나 유전적 변화의 컨텍스트를 만들어내고 있으나 실제로 유전적 변화가 일어나느냐 아니냐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창조적 사고는 반드시 무작위적인 요소를 포함한다.
사고나 관념을 검열해 보는데 2가지 방법이 있다.
일관성의 검열 - 새로운 관념이 이미 알려져 있거나 통용되는 관념과 서로 견주어볼 때 의미가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검열이다. 의미라는 것도 천차만별이지만, 논리라는 것이 현상계의 활동을 파악하는 데는 너무나도 빈약하다.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 자체는 이미 보유하고 있는 관념의 교체나 재구성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한다.
사고과정에서의 엄밀성은 진화에서의 내적일관성과 같은 것이다.
문화사 학자들은 몇 세대에 걸친 형태적 유사를 세계 문화사에서 엿보게 되었으며, 동물학자들이 추구한 상동과 같은 문화의 패턴을 찾아내었다.
생물의 행위는 모두 어느 정도 시행착오적이다.
제7장 분류에서 과정으로
설명의 한 종류는 과정 또는 현상집합체에 하나의 추상적인 토톨로지를 제시하고 그 위에 description을 지도화한다.
뇌는 뇌 자체를 구성하는 신경통로와스위치 시스템과 신진대사물 이외에 아무 것도 포함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하다.
또한 정신 속에는 뉴런도 없고 있는 것이라고는 돼지나 코코넛에 대한 관념 뿐이다.
이름은 이름지어진 사물 자체가 아니며 돼지에 대한 관념도 돼지 그 자체는 아닌 것이다.
개나 고양이는 논리를 구축하고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나 그들도 세계를 아무런 추론 없이 받아들이는 것만은 아니다. 본래 지각과정 자체가 하나의 로지칼타입을 설정하는 행위이다. 이미지 하나하나가 몇 개의 단계를 걸쳐 복잡하게 기호화되고 지도화된 그 집대성이라 할 수 있다.
사물들 및 살아있는 것들조차 서로를 직접 경험할 수는 없다.
대칭형을 이루는 상호작용과 상보형을 이루는 상호작용이 서로 상쇄적으로 작용한다.
체세포적인 상황이 유전자 구조에 직접적인 작용을 미치게 되는 것을 허용한다면 생물체 내의 조직의 상하단계는 붕괴해 버리고 말 것이다.
윌리엄 블레이크 - 현명한 사람은 윤곽을 본다.
제8장 그래서?
훌륭한 인간일지라도 너무 오랫동안 변하지 않으면 해독을 끼치는 쓸모없는 인간이 된다.
사슴이나 퓨마가 자신의 존재를 변명할 필요가 있을까
나는 오랫동안 멍청한 것이 종교의 필요조건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들은 신앙을 설교하고 복종을 설교한다.
마술로부터 종교가 발생했다는 것은 전통적인 사고방식인데, 실은 종교가 타락해 마술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야비한 물질주의를 벗어나는 것은 기적이 아니라 미 beauty이다.
미의 문제에 대해서나 의식의 문제에 대해서 아직 한 사람도 답하지 못했다는 것은 이유가 있다. 있지도 않은 거위 사냥에 나선 것이 되었을 수 있다.
정신이란 일종의 부분들의 조직화 안에 내재한다.
외계에서는 정적인 차이라도 우리가 그 차이들과 관련하여 움직이면 사건이 발생할 수 있다.
가장 아름다운 답은 가장 어려운 문제를 묻는데 있다.
의식이 개처럼 혀를 내밀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니까 어정쩡한 물음에 야비한 답이 나오려 한다. 이런 것을 시니시즘 cynicism-냉소주의 라고 한다. 성스러움의 본질이나 미의 본질을 의식으로 파악하려는 것은 축소주의의 어리석음이다.
부록 혼돈의 시대
로마카톨릭교회가 라틴어의 공용을 포기한 반면에 젊은이들은 산스크리트어를 암송하는 현실은 결코 우연한 일만은 아니다.
달리는 자전거의 균형의 법칙을 운동신경이 거의 무의식적으로 인지할 때만이 자전거를 타고 자유롭게 달릴 수 있다.
생물에게서는 내적인 선택작용이 항상 이전의 상황과 양립성을 유지한다는 점, 그리고 그 작용이 오랫동안 진화해 오면서 일관되게 나타난 것이 상동이다. 바꾸어 말하면 내적 선택의 보수성이 발생의 절차와 추상적인 형태의 고수에 가장 강력하게 발휘된다는 것이다.
보수적, 급진적, 진보적 이런 이름에는 어떤 인식론의 진리가 작용하고 있다. 이 진리는 사람들을 분류하는 이 대조의 극이 실제로 살아있는 세계를 구성하는 변증법적인 대조의 극이라는 점을 주장하고 있다.
생물 진화에서의 규칙은 간단명료하다. 개체가 직접 받게 되는 몸의 기능적 변화가 그대로 개체의 유전적 기호를 좌우하는 것을 막는 한편,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의 차이는 자연선택의 검열을 통해 능력이 모자라는 것은 도태되어 결과적으로 개체군 전체로서 변화해 나간다.
단순히 구조적 변화를 촉진시키는 것이나 또는 단순히 기능적 변화를 억제하는 것만으로는 시대에 뒤떨어짐을 피할 수 없다.
2012년 4월 8일 일요일
내재하는 신 - 르네 드보
내재하는 신 - 르네 듀보
A God within - Rene Dubos
도시 집단생활은 때때로 개미굴이나 벌집으로 곧잘 비유된다. 도시는 사회적 곤충과 같이 일하는 인간의 숙소이다. 수많은 사람들은 공동체 안에서 동일한 역할을 연출하면서 아침저녁 지정된 소굴로 돌아간다.
앙드레지드 Andre Gide, 당신은 당신 이외의 어떤 다른 사람이라도 말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그런 것은 말하지 말아라. 당시 이외의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것 그런 것은 행하지 말아라. 당신을 제하고는 존재할 수 없는 그런 측면에만 관심을 기울여라.
지각있는 성인이면, 자기의 일면은 짐승이고 또한 일면은 성자라는 것, 그리고 어리석음과 이성, 사랑과 미움, 용기와 비겁의 혼합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믿는 자인 동시에 회의하는 자요, 이상주의자인 동시에 회의론자이며, 이타적인 선량한 시민인가 하면 이기적인 쾌락주의자인 것이다. 이와 같이 상반되는 모순성이 함께 공존하면 으례 긴장을 초래하는 법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가 서로 잘 상용하면서 건전성을 이루고 있다.
산책할 경우에는 꽃을 즐길 수가 있고 마차를 타고 갈 때엔 작은 시냇물의 물소리를 들을 수가 있으나, 스피드를 내는 자동차 여행의 경우 최고의 경치는 넓게 펼쳐진 광야의 풍경이다.
서 평
인간과 자연이 공존할 수 있는가, 인간의 환경파괴는 제재를 받아야 되는지, 항상 자연에 대한 영감을 주는 글을 써는 저자는, 사소하게 잊혀져 가는 사실들로, 총체적인 입론의 근거를 마련하고 있다.
저자의 글을 따라가다 보면 오늘날의 그린피스나 환경론자들이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다.
안타깝지만 생태학에 관한 책들이 그렇듯이, 정확한 사실을 기반으로 하기 보다는 여러 저자의 감상이나 당시의 보고서, 그리고 저자의 느낌이 모자이크 되면서 지금에 와서는 과학적인 기반이나 근거가 조금 더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서론 - 실재 속에 숨겨져 있는 측면
원시인은 의식은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어떤 사물 뒤엔느 혹은 그 안에는 반드시 어떤 다른 것이 있고, 또 눈에 보이는 운동 뒤에는 반드시 이와 대응되는 힘이 있으리라고 상상했다. 바로 이와 같은 비물질적인 것이나 힘을 그들은 신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호칭은 외적인 실재 안에 숨어 있다고 생각되는 법칙을 나타내는 데 불과했다. 그 명칭 자체에는 아무런 별다른 뜻이 부여되어 있지 않았다. 현대에 살면서도 아직 그 석기시대의 문화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부족들은 자기들 주위에 도처에 신이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전고전기 및 고전기의 그리스인들은 인간성의 숨겨진 측면, 특히 기억에 남는 행동을 이룰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자극한 힘을 entheos 즉 내재하는 신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enthusiasm은 바로 이 entheos에서 유래한 말이다.
enthusiasm이라고 하는 그리스어의 뜻은 논리나 명석한 사고만 가지고는 인간생활의 창조적 활동을 완전히 설명할 수 없다는 뜻도 포함하고 있다.
nature라는 말은 심리적 사회적 또는 인간적인 외적 풍모만 말해 주는 것이 아니라 실재의 표면 밑에 숨어 있는 모든 힘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이스나 로마 시대 사람들에게는 영웅 아니면 무슨무슨 신들이 주역이 되어 있는 신화를 환기시키지 않고서는 아무리 설명해 보아야 어떤 장소나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역할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제1장 세계에 내재하는 세계들
비가 거친 뒤 빗물을 잔뜩 머금은 야생버섯이 적절한 시기와 장소를 적절히 택하여 폭발적으로 번식하는 현상은 진기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겨울, 봄, 이른 여름 동안에는 발견되지 않던 효모는 풍성하게 번식해서 포드즙을 큰 항아리에 저장하자마자, 즉시에 발효하기 시작한다. 그러한 수확기가 지나고 나면 효모는 포도원에서 자취를 감추고 만다.
어떤 사물을 묘사할 때, 그것이 제아무리 섬세하고 객관적으로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그것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성을 제대로 다 전달해 주지는 못한다. 오직 그것을 그대로 몸소 체험하는 길 밖에 다른 방법은 없다.
지금에 와서 나는 내 인생항로를 형성하는데 있어 행동적 결정론보다는 오히려 동기나 자유의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역사의 과정에 있어서도 우발적인 사건이 더 큰 역할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전신에 펼쳐져 있는 유기적 기능으로 받아들여지는 감각을 통하여 세계와 접촉하고 있는데, 우리의 세계관에는 그러한 것 이상의 것이 존재하고 있다. 감각은 우리 개개인이 그 내부에 가지고 있는 정신작용에 따라 완전히 그 사람 독자적인 개념구조로 전환되는 것인데, 그 정신작용은 그 사람의 유전적 경험적인 과거에 입각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어떠한 사람의 정신작용과도 다른 것이다.
아무리 우리가 개인적으로 또는 집단적으로 공동의 생활을 위해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생각해 보면 우리는 극히 사적인 자기 자신의 세계를 살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인간들이 교류를 하고 우주적인 테크놀로지가 전세계를 획일화시키려고 노력한다하더라도 대부분의 정상적인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지리적으로 극히 한정된 소지역에서 배타적이라고도 할 만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제2장 지구의 신학
태양으로부터 발사되는 지나치게 뜨거운 자외선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수면뿐이었기 때문에 극히 오랫동안 생명이 존재할 수 있었던 곳은 오직 바다의 수면 밑이었을 것이라는 상상은 쉽게 할 수 있다. 수중에는 풍부한 영양물이 있었기 때문에 바다는 원시생물로 가득했을 것이다. 남조류가 20억년 전의 선캄브리아기의 퇴적층에서 발견된 것은 그것이 근거가 있는 이론이다.
지구의 특징을 말할 때 성스로운이라는 표현을 쓰는 생각은, 인류의 마음깊이 뿌리박혀 있는 태도를 표현하는 것이다. 자연을 파괴하는 것에 대해서 모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토양은 그대로 하나의 생명체이다. 화학성분이나 구조로 보아 그 토양이 어떠한 장소의 것이든 간에 항상 생물의 활동에 의해 원시의 암석으로부터 쉬지 않고 재생되어 가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어떠한 곳에서나 많은 종류의 다양한 생물이 생식하고 있으며 그것들은 각기 자기에게 적절한 장소를 찾아서 자기에게 적합한 토양으로 변질시켜 가고 있다.
자연에서 내리치는 끊임없는 회초리에 내 몸을 맡긴다는 것은 인간의 건전성을 위하여 본질적으로 필요한 우주의 힘의 핵심과의 생동하는 접촉을 뜻하는 일이다.
인간은 소우주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 소우주는 자기인식 능력으로 대우주를 포용하면서 동체가 되어 그것들을 새로이 보다 풍부하게 재조직한 결과 이번에는 조직의 힘을 빌려 대우주에다 보다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빈곤 질환 그리고 환경의 황폐화 등에 대한 여러 가지의 문제는 고도로 발달한 과학기술만 가지고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다. 기술적인 처리만을 구사할 경우 대개 경과조치의 난잡성만 늘어날 뿐 뜻하지 않았던 부작용이 발생하던가, 자연의 힘에 역행하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이와는 달리 인간과 지구와의 관계에 대한 깊은 지식은 현대의 우리들에게 원시시대의 조상들이 그랬던 것보다 훨씬 더 큰 자연보호에 가능성을 던져주고 있다.
정통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이성은 미신이나 공포심보다 훨씬 유효한 자연을 관리하는 지침이 될 수 있다.
Henry Beston, 자연은 우리 인간성의 일부이다. 이와 같은 성스러운 신비에 대한 자각과 경험을 갖지 않는다면 인간은 인간이길 멈추게 될 것이다.
제3장 뿌리는 깊다
인류는 아열대적 환경 속에서 출현하였지만, 인류의 진화가 완성된 것은 빙하시대였다. 즉 인류는 안정된 기후 속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빙하가 전 지구를 뒤덮고 있었던 추위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렇게 기후적인 요인과 수렵이나 식물채집의 생활양식에 맞추어 몇 가지 인류의 형이 도태 선택되었는데, 이러한 도태현상의 압력은 굉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인류는 한 형이 형성되고 나면 적어도 5만년은 그리 큰 변화를 일으키지 않은 것 같다.
석기 시대 사람은 지구를 방방곡곡 누비고 다녔던 탓으로 격심한 기후의 변화도 경험했다. 그리하여 당연한 결과로써 매우 다양한 유전형이 나타났는데, 그러나 그 유전자의 변화는 그다지 뿌리 깊은 것이 못되었다.
우리 자신의 육체나 정신 면에 있어서, 문명생활이 짊어지고 있는 많은 문제들은 석기시대로부터 내려오는 몸과 마음을 가지고 이 기술사회를 살아야 한다는 모순된 사실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인간의 생물학적 성질과 그의 환경 전체 사이에서 생기는 균열은 변화가 가속될 때 특히 심해진다. 신석기시대의 농업혁명, 청동기시대의 도식혁명, 산업혁명 이후의 2세기에 걸친 시기를 보면, 생물의 진화메커니즘은 대단히 더딘 데다가 그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 생활양식의 변화가 급격할 때 그 보조는 맞지 않게 된다.
인간의 신체나 마음의 대부분, 주야의 일주기, 계절에 의한 계절주기, 그리고 월경주기와 같은 리듬은 인간이 자연계와 결부되어 있다는 가장 명확하고 정정된 현상들이다. 이와 같은 리듬은 먼 옛날부터 내려오는 인가의 진화역사를 통해서 진화의 모든 측면에서 우주의 힘이 지배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해 주고 있다.
인간도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혈압, 홀몬 작용과 같은 생리적 기능은 우주의 영향력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같은 13도의 온도가 7월에는 춥게 느껴지지만, 12월에는 매우 쾌적하다. 그것은 인간 신체의 기본조건이 여름과 겨울에 다르기 때문이다. 그 메커니즘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지만, 겨울에 흔히 있는 식량부족등에 대비한 몸의 변화로 판단할 수 있는 것같다. 적응 메커니즘은 유전 기호로서 유전코드에 기록되고, 여전히 변함없는 그 힘을 발휘하고 있다.
석기시대에 개발된 생물학적 장치를 갖춘 인간이 현대의 기술사회를 생활하며 기능하지않으면 안 될 모순이야말로 몇몇의 현대 질환의 발생원인인 것으로 보인다.
1940년대에 미국에서 일본이나 한국까지 프로펠러 비행기로 30시간이나 걸려 오는 동안, 부신 스테로이드 호르몬의 분비량을 측정한 기록이 있다. 여행중에는 미국의 표준시와 시간적으로 일치하고 있었는데, 아시아에 도착하자 변화가 있었다. 도착후 9일이나 10일이 지나서야 겨우 아시아 시간과 일치하였다. 미국에서 유럽으로 여행했을 경우에는 적응에 5일이 걸렸다.
호모사피엔스가 출현한 곳은 동아프리카의 고원지대인데, 그곳은 우기와 건조기가 교대로 있어서 식물의 성장기와 휴식기에 상응하는 아열대 기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현대인의 욕구, 기호 또는 습관 같은 것도 따지고 보면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는 캘리포니아나 지중해 연안과 같은 기후 조건이다. 그러므로 대개의 인간들은 그와 같은 아열대 기후를 대단히 좋아하며 심지어 그들의 주택 안도 이와 같은 기후환경을 만들어 놓고 즐긴다.
신화나 고전 예술의 많은 테마가 쾌적한 기후조건 하에 있는 전원풍경 속에서 전개되고 있는데, 이것은 호모사피엔스가 그의 생물학적 진화를 완결시킨 곳이었던 사반나 지방과 매우 흡사한 지대인 까닭이라 생각한다.
고금을 가리지 않고 세계 도처에서 그려지고 있는 전원풍경화라는 것은 목장 안에 무성한 나무 밑에서 양치기들이 양떼를 지키며 젊은이들이 사랑을 속삭이고 있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이렇게 전원생활이란 확실히 인류의 가장 기분좋은 추억과 결부되어 있다.
인간은 자기가 경험한 모든 경험을 상징화하고 또 그 상징에 대하여 마치 그것이 현실적인 실재의 사건이라도 되는 듯이 반응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역시 그 기원을 선사시대에다 둘 수 있는 것이다.
적어도 십만년 전 네안데르탈인들은 사자를 장사지낼 때 부장물과 함께 죽은 사람을 동에서 서쪽으로 향해 구부리고 앉아 있는 자세로 이장을 했으며, 또 야생화로 장식한 침상 위에다 시체를 올려놓고 매장하기도 하였다.
Ralph Waldon Emerson, 연령 인종을 뛰어넘어 만인이 범하는 악덕이라든가 우행이라는 것이 있다. 인간은 조상을 닮기보다는 동시대 사람을 더 많이 닮는다.
환경 속에는 우리 이외, 즉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외부 세계의 환경 전체가 가지고 있는 여러가지의 측면 이외에 개인의 마음 속에만 존재하는 측면, 그러니까 한사람의 극히 사적인 개념적 환경에 의해 구성되는 측면이 있다.
모든 인간은 학식이 있건 원시적인 무식이건 간에 모두 각자의 개념적 환경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 개념적 환경이 각자의 윤리적 사회적 상태를 결정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진보의 본질에 관한 의견, 우주의 질서 안에 있는 인간의 위치에 관한 개념, 그리고 신이라고 하는 언어와 관련되는 태도 같은 것들이 이렇게 하여 결정되는 것이다.
인간의 반응이 아니라 응답이라는 단어는 인간과 환경과의 상호작용이 인간에게 있어서 단순한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인간측의 자유의지가 작용하고 있다는 점을 나타내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다.
어린 시적의 경험이 특히 중요하다고 말하는 까닭은 탄생 시에는 아직 발달하지 않았던 신체나 뇌가 환경의 여러 가지 자극을 받아 거기에 음답해 가는 동안에 완성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뇌는 3살만 되면 갓 태어났을 당시의 3배로 성장하는데, 뇌의 기본구조는 초기 기간에 정교한 수상돌기가 여러 개 생겨나면서 발달하는 것이다. 언어, 상상력, 의식, 자아의식 같은 것 역시 이 시기에 고도로 발달한다.
제4장 개성, 인격 및 집단
도시 집단생활은 때때로 개미굴이나 벌집으로 곧잘 비유된다. 도시는 사회적 곤충과 같이 일하는 인간의 숙소이다. 수많은 사람들은 공동체 안에서 동일한 역할을 연출하면서 아침저녁 지정된 소굴로 돌아간다.
인간을 생물적 인간, 사회적 인간, 정치적 인간, 경제적 인간이라고 하는 것과 같이 인간을 추상화할 수 있는 보편적 법칙을 발견하려고 하였다. 우나무노 Miguel de Unamuno 1864~1936는, 골육을 가지고 있는 인간은 모두 보편성 같은 것에는 무관심하며, 오직 개개의 독자성만을 귀중히 여긴다.
문명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 여러 가지 형태로 달라지지만 그 모든 양상의 문명은 역시 똑같은 생물적 충동과 고정된 행동 패턴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사랑과 슬픔의 시 또는 숭배라든가 승리의 기념비 같은 것은 모두 보편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모든 사람의 오늘의 모습, 내일의 모습 하는 것은 모두 어제 또는 과거 한때의 그 사람의 모습에서 조금밖에 변하지 않은 것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발달과 행동을 과학적으로 구명하려 할 대 대부분의 연구는 마치 인간을 유전과 환경의 힘에 의해 만들어진 수동적 제품인 것같이 취급하려 든다.
육체를 살려두기 위해서는 이것만은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과, 인간이 죽는다거나 성장을 멈추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이것만은 해서는 안되는 일이 있는 것은 분명한 반면에, 그 중간 영역은 지역적, 문화적 특색에 의하여 주장되어진다. - 에릭슨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Arthur Compton은, 뉴튼의 법치과 왼손을 올리고 싶을 때 올리는 자유가 서로 충돌하면, 뉴튼의 법칙을 변경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자유의지가 통계적으로 표시되지 않는 이유는, 관찰을 통계적으로 처리할 때 예견할 수 없는 현상을 될 수 있는 한 숨겨 버린다거나 또는 말살해 버리려고까지 한다.
어린아이에게 있어 논다는 사실은, 자기 독자의 세계를 구성하는 모은 감각과 지각을 얻기 위한 하나의 중요한 수단이라고 간주해도 좋을 것이다.
유아기, 소년기, 청년기, 성인기를 통하여 복잡한 조정을 되풀이해 가는 중에 인간의 자기의 아이덴티티에 관한 감각을 갖기 시작하게 되고, 또 그것은 점점 예리해져 가는 것이다.
어린아이 시절의 온갖 사건은 전생애의 모든 단계를 통하여 남김없이 계속 반영된다. 그것은 초기의 경험이 미래를 엄격하게 규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이후의 모든 반응을 조절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개성이라고 하는 것은 존재이기 보다는 형성되어 가는 것이다.
전생애를 통하여 끊임없는 변화를 계속해 나가면서도 마음은 항상 아이덴티티의 감각을 잃지 않고 있다. 이와 같은 안정성은, 물질대사에 의한 변화로부터 기본적으로 독립해 있는 하나의 신경계의 패턴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뜻하고 있다.
어떤 개인의 독특한 정신구조는 부분적으로는 자기 자신의 창조에 의한 것이므로 환경이나 사건에 대한 그 자신의 반응은 발달하여 감에 따라 자기 자신의 진화적 과거나 자기가 태어난 문화환경으로부터 독립성을 더해 가는 것이다.
성인은 어떤 특수한 의식적인 경험에다 촛점을 맞춘다. 그리고 성인은 지금 당장 쓸데없는 사물에 대하여 선택과 배제를 행하여 이에 따라 선택된 자기의 목표만을 향하여 나아가는데 도움이 될 만한 일종의 터널적인 비전을 발전시킨다. 이렇게 한정된 범위 안에서의 경험이나 목표에 촛점을 맞춘다는 태도야말로 인간 개개의 개성적 발전을 가능케 할 뿐만 아니라, 알베르 까뮈의 말처럼 어느 연령 이상의 사람은 모두가 자기 얼굴에 책임이 있다라는 말이 매우 심각하면서도 비극적인 의미조차 띠게 된다.
개성 individuality과 인격 personality의 구분 - 개성이라는 말은 불가분이라는 말과 같은 어원을 가진다. 즉 개성은 대단히 잘 통합된 조직체로서 구조와 기능간의 영속적인 상호관계가 하나의 유기체를 독특하고도 영속적인 것으로 만든다. 인격은 페르소나와 같이 의식적으로 수득한 역할이나 태도를 나타내는 것이라 본다.
퍼스낼리티는 유기체에 부가되었든가 아니면 유기체에 의해서 채용된 속성이기 때문에 그가 상징하는 역할이나 태도가 이미 적절한 것이 못될 경우 또는 불필요해졌을 경우 그것은 제거되던가 아니면 상실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인간됨됨의 그 그릇은 자기 스스로의 페르소나를 선택하고 또 창조하려고 하는 능력에 따라 결정되어 진다. 사람은 결단을 내릴 때만이 참다운 인간이 된다.
앙드레지드 Andre Gide, 당신은 당신 이외의 어떤 다른 사람이라도 말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그런 것은 말하지 말아라. 당시 이외의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것 그런 것은 행하지 말아라. 당신을 제하고는 존재할 수 없는 그런 측면에만 관심을 기울여라.
지각있는 성인이면, 자기의 일면은 짐승이고 또한 일면은 성자라는 것, 그리고 어리석음과 이성, 사랑과 미움, 용기와 비겁의 혼합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믿는 자인 동시에 회의하는 자요, 이상주의자인 동시에 회의론자이며, 이타적인 선량한 시민인가 하면 이기적인 쾌락주의자인 것이다. 이와 같이 상반되는 모순성이 함께 공존하면 으례 긴장을 초래하는 법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가 서로 잘 상용하면서 건전성을 이루고 있다.
인간은 항상 사회구조의 일부이기 때문에 인간이 유기적인 전체로 통합된다는 것은 그의 생물적 또는 정신적인 속성뿐만 아니라 그가 속해 있는 사회적 집단의 자기 이외의 구성원과의 상호작용과도 관련되는 것이다.
이해한다는 것은 행동이 결정론적 법칙에 지배된다고 믿는 것이며, 용서한다는 것은 결정론을 초월한 동정의 행위이다.
가슴아픈 사실은 인간이 어떠한 가치있는 일을 달성하려 할 때면 항상 하나의 통일체로서 기능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일이다.
제5장 장소, 인간, 국가
일상생활에 있어서는 흔히 사람이 장소보다 더욱 중요하다. 장소나 비인간적인 사물은 끊임없는 응답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넓은 평야나 대해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의 몸과 마음은, 삼림 속의 오지나 산간계곡의 온유한 빛 아래 있을 때와 판이하다.
목축민인 아벨과 농경민인 카인으로 표현하여, 아벨과 카인의 투쟁이 인류역사라는 영국 생물학자 달링턴의 이야기는 약간의 의미는 있다.
유전과 환경의 상호 작용에 의해서 발생하는 생물학적 유독성은 자유의지가 작용함에 따라 더욱 증대된다.
풍경이나 기후는 사람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리스의 위생시설은 비참한 상태이며, 남프랑스 지방의 상수도는 그 시설이 불충분하지만, 지중해 세계의 경치, 하늘과 강물이 평생을 지배하는 기호나 태도를 낳게 하는 사실에 비추어 보면,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가?
히포크라테스는, 공기과 물과 장소에 관하여라는 에세이에서, 여러 국민들의 신체적 정신적 특징은 그 나라의 제세와 공기 및 물의 질, 또는 식량의 풍요성과 그 질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
국민이라는 것은 지리적, 기후적, 또는 인종적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경험에 의해서 성립되는 것이다.
영국에서는 금지되어 있지 않는 것은 전부 허가되어 있다는 뜻이고, 독일에서는 허가되어 있지 않으면 다 금지되어 있고, 프랑스에서는 설사 금지되어 있다 하더라도 모든 것은 허가되어 있다이고, 러시아에서는 허가되어 있다 하더라도 모든 것은 금지되어 있다.
미국인을 비유할 때, 수백만의 광우리 속에서 뛰어 돌아다니는 수백만의 다람쥐들이라고 표현한 것은 D. H. Lawrence이다.
인간 모두 지역적으로 인종적으로 다르기는 하지만, 우리들의 몸 안에 흐르는 피는 같은 색깔이다. 우리들은 실은 한 민족이다.
제6장 장소의 영속성
먼 옛날의 조상들이 땅에 남겨 놓은 흔적이 아주 말살되어 버린 경우는 거의 없다. 서유럽의 농경지 대부분이 수천년 전에 삼림을 개척하고 땅을 개간한 신석기 시대의 정주자들에 의하여 최초로 만들어졌다는 옛날의 기록문서가 있다. 이것은 최근의 항공사진에 의해서 확인되었다. 또 많은 도로도 고대에서 그 기원을 가지고 있다.
고대의 입체도로나 로마의 하이웨이를 개발하는 데 사용한 기술은 그 지방의 식물이나 토지에 커다란 영향을 끼쳐 주었다. 그러한 영향은 매우 항구적인 것으로서 항공사진으로 보면 지름길에서 다리에 의해 변경된 곳까지라도 본래는 도로가 통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식물의 분포가 현저하게 다르다.
전 인류의 역사를 통하여 문명의 발달은 도시의 중심부의 존속과 항상 결부되고 있다. 성서 바이블이라는 명칭은 비브로스 Byblos라는 도시명에서 유래된 것인데, 파피루스의 두루마리를 뜻하는 말인 동시에 레바논 해안 베이루트에서 25마일 북방에 위치하는 고대의 항구명이기도 하다.
미국 미시시피강 서쪽에 있는 여러 대도시중 샌프란시스코는 서부 개척민에 의하여 이룩되지 않은 유일한 도시이다.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한 최초의 사람은 그 대부분이 파나마 지협을 넘고 호온만을 돌아온 도박사, 매춘부, 악당들, 일확천금을 노린 사람들이었다. 이 새로운 도시는 청교도의 영향을 입지 않고 발전했던 것이다. 그 뒤 북이탈리아로부터 대규모의 이민이 몰려 닥쳐 이 도시 독특한 성격이 이룩되었다. 가난한 시실리아인이나 나폴리인들과는 달리 북이탈리아인들은 유럽 문명에 정통하고 있어서 지중해항의 코스모폴리탄적 분위기와 흡사한 것을 만들어내었다. 이 도시는 유럽 대륙의 대도시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어서, 인스에 무관심했을 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개혁에도 어떤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아, 새로운 스타일의 생활을 희구하는 메카가 되었다.
런던은 벨기에 계의 소부족의 수도로서 출발하여, 로마제국의 일지방의 수도가 되었고, 색슨인의 수도, 노르만인의 수도, 그러다가 드디어 세계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렘브란트와 콘스터블이 엘 그레꼬나 세잔느와 다른 까닭은 그림의 제재뿐에서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다른 종류의 빛깔들이 그들의 감각이나 마음에다 각기 다른 영향을 던져 준 결과에서이다. 지중해의 하늘은 바닥이 뚫어질듯이 밝고 맑게 갠 공기 때문에 눈에 띄는 것이라고는 모두 빛을 발산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북대서양의 하늘 아래에서는 빛깔은 모두 사물 속에 빨려들어가 있는 듯이 보이는 탓으로 사물이 어떤 신비성을 띤다.
한 국가의 사회사나 문화사는 그 국민의 행동이나 기호에서 뿐만 아니라 인간의 온갖 활동이 그 경관을 이룩하는데 어떤 역할을 하는가에도 달려있다. 이 세계 어디치고 사람이 사는 곳이면 다 그 나라의 경관의 주요한 특징을 이루고 있는 것의 대부분이 그 나라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 오락의 방법, 사회적 교류의 방법 등에서 유래한다.
미국의 도시공원의 대부분이 미국인의 생활과 별 상관이 없는 까닭은, 그것의 설계가 치졸해서가 아니라 , 한 가호씩 독립된 주택이 아파트의 수를 훨씬 능가하여 집 뒷뜰이 사교장이 되어있어 공공의 광장은 자연히 방치되고 사회의 낙오자의 것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개인이 심은 버드나무가 수 세대 이전에 공공의 부지에 심어 놓은 유서깊은 느릅나무나 떡갈나무를 능가한다.
일본 페루 남유럽 같은 여러 지역에서는 전통적인 사다리밭 경작의 방법으로 수세기를 내려오면서 표토의 유실을 막아왔는데, 현대의 농업에서는 등고선 경작으로 토양의 침식을 막고 있다.
구세계에서의 다리는 무엇보다도 사람과 사람과의 교류를 위하여 만들어진데 비하여, 미국의 근대적 교량은 자동차를 통과시키기 위하여 설계되고 있다. 구도시의 건축물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단을 구분시켜 주었으며 그들 사이에는 꼬불꼬불한 골목길들이 있었다. 대조적으로 미국에서 일찌기 발달된 격자호 도로망 gridiron pattern은 길다란 도로의 탄생을 촉진시켰고, 그것은 하이웨이로 발전해 나갔다.
국가의 크기는 그 나라가 토지 이용을 어떻게 하는가의 태도에 영향을 던져 주는 요소의 하나이다. 영국에서는 토지의 황폐화에 대한 외침이 커지만, 미국에서는 전혀 그런 두려움이 없다. 미국인은 만약 어떤 장소가 쓸모없게 된다면 곧 그곳을 버리고 다른 데로 옮겨갈 수 있다.
제7장 자연의 인간화
인간이 경작해 온 토지들은 쉴 사이 없이 경작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비옥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인간이 원시 들판을 인간 사회에 알맞은 풍토로 뜯어 고쳤으며, 사람의 손길이 닿은 풍경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생물학적으로도 윤택해지고, 새로운 문명의 발생과 그의 성장을 돕기에 알맞은 조건을 제공하기에 이르렀다.
유럽의 자연은 인간과 그가 살고 있는 장소와의 사이의 끊임없는 긴밀한 공동작업, 즉 지구의 구애로부터 오는 산물인 것이다.
인간은 야성 속에서 소외감을 느낀다. 그러므로 수백 세대를 내려오면서 야성으로부터 도망쳐왔다. 자연을 조종한다든가 또는 많은 장소에다 새로운 환경을 만들어 냄으로써 인간은 점차 야성으로부터 자기를 지키기에 이르렀다. 야성을 극복하고 자기에게 쾌적한 생태학적 상황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된 바로 그 시기에 인간생활의 본질적인 특성을 형성하였다.
재배식물은 거의가 양수성인 것으로서 다른 나무 아래에서는 성장할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은 농업의 발전, 문명의 발전을 위해서 삼림을 베어낸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제일단계였던가를 말해 준다.
지구의 총 육지면적에서 11%는 경작지로서, 10%는 방목지로서, 그리고 20%는 관리된 삼림으로 이용되고 있다.
제8장 프란시스코 수도회의 자연보존과 베네딕트 수도회의 자연경영
성 프란시스 Francis, 1182~1226는 자연의 윤리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모든 생물과 무생물까지도 마치 그의 친 형제자매처럼 다루었다.
홍적세의 기간에 이동한 대륙의 빙상에 의하여 그 당시의 많은 동물상 식물상이 파괴되었으며, 토양이 유실되었다. 그러나 자연은 또 회복하여 새로운 동식물상을 획득하기에 이르렀다.
미국의 밤나무는 미국 동부의 삼림 속에서 꽤 울창하게 자랐었는데, 1906년 아시아로부터 우연히 수입된 진균식물로 말미암아 오늘날에 와서는 그 썩어버린 밤나무가 부식토를 이루고 있어 숲속의 그 자리는 수많은 종류의 오크로 뒤덮이게 되었다.
1883년 자바와 수마트라 중간에 끼어있는 작은 섬인 크라카토아 krakatoa에서는 화산분출 활동이 매우 활발하였다. 그 폭발력으로 섬의 3분의 2가 날라가 버렸다. 화산재는 지구상 대단히 광대한 면적으로 퍼져 나갔다. 폭발이 있은 지 1년 후에 그 섬을 상세히 조사한 결과 오직 한 마리의 거미와 몇 포기의 풀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25년 후 3일을 계속해서 조사하는 과정에서 202 종류의 동물이 발견되었으며, 50년 후에는 880 종류의 동물을 헤아릴 수 있었고, 삼림이 섬을 온통 뒤덮을 정도로 생물학적인 회복이 진행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생물의 거의가 자바나 스마트라에서 왔던 것이다.
태평양의 비키니나 애니웨톸 Emiwetok 환초는 1946년으로부터 1958년에 이르기까지 수차례의 핵실험으로 말미암아 산산이 분쇄되어 버렸음에도 1964년에는 이러한 섬들의 표토만은 파괴되어 있었지만, 거의가 모두 정상의 상태로 되돌아 갔다.
자연계를 보호한다는 것은 다양성의 소실을 막는 최량의 보증도 되며 생태학적 재해를 최소한 줄이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 되기도 한다.
자연보호를 권장하는 또 하나의 이유로서 경제적 생태학적 이유를 훨씬 넘어서는 미적 도의적인 이유가 있다.
콘돌과 같은 것을 구하는 일에 있어서의 진정한 중요성은 우리가 콘돌 그 자체를 필요로 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그것을 구하려고 하는 행위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데 있다.
Thoreau는 그의 일기에서, 어쩌다 내가 월든호 Walden Pond를 따라 무심히 흘러갈 때면 나는 사는 것을 그만두고 존재하기 시작한다고 적고 있다.
아씨시의 프랜시스와 마찬가지고 너시아 Nursia의 베네딕트는 참 자연보호는 잘못된 인간의 행동으로부터 자연을 지켜 나갈 뿐 아니라 잘 조화된 인간과 자연과의 사이에 이루어지는 창조적인 관계를 더욱 촉진시키는 것과 같은 인간활동을 발달시켜 나가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라가고 하는 신념을 가진 사람에게 있어서만이 그들의 수호신처럼 받들여질 것이다.
베네딕트회의 수도사야말로 손에다 흙을 묻힌 최초의 학자였다.
창세기의 제1장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에 관해 말하고 있다.
초기 무렵의 베네딕트회 수도사는 언덕 위에 살고 있었는데 비하여, 그 분회인 시토수도회 Cistercian의 수도사들은 계곡에 살기를 좋아했다.
시토수도회는 사람이 살기에 부적당한 습지나 숲으로 뒤덮인 계곡을 찾아 수도원을 설립하면서, 숲을 베어 넘기고 습지에는 배수시설을 하여 말라리아가 번지는 곳으로부터 건강하고도 번영을 다짐하는 새로운 농토를 만들어 내었다. 말라리아를 박멸하는 일로 대단히 명성이 높았던 그들은 마침내 로마 평야에다 배수시설을 하라는 대공사까지 맡기에 이르렀다.
제9장 적합성, 변화, 설계
영국은 종획지 실시로, 경지면적 5~10에이커마다에 도랑을 파고 직선으로 된 산울타릴르 만들어 분할해 놓고 일정한 간격으로 나무를 심었다. 이처럼 독특한 지금은 오랜 역사와 많은 문학작품 속에서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경관이야말로 영국 중부지방의 전형적인 풍경이다.
꽃이라든가 담 또는 초원, 꼬불꼬불한 작은 길 같은 것은 느릿한 속도에서 바라보면 즐거운 일이지만, 그것이 시속 60마일이 된다면, 벌써 흐릿하게 어른거려 방해가 됨은 물론 오히려 위험할 정도이다. 산책할 경우에는 꽃을 즐길 수가 있고 마차를 타고 갈 때엔 작은 시냇물의 물소리를 들을 수가 있으나, 스피드를 내는 자동차 여행의 경우 최고의 경치는 넓게 펼쳐진 광야의 풍경이다.
저속력으로 달리는 승용차와 얌전하고 섬세한 산업화 이후의 시골과는 서로 잘 어울려 있지만, 오늘날의 자동차나 비행기의 여행은 넓은 벌판의 경관과 잘 어울린다.
모든 생태학은 궁극에 가서는 항상 인간중심주의가 된다. 인간은 가치판단을 도입하지 않고 환경의 적합성을 논할 수는 없다.
식량의 생산과 소비는 문화를 안정시키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이긴 하지만, 인간의 적응력은 식습관에까지 번지고 있다.
스파게티는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서 14세기에 베니스로 소개한 것이고, 토마토는 17세기에 중미로부터 유럽으로 넘어 왔는데, 영국과 프랑스는 성욕을 증진시킨다고 생각하여 “사랑의 능금”이라고 불렀다. 옥수수와 감자도 그 기원은 미국이고, 쌀은 인도에서 중국으로 넘어가기까지 2000년이 걸렸고, 거기에서 일본으로 건너가기까지 800년이 걸렸다. 바빌로니아 앗시리아 이집트 문명의 기본 곡물은 보리쌀이었다. 밀은 이디오피아의 고지대에서 생겨 세계에 퍼졌다.
고향이란 탄생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 피부 눈 머리 빛깔에 따라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란 극히 왕성한 적응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세계 어느 곳에서나 살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현대의 수많은 문제거리의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자연과 적합하는데 성공한 주거나 농경지 또는 풍경의 모든 형태를 살펴 보면 그 뿌리 밑에 깔려 있는 사회철학이 모두 외부에 현재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그것들은 그것을 이룩한 사람들의 습관 기호 희망을 드러내 놓고 있는 것이다.
도미니크회에서는 읍내에다, 예수교회에선 도시에다가 제각기 뜻에 맞는 활동과 장소를 선택했다. 영국인들은 동식물을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동식물 그 자체를 위하여 사랑했고, 프랑스인들은 동식물을 조형디자인 속에 끌어 들이려는 원망을 일찍부터 드러내기 시작했다.
문화패턴의 기원은 대부분 태도나 형태나 기술 중의 한 작은 쏠림이 우연한 동기로 어느 일정한 방향으로 집합작용을 일으킬 때 일어났던 것 같다.
고대의 조형가들은 우선 그들이 관여하지 않아서는 안 될 상황이 대단히 단순했던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나라들을 여행하는데 매력을 느끼는 이유의 하나는, 건물이나 지붕이 그 지방의 조건과 잘 적합해 있어 지금도 그 때의 정신을 역력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적응성은, 오랜 뒤에 가서는 육체나 정신에 때때로 병이라고 하는 댓가를 지불하게 한다.
히포크라테스는, 질병을 일으키는 주요한 원인은 변화다. 그것도 최대의 변화인 계절이나 그밖의 사상에 있어서의 급격한 변화이다라고 한다.
인간 대 자연의 관계를 추상적인 말로 생각한다는 것은 일반 사람에 있어서는 좀 어려운 일이다. 아마도 이 어려움 때문에 고대의 사람들이 개개의 장소를 거기에 유일한 특수성을 부여하고 그것이 해내야 할 사명 vocation을 결정짓는 속성을 똑똑히 밝히는 신성에 의해 의인화시켰던 것같다.
영국의 경관설계가들은 17세기의 회화에서 유래하는 미적인 배려를 장소의 정신 속에 쏟아 넣음으로써 새로운 종류의 경치를 창조해 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타리아와 영국은 자연과 풍토에 있어 현저히 다르다. 이는 새로운 경관을 창조한 것으로 봐도 좋다.
제10장 내재하는 악마
스위스의 건축가 르 코르브제 Le Corbusier는, 현대주택은 테크놀로지 문명이 몰고온 여러가지 기술을 받아들이고 있긴 하나 문명생활을 육성하는 쾌적이라고 하는 점에 있어서는 대단히 부족하다고 한다. 현대주택은 살기위한 기계이다.
산업문명의 성공은 인간관계의 질에 의하는 것보다 음식물이나 제품의 양에 의해 측정되게끔 되었다.
옥외변소를 옥내로 옮기고, 육체적인 노동을 경감시키고, 전력으로 집을 냉난방하고 실제로 필요 이상으로 자동차 냉장고 전화 등등 여가용품을 소유할 수 있을 정도로 풍요로울 때 그 사회는 문명화되었다고 말하게끔 되었다.
동양문명은 입으로는 자연의 신성성을 부르짖으면서도 실제로는 숲을 베어 넘기고 토지를 침식하고 석탄 석유 광물을 구하려고 구덩이를 파헤칠 뿐만 아니라 단일재배 농업을 시행하는 등 그 결과 서양문명과 거의 같을 정도로 환경을 무참히 오염시키고 있다.
과학기술이 사회적인 면에서 파탄한 까닭은 그것 자체가 갖는 너무나 강대한 힘과 또 그것의 지나친 정밀성 때문에 지금와서는 오히려 사람의 능력으로 그것을 이해하고 다루기는 어렵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테크놀러지가 사회를 자기 뜻대로 조형하고 있는 악마의 손에 의해 좌우된다고 하는 광범한 신념은 테크놀로지적인 정신이 드디오 모든 사회제도나 사고양식 속에 스며들기 시작한 현실 사태로부터 야기된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사회의 시스템이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해석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기술문명에 있어 가장 악마적인 힘의 하나는 성장에의 끊임없는 추구이다.
내쫓아야 할 악마는 테크놀러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 한 가운데 숨어 있다.
숙명론적인 태도에 의하면, 우리는 어떤 사물의 처리방법을 알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일을 그렇게 행하고 있음에 지나지 않으며, 이런 독특한 숙명주의야말로 현대세계의 무서운 악마적인 힘이 되는 것이다.
A God within - Rene Dubos
도시 집단생활은 때때로 개미굴이나 벌집으로 곧잘 비유된다. 도시는 사회적 곤충과 같이 일하는 인간의 숙소이다. 수많은 사람들은 공동체 안에서 동일한 역할을 연출하면서 아침저녁 지정된 소굴로 돌아간다.
앙드레지드 Andre Gide, 당신은 당신 이외의 어떤 다른 사람이라도 말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그런 것은 말하지 말아라. 당시 이외의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것 그런 것은 행하지 말아라. 당신을 제하고는 존재할 수 없는 그런 측면에만 관심을 기울여라.
지각있는 성인이면, 자기의 일면은 짐승이고 또한 일면은 성자라는 것, 그리고 어리석음과 이성, 사랑과 미움, 용기와 비겁의 혼합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믿는 자인 동시에 회의하는 자요, 이상주의자인 동시에 회의론자이며, 이타적인 선량한 시민인가 하면 이기적인 쾌락주의자인 것이다. 이와 같이 상반되는 모순성이 함께 공존하면 으례 긴장을 초래하는 법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가 서로 잘 상용하면서 건전성을 이루고 있다.
산책할 경우에는 꽃을 즐길 수가 있고 마차를 타고 갈 때엔 작은 시냇물의 물소리를 들을 수가 있으나, 스피드를 내는 자동차 여행의 경우 최고의 경치는 넓게 펼쳐진 광야의 풍경이다.
서 평
인간과 자연이 공존할 수 있는가, 인간의 환경파괴는 제재를 받아야 되는지, 항상 자연에 대한 영감을 주는 글을 써는 저자는, 사소하게 잊혀져 가는 사실들로, 총체적인 입론의 근거를 마련하고 있다.
저자의 글을 따라가다 보면 오늘날의 그린피스나 환경론자들이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다.
안타깝지만 생태학에 관한 책들이 그렇듯이, 정확한 사실을 기반으로 하기 보다는 여러 저자의 감상이나 당시의 보고서, 그리고 저자의 느낌이 모자이크 되면서 지금에 와서는 과학적인 기반이나 근거가 조금 더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서론 - 실재 속에 숨겨져 있는 측면
원시인은 의식은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어떤 사물 뒤엔느 혹은 그 안에는 반드시 어떤 다른 것이 있고, 또 눈에 보이는 운동 뒤에는 반드시 이와 대응되는 힘이 있으리라고 상상했다. 바로 이와 같은 비물질적인 것이나 힘을 그들은 신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호칭은 외적인 실재 안에 숨어 있다고 생각되는 법칙을 나타내는 데 불과했다. 그 명칭 자체에는 아무런 별다른 뜻이 부여되어 있지 않았다. 현대에 살면서도 아직 그 석기시대의 문화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부족들은 자기들 주위에 도처에 신이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전고전기 및 고전기의 그리스인들은 인간성의 숨겨진 측면, 특히 기억에 남는 행동을 이룰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자극한 힘을 entheos 즉 내재하는 신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enthusiasm은 바로 이 entheos에서 유래한 말이다.
enthusiasm이라고 하는 그리스어의 뜻은 논리나 명석한 사고만 가지고는 인간생활의 창조적 활동을 완전히 설명할 수 없다는 뜻도 포함하고 있다.
nature라는 말은 심리적 사회적 또는 인간적인 외적 풍모만 말해 주는 것이 아니라 실재의 표면 밑에 숨어 있는 모든 힘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이스나 로마 시대 사람들에게는 영웅 아니면 무슨무슨 신들이 주역이 되어 있는 신화를 환기시키지 않고서는 아무리 설명해 보아야 어떤 장소나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역할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제1장 세계에 내재하는 세계들
비가 거친 뒤 빗물을 잔뜩 머금은 야생버섯이 적절한 시기와 장소를 적절히 택하여 폭발적으로 번식하는 현상은 진기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겨울, 봄, 이른 여름 동안에는 발견되지 않던 효모는 풍성하게 번식해서 포드즙을 큰 항아리에 저장하자마자, 즉시에 발효하기 시작한다. 그러한 수확기가 지나고 나면 효모는 포도원에서 자취를 감추고 만다.
어떤 사물을 묘사할 때, 그것이 제아무리 섬세하고 객관적으로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그것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성을 제대로 다 전달해 주지는 못한다. 오직 그것을 그대로 몸소 체험하는 길 밖에 다른 방법은 없다.
지금에 와서 나는 내 인생항로를 형성하는데 있어 행동적 결정론보다는 오히려 동기나 자유의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역사의 과정에 있어서도 우발적인 사건이 더 큰 역할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전신에 펼쳐져 있는 유기적 기능으로 받아들여지는 감각을 통하여 세계와 접촉하고 있는데, 우리의 세계관에는 그러한 것 이상의 것이 존재하고 있다. 감각은 우리 개개인이 그 내부에 가지고 있는 정신작용에 따라 완전히 그 사람 독자적인 개념구조로 전환되는 것인데, 그 정신작용은 그 사람의 유전적 경험적인 과거에 입각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어떠한 사람의 정신작용과도 다른 것이다.
아무리 우리가 개인적으로 또는 집단적으로 공동의 생활을 위해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생각해 보면 우리는 극히 사적인 자기 자신의 세계를 살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인간들이 교류를 하고 우주적인 테크놀로지가 전세계를 획일화시키려고 노력한다하더라도 대부분의 정상적인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지리적으로 극히 한정된 소지역에서 배타적이라고도 할 만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제2장 지구의 신학
태양으로부터 발사되는 지나치게 뜨거운 자외선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수면뿐이었기 때문에 극히 오랫동안 생명이 존재할 수 있었던 곳은 오직 바다의 수면 밑이었을 것이라는 상상은 쉽게 할 수 있다. 수중에는 풍부한 영양물이 있었기 때문에 바다는 원시생물로 가득했을 것이다. 남조류가 20억년 전의 선캄브리아기의 퇴적층에서 발견된 것은 그것이 근거가 있는 이론이다.
지구의 특징을 말할 때 성스로운이라는 표현을 쓰는 생각은, 인류의 마음깊이 뿌리박혀 있는 태도를 표현하는 것이다. 자연을 파괴하는 것에 대해서 모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토양은 그대로 하나의 생명체이다. 화학성분이나 구조로 보아 그 토양이 어떠한 장소의 것이든 간에 항상 생물의 활동에 의해 원시의 암석으로부터 쉬지 않고 재생되어 가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어떠한 곳에서나 많은 종류의 다양한 생물이 생식하고 있으며 그것들은 각기 자기에게 적절한 장소를 찾아서 자기에게 적합한 토양으로 변질시켜 가고 있다.
자연에서 내리치는 끊임없는 회초리에 내 몸을 맡긴다는 것은 인간의 건전성을 위하여 본질적으로 필요한 우주의 힘의 핵심과의 생동하는 접촉을 뜻하는 일이다.
인간은 소우주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 소우주는 자기인식 능력으로 대우주를 포용하면서 동체가 되어 그것들을 새로이 보다 풍부하게 재조직한 결과 이번에는 조직의 힘을 빌려 대우주에다 보다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빈곤 질환 그리고 환경의 황폐화 등에 대한 여러 가지의 문제는 고도로 발달한 과학기술만 가지고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다. 기술적인 처리만을 구사할 경우 대개 경과조치의 난잡성만 늘어날 뿐 뜻하지 않았던 부작용이 발생하던가, 자연의 힘에 역행하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이와는 달리 인간과 지구와의 관계에 대한 깊은 지식은 현대의 우리들에게 원시시대의 조상들이 그랬던 것보다 훨씬 더 큰 자연보호에 가능성을 던져주고 있다.
정통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이성은 미신이나 공포심보다 훨씬 유효한 자연을 관리하는 지침이 될 수 있다.
Henry Beston, 자연은 우리 인간성의 일부이다. 이와 같은 성스러운 신비에 대한 자각과 경험을 갖지 않는다면 인간은 인간이길 멈추게 될 것이다.
제3장 뿌리는 깊다
인류는 아열대적 환경 속에서 출현하였지만, 인류의 진화가 완성된 것은 빙하시대였다. 즉 인류는 안정된 기후 속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빙하가 전 지구를 뒤덮고 있었던 추위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렇게 기후적인 요인과 수렵이나 식물채집의 생활양식에 맞추어 몇 가지 인류의 형이 도태 선택되었는데, 이러한 도태현상의 압력은 굉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인류는 한 형이 형성되고 나면 적어도 5만년은 그리 큰 변화를 일으키지 않은 것 같다.
석기 시대 사람은 지구를 방방곡곡 누비고 다녔던 탓으로 격심한 기후의 변화도 경험했다. 그리하여 당연한 결과로써 매우 다양한 유전형이 나타났는데, 그러나 그 유전자의 변화는 그다지 뿌리 깊은 것이 못되었다.
우리 자신의 육체나 정신 면에 있어서, 문명생활이 짊어지고 있는 많은 문제들은 석기시대로부터 내려오는 몸과 마음을 가지고 이 기술사회를 살아야 한다는 모순된 사실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인간의 생물학적 성질과 그의 환경 전체 사이에서 생기는 균열은 변화가 가속될 때 특히 심해진다. 신석기시대의 농업혁명, 청동기시대의 도식혁명, 산업혁명 이후의 2세기에 걸친 시기를 보면, 생물의 진화메커니즘은 대단히 더딘 데다가 그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 생활양식의 변화가 급격할 때 그 보조는 맞지 않게 된다.
인간의 신체나 마음의 대부분, 주야의 일주기, 계절에 의한 계절주기, 그리고 월경주기와 같은 리듬은 인간이 자연계와 결부되어 있다는 가장 명확하고 정정된 현상들이다. 이와 같은 리듬은 먼 옛날부터 내려오는 인가의 진화역사를 통해서 진화의 모든 측면에서 우주의 힘이 지배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해 주고 있다.
인간도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혈압, 홀몬 작용과 같은 생리적 기능은 우주의 영향력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같은 13도의 온도가 7월에는 춥게 느껴지지만, 12월에는 매우 쾌적하다. 그것은 인간 신체의 기본조건이 여름과 겨울에 다르기 때문이다. 그 메커니즘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지만, 겨울에 흔히 있는 식량부족등에 대비한 몸의 변화로 판단할 수 있는 것같다. 적응 메커니즘은 유전 기호로서 유전코드에 기록되고, 여전히 변함없는 그 힘을 발휘하고 있다.
석기시대에 개발된 생물학적 장치를 갖춘 인간이 현대의 기술사회를 생활하며 기능하지않으면 안 될 모순이야말로 몇몇의 현대 질환의 발생원인인 것으로 보인다.
1940년대에 미국에서 일본이나 한국까지 프로펠러 비행기로 30시간이나 걸려 오는 동안, 부신 스테로이드 호르몬의 분비량을 측정한 기록이 있다. 여행중에는 미국의 표준시와 시간적으로 일치하고 있었는데, 아시아에 도착하자 변화가 있었다. 도착후 9일이나 10일이 지나서야 겨우 아시아 시간과 일치하였다. 미국에서 유럽으로 여행했을 경우에는 적응에 5일이 걸렸다.
호모사피엔스가 출현한 곳은 동아프리카의 고원지대인데, 그곳은 우기와 건조기가 교대로 있어서 식물의 성장기와 휴식기에 상응하는 아열대 기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현대인의 욕구, 기호 또는 습관 같은 것도 따지고 보면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는 캘리포니아나 지중해 연안과 같은 기후 조건이다. 그러므로 대개의 인간들은 그와 같은 아열대 기후를 대단히 좋아하며 심지어 그들의 주택 안도 이와 같은 기후환경을 만들어 놓고 즐긴다.
신화나 고전 예술의 많은 테마가 쾌적한 기후조건 하에 있는 전원풍경 속에서 전개되고 있는데, 이것은 호모사피엔스가 그의 생물학적 진화를 완결시킨 곳이었던 사반나 지방과 매우 흡사한 지대인 까닭이라 생각한다.
고금을 가리지 않고 세계 도처에서 그려지고 있는 전원풍경화라는 것은 목장 안에 무성한 나무 밑에서 양치기들이 양떼를 지키며 젊은이들이 사랑을 속삭이고 있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이렇게 전원생활이란 확실히 인류의 가장 기분좋은 추억과 결부되어 있다.
인간은 자기가 경험한 모든 경험을 상징화하고 또 그 상징에 대하여 마치 그것이 현실적인 실재의 사건이라도 되는 듯이 반응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역시 그 기원을 선사시대에다 둘 수 있는 것이다.
적어도 십만년 전 네안데르탈인들은 사자를 장사지낼 때 부장물과 함께 죽은 사람을 동에서 서쪽으로 향해 구부리고 앉아 있는 자세로 이장을 했으며, 또 야생화로 장식한 침상 위에다 시체를 올려놓고 매장하기도 하였다.
Ralph Waldon Emerson, 연령 인종을 뛰어넘어 만인이 범하는 악덕이라든가 우행이라는 것이 있다. 인간은 조상을 닮기보다는 동시대 사람을 더 많이 닮는다.
환경 속에는 우리 이외, 즉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외부 세계의 환경 전체가 가지고 있는 여러가지의 측면 이외에 개인의 마음 속에만 존재하는 측면, 그러니까 한사람의 극히 사적인 개념적 환경에 의해 구성되는 측면이 있다.
모든 인간은 학식이 있건 원시적인 무식이건 간에 모두 각자의 개념적 환경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 개념적 환경이 각자의 윤리적 사회적 상태를 결정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진보의 본질에 관한 의견, 우주의 질서 안에 있는 인간의 위치에 관한 개념, 그리고 신이라고 하는 언어와 관련되는 태도 같은 것들이 이렇게 하여 결정되는 것이다.
인간의 반응이 아니라 응답이라는 단어는 인간과 환경과의 상호작용이 인간에게 있어서 단순한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인간측의 자유의지가 작용하고 있다는 점을 나타내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다.
어린 시적의 경험이 특히 중요하다고 말하는 까닭은 탄생 시에는 아직 발달하지 않았던 신체나 뇌가 환경의 여러 가지 자극을 받아 거기에 음답해 가는 동안에 완성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뇌는 3살만 되면 갓 태어났을 당시의 3배로 성장하는데, 뇌의 기본구조는 초기 기간에 정교한 수상돌기가 여러 개 생겨나면서 발달하는 것이다. 언어, 상상력, 의식, 자아의식 같은 것 역시 이 시기에 고도로 발달한다.
제4장 개성, 인격 및 집단
도시 집단생활은 때때로 개미굴이나 벌집으로 곧잘 비유된다. 도시는 사회적 곤충과 같이 일하는 인간의 숙소이다. 수많은 사람들은 공동체 안에서 동일한 역할을 연출하면서 아침저녁 지정된 소굴로 돌아간다.
인간을 생물적 인간, 사회적 인간, 정치적 인간, 경제적 인간이라고 하는 것과 같이 인간을 추상화할 수 있는 보편적 법칙을 발견하려고 하였다. 우나무노 Miguel de Unamuno 1864~1936는, 골육을 가지고 있는 인간은 모두 보편성 같은 것에는 무관심하며, 오직 개개의 독자성만을 귀중히 여긴다.
문명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 여러 가지 형태로 달라지지만 그 모든 양상의 문명은 역시 똑같은 생물적 충동과 고정된 행동 패턴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사랑과 슬픔의 시 또는 숭배라든가 승리의 기념비 같은 것은 모두 보편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모든 사람의 오늘의 모습, 내일의 모습 하는 것은 모두 어제 또는 과거 한때의 그 사람의 모습에서 조금밖에 변하지 않은 것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발달과 행동을 과학적으로 구명하려 할 대 대부분의 연구는 마치 인간을 유전과 환경의 힘에 의해 만들어진 수동적 제품인 것같이 취급하려 든다.
육체를 살려두기 위해서는 이것만은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과, 인간이 죽는다거나 성장을 멈추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이것만은 해서는 안되는 일이 있는 것은 분명한 반면에, 그 중간 영역은 지역적, 문화적 특색에 의하여 주장되어진다. - 에릭슨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Arthur Compton은, 뉴튼의 법치과 왼손을 올리고 싶을 때 올리는 자유가 서로 충돌하면, 뉴튼의 법칙을 변경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자유의지가 통계적으로 표시되지 않는 이유는, 관찰을 통계적으로 처리할 때 예견할 수 없는 현상을 될 수 있는 한 숨겨 버린다거나 또는 말살해 버리려고까지 한다.
어린아이에게 있어 논다는 사실은, 자기 독자의 세계를 구성하는 모은 감각과 지각을 얻기 위한 하나의 중요한 수단이라고 간주해도 좋을 것이다.
유아기, 소년기, 청년기, 성인기를 통하여 복잡한 조정을 되풀이해 가는 중에 인간의 자기의 아이덴티티에 관한 감각을 갖기 시작하게 되고, 또 그것은 점점 예리해져 가는 것이다.
어린아이 시절의 온갖 사건은 전생애의 모든 단계를 통하여 남김없이 계속 반영된다. 그것은 초기의 경험이 미래를 엄격하게 규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이후의 모든 반응을 조절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개성이라고 하는 것은 존재이기 보다는 형성되어 가는 것이다.
전생애를 통하여 끊임없는 변화를 계속해 나가면서도 마음은 항상 아이덴티티의 감각을 잃지 않고 있다. 이와 같은 안정성은, 물질대사에 의한 변화로부터 기본적으로 독립해 있는 하나의 신경계의 패턴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뜻하고 있다.
어떤 개인의 독특한 정신구조는 부분적으로는 자기 자신의 창조에 의한 것이므로 환경이나 사건에 대한 그 자신의 반응은 발달하여 감에 따라 자기 자신의 진화적 과거나 자기가 태어난 문화환경으로부터 독립성을 더해 가는 것이다.
성인은 어떤 특수한 의식적인 경험에다 촛점을 맞춘다. 그리고 성인은 지금 당장 쓸데없는 사물에 대하여 선택과 배제를 행하여 이에 따라 선택된 자기의 목표만을 향하여 나아가는데 도움이 될 만한 일종의 터널적인 비전을 발전시킨다. 이렇게 한정된 범위 안에서의 경험이나 목표에 촛점을 맞춘다는 태도야말로 인간 개개의 개성적 발전을 가능케 할 뿐만 아니라, 알베르 까뮈의 말처럼 어느 연령 이상의 사람은 모두가 자기 얼굴에 책임이 있다라는 말이 매우 심각하면서도 비극적인 의미조차 띠게 된다.
개성 individuality과 인격 personality의 구분 - 개성이라는 말은 불가분이라는 말과 같은 어원을 가진다. 즉 개성은 대단히 잘 통합된 조직체로서 구조와 기능간의 영속적인 상호관계가 하나의 유기체를 독특하고도 영속적인 것으로 만든다. 인격은 페르소나와 같이 의식적으로 수득한 역할이나 태도를 나타내는 것이라 본다.
퍼스낼리티는 유기체에 부가되었든가 아니면 유기체에 의해서 채용된 속성이기 때문에 그가 상징하는 역할이나 태도가 이미 적절한 것이 못될 경우 또는 불필요해졌을 경우 그것은 제거되던가 아니면 상실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인간됨됨의 그 그릇은 자기 스스로의 페르소나를 선택하고 또 창조하려고 하는 능력에 따라 결정되어 진다. 사람은 결단을 내릴 때만이 참다운 인간이 된다.
앙드레지드 Andre Gide, 당신은 당신 이외의 어떤 다른 사람이라도 말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그런 것은 말하지 말아라. 당시 이외의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것 그런 것은 행하지 말아라. 당신을 제하고는 존재할 수 없는 그런 측면에만 관심을 기울여라.
지각있는 성인이면, 자기의 일면은 짐승이고 또한 일면은 성자라는 것, 그리고 어리석음과 이성, 사랑과 미움, 용기와 비겁의 혼합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믿는 자인 동시에 회의하는 자요, 이상주의자인 동시에 회의론자이며, 이타적인 선량한 시민인가 하면 이기적인 쾌락주의자인 것이다. 이와 같이 상반되는 모순성이 함께 공존하면 으례 긴장을 초래하는 법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가 서로 잘 상용하면서 건전성을 이루고 있다.
인간은 항상 사회구조의 일부이기 때문에 인간이 유기적인 전체로 통합된다는 것은 그의 생물적 또는 정신적인 속성뿐만 아니라 그가 속해 있는 사회적 집단의 자기 이외의 구성원과의 상호작용과도 관련되는 것이다.
이해한다는 것은 행동이 결정론적 법칙에 지배된다고 믿는 것이며, 용서한다는 것은 결정론을 초월한 동정의 행위이다.
가슴아픈 사실은 인간이 어떠한 가치있는 일을 달성하려 할 때면 항상 하나의 통일체로서 기능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일이다.
제5장 장소, 인간, 국가
일상생활에 있어서는 흔히 사람이 장소보다 더욱 중요하다. 장소나 비인간적인 사물은 끊임없는 응답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넓은 평야나 대해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의 몸과 마음은, 삼림 속의 오지나 산간계곡의 온유한 빛 아래 있을 때와 판이하다.
목축민인 아벨과 농경민인 카인으로 표현하여, 아벨과 카인의 투쟁이 인류역사라는 영국 생물학자 달링턴의 이야기는 약간의 의미는 있다.
유전과 환경의 상호 작용에 의해서 발생하는 생물학적 유독성은 자유의지가 작용함에 따라 더욱 증대된다.
풍경이나 기후는 사람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리스의 위생시설은 비참한 상태이며, 남프랑스 지방의 상수도는 그 시설이 불충분하지만, 지중해 세계의 경치, 하늘과 강물이 평생을 지배하는 기호나 태도를 낳게 하는 사실에 비추어 보면,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가?
히포크라테스는, 공기과 물과 장소에 관하여라는 에세이에서, 여러 국민들의 신체적 정신적 특징은 그 나라의 제세와 공기 및 물의 질, 또는 식량의 풍요성과 그 질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
국민이라는 것은 지리적, 기후적, 또는 인종적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경험에 의해서 성립되는 것이다.
영국에서는 금지되어 있지 않는 것은 전부 허가되어 있다는 뜻이고, 독일에서는 허가되어 있지 않으면 다 금지되어 있고, 프랑스에서는 설사 금지되어 있다 하더라도 모든 것은 허가되어 있다이고, 러시아에서는 허가되어 있다 하더라도 모든 것은 금지되어 있다.
미국인을 비유할 때, 수백만의 광우리 속에서 뛰어 돌아다니는 수백만의 다람쥐들이라고 표현한 것은 D. H. Lawrence이다.
인간 모두 지역적으로 인종적으로 다르기는 하지만, 우리들의 몸 안에 흐르는 피는 같은 색깔이다. 우리들은 실은 한 민족이다.
제6장 장소의 영속성
먼 옛날의 조상들이 땅에 남겨 놓은 흔적이 아주 말살되어 버린 경우는 거의 없다. 서유럽의 농경지 대부분이 수천년 전에 삼림을 개척하고 땅을 개간한 신석기 시대의 정주자들에 의하여 최초로 만들어졌다는 옛날의 기록문서가 있다. 이것은 최근의 항공사진에 의해서 확인되었다. 또 많은 도로도 고대에서 그 기원을 가지고 있다.
고대의 입체도로나 로마의 하이웨이를 개발하는 데 사용한 기술은 그 지방의 식물이나 토지에 커다란 영향을 끼쳐 주었다. 그러한 영향은 매우 항구적인 것으로서 항공사진으로 보면 지름길에서 다리에 의해 변경된 곳까지라도 본래는 도로가 통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식물의 분포가 현저하게 다르다.
전 인류의 역사를 통하여 문명의 발달은 도시의 중심부의 존속과 항상 결부되고 있다. 성서 바이블이라는 명칭은 비브로스 Byblos라는 도시명에서 유래된 것인데, 파피루스의 두루마리를 뜻하는 말인 동시에 레바논 해안 베이루트에서 25마일 북방에 위치하는 고대의 항구명이기도 하다.
미국 미시시피강 서쪽에 있는 여러 대도시중 샌프란시스코는 서부 개척민에 의하여 이룩되지 않은 유일한 도시이다.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한 최초의 사람은 그 대부분이 파나마 지협을 넘고 호온만을 돌아온 도박사, 매춘부, 악당들, 일확천금을 노린 사람들이었다. 이 새로운 도시는 청교도의 영향을 입지 않고 발전했던 것이다. 그 뒤 북이탈리아로부터 대규모의 이민이 몰려 닥쳐 이 도시 독특한 성격이 이룩되었다. 가난한 시실리아인이나 나폴리인들과는 달리 북이탈리아인들은 유럽 문명에 정통하고 있어서 지중해항의 코스모폴리탄적 분위기와 흡사한 것을 만들어내었다. 이 도시는 유럽 대륙의 대도시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어서, 인스에 무관심했을 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개혁에도 어떤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아, 새로운 스타일의 생활을 희구하는 메카가 되었다.
런던은 벨기에 계의 소부족의 수도로서 출발하여, 로마제국의 일지방의 수도가 되었고, 색슨인의 수도, 노르만인의 수도, 그러다가 드디어 세계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렘브란트와 콘스터블이 엘 그레꼬나 세잔느와 다른 까닭은 그림의 제재뿐에서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다른 종류의 빛깔들이 그들의 감각이나 마음에다 각기 다른 영향을 던져 준 결과에서이다. 지중해의 하늘은 바닥이 뚫어질듯이 밝고 맑게 갠 공기 때문에 눈에 띄는 것이라고는 모두 빛을 발산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북대서양의 하늘 아래에서는 빛깔은 모두 사물 속에 빨려들어가 있는 듯이 보이는 탓으로 사물이 어떤 신비성을 띤다.
한 국가의 사회사나 문화사는 그 국민의 행동이나 기호에서 뿐만 아니라 인간의 온갖 활동이 그 경관을 이룩하는데 어떤 역할을 하는가에도 달려있다. 이 세계 어디치고 사람이 사는 곳이면 다 그 나라의 경관의 주요한 특징을 이루고 있는 것의 대부분이 그 나라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 오락의 방법, 사회적 교류의 방법 등에서 유래한다.
미국의 도시공원의 대부분이 미국인의 생활과 별 상관이 없는 까닭은, 그것의 설계가 치졸해서가 아니라 , 한 가호씩 독립된 주택이 아파트의 수를 훨씬 능가하여 집 뒷뜰이 사교장이 되어있어 공공의 광장은 자연히 방치되고 사회의 낙오자의 것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개인이 심은 버드나무가 수 세대 이전에 공공의 부지에 심어 놓은 유서깊은 느릅나무나 떡갈나무를 능가한다.
일본 페루 남유럽 같은 여러 지역에서는 전통적인 사다리밭 경작의 방법으로 수세기를 내려오면서 표토의 유실을 막아왔는데, 현대의 농업에서는 등고선 경작으로 토양의 침식을 막고 있다.
구세계에서의 다리는 무엇보다도 사람과 사람과의 교류를 위하여 만들어진데 비하여, 미국의 근대적 교량은 자동차를 통과시키기 위하여 설계되고 있다. 구도시의 건축물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단을 구분시켜 주었으며 그들 사이에는 꼬불꼬불한 골목길들이 있었다. 대조적으로 미국에서 일찌기 발달된 격자호 도로망 gridiron pattern은 길다란 도로의 탄생을 촉진시켰고, 그것은 하이웨이로 발전해 나갔다.
국가의 크기는 그 나라가 토지 이용을 어떻게 하는가의 태도에 영향을 던져 주는 요소의 하나이다. 영국에서는 토지의 황폐화에 대한 외침이 커지만, 미국에서는 전혀 그런 두려움이 없다. 미국인은 만약 어떤 장소가 쓸모없게 된다면 곧 그곳을 버리고 다른 데로 옮겨갈 수 있다.
제7장 자연의 인간화
인간이 경작해 온 토지들은 쉴 사이 없이 경작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비옥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인간이 원시 들판을 인간 사회에 알맞은 풍토로 뜯어 고쳤으며, 사람의 손길이 닿은 풍경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생물학적으로도 윤택해지고, 새로운 문명의 발생과 그의 성장을 돕기에 알맞은 조건을 제공하기에 이르렀다.
유럽의 자연은 인간과 그가 살고 있는 장소와의 사이의 끊임없는 긴밀한 공동작업, 즉 지구의 구애로부터 오는 산물인 것이다.
인간은 야성 속에서 소외감을 느낀다. 그러므로 수백 세대를 내려오면서 야성으로부터 도망쳐왔다. 자연을 조종한다든가 또는 많은 장소에다 새로운 환경을 만들어 냄으로써 인간은 점차 야성으로부터 자기를 지키기에 이르렀다. 야성을 극복하고 자기에게 쾌적한 생태학적 상황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된 바로 그 시기에 인간생활의 본질적인 특성을 형성하였다.
재배식물은 거의가 양수성인 것으로서 다른 나무 아래에서는 성장할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은 농업의 발전, 문명의 발전을 위해서 삼림을 베어낸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제일단계였던가를 말해 준다.
지구의 총 육지면적에서 11%는 경작지로서, 10%는 방목지로서, 그리고 20%는 관리된 삼림으로 이용되고 있다.
제8장 프란시스코 수도회의 자연보존과 베네딕트 수도회의 자연경영
성 프란시스 Francis, 1182~1226는 자연의 윤리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모든 생물과 무생물까지도 마치 그의 친 형제자매처럼 다루었다.
홍적세의 기간에 이동한 대륙의 빙상에 의하여 그 당시의 많은 동물상 식물상이 파괴되었으며, 토양이 유실되었다. 그러나 자연은 또 회복하여 새로운 동식물상을 획득하기에 이르렀다.
미국의 밤나무는 미국 동부의 삼림 속에서 꽤 울창하게 자랐었는데, 1906년 아시아로부터 우연히 수입된 진균식물로 말미암아 오늘날에 와서는 그 썩어버린 밤나무가 부식토를 이루고 있어 숲속의 그 자리는 수많은 종류의 오크로 뒤덮이게 되었다.
1883년 자바와 수마트라 중간에 끼어있는 작은 섬인 크라카토아 krakatoa에서는 화산분출 활동이 매우 활발하였다. 그 폭발력으로 섬의 3분의 2가 날라가 버렸다. 화산재는 지구상 대단히 광대한 면적으로 퍼져 나갔다. 폭발이 있은 지 1년 후에 그 섬을 상세히 조사한 결과 오직 한 마리의 거미와 몇 포기의 풀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25년 후 3일을 계속해서 조사하는 과정에서 202 종류의 동물이 발견되었으며, 50년 후에는 880 종류의 동물을 헤아릴 수 있었고, 삼림이 섬을 온통 뒤덮을 정도로 생물학적인 회복이 진행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생물의 거의가 자바나 스마트라에서 왔던 것이다.
태평양의 비키니나 애니웨톸 Emiwetok 환초는 1946년으로부터 1958년에 이르기까지 수차례의 핵실험으로 말미암아 산산이 분쇄되어 버렸음에도 1964년에는 이러한 섬들의 표토만은 파괴되어 있었지만, 거의가 모두 정상의 상태로 되돌아 갔다.
자연계를 보호한다는 것은 다양성의 소실을 막는 최량의 보증도 되며 생태학적 재해를 최소한 줄이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 되기도 한다.
자연보호를 권장하는 또 하나의 이유로서 경제적 생태학적 이유를 훨씬 넘어서는 미적 도의적인 이유가 있다.
콘돌과 같은 것을 구하는 일에 있어서의 진정한 중요성은 우리가 콘돌 그 자체를 필요로 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그것을 구하려고 하는 행위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데 있다.
Thoreau는 그의 일기에서, 어쩌다 내가 월든호 Walden Pond를 따라 무심히 흘러갈 때면 나는 사는 것을 그만두고 존재하기 시작한다고 적고 있다.
아씨시의 프랜시스와 마찬가지고 너시아 Nursia의 베네딕트는 참 자연보호는 잘못된 인간의 행동으로부터 자연을 지켜 나갈 뿐 아니라 잘 조화된 인간과 자연과의 사이에 이루어지는 창조적인 관계를 더욱 촉진시키는 것과 같은 인간활동을 발달시켜 나가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라가고 하는 신념을 가진 사람에게 있어서만이 그들의 수호신처럼 받들여질 것이다.
베네딕트회의 수도사야말로 손에다 흙을 묻힌 최초의 학자였다.
창세기의 제1장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에 관해 말하고 있다.
초기 무렵의 베네딕트회 수도사는 언덕 위에 살고 있었는데 비하여, 그 분회인 시토수도회 Cistercian의 수도사들은 계곡에 살기를 좋아했다.
시토수도회는 사람이 살기에 부적당한 습지나 숲으로 뒤덮인 계곡을 찾아 수도원을 설립하면서, 숲을 베어 넘기고 습지에는 배수시설을 하여 말라리아가 번지는 곳으로부터 건강하고도 번영을 다짐하는 새로운 농토를 만들어 내었다. 말라리아를 박멸하는 일로 대단히 명성이 높았던 그들은 마침내 로마 평야에다 배수시설을 하라는 대공사까지 맡기에 이르렀다.
제9장 적합성, 변화, 설계
영국은 종획지 실시로, 경지면적 5~10에이커마다에 도랑을 파고 직선으로 된 산울타릴르 만들어 분할해 놓고 일정한 간격으로 나무를 심었다. 이처럼 독특한 지금은 오랜 역사와 많은 문학작품 속에서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경관이야말로 영국 중부지방의 전형적인 풍경이다.
꽃이라든가 담 또는 초원, 꼬불꼬불한 작은 길 같은 것은 느릿한 속도에서 바라보면 즐거운 일이지만, 그것이 시속 60마일이 된다면, 벌써 흐릿하게 어른거려 방해가 됨은 물론 오히려 위험할 정도이다. 산책할 경우에는 꽃을 즐길 수가 있고 마차를 타고 갈 때엔 작은 시냇물의 물소리를 들을 수가 있으나, 스피드를 내는 자동차 여행의 경우 최고의 경치는 넓게 펼쳐진 광야의 풍경이다.
저속력으로 달리는 승용차와 얌전하고 섬세한 산업화 이후의 시골과는 서로 잘 어울려 있지만, 오늘날의 자동차나 비행기의 여행은 넓은 벌판의 경관과 잘 어울린다.
모든 생태학은 궁극에 가서는 항상 인간중심주의가 된다. 인간은 가치판단을 도입하지 않고 환경의 적합성을 논할 수는 없다.
식량의 생산과 소비는 문화를 안정시키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이긴 하지만, 인간의 적응력은 식습관에까지 번지고 있다.
스파게티는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서 14세기에 베니스로 소개한 것이고, 토마토는 17세기에 중미로부터 유럽으로 넘어 왔는데, 영국과 프랑스는 성욕을 증진시킨다고 생각하여 “사랑의 능금”이라고 불렀다. 옥수수와 감자도 그 기원은 미국이고, 쌀은 인도에서 중국으로 넘어가기까지 2000년이 걸렸고, 거기에서 일본으로 건너가기까지 800년이 걸렸다. 바빌로니아 앗시리아 이집트 문명의 기본 곡물은 보리쌀이었다. 밀은 이디오피아의 고지대에서 생겨 세계에 퍼졌다.
고향이란 탄생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 피부 눈 머리 빛깔에 따라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란 극히 왕성한 적응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세계 어느 곳에서나 살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현대의 수많은 문제거리의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자연과 적합하는데 성공한 주거나 농경지 또는 풍경의 모든 형태를 살펴 보면 그 뿌리 밑에 깔려 있는 사회철학이 모두 외부에 현재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그것들은 그것을 이룩한 사람들의 습관 기호 희망을 드러내 놓고 있는 것이다.
도미니크회에서는 읍내에다, 예수교회에선 도시에다가 제각기 뜻에 맞는 활동과 장소를 선택했다. 영국인들은 동식물을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동식물 그 자체를 위하여 사랑했고, 프랑스인들은 동식물을 조형디자인 속에 끌어 들이려는 원망을 일찍부터 드러내기 시작했다.
문화패턴의 기원은 대부분 태도나 형태나 기술 중의 한 작은 쏠림이 우연한 동기로 어느 일정한 방향으로 집합작용을 일으킬 때 일어났던 것 같다.
고대의 조형가들은 우선 그들이 관여하지 않아서는 안 될 상황이 대단히 단순했던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나라들을 여행하는데 매력을 느끼는 이유의 하나는, 건물이나 지붕이 그 지방의 조건과 잘 적합해 있어 지금도 그 때의 정신을 역력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적응성은, 오랜 뒤에 가서는 육체나 정신에 때때로 병이라고 하는 댓가를 지불하게 한다.
히포크라테스는, 질병을 일으키는 주요한 원인은 변화다. 그것도 최대의 변화인 계절이나 그밖의 사상에 있어서의 급격한 변화이다라고 한다.
인간 대 자연의 관계를 추상적인 말로 생각한다는 것은 일반 사람에 있어서는 좀 어려운 일이다. 아마도 이 어려움 때문에 고대의 사람들이 개개의 장소를 거기에 유일한 특수성을 부여하고 그것이 해내야 할 사명 vocation을 결정짓는 속성을 똑똑히 밝히는 신성에 의해 의인화시켰던 것같다.
영국의 경관설계가들은 17세기의 회화에서 유래하는 미적인 배려를 장소의 정신 속에 쏟아 넣음으로써 새로운 종류의 경치를 창조해 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타리아와 영국은 자연과 풍토에 있어 현저히 다르다. 이는 새로운 경관을 창조한 것으로 봐도 좋다.
제10장 내재하는 악마
스위스의 건축가 르 코르브제 Le Corbusier는, 현대주택은 테크놀로지 문명이 몰고온 여러가지 기술을 받아들이고 있긴 하나 문명생활을 육성하는 쾌적이라고 하는 점에 있어서는 대단히 부족하다고 한다. 현대주택은 살기위한 기계이다.
산업문명의 성공은 인간관계의 질에 의하는 것보다 음식물이나 제품의 양에 의해 측정되게끔 되었다.
옥외변소를 옥내로 옮기고, 육체적인 노동을 경감시키고, 전력으로 집을 냉난방하고 실제로 필요 이상으로 자동차 냉장고 전화 등등 여가용품을 소유할 수 있을 정도로 풍요로울 때 그 사회는 문명화되었다고 말하게끔 되었다.
동양문명은 입으로는 자연의 신성성을 부르짖으면서도 실제로는 숲을 베어 넘기고 토지를 침식하고 석탄 석유 광물을 구하려고 구덩이를 파헤칠 뿐만 아니라 단일재배 농업을 시행하는 등 그 결과 서양문명과 거의 같을 정도로 환경을 무참히 오염시키고 있다.
과학기술이 사회적인 면에서 파탄한 까닭은 그것 자체가 갖는 너무나 강대한 힘과 또 그것의 지나친 정밀성 때문에 지금와서는 오히려 사람의 능력으로 그것을 이해하고 다루기는 어렵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테크놀러지가 사회를 자기 뜻대로 조형하고 있는 악마의 손에 의해 좌우된다고 하는 광범한 신념은 테크놀로지적인 정신이 드디오 모든 사회제도나 사고양식 속에 스며들기 시작한 현실 사태로부터 야기된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사회의 시스템이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해석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기술문명에 있어 가장 악마적인 힘의 하나는 성장에의 끊임없는 추구이다.
내쫓아야 할 악마는 테크놀러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 한 가운데 숨어 있다.
숙명론적인 태도에 의하면, 우리는 어떤 사물의 처리방법을 알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일을 그렇게 행하고 있음에 지나지 않으며, 이런 독특한 숙명주의야말로 현대세계의 무서운 악마적인 힘이 되는 것이다.
피드 구독하기:
글 (At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