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 24일 화요일
정신세계의 병리와 해부 - 빅터 프랭클
Arztliche Seelsorge von Viktor E. Frankl
성적 용구의 좌절이 신경증의 원인이 되는 것처럼, 의미를 추구하는 의지의 좌절도 신경증의 원인이 되고, 이를 실존적 욕구좌절이라고 한다.
언어능력이나 개념적 사고 혹은 직립보행 보다도, 그 존재의 의미를 문제삼는 계기야말로 인간과 동물의 본질적 차이의 기준으로 한층 중요하다.
사육되는 동물은 사람이 그들을 사육하는 목적을 알지 못한다. 그렇게 사람이 삶의 최종 목적으로써 우주가 갖는 초의미가 무엇인가를 포착할 수 없다. 다만 추정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한 인간이 살아간 소설은 글로 쓴 로망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만큼 위대한 창작적 업적이다.
창조적 활동 속에 실현되는 것을 창조적 가치라 부른다. 가치 이외의 다른 체험 속에 실현되는 것과 같은 체험적 가치도 존재한다.
제 3의 가치 유형으로, 삶이 창조적으로 훌륭한 것도 아니며 체험이 풍부하지 않아도 근본적으로 다른 한 의미가 있다. 이를 태도적 가치라고 한다.
가치는 창조나 인생의 즐거움 속에서 뿐만 아니라 고뇌함으로써 실현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은 활동을 통해서 창조적 가치를, 체험을 통해서 체험적 가치를, 또 고뇌를 통해서 태도적 가치를 실현하고 있다.
인생은 어떤 것이 아니라 어떤 것에 대한 기회에 지나지 않는다(헵벨-Hebbel)
서평
히틀러 당시에 유대인 수용소에 수감되어 극적으로 살아난 프랑클은, 자신의 전공을 바탕으로 수용소에 수용된 사람들의 심리를 바탕으로 깊은 연구를 한 끝에 극한 상황에서의 연구를 발표하였다. 이미 이 책에 나온 로고데라피는 인간이 자신의 존재의미를 찾는 것을 치료하는 방법이지만, 기존의 정신의학자가 연구하는 단순한 병리현상과는 다른 병을 대상으로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가 이 책에는 깊게 언급하지는 않지만, 절망의 상황에서 인간을 계속 살아가게 해 주는 것은 희망이고, 그래서 희망의 철학을 전파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에서 전개되는 내용을 읽다보면, 인생의 의미를 숙고하고 찾으려는 사람이 과연 정신질환자로 취급되어야 할 것인지, 구도자들은 모두 이런 대상에 속할 것인지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얌념으로 실전에서 사용해 볼 수 있는 역설적 관념법의 일반론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서론
사람이 산다는 것이 사실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인지? 의사가 의학의 영역에 철학을 도입하려고 시도한다는 비난을 받는데,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환자 자신이 철학적 문제를 가지고 의사를 찾아가고 있다.
의사는 자기 존재의 의미를 찾는 사람들이 경험하는 정신적 고통은 병리적 증후가 아니라고 속이면서 쉽게 안심시킬 수가 있다.
인간은 육체, 정신 및 영혼으로 이뤄진 세 개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 인간세계에서는 영혼의 차원을 무시할 수가 없다.
영적 고뇌는 정신적 질병과 전혀 다르다. 인간세계에서 영혼의 차원을 이해하는 사람이 아니면 그에 대한 올바른 진단을 내릴 수가 없다.
인간이 쾌락원리를 추구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가능한 많은 가치를 실현시키고, 자기의 삶에 대하여 가장 큰 의미를 주는 내적 욕망은 의미를 추구하는 의지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의미를 추구하는 의지야말로 무엇보다도 가장 인간적인 현상이다. 심리치료의 영역에서는 이 의미를 추구하는 의지를 곧 신경증적 갈등과 같이 다루어 인간의 약점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강제수용소에서의 경험으로 보건데, 산다는 것은 무엇을 기다린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한 가지 일에 대한 목적은 곧 인생의 목적이 된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이런 것에 대한 해결방법을 로고데라피, Logotherapy, 혹은 생존을 위한 심리치료법이라고 한다. 로고데라피는 기존의 심리치료법을 보완하여 인간상의 전체성을 그려 보겠다는 것이다.
삶의 의미에 실상을 안겨주는 것을 실존적 신경증리가고 하고 그와 상반되는 것을 임상적 신경증이라고 한다. 성적 용구의 좌절이 신경증의 원인이 되는 것처럼, 의미를 추구하는 의지의 좌절도 신경증의 원인이 되고, 이를 실존적 욕구좌절이라고 한다.
신경증 환자의 20%는 그 본질과 기원으로 보아 정신발생적 신경증으로 간주할 수가 있다.
심리치료에서는 사람이 가진 일할 수 있는 능력과 삶을 즐길 수 있는 능력에 관심이 있다. 그런데 의료봉사에서는 고통을 참고 견디는 능력에 관심이 있다.
사람들은 자기가 창조적 가치라고 부르는 것을 실현함으로써 자기의 삶에 대하여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또 경험적 가치를 실현함으로써 자기의 삶에 대하여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활동할 수도 없고 창조할 수도 없는 가장 고통스런 가운데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사람들까지도 삶의 가치를 실현하고 있다. 그러나 그에 의미가 부여되었다는 것은 경험하지 못한다. 그는 그에게 주어진 피할 수 없는 고통을 겪음으로써 그의 가치를 실현하고 있는데, 이것을 태도적 가치라고 부른다.
주저하지 않고 운명에 직면하는 것과 같은 고통은 인간에게 부여된 최고의 공적이다.
고통을 겪음으로써 의미를 성취하는 태도적 가치는 그 고통이 회피할 수도 없고 도피할 수도 없을 때에 실현된다.
사람이란 삶을 통해서 무엇을 얻을 것인가를 문제삼지 말고 삶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내가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문제삼지 말고 삶을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느냐고 자문을 해보아야 한다.
종교인은 자신이 존재하는 것은 단순한 과업으로써가 아니라 하나의 사명으로 여기고 있다.
심리치료법이 영혼을 보다 건전하게 치료하는 것이라면 종교는 영혼을 구제하는 것으로써 서로 다르다.
궁극에 가면 로고데라피는 책이맘에 대한 교육에 지나지 않는다.
집합적 신경증의 증후는 네 가지가 있다.
삶에 대한 뚜렷한 계획이 없이 그날그날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첫째 증후이다. 삶에 대한 숙명적 태도가 둘째 증후이다. 집합적 사고가 셋째 증후이다. 즉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어떤 대중 속으로 몰아넣으려는 경향이 있다. 광신이 넷째 증후이다. 집합주의자들은 자신 자신의 인격을 무시하는 데 반해 광신자들은 다른 사람을 전적으로 무시해 버린다.
이 네 가지 증후의 원인은 책임감에 대한 공포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 대한 공포에서 찾을 수가 있다.
양심의 갈등인 도덕적 갈등은 실존적 신경증의 원인이 된다. 사람이 양심의 갈등만 극복할 수만 있다면 광신과 집합적 신경증에 대한 면역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집합적 신경증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은 양심의 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에 괴로워할 수 있고 또 그것을 극복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실존적 신경증은 집합적 신경증을 치료할 것이다.
신체적 질병은 전쟁에서 오는 전형적인 결과이며 정신적 질병은 전쟁을 유발시킨 잠재적 원인이다.
사람의 실존은 인간의 영혼성, 자유성 및 책밍감의 세 가지 요인으로 특징지을 수가 있다.
자유에는 본능, 유전적 소질 및 환경의 세 가지 측면이 있다. 우리는 결심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그런 본능을 받아 들일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다. 유전적 소질은 일란성 쌍둥이라도, 하나는 범법자가 되고 하나는 범죄학자가 되는 것으로 보아 악도 아니요, 선도 아니다. 환경의 경우 환경이 사람을 창조하지는 못한다. 동일한 사태에 직면해도 어떤 사람은 타락하는데 어떤 사람은 숭고성을 유지한다.
사람은 단순한 유전과 환경의 산물이 아니다. 결심이라고 하는 제3의 요소가 있다. 사람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위해서 결심을 한다. 결국 결심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도록 가르키는 것이 교육이다.
사람의 영혼성과 자유성 다음에 오는 것이 책임성인데, 첫째 자기의 양심에 대한 책임이 있다. 오늘날의 정신분석자드은 진정한 도덕성이란 초자아의 개념에 바탕을 둘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람이란 자신이 믿고 있는 것보다 훨씬 비도덕적일 뿐만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도덕적이다(프로이드).
아우슈비쯔의 가스방은 사람이 유전과 환경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론을 체험하는 데 충분하였다.
제1 심리치료법에서 로고데라피로
정신분석과 개인심리학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는 심리치료법을 논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 위대한 심리치료법의 체계는 프로이트와 아들러가 독자적으로 창안하였다.
무의식의 세계에 묻혀 있는 사실들은 억압에서 벗어나 다시 되살아 나야 한다.
신경증 환자가 자신은 죄가 없다는 것을 주장하는 과정이 타협이다. 무의식의 세계로 추방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이 책임을 면하려고 하는 것이다.
의식으로써 자아를 제한하는 것이 정신분석의 신경증에 대한 견해라면, 책임감각으로써 자아를 제한하는 것이 개인심리학의 신경증에 대한 견해이다.
정신분석이나 개인심리학은 인간 존재의 일면만을 보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모든 것은 가상이며, 이상이며, 표상이라고 하는 유아론의 주장은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진리, 현실 및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에 대응하는 개념 또한 소실되기 때문이다.
개인심리학은 그 정신병리학적 측면을 보다 좁게 보는 과오를 범하고 있다. 그들은 정신적 투쟁의 순수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정신적 현상과 신경증적 표현 그 자체가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부정함으로써 정신적 실체는 의미가 많고 또 다양하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개인심리학과 달리 신경증적 증후는 목적에 대한 수단만이 아니고 여러 가지 정신적 투쟁의 직접적인 표현이다.
정신분석이 성취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편으로는 무의식의 요구와 또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성이 요구하는 것을 타협시키는 것이다. 개체는 자기의 개인적 추동을 외적 세계에 적응시켜 현실과 조화시키려고 시도한다.
인간의 외면적 생활형성과 내면적 충족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생활형성이 외연적 크기라고 한다면 생활충족은 벡타적인 크기이다. 즉 그것은 개개 인간의 인격에 부여된 가치가능성에 관계되는 것으로써 이 가능성을 실현한다는 것이 인생에 있어서는 중요하다.
내면적 충족은 놀랄만한 업적으로 수행하는데 최선을 다 함으로써 인생의 의의를 발견한다.
과학의 개척지에 있는 이론가는 이 세상의 한 복판에 있는 보다 활동적인 사람보다 더 훌륭한 영웅적 봉사를 하고 있다. 즉 그는 거기서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을 위임받고 있으며, 그 독자성에 있어서 다른 사람과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순수하게 연역에 의존하는 심리치료법은 학문적 영역에 있어서는 공백이라고 할 수 있다.
신경증 환자가 요구하는 것은 그가 철학적 고찰을 하는데 있어서 가지는 내재적 비판이다. 그의 논쟁에 대하여 성실한 반대론을 전개해야지, 사회학적 영역이나 생물학적 영역에서 근거를 찾는 이질적인 논쟁은 피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내재적 비평을 피해야 하고, 그런 문제가 생신 정신적 평면을 버려야 하고, 정신적 태도를 위한 싸움을 정신적 무기로써 극복해서는 안된다. 일종의 대등한 세계관에서 동일한 무기를 포함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환자의 생각이 옳다면 환자는 심리치료를 받을 필요가 없다. 환자의 생각이 옳지 못하다면 심리치료법으로는 그 교정이 불가능하다. 여러가지 영적 현상에 대해서는 종래의 심리치료법으로 접근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심리적 전체성에 대한 접근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영적 현실의 독립성을 추구하는 것도 용납되지 않는다.
세계관에 대한 정신병리학이나 세계관에 대한 심리치료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존재하는 것은 세계를 보는 자, 그의 마음 속에서 세계관이 형성되는 구체적 인간의 정신병리학내지는 심리치료법이다.
어떤 세계관을 가진 사람에 대하여 심리적으로 건전하다 혹은 건전하질 못하다고도 말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모든 정신적인 것은 자기법칙성을 결코 부정되어서는 안된다. 신의 개념은 자연력에 대한 원시인의 불안에서 생겼다는 사실에서 신적인 것이 존재하느냐에 대한 논쟁을 벌이는 것은 인식론적으로 허용될 수 없는 하나의 철학적인 도박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시야의 특수성, 모든 세계의 일면성은 사실은 본질과 가치 세계의 객관성과 상대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
건강하므로 진이며, 반대로 병이기 때문에 위(가짜)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로고데라피는 영적 용어를 쓰는 심리치료법이다.
심리주의는 결국 인식적 소여와 정신적 과제로부터의 도피이며 따라서 인간의 현실성과 가능성으로부터의 도피이다. 그것은 가면 이외의 아무 것도 찾아내지 못한다. 그리고 가면의 배후에는 신경증적 동기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모든 것이 그에게는 진실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예술은 결국 생활이나 사람으로부터의 도피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종교는 자연의 폭력에 대한 원시인의 공포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는다.
심리주의는 가치를 타락시키는 경향이 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인간상은 많은 제약성 때문에 인간의 무력함이 강조되고 몹시 왜곡되었다. 즉 생물학적인 것, 심리학적인 것, 하회학적인 것으로 속박되어 왔다.
인간이 그러한 것들의 제약에 동조하지 않을 때 비로소 그의 도덕적 판단가능성이 싹트게 된다.
제2. 정신분석에서 실존분석으로
|. 일반실존분석
심리치료법에서는 본능적인 것을 의식하게 하는 데 반해, 로고데라피에서는 영적인 것을 의식하게 하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1. 삶이란 무엇인가
영적 갈등으로 괴로워하는 환자는 흔히 부딪치게 되는데, 의사가 그것을 화제로 삼는 것이 아니라 환자가 의사로 하여금 그러한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게 만드는 것이다.
언어능력이나 개념적 사고 혹은 직립보행 보다도 그 존재의 의미를 문제삼는 계기야말로 인간과 동물의 본질적 차이의 기준으로 한층 중요하다.
인간존재는 무엇보다도 본질적으로 역사적 존재이다.
현재적 존재란 모든 미래지향성을 포기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인생에 대한 태도를 말한다(슈트라우쓰).
서구 사람들은 본래 그 자신이 창조적으로 실현해야 할 여러가지의 명령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본래 자기 자신의 활동에 도취하여 마비되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은 가치 실현의 수단을 위해 최종 목적인 가치를 망각하고 있다(쉘러-Scheler).
일요신경증 환자는 정신적 의미에 있어서 일종의 공허감을 메꾸기 위해 어떤 도취상태로 도피한다.
순전히 외인적 이유에서 그 심적 균형을 상실한 사람에게 로고데라피가 적합하다. 친근자를 잃고 불안해진 나머지 그래도 자신의 생활이 의미를 갖는가를 의심해 본다. 이 순간에 그 존재의 의미성에 위기가 오는 비참한 경우가 있다.
사육되는 동물은 사람이 그들을 사육하는 목적을 알지 못한다. 그렇게 사람이 삶의 최종 목적으로써 우주가 갖는 초의미가 무엇인가를 포착할 수 있을까?
자유의지 - 사육되는 동물도 그 동물적 본능 때문에 살고 있으나 사람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 본능을 이용하고 있다.
한 인간이 살아간 소설은 글로 쓴 로망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만큼 위대한 창작적 업적이다. 시간이나 혹은 삶의 과거는 그 의미와 가치를 조금치도 변화시킬 수가 없다.
윤리적 니힐리즘에 빠진 환자는 곧 모든 삶의 의미는 쾌락적인 것이라고 쉽게 단정해 버린다. 모든 인간의 행동은 결국에 가서는 행복에 향한 노력에 의해 지배되고 모든 심리적 행동은 순순한 쾌락원리에 의하여 규정된다는 사실에 논거를 두는 것이다.
그러나 쾌락원리는 심리학적 가공물이다. 쾌락원리를 받아들이려고 하는 것은 도덕적인 점에서는 인간의 가능한 목적설정의 평균화를 초래한다.
현실에 있어서 사람이 사는 데에는 쾌 불쾌는 직접적으로 그렇게 중요하질 않다.
만일 우리가 단순한 쾌락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면 삶은 결국 무의미하게 됮 않을 수가 없다. 쾌락이란 하나의 상태이다. 죽음에 직면해서는 어떠한 인간의 어떠한 쾌감도 다같이 무의미하다.
정상인들은 매일 평균적으로 쾌감보다는 비교할 수 없는 정도의 불쾌감을 경험하고 있다.
물리적인 엔트로피에 버금가는 것으로 심리적인 열반을 들 수 있다. 모든 불쾌감에서 해방하려는 모든 심리적 긴장의 해소는 대우주적인 엔트로피에 대한 소우주적인 등가물로써의 열반은 내면에서 내다 본 엔트로피이다.
즐거움 그 자체가 의미를 지니고 있을 때만 삶의 의미로 충만시킬 수 있다. 즐거움은 항상 어떤 대상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주관적 상태는 어떤 가치를 인정하기 위한 조건이며 주체의 어떤 태도가 가치파악에 필요한 매개임은 확실하다. 그러나 이는 절대적 가치의 객관성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고 그를 전제로 하고 있다.
창조적 활동 속에 실현되는 것을 창조적 가치라 부른다. 가치 이외의 다른 체험 속에 실현되는 것과 같은 체험적 가치도 존재한다. 체험적 가치는 세계를 수용함에 있어서 자연미와 예술로 귀의시킴으로써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다.
사람이 존재함에 있어서 일정한 순간의 현실적 의미가 활동에 의하지 아니하고 단순한 체험 속에 오는 것이 있다.
산맥의 높이는 계곡의 높이로써가 아니라 최고봉의 높이에 의해서 측정되는 것과 같이 인생에 있어서도 그 의미성에 관해서는 최고점이 결정적인 것으로 짧은 한 순간이 후에 가서 생각해 보면 전생애에 의미를 부여하는 수도 있다.
제 3의 가치 유형으로, 삶이 창조적으로 훌륭한 것도 아니며 체험이 풍부하지 않아도 근본적으로 다른 한 의미가 있다. 이를 태도적 가치라고 한다.
가치실현의 완성이 어떻게 제한된다고 해도 태도적 가치를 실현한다는 것은 가능하며 또 존속한다. 이렇게 해서 인간존재는 의식성 존재와 책임성 존재라는 출발 명제에서 도덕적 타당성에 의해서 확인되는 것이다.
시시각각으로 인생에 있어서는 가치추구의 기회가 달라진다. 어떤 가치를 실현할 것인지 그 상황에 맞는 것이 필요하다.
심한 죽음의 괴로움을 약물로써 완화시키려고 하는 것은 안락사와는 다른 것으로써, 안락사의 문제는 모든 삶에 대한 말살을 법률적으로 공인하려고 하는 시도이다.
정신병 환자의 경우, 의사는 그의 병든 의지 대신 죽음에 이르도록 해서는 안된다. 로고테라피스트의 입장에서는, 의사는 환자의 삶의 의지와 삶의 권리라는 의미에서 그에 봉사하면서 행동해야 한다. 그로부터 그의 의지와 권리를 박탈해서는 안된다.
자살자가 갖는 삶에 대한 권태는 하나의 감정이지만, 이는 논증되지 않는다. 윤리적으로 이와 같은 권태에 빠져도 되느냐가 문제가 된다.
사람의 자유는 이미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로 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에의 자유라는 것, 즉 책임을 질 자유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해야 한다.
자살을 선택한 사람은 인생의 규칙을 위배한 것이다. 어떠한 대가를 치뤄도 이겨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싸움에서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요구된다.
왜 사는가를 알고 있는 사람은 어떤 삶도 참고 견디어 나간다(니체).
자살하는 사람은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그러나 삶을 무서워 한다.
인생은 그것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그만큼 의미가 충만되고 있다고 하는 통찰이 생긴다.
인간의 실존이 본질적으로 구체적이며 주관적이라는 점을 밝힌 점은 현대실존철학의 커다란 공적이다.
미래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은 곧 장래의 행동에 대하여 영향을 주므로 미래를 예언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다.
인간의 도덕적인 자기 비난은 어떤 인격적 이상과 인격적 당위를 이미 예상하고 있다. 그 경우 이 인간은 어떤 가치를 인정하고 가치의 세계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평생을 두고 성취해야 할 일은 항상 존재하며 원칙적으로는 사람의 능력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신경증 환자에게 그의 사명을 색출하는 본능적 확실성은 결여되어 있다.
삶의 의미에 대하여 비판할 때 우리는 극단적인 입장을 취하게 된다.
(1) 죽음이란 무엇인가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은 사람으로써 할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질문이다. 인간생존의 유한성 자체가 동시에 삶의 의미를 말살시키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으로서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우리가 죽지 않는다면 우리는 과연 모든 행위를 무한으로 연기할 수가 있을까? 그것을 지금 행하든, 내일, 모래, 1년 후, 혹은 10년 후에 행하든 같은 것이다.
유한성, 즉 시간성은 본질적 특징만이 아니다. 의미에 있어서 결정적인 것이다. 인간 실존의 의미는 그 전도가능한 것 속에 기반을 두고 있다. 따라서 한 인간이 가지는 삶의 책임은 시간성과 단일성을 갖는 것이라고 이해할 때에만 실로 이해되는 것이다.
삶이란 사실상 소비될 수가 없는 실질이지만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서 실질을 망각하고 그 기능에 변화가 오며 종말에 가서는 각자의 행위나 체험이 고뇌 속으로 성숙되어 가는 것이다.
마일 삶이 의미를 지니고 있다면 그때 그것은 그 장단이나 자손의 유무와는 무관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혹은 만일 삶이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언제까지 계승되거나 혹은 무한하게 자손을 남긴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반짝이는 것은 연소하는 것을 감내하지 않으면 안된다(빌트간쓰-Wildgans). 연소한다는 것은 고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것이 끝까지 연소되어 없어질 때까지 참고 견디어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삶은 그 의미를 정신적, 윤리적, 그리고 미학적인 비생물학적인 여러 영역에서 처음으로 얻게 된다.
본능적 충족과 생물적인 자녀를 갖는다는 것은 결혼의 두 가지 측면에 지나지 않으며 결코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사랑이 갖는 영적 요인이 보다더 중요하다.
인간이 고도로 분화되면 될수록 그만큼 일반적 의미에 있어서나 이상적 의미에 있어서나 평균과는 멀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평균적 특징을 희생하는 대신 개성적 특징을 얻게 된다.
개인적 실존이 의미를 가지려면 공동체가 필요하고, 공동체가 스스로 의미를 지니려면 개인적 실존을 필요로 한다. 공동체는 본질적으로 대중과 구별하게 된다. 대중은 어떠한 개성을 다 망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인적 실존은 대중 속에서 그 의미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중 속으로 도피함으로써 인간은 가장 고유한 것 즉, 책임을 상실한다. 그러나 공동체가 그에게 짐을 지워주고 있으며 그는 그 속에서 살아가려는 사명 때문에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대중 속으로 도피하는 것은 결국 개인적 책임으로부터의 도피이다.
전체주의는 사람을 판단할 때 과오를 범한다. 책임있는 인격 대신 단순한 유형만을 본다. 인격적 책임 대신 인간 유형에 묶여 있는 것을 보려고 한다. 어떤 유형에 의해서 평가할 때 개인을 고려할 필요가 없다.
도덕적 영역에 있어서 전체주의의 입장에 따르면 사람을 평가하거나 비난하는 경우에는 집합적 죄의식을 갖게 된다.
실존분석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 실존의 단일성과 독자성에 대한 책임을 의식하게 한다. 인간의 실존은 그 유한성에 대한 책임성 존재이다.
운명에 대한 반역의 배리성은 분명하다. 어떤 사람의 경우 그가 자기 아버지로부터 태어난 것이 아니고 다른 아버지로부터 태어났다고 할 때 운명에 대한 배역의 역설적 본질은 분명해진다. 그의 경우 이미 자기자신이 아니고 운명을 쥐고 있는 사람은 전혀 다른 사람이며 따라서 그는 자기의 운명을 운운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가장 극단적인 자기의문시 즉, 자살을 결단하는 그 가능성 및 자기자신의 존재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인간의 자유는 인간의 모든 다른 존재와는 구별되는 것으로 동물의 존재양식과도 대조를 이룬다.
의지의 자유를 정말로 의심삼는 것은 결정론적인 철학적 이론에 빠진 사람이나 혹은 망상형 정신분열증 환자이다. 이들의 의지는 자유가 아니며 작위적으로 제한된다.
인간은 순간순간 많은 가능성 속에서 하나를 찾아내어 그것을 실현하여 과거로 돌려보내고 또 그것을 확보하는 것으로써 생활하고 있다.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나 지나가 버린 것은 남아 있는 것으로, 그것이 지나가 버린 것인데도 불구하고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지나가 버림으로써 남아있다.
현재가 저장하고 있는 가능성을 과거 속에 영원히 저장되는 현실에 이송되면 순간은 영원해지는 것이다.
운명적인 것은 세 가지 형태로 주어져 있다. 신체적 운명으로 소질이 하나. 외적 상황의 총체로써 그 상태가 둘, 소질과 상태는 공동으로 인간의 위치를 형성한다. 인간은 그 위치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는 것이다.소질은 인간의 생물학적 운명을 형성하고, 상태는 그 사회학적 운명을 형성한다. 마지막으로 심리학적 운명이 있다.
영혼의 위력과 자연의 위력을 무한히 대립시키는 것은 의미가 없다. 우리는 이미 양자가 모두 인간에게 예속되어 있다는 것과, 양자가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예술적이라고 하는 것은 어려운 생물학적 소재가 자유로운 의지에 의하여 형성된 것을 의미한다.
정신분석은 심리적 사실의 결정적 측면을 강조하는데, 심리적인 사실을 어떻게도 할 수 없는 메카니즘의 산물로 보고 있다. 편견없는 관찰에 의하면, 본능은 동의를 하는 것으로, 자아가 그 동기를 결정한다고 하는 것이 현상학적 사실임이 분명하다.
정신분석을 성적 본능을 윤리적 의지로 변화시키려고 하는 지적 연금술(쉘러 - Scheler)
연금술의 본질은 배가 바람에 의해서 그냥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항해의 기술은 오히려 바람의 힘을 자기가 뜻하는 방향으로 움직여서 어떤 경우에는 바람과는 거꾸로 배를 달리게 하는 것이 가능할 때 처음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인간의 의지박약의 배후에 숨어 있는 그 자신의 자유를 은폐하려고 하기 쉽다. 여자정신분열증 환자에게 당신이 의지박약이냐고 물었더니, “ 내가 되고 싶으면 나는 의지박약이고, 내가 바라지 않으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였다.
로고데라피는 의사가 환자의 괴로운 고뇌는 우울증의 주요원인이 되며, 투쟁을 걸어오는 것임을 환자로 하여금 알게할 필요가 있다.
같은 정신병 환자라도 정신적 태도에 따라 다르게 행동한다는 점은 정신과 의사가 잘 알고 있다.
(2) 강제수용소내에서의 심리적 변화
수용소에 수감될 때 수용쇼크라는 현상이 있다. 새로 수용되는 죄수는 안경을 제외하고는 이전에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빼앗긴다. 제2의 단계에서는 죄수 자신에 의해 조정되는 것으로서 무감동은 자기방어의 기제이다. 이런 독특한 환경에 대한 일종의 심리적 적응현상이 문제된다. 그 환경에서 일어나는 일이 약화되어 의식되고 감정생활은 퇴화된다.
그 뒤 점점 모든 높은 수준의 흥미는 감퇴해 버리고, 예외적으로 정치적 관심과 종교적 관심이 높아지는 것은 당연하고도 주목할 만하다. 그것을 빼놓고는 죄수는 동면상태에 들어간다.
수용소의 생활이 원시적으로 변하면서 음식부족이 모든 생각이나 원망의 주된 내용이 되고, 성에 대한 관심은 현저하게 상실된다. 강제수용소에서는 성충동이 꿈에서도 나타나지 않는다.
수용소 생활에서는 본능이 보다 원시적 구조로 퇴화하고 있다. 많은 죄수들로부터 무감동뿐만 아니라 불안정성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사실을 발견했다.
파수꾼이 되는 몇몇은 점차적으로 황제망상을 갖게 된다.
개인의 자유가 극히 제한된 사회환경이지만, 그의 실존은 어떤 형태로 형성되든, 최후의 자유가 존재하고 있다.
강제수용소내에서 생기는 성격변화는 생리적 상태변화(기아, 수면부족 등)의 결과이며, 또 심리학적 소재(열등감)의 표현인 동시에 본질적으로는 영적 태도에 의해서 결정된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환경의 영향에 따라 혹은 그와 상관없이 태도를 결정할 수 있는 자유와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수용소에서는 인간실존에 있어서 수용소의 생활이 문제될 뿐만 아니라 기한없는 예비적 생활이 문제가 된다. 그는 철조망 외부의 세계에 대하여 점차적으로 소외감을 갖게 된다. 그는 철조망을 통해서 외부의 사람이나 사물은 이 세상과는 먼 것같이 보여 마치 죽은 자가 먼 세계에서 내다보는 것같이 비현실적이며 감지할 수 ㅇ벗는 것같이 느낀다.
영적 의지처가 없을 때 정신적 붕괴는 완전히 무감동에 빠지는 수가 있다. 죄수는 어느 날 갑자기 바라크 속 그의 자리에 누워버린다. 점호에도 나가지 않고 노동도 식사도 세면도 하지 않는다. 아무리 충고해도, 아무리 위협해도 그는 무감동 상태에서 해방되지 않고, 어떠한 벌을 주어도 그는 움직일 수가 없게 된다.
삶에 대한 용기, 혹은 삶에 대한 싫증, 환멸이나 밝은 희망은 저항력과 깊은 관계가 있다.
자살하기로 결심한 두 죄수가 말한 것 가운데, “이제 인생에서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게 되었구나"하는 감정에 지배되고 있다는 공통점들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석방한 뒤에, 그는 먼저 기뻐하는 것을 다시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그것을 다 잊었다. 자유가 된 첫날은 현실이 아름다운 꿈과 같이 생각되지만 곧 과거가 악몽처럼 생각될 뿐이다.
2. 고뇌란 무엇인가
창조적 가치는 행동에 의해서 실현되고 체험적 가치세계(자연, 예술)의 수동적 수용에 의해서 자아 속에서 실현된다. 이와 달리 태도적 가치는 어떤 변화되지 않는 것, 어떤 운명적인 것이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안 될 경우에 이르렀을 때 실현된다.
이것이 곧 가치는 창조나 인생의 즐거움 속에서 뿐만아니라 고뇌함으로써 실현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희생이라고 하는 도덕적 문제에 직면할 때 공리적 윤리학을 저지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은 분명하다. 희생이 타산적으로 되면 윤리적 의미를 잃게 된다.
성과가 없었다는 것이 의미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사람드은 그가 체험한 쾌 불쾌의 특성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사람은 활동을 통해서 창조적 가치를, 체험을 통해서 체험적 가치를, 또 고뇌를 통해서 태도적 가치를 실현하고 있다.
고뇌는 인간에게 그래야만 된다는 것을 직감케 하여 무섭고 혁명적인 긴장을 불러 일으킨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슬퍼한다는 것은 그를 어떤 형태로든지 생존시키는 것과 같다.
비애는 그것을 현재화시키는 기능을 갖는다. 그에 대한 회한은 쉘러가 말한 바와 같이 어떤 죄를 씻어 버린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고난과 퇴굴 사이를 시계의 추와 같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다(쇼펜하우어)
고뇌는 인간을 무감동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심리적 응고로부터 보호해 주고 있다. 우리는 고뇌하는 한 심리적으로는 생생하게 살아 있다.
태도적 가치의 본질은 인간이 변화시킬 수 없는 것에 대처하고 있는 그 속에서 찾을 수 있다. 따라서 태도적 가치의 참된 실현의 전제는 실제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이 문제일 때 생긴다.
행동이나 인내에 의하여 고귀화시킬 수 없는 어떠한 상황도 존재하지 않는다(괴테).
인생은 어떤 것이 아니라 어떤 것에 대한 기회에 지나지 않는다(헵벨-Hebbel).
질병은 인간에게 고뇌의 기회를 부여한다.
한편 모든 질환과는 거리가 먼 인간의 고뇌가 존재한다.
3. 노동이란 무엇인가
구체적 직업이 충족감을 주지 않는 경우 죄는 인간에게 있는 것이지 직업에 있는 것이 아니다.
구체적인 직업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 실존의 독자성을 형성하는 인격적인 것이 직업활동 속에서 삶을 의미있게 해 주느냐가 문제이다.
하는 일 그 자체에서가 아니라 그가 종사하는 태도에서 개인의 불가피성, 불변성, 단일성과 독자성을 찾아 낼 수가 있다.
실업신경증은 그 주증후로 나타나는 것이 우울이 아니라 무감동과 무관심이다.
실업은 신경증의 온상이 된다.
실업신경증은 신체적 증후형성의 수반현상도 되며 많은 경우 동시에 존재하는 영양부족의 결과이다. 무감동은 목적에 대한 수단이 된다. 즉 이미 존재하고 있던 신경증이 실업에 의해 악화되거나 재발된 것이다.
실업은 신경증의 소재가 되고 신경증의 내용이 되어 신경증적으로 진행된 것이다.
훌륭한 실업자라면, 남아 돌아가는 시간을 의미있게 형성하여 그들의 의식, 시간, 생명을 내용이 충만한 것으로 만든다. 그들은 인간 생활의 의미가 직업활동으로 끝이 나지 않는다는 것, 따라서 실업을 해도 생활의 의의가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람이 적절한 직업을 갖게 되면 심리적 활동 구조에 영향을 준다. 더 나아가 생물의 활동 구조와 조직에 까지 영향을 준다.
사람이 임무를 준 서어커스단에서 훈련받은 동물은 동물원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는 동물에 비하여 보통 수명이 길다.
만일 사랑이 결핍되어 있다면 노동은 대용물이 되고, 만일 노동이 결핍되어 있다면 사람은 아편이 될 것이다(알리스 리켄스-Alice Lyttkens).
직업생활과 창조적 생활이 같지 않다. 실존본래의 무내용성이나 의미의 빈약성은 그의 직업생활이 잠시나마 정지될 때, 일요일에 곧 나타나게 된다.
자기 일에 전적으로 얽매인 채 아무 것도 못하는 사람에게는 주말에는 부산한 활동이 필요하다.
인생의 목표가 없는 사람은 인생행로를 급속도로 달리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 목적이 없다는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다. 미친 듯이 뛰는 부산한 생활이 멈추고 나면 무목적성, 무의미성, 실존의 허무감이 다시 나타난다.
그는 일요일에 이러한 체험을 회피하기 위해서, 환락가로 도피, 댄스에 주의를 집중, 운동으로 도피 기타 등등. 그러나 마음 속의 공허감을 감출 수가 없다.
등산한다는 것은 적극적 참여를 의미한다. 신체적 힘이 닿는 한 어느 지점에 도달하려는 순순한 업적이 있다. 등산가가 위험 그 자체를 찾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스포츠뿐만이 아니라 예술도 신경증적으로 남용된다.
참된 예술이나 예술체험은 인간을 풍요하게 하고 그를 가장 고유한 가능성에로 인도한다. 이와는 달리 신경증적으로 오용된 예술은 인간을 그 자신으로부터 유리시켜 버린다. 이렇게 되면 예술은 자기를 마취시키는 가능성과 기회에 지나지 않게 된다.
스릴에 굶주리고 있는 사람에게 가장 큰 센세이션을 의미하는 것은 죽음이다. 그는 자극이 점점 강하지 않으면 만족할 수 없다. 결과적으로 그에게 중요한 것은 죽음뿐이라고 생각한다.
삶의 끝장으로서의 죽음은 그 시간에 충실하지 못했던 사람에게는 타격이 가고 그는 그에 직면할 수가 없게 된다.
소설세계에로의 신경증적 도피, 신경증 환자는 거기에서 그의 허구적 히로인과 동일시한다.
자신을 마비시킴으로써만 우리는 인생이 우리들의 양심 속에 느끼게 하는 영원의 자극에 대하여 스스로 무감각하게 되는 것이다.
4.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을 에로스의 의미로 파악한다면 그것은 체험적 가치가 특별한 양식으로 실현되는 영역이다. 즉 사랑은 다른 사람을 그의 독자성과 단일성에 의해 체험한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받은 인간은 본질적으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포착되어 그가 파악된 다른 자아의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랑에 대한 풍부한 가치성에 대하여 인간적인 공감성을 높여 주는 것이며 모든 가치에 대한 눈을 뜨게 해 준다.
사랑은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력을 강화시켜 가치를 냉철하게 볼 수 있게 한다.
인간은 사랑하는 자로서 신체적-심리적-영적 전체에 대해서 여러가지 태도를 취하게 된다. 가장 원시적인 태도는 신체적 층으로서 그것은 성적 태도이다. 상대방에 대한 보다 높은 태도는 에로틱한 태도이다. 에로틱한 태도를 취하는 사람은 단순히 성적 태도를 취하는 사람보다 더 깊은 심리적 구조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사랑은 그것이 상대방의 인격구조 속에 가장 깊이 파고 들어가 영적인 것에 이르게 되면 최고의 유형이 된다.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신체적 성적 관계는 그 영적 관계의 표현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보고 정신적 관계가 본래 그의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표현수단으로서의 성적 관계는 영적 행위로서의 사랑에서 처음으로 그 인간적 존경을 받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성적 행위는 영적 지향의 표현이다.
잠옷도 그 자체는 남자들에게 영향을 주지 못한다. 남자는 사랑하는 여자가 그 옷을 입고 있을 때 비로소 그것을 아름답게 생각한다.
만일 삶의 의미가 사랑의 행복을 체험했는지 못했는지에 있다면 우리의 존재는 비참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이 아니고 삶은 무한히 풍부한 가치를 실현하는 기회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우리가 창조적 가치 실현의 우위성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태도적 가치 때문에 창조적 가치실현을 포기하면 안되듯이, 사랑의 체험적 가치도 너무 빨리 체험하면 그에 따른 위험은 크다.
여자는 자기와 함께 있는 남자들에게 괴로움을 주지 않기 위해 자기의 개인적인 본질을 숨기려고 하고 그가 찾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녀는 하나의 성을 값진 사랑으로 받아들여지기를 희망하고 있기 때문에 먼저 자신의 신체를 그냥 내 맡긴다. 그녀는 개성을 상실해 버리고, 어떤 형태의 유형이라도 에로틱한 허영에 휩쓸리게 되어 버린다.
체험적 시간에 나타나는 것은 오히려 영원성에 대한 체험이다. 사랑은 영원히 존속될 때에만 체험되는 것이다. 우리가 참된 사랑을 체험하는 순간에 그것은 영원히 타당한 것으로서 체험하는 것이다.
불행한 짝사랑이란 논리적으로는 모순되는 것같지만 심리적으로는 일종의 애수의 표현이다.
질투하는 사람은 그가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마치 자기의 소유물과 같이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질투하는 사랑은 그가 두려워하고 있는 사랑의 소멸을 가져온다.
남녀 부실에 대한 평가가 다르다는 것은 사회학적 근거가 있다. 처에 대해 부실한 남성은 그의 아내만이 성실하다면 누가 아기의 아버지인지는 알 수가 있다.
에로틱한 유물론적 사상은 상대방을 소유물로 보지 아니하고 애로티즘 자체를 상품으로 본다.
매춘부는 정신병리학에서 별로 가치가 없는 성격유형을 가지고 있는 정도로서 문제는 별고 크질 않다. 매춘부의 사례를 심리학적으로 분석해 보면 거의 모든 경우 패덕성이 정신병질적 인격특성으로서 나타나고 있다. 고객의 심리성향이 문제다.
말더듬이에게는 발성하여 사고하기 위해 입이 자연스럽게 움직인다고 생각하게 해주는 것으로써 치료는 충분하다.
성적으로 예민하여 실패에 대한 기대불안은 스스로 성적 실패를 가져온다. 성신경증 환자는 이미 상대방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행위 그 자체를 지향하고 있다.
모범적 인간의 특징은 그가 쉽게 당혹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청년기의 성적 특성은 신체적 사상에 대한 정신적 반사로서 내분비적 변화에 심리적 결과 혹은 내분비적 긴장의 심리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처음 성적 충동이 이성의 배우자와 접촉함으로써 긴장상태의 해방이라고 하는 목적을 갖게 된다.
성숙된 인간은 그가 사랑할 때에만 비로소 성적으로 갈망하게 된다.
정상적인 성숙과정에서 여자는 남자보다 쉽게 이상적 목적에 도달할 수 있다. 여자는 심리적 영적 욕구가 신체의 표현욕구와 결합될 때 비로소 성적욕구가 생기는 것이다.
성에 대한 계몽은 결코 집단적으로 행해져서는 안된다. 그에 대한 개인적 교육이 유일한 이상적 방법이다.
〢 특수실존분석
1. 불안신경증의 심리
신경증적 불안의 배후에는 공포증후에서 특수한 형태로서 나타나는 실존적 불안이 존재한다.
인간이 삶에 대해서 죄의식을 느끼고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에 죽음은 마음에서 떠나서 신체의 특수한 기관에 대한 두려움으로 나타난다.
근원적 불안 그 자체가 구체적 내용을 찾게 되는데 어떤 것은 죽음 혹은 생명과 같은 것을 찾는데 이것이 곧 한계상황이며, 상징적 표현이다.
광장공포증은 가두, 무대공포증은 무대가 상징적 기능을 갖는다.
미녀로 사교계를 풍미하던 여자는 미모에 대한 자신을 상실하게 되자, 삶의 목적도 삶의 내용도 없는 자기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때 그녀에게는 삶의 내용을 찾기 위해서는 미적 효과나 사회적 세력을 멀리하여 삶의 의미를 도덕적으로 타당한 세계 속에서 찾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불안 즉 신경증적 심장반응은 영적 불안의 표현이다.
2. 강박신경증의 심리
증후적 치료와 로고데라피에 의해서 증후가 완화되는 것은 엄격하게 구별해야 한다. 로고데라피의 기법을 쓰는 치료자는 증후 하나하나를 치료하지도 않고 그러한 질병을 다루지도 않는다. 오히려 자기의 신경증에 대한 신경증적 태도를 변화시키는데 주력한다.
강박신경증과 정신병 사이에는 어떤 길항관계가 있으며 그렇게 됨으로써 강박신경증 환자는 그 강박적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정신병에 대한 면역이 된다.
환자가 정신병에 대한 공포를 갖지 않게 되면 그것만으로도 심리적 압박으로부터 해방된 것은 분명하다.
우리가 운명이라고 받아들이게 교육시키면 시킬수록 도움을 줄 수 없는 증후의 잔재는 소실되어 버린다.
강박신경증 환자는 비합리적인 잔재에서 도피할 수가 없고 그것을 초월하여 사고를 계속할 수가 없다. 강박신경증 환자가 갖는 명증감정에 대한 기능부전에는 비합리적인 것에 대한 관용성이 결여되어 있다.
강박신경증 환자는 존재와 당위 사이의 긴장을 감당하지 못하는 특징이 있다.
절대에 대한 요구를 충족시킨다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강박신경증 환자는 그것을 생활의 특수한 영역에 집중시키지 않을 수가 없다. 100%의 완전성은 실현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충족될 수가 있는 일정한 영역, 즉 손을 깨끗하게 하는 행동으로 한정시켜 압축하는 것이다.
안전에 대한 추구 - 정상인이 추구하는 것은 곧 안전에 대한 투쟁 그 자체이다. 그러나 신경증 환자는 안전의 내용 그 자체와는 거리가 멀다. 그는 결과적으로 절대적 안전을 갈망한다. 그러나 절대적 안전이라는 것은 달성하기가 불가능한 것이므로 불안신경증은 단순한 느끼는 것으로 만족하도록 강요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그는 대상과 객관적 실체를 떠나서 주관의 세계로 도피할 것을 탐색한다. 어떤 재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신경증은 그의 안전감에 대해서 가식적으로 좋아하는 척한다. 현실세계로부터 도피함으로써 죄의식이 생긴다. 이는 곧 보상을 요구하는데, 안전에 대한 주관적 투쟁이 비인간적으로 확대된 데에서만 발견할 수가 있다.
정상인은 보통 상대적 안전을 추구하는데 신경증은 절대적 안전을 추구한다. 정상인은 주위의 세계를 대략만 알고 넘기려고 하는데 강박신경증은 명증감을 추구하기 때문에 그로 인해서 무한한 운동템포로 끌려가고 있는 것같이 느낀다.
강박신경증은 현실을 경멸하지만 강박신경증으로 고생하지 않은 보통 사람은 그것을 실존적 자유의 도약대로 삼고 있다.
행동하는 사람은 양심이 없고, 관조하는 사람만이 양심을 갖는다(괴테).
3. 우울증의 심리
정신병 환자의 현재 행동은 영적 태도의 표현이다. 이 태도는 자유로운 태도이며, 따라서 수정이 가능하다. 이런 의미에서도 정신병은 인간에 대한 시련의 시도이며 정신병 환자의 인간성에 대한 시도이다.
우울성 불안은 주로 죽음에 대한 불안이며 또 양심에 대한 불안이다. 우울증의 불안감정과 죄에 대한 체험은 인간존재의 양식으로서 파악할 때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인적 요소가 곧 질병을 전파시키고 우울증을 경험하게 하는데 이것은 인간존재양식에 지나지 않는다. 우울증의 저변에 깔려 있는 질병은 정신근육운동 혹은 분비선의 억제와 같은 증후를 유발시킨다.
인간 특유의 우울증에 수반되는 특유한 죄의 감정이나 자기비난, 자책감정 같은 것은 동물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다.
동물도 불안을 느낀다. 그러나 양심의 불안 혹은 열등의식 감정을 느끼는 것은 사람뿐이다.
우울증의 경우 정신신체적 기능부전감은 인간에게만 독자적인 형태로서 체험된다. 즉 자기존재와 자기당위 사이의 긴장으로서 체험된다.
우울증 환자는 그의 인격과 이상 간의 거리를 초자연적인 것으로 체험한다.
어떤 사람이 우울증 환자가 되면 양심의 불안이나 죄에 대한 감정은, 무엇을 소유할 것인가에 집중된다. 이러한 병질적 조건은 공포를 일으킨다.
환자의 고백 - 현재는 없어져 버렸다. 나는 과거의 생활 속에 살고 있다. 미래에 대한 감정상실과 함께 삶은 끝이 나고, 시간은 이미 탕진되었다.
정신분열증 환자의 실존적 체험은 ‘예기했던 주검'이고, 우울증은 ‘영속되는 심판일'에 대한 체험이다(크론펠드-Kronfeld).
우울증환자는 당위에대한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체험에 대하여 조증 환자는 능력이 당위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해서 조증 환자의 권력감정은 우울증 환자의 죄악감에 대응한다. 조증환자는 마치 미래 속에서 살고 있는 것같다.
우울증 환자는 자기 자신을 가치가 없는 것으로 보며 또 자신의 삶을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때때로 자살하기도 한다.
우울증의 증후는, 영원한 벌은 받는 관념, 비존재의 관념, 그리고 죽음이 불가능한다는 관념이다(코다트-Cotard).
죽지 않는다는 망상은 에헤주리어스 우울증 - Ahasuerus라고 한다. 그는 이 기능부전체험으로부터 이미 그에 대응할 능력이 없다고 느끼고 있는 생활과제나 사명은 무한하게 살아도 충족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생각할 때, 나는 영원히 생존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왜 그런가 하면 나의 죄를 보상하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나에게 연옥과 같이 생각된다고 한다.
4. 정신분열증의 심리
자신의 거동이 촬영되고 있다는 촬영망상은 야스퍼스의 말로는 참된 지식의 환각이다. 그룰레 Gruhle는 이것을 일차적 망상양감정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공통적으로, 인간은 자기 자신을 대상내지 객체로서 체험하고 있다. 즉 극히 다양한 다른 사람의 지향적 행위의 대상으로 체험되는 것이다.
환자는 자기 자신을 마치 주체가 객체에로 변화되어 가는 것과 같이 체험한다. 모든 행위나 지향, 이들의 정신적 기능이 마치 수동형으로 바꿔진 것같이 체험한다. 그는 주목당하고 있으며, 남이 생각하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정신분열증 환자는 정신적 기능의 체험적 수동화 현상이 생기는 것으로 공통되는 심리적 사실이다.
환자들이 무리하게 타동사를 쓰는 것을 보면 그들이 경험하는 수동화현상을 이해할 수 있다. 자신이 잠을 깨는 감정은 없고, 남이 나로 하여금 잠에서 깨게 한다.
동사를 무리하게 명사적 구성으로 많이 쓴다.
자폐적 정신분열증 환자의 특이한 언어는 자신의 환상에서 오는 것으로 외부의 세계에 대해서는 전혀 반응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벨베는 분열증을 과정성 증후와 결함성 증후로 구분하고 있다.
꿈 속에서 사고하는 것은 잠이 들 때 사고하는 것과 다르다. 꿈 속에서는 상징적 언어가 지배하는 한 사고가 존재한다. 잠들 때에 의식 수준은 의식성보다 낮은 단계로 이동하는 것이고, 꿈을 꾸기 시작하면 그것은 더 낮은 의식수준에 이른다.
정상인의 경우에 내적 언어가 사고에 있어서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청각적 요소가 분열증 환자에 있어서는 수동적으로 체험된다. 자기 자신의 것이나 내적인 것이 마치 남의 것, 외부에서 작용하는 것으로서 체험되어 마치 그것이 지각인 것같이 체험된다.
지식은 항상 어떤 것에 대하여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또 이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하는 자신에 대한 지식이며 다시 그것이 자기에서부터 나왔다고 하는 지식이다.
지식 혹은 사고라고 하는 정신적 행위는 2차적 반사행위로서 그것은 1차적 행위와 또 그 가운데에 1차적 행위의 출발점으로서 자아를 대상으로 한다. 따라서 주체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지나친 자기관찰은 이인증 체헝과도 같다. 과도한 긴장에 의한 정신적 기능과 자아와의 연관이 장애를 받고 있다고 하는 체험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다. 지나친 자기관찰이라고하는 반사행위는 1차적 행위와 능동적 자아와의 체험적 연관을 상실한다.
정신분열증과 분열성 정신병질성격에서 나타나는 강박신경증 증후가 정신병질성격의 지나친 자기관찰에서 오는 의식의 긴장저하가 자아장애를 수반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강박증 환자는 적응기능의 부전과 지속적이며 과도한 의식성 때문에 번민하고 있으며, 정신분열증 환자는 심적 능동성의 기능부전에 의한 의식의 긴장저하로 번민하고 있다.
따라서 정신분열증은 전인간적 존재 그 자체가 정신병적 프로세스에 의해서 이상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우울증 환자의 이상체험은 인간적인 것으로부터 질환과정의 형성으로 해석될 때에만, 이해 가능하고, 정신분열증은 이 인간존재자체가 이환되고 있는 것으로서, 그 자신이 질환과정에 의해서 형성되고 있다.
제3 심리치료법으로서의 로고데라피
심리치료법에서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나 왓슨 Watson의 행동주의 심리학을 부흥시키는 새로운 운동의 하나로서 실존주의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여러가지 중에서 로고데라피만이 치료기술을 계승받은 유일한 실존정신의학이라고 한다.
1. 역설적 관념법
기대불안의 개념 - 적면공포증 환자 - 이들은 불안발작에 의해서 신체가 쇠퇴하지나 않을까 - 쇄퇴공포증, 심장이 경색되지나 않을까 - 경색공포, 대뇌마비의 결과가 아닌가 - 피해공포
정신병적 공포증, 죄업공포증
자기 자신의 강박관념을 실현할까 하는 두려움에 싸인 강박관념을 가진 환자도 역시 자기의 강박관념에 대하여 투쟁한다. 이 경우 자살공포증 혹은 살인공포증이라 한다.
기대불안은 환자가 두려워했던 사실을 틀림없이 극복할 수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으나, 로고데라피에서 과다의도라고 부르는 지나친 욕심은 환자가 하고 싶은 것을 해내지 못하는 경우로 본다.
공포증에 미리 선수를 치는 것이 역설적 관념법이다.
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불안이 야기되는 상황에서 회피하려고 하지만 강박신경증 환자는 억압하려고 한다.
자기 자신을 보고 웃을 수 있는 환자는 자기를 통재할 수 있고 아마도 치료할 수 있다(골든 올포트 Allport, Gordon).
역설적 관념법은 그 자체가 급성환자에게 단기치료로 적합하다(겔즈Gerz).
레더먼 박사가 시사한 최면술, 베지 교수가 시사한 슐즈의 긴장이완훈련, 빌하우프가 시사한 울피의 행동치료, 크라토크빌 박사가 소개한 보자노브스키와 클로우프코바의 활성화훈련 등이 로고데라피와 병행시키는 것은 타당하다.
역설적 관념법은 기대불안의 기제가 작용하고 있는 공포증에 대한 단기치료에 특히 효과가 있다.
역설적 관념법의 태도를 취함으로써 자아는 징벌적 초자아를 속이게 된다.
신경증 환자는 자기 자신의 무기로써 투쟁을 하는 것이다.
로고데라피는 지적 저항심을 바탕으로 하는 것으로 이는 특히 인간이 자기 자신을 자기의 세계뿐만을 아니라 자기 자신과 격리시키는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역설적 관념법은 이 기본적인 인간의 잠재능력을 발동시켜서 신경증과 투쟁하게 한다.
2. 사고중단법
카메레온에 대해서 10분간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 10분 동안 카멜레온만 생각하게 된다.
사고중단법으로는 환자로 하여금 긍정적 측면에 대하여 각성할 수 있게 할 수 있을 뿐이다.
3. 정신병 환자에 대한 로고데라피
로고데라피는 근본적으로 건전한 인격측면을 대상으로 한다. 병든 측면은 약물치료와 전기충격치료의 대상이다.
4. 내인성 우울증
정신병적 우울증에는 역설적 관념법이 적용될 수가 없다.
5. 정신분열증
사고중단법이 유일한 방법이다.
6. 결어
이러한 방법은 훈련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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