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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4월 14일 토요일

정신과 자연 - 그레고리 베이트슨

정신과 자연
보론 : 이중구속이론을 중심으로 한 7편의 논문들 - 그레고리 베이트슨

Mind and Nature - A Necessary Unity
Steps to an Ecology of Mind 중에서 7개 장 번역
Social Planning and the Concept of Deutero-Learning
A Theory of Play and Fantasy
Toward a Theory of Schizophrenia
Minimal Requirement for a Theory of Schizophrenia
Double Bind


우리들은 음악이라는 예외를 제외하고는 패턴이라는 것을 고정적으로 받아들이도록 훈련받았다.
영원의 눈으로 바라보면 만물을 무한의 공간과 무한의 시간 속에 놓고 파악하게 되며 모든 사건을 전부 스터캐스틱한 연속 속에 놓게 될 것이다.
생물체의 구조와 기능부터가 결코 자신의 내적 일관성을 무너뜨리지 않는 하나의 가설설정 시스템이라고 볼 수 있으며, 생물을 둘러싼 환경도 내적일관성을 갖춘 가설설정 시스템이다.
논리라는 것이 현상계의 활동을 파악하는 데는 너무나도 빈약하다.

서평

그레고리 베이트슨이 제시하는 패턴이라는 개념은 단순히 시스템이라는 차원을 넘어서 세상을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새로운 사고의 유형이다. 인간이나 각종 생물이 인지하는 방법이 원래 패턴인데, 서구 철학이나 방법론이 고정된 단어적인 지식의 습득을 강요하여 인간의 지능 또한 그렇게 발달해 온 것이라는 것이다. 이 책에서 제시하는 각종의 주제를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저자가 사유해 온 고민의 흔적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책이다.
근래에 보기 드문 지혜와 통달이 엿보이는 책이고, 누구나가 이 책의 사유 방법을 받아 들여서 자기화하기를 바란다. 단순히 이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사물의 이치를 깨닫는 또다른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기에 현실생활을 하는 개개인에게 생활 자체에 적용가능한 자기만의 방법을 가르쳐 줄 것이므로, 지대한 가치를 지닌 책이라 보인다.





제1장 서론

현재의 제도교육은 해안이나 미국삼나무숲과 사막 또는 초원 등과 같은 자연에 대해 거의 아무 것도 가르쳐주지 않고 있다.
정신은 사고하는 인간의 외부에 있는 자연계의 커다란 부분 또는 수많은 부분들의 반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나치게 단순한 사상이 세련된 사상을 구축하고 조악하고 적의에 찬 것이 아름다운 것을 구축해 버린다. 그러나 아름다운 것은 여전히 존재한다.
생명이 있는 세계와 당구공이나 은하계와 같은 생명이 없는 세계가 어떠한 근본적인 개념에 의해 구분되고 있는가, 이 2개의 세계를 융은 생명이 있는 크레아투라 creatura와 생명이 없는 플레로마 pleroma라고 부른다. 힘과 충격이라는 개념으로 충분히 설명이 가능한 플레로마의 물리적 세계와 차이와 특징없이는 무엇하나 이해할 수 없는 크레아투라의 세계의 차이는 무엇인가?
학습하는 사항을 연결시키는 패턴을 파괴하는 것은 곧 모든 질을 파괴해 버리는 것이 된다. 게와 새우를 연결시키는 패턴은 무엇일까? 살아있는 모든 것을 연결시키는 패턴은 무엇일까?
미적이란 연결시키는 패턴에 대해 예민하게 감응한다는 의미이다.
게의 집게발이 크다는 것이 생명의 증거일까? 좌우 집게발의 크기가 다르지만 어느 쪽이나 같은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은 크기와 같은 것이 1차적이고 근본적이며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는 보잘 것없는 사고를 정중하게 쓰레기통에 버리고, 연결시키는 패턴에 눈을 돌리는 것이다.
게의 구조는 반복이 많으며 리드미컬하게 이루어져 있다. 실제로 머리에서 몸통 끝 쪽을 향해 훑어 내려가면 그 구조와 시간의 흐름이 대응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의 다리뼈와 말의 다리뼈가 형태적으로 닮았다고 하는 클래스를 생물학에서는 계통발생적인 상동homology이라고 한다. 게의 부속기관과 새우의 부속기관의 형태적인 유사도 이러한 예에 속한다.
연속적 상동 serial homology는 몸통의 위에서 아래로 향해, 각 부속기관마다 나타나는 변화를 수반한 리드미칼한 반복을 말하는데, 좌우대칭도 이러한 클래스에 속한다.
게의 각 부분은 좌우대칭, 연속적 상동 등 다향한 패턴에 의해 서로 연결되어 있다.
사람이나 말에게 눈을 돌려보면 각각에 좌우대칭과 연속적 상동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에서도 형태와 패턴과 관계가 크기보다 본질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서로 연결시키는 것이 패턴이다.

수면의 소용돌이나 은하수, 회오리바람 이외의 자연계의 나선은 모두 생물에 의해 만들어졌다. 피보나치 수열과 홤금분할의 예를 생각하면 당연할 것이다.
나선이란 형태를 유지하면서 성장방향을 따라 1차원적으로 성장할 때 생기는 형태이다.
그러므로 모든 대칭성과 체절구성은 성장의 결과이며 귀결이며, 성장은 고유의 형태적 특징을 만들어내고, 나선이라는 형태에 의해 이 두 가지 중 어느 한쪽이 만족된다.
소라껍질에는 이 생물이 그 발생과정에서 어떠한 패턴 형태로 형태상의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해 왔는가 하는 기록이 그려져 있다. (프로크로니즘 prochronism)
우리들은 음악이라는 예외를 제외하고는 패턴이라는 것을 고정적으로 받아들이도록 훈련받았다. 서로 연결시키는 패턴을 시작하기 생각했을 때 올바른 길은 그것이 1차적으로 상호간에 서로 반응하는 부분이 연출해내는 하나의 춤이라는 것과 2차적으로는 여러 가지 물리적인 한계와 각 생물체가 갖고 있는 고유한 장애에 의해 고정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학습한 것이 무엇이든 나의 학습은 중요한 타인의 행위에 의해 내 경험의 연속 안에서 일어난 것이다. 바라 보는 것을 어떤 컨텍스트 안에 놓고 보지 않으면 아무 것도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이 바라봄을 전이 transference라고 하는데, 이것은 인간관계에서도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통상적으로는 상동의 사실을 증거로 삼아 진화가 존재한다고 증명하고 있으나 진화의 존재를 전제로 상동의 본질을 탐구해 보자.
코끼리의 경우 코라는 것은 양쪽 눈 사이와 입 위에 있는 것을 코라고 정의하지만, 냄새맡는 기능으로 코를 정의하려는 사람도 있다. 기능을 생각한다는 것은 그 기관이 생물과 환경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에 의해 주어진 역할을 한다고 보므로, 시간적 컨텍스트라고 부르는데, 공간적 컨텍스트와 결국은 동일한 지점에 이른다. 컨텍스트의 시간적 분류와 공간적 분류가 서로 교차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말해 코끼리 태아의 코는 아무런 냄새도 맡을 수가 없다. 발생이란 형태적 formal 이다.
명사가 사물이나 장소나 물건의 이름, 동사가 동작을 나타내는 말이라는 한심스러운 것을 배우지 말라. 명사란 술어와 어떤 관계를 가지는 말이며 동사란 그 주어진 명사와 어떤 관계를 가지는 말이라는 식의 교육방식을 학생들이 따라오지 못할 리 없다.

동식물의 형태는 메시지의 변형에 불과하다. 언어도 그 자체가 정보전달의 한 형태이다. 생물체의 구조는 모두 메시지를 만드는 물질적 재료의 변형이며 그곳에서 일어나는 형태구성이 컨텍스트에 의한 것이라면 생물체 구조 속에도 문법에 상당하는 것이 반드시 있다는 것, 컨텍스트에 의한 형태구성이란 문법의 별칭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대조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동떨어진 인식론이라도 최종적 통일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서로 비슷하다.
미적 통일성의 상실이 우리들의 인식론상의 커다란 잘못이었다.
논리는 언제나 회귀적인 순환을 논할 경우 자기 모순에 빠지지 않을 수 없으며 양은 엄밀하게 말해 정보전달체계들의 복합물이 아니다.

제2장 학교다니는 아이라면 모두 ~~~ 알고 있다.

과학은 전제를 토대로 한다.
학생들의 교육받은 결과로 사고에 필요한 어떤 도구의 결핍이 드러난다. 이들에게 결여된 것은 과학의 전제뿐 아니라 일상생활의 전제에 대한 인식이다.
카톨릭계의 학생들과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하는 학생들에게는 이러한 인식의 결여가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과거 2500년간의 인간 사상에 대해서 스스로 생각해본 적이 있거나 남들로부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믿고 있는 올바른 전제에 너무나도 큰 중요성을 부여하고 이단적인 생각은 파문의 위협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단을 위험시하는 인간은 당연히 자신의 전제에 대해 애써 의식을 하려고 하며 이러한 일에 대해서 나름의 안목을 키우게 된다.

1. 과학은 아무 것도 증명하지 못한다.

2,4,6,8,10,12 다음에 오는 수는 14일 수도 있지만, 27일 수도 있다.
2,4,6,8,10,12,27, 2,4,6,8,10,12,27, 2,4,6,8,10,12, 27
그 다음에 오는 수는 2라고 말할 것이다.
이는 오캄의 면도날 Occam’s razor라 불리는 전제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즉 사실에 부합하는 가장 단순한 추측을 선호하는 절약의 법칙 때문인 것이다.
불행하게도 다음에 오는 사실을 결코 미리 손에 넣을 수는 없다. 고작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단순했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또한 다음에 오는 사실은 언제나 우리들을 한 단계 더 높은 복잡한 수준으로 이끌고 갈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다.
패턴은 추가와 반복에 의해서 또는 그 패턴을 새롭게 지각할 것을 강요하는 그 어떤 사건에 의해서 바뀌거나 파괴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결코 절대적인 확신을 갖고 예측할 수 없는데, 그것은 그들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절대 확실한 예측이란 결코 있을 수 없다. 과학은 일반화된 명제를 결코 증명할 수 없다. 기술된 내용을 점검해감으로써 최종적인 사실에 도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과학은 지각하는 방법이며 우리의 지각에서 의미라고 불리는 것을 만들어가는 방법이라고 전제한다. 그런데 차이가 없으면 지각은 생기지 않는다. 우리가 받아들이는 정보는 어떠한 경우에도 차이의 전달과 다름없는 것이다.
지각하는 방법으로서의 과학은 사실일지도 모르는 것의 외재적이고 가시적인 기호를 모으는 것 이상은 불가능하다. 과학은 탐색할 뿐 증명하지 않는다.

2. 지도는 땅 그 자체가 아니며 사물의 이름은 그 사물 자체가 아니다.

지도 작성도 본질적으로는 일종의 이름 짓기나 다름없는 것이다.

3. 객관적 경험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경험은 주관적이다.
외계의 경험은 항상 어떤 특정의 감각기관과 신경통로에 의해 전달된다. 그런 의미에서 사물에 대한 나의 경험은 주관적인 것으로서 객관적일 수 없으며 곧 사물은 나의 창조물이다.

4. 이미지 형성 과정은 무의식적이다.

우리들이 지각의 과정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의식되는 것은 지각의 산물일 뿐이다. 내가 의식해서 보고 있는 이미지는 무의식 속에서 형성된 것이며, 이 무의식적 과정에서 내가 사용하고 있는 다종 다양한 전제는 이미 형성된 이미지 속에 짜넣어져 있다는 것, 경험적 인식론의 시작은 이 2가지 일반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자신들이 보고 있는 이미지가 뇌나 정신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으나 이것을 단지 지식으로서 알고 있는 것과 실제로 느끼고 깨달아서 알고 있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우리가 눈을 통해서 외계를 바라볼 때 우리들은 5개의 주요한 단서들을 사용하여 우리가 만들어내는 상에 원근감을 주고 있다.
크기는 망막에 비친 물리적인 상의 크기로서, 물체의 양끝과 안구의 중심이 만드는 각도라는 편이 더 정확할지 모른다. 시신경에 전달되는 것은 시각의 변화로 이 변화의 정도가 눈에서 물체까지의 거리를 만드는 단서가 될 것이다.
밝기의 대조도 마찬가지다. 즉 크기, 밝기, 중복, 양쪽 눈에 의한 시차, 머리의 이동에 의한 시차, 이 5가지가 원근감을 만들어내는 단서이다. 가장 강력하게 작용하는 것은 머리의 이동에 의한 시차이다.
##실험방법은 49면##
멀리 있는 것은 작게 보인다는 누구나 익히 알고 있는 우주의 법칙이 실은 지각과정 속에 깊이 묻혀 있다. 자연사 수준에서 형성되어온 인식론 epistremology은 거의 대부분이 무의식적인 것이며 바꾸려고 해도 그렇게 간단히 바꿀 수 없다.
사다리꼴 방의 실험에서, 훈련을 쌓아가며 능숙해짐에 따라 시각상 자체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고, 방이 실제 사다리꼴 모양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지각이 정신의 눈에 비추고 있는 상의 지배는 직접적인 것으로 자유의지의 개입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부단한 훈련과 자기 수정에 의해 그러한 상들을 부분적으로 바꾸어 나가는 것은 가능하다.
결론적으로 정보가 어떠한 영역을 통해서 전해질 때는 상의 형태가 편리하고 경제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5. 지각되는 세계가 부분과 전체로 나누어지는 것은 편리하고 필연적일지도 모르지만, 어떻게 나눌 것인가 하는 결정에 필연은 작용하지 않는다.



이 도형이 어떤 도형인지 언어로 기술하라는 문제에서, 장화라든지, 극단적인 대답을 한다. 이와 같은 유추적 도상적 기술로서는 그것을 들은 사람이 원래의 도형을 재생하기란 어려운 것이다.
압도적으로 많이 나오는 답은 직사각형과 6각형으로 이루어졌다고 보고, 2개의 부분으로 나누어서 기술한다.
극히 소수의 사람은 정육각형의 존재를 예측한다. 그들은 상상력으로 어떤 존재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사용해서 지각되는 규칙성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일종의 과학적 가설을 마련한 것과 다름없다.



6. 발산되는 연속은 예측할 수 없다.

유리창에 돌을 던질 때, 방사상으로 깨지는 조건하에서 깨지는 방향의 진행을 예측하거나 혹은 어떤 특정한 파손을 유도할 수 있도록 돌을 던지는 것은 불가응하다. 흥미로운 점은 실험 정도를 높여감에 따라 결과의 예측 불가능성도 높아진다는 것이다.
유리표면에 굵힌 자국을 만들어두거나 처음부터 흠이 있는 유리를 사용할 경우, 어느 정도 대략적인 예측을 세울 수 있다. 이유는 알지 못하지만 유리의 균열은 흠집에서 1인치의 1/100 벗어난 곳에서 흠집과 평행을 이루며 생긴다고 예측하면 일단 틀림없다.
어떤 일정한 사회적인 힘과 긴장상태 속에서 어떤 형태로든 도화선에 불을 당기는 개인이 반드시 나타나게 되는데, 그것이 누구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7. 수렴하는 연속은 예측할 수 있다.

방산하는 연속에서 중요한 것은, description이 개체, 특히 개개의 분자를 주제로 한다는 점이다.분자의 브라운 운동도 예측할 수 없는 발산의 연속이다.
확률의 법칙은 개체의 행동에 관한 description과 큰 집단의 행동에 관한 description과의 중간역할을 맡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의 역사관은 사회 전체의 변동과정이 각각의 독자성을 지닌 개개인의 사건으로 수렴된다고 하는 근본적으로 무리한 이론을 적용시키려는 불행한 노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8. 무에서 유는 생기지 않는다.

질량보존의 법칙, 에너지 보존의 법칙, 실험실에서 새로운 생명의 출현을 기대할 수 없다는 파스퇴르에 의해 입증된 원칙, 그리고 새로운 질서 또는 패턴은 정보 없이는 만들어낼 수 없다는 원칙이 그것이다.
메시지가 아무에게도 읽혀질 수 없게 되었을 때 그것은 메시지로서의 기능을 잃어버린다. 고대 이집트 문자도 로제타스톤이 없이는 파피루스나 바위에 그려진 우아한 장식문양에 지나지 않는다. 의미를 이루기 위해서는 모든 규칙성이 그것을 보완하는 별도의 규칙성 혹은 기능과 만나지 않으면 안된다.
메시지에 반응하는 기능의 발생이 진화과정의 또 한 측면을 형성하고 있고, 이것이 연계진화 co-evolution이다.
모순되게도 정보와 유기체의 세계에서 ‘무에서 유는 생기지 안는다’는 심오한 진리가, 정보가 되는 사건이 전혀 없는 것이 하나의 메시지가 될 수 있다. 진드기의 유충이 나무 위에서 땀 냄새에 따라 가지에서 떨어져 포유류에 기생하는데, 몇 주를 기다려도 땀 냄새가 나지 않을 경우 역시 떨어져서 다른 나무 위로 올라간다.
편지를 쓰지 않는 것, 사죄하지 않는 것 등은 충분하고 효과적인 메시지가 될 수 있고, 0도 컨텍스트 - 문맥에 따라 의미를 갖게 된다.
관념적으로는 발생은 공리와 정의만 정해지면 그후에는 아무 것도 추가되지 않는 복잡한 토톨로지의 성립과정과 유사하다. 피타고라스의 정리는 유클리드 기하학의 공리와 정의와 공준을 사용하여 쌓아올린 형태로 되어있다. 인간에게는 풀어가는 순서에 관한 지식이 필요하다.
발생과 토톨로지는 반복과 모방의 세계를 구성하는 한편, 창조, 예술, 학습, 진화로 이루어진 세계에서는 변화의 과정이 무작위한 것을 양식으로 삼아 진전된다. 발생의 본질은 예측할 수 있는 반복이며 학습과 진화의 본질은 탐구와 변화이다.
문화의 전달에서 인간은 항상 모방을 시도한다. 그러나 문화의 전달이 DNA에 의해서가 아니라 학습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실패한다.
하여튼 2개의 세계를 연결하는 것으로서 설명이란느 문화현상이 존재한다. 설명이란 익숙하지 않은 사건의 연쇄의 토톨로지 위에 지도를 그리는 것이다.

생물이 새로운 돌연변이를 모으는 것은 무작위의 세계로부터이며, 스토캐스틱한 학습이 해답을 모으는 것도 무작위의 세계로부터이다.
학습은 정신을 포화상태로 이르게 한다.

9. 수와 양은 다른 것이다.

수는 센다고 하는 행위의 산물이며, 양은 측정한다는 행위의 산물이다. 정수 사이에는 불연속이 있지만, 양의 경우에는 비약이 존재하지 않는다. 비약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어떠한 양도 정확하지 않다.
토마토가 세 개 있다고는 할 수 있으나, 물이 딱 3리터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양이란 항상 실물에 근사할 뿐이다.
수와 양 이외에 패턴이라고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개념이 있다. 모든 수가 세는 행위의 산물은 아니다. 작고 그러므로 일상적인 수는 흔히 셀 수는 없지만 한눈에 봤을 때 패턴으로서 인지되는 경우가 많다.
수는 패턴과 형태 gestalt와 디지틀 계산의 세계에 속하며, 양은 유추계산과 확률계산의 세계에 속한다.
생물계에 나타나는 여러가지 수에 대해서 그것이 형태의 예인지, 수를 센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단순한 양인지 의문을 제기해 본다. 홑장미가 꽃잎이 5장, 꽃받침이 5장, 5방향으로 대칭을 이룬다라는 description과 수술을 112개, 가지고 있다는 진술에는 두드러진 차이가 있다.
생물의 성장과정이 고정된 과정으로 다룰 수 있는 수의 상한선, 즉 그 선을 넘으면 양으로서 취급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생각하게 된다. 동식물이 대칭, 특히 방사상 대칭을 이루는 경우 2,3,4라고 하는 수가 가장 일반적인 것 같다.
비교적 큰 수가 규정받는 것은, 포유류의 등뼈, 곤충의 복부체마디, 지렁이의 전부 분절등의 직선적으로 연속된 마디를 이루고 있는 것들이다.
생물에서 어느 부분이 일정 수의 방사상 대칭을 이루는 경우 그 수가 다른 부분에도 다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백합은 꽃받침이 3장, 꽃잎이 3장, 수술은 6개, 암술에는 씨방이 3개 있다.

10. 양은 패턴을 결정하지 않는다.

패턴은 양이 작용하기 이전부터 그 시스템 속에 잠재하고 있다. 패턴은 양적 변화의 작용을 받기 이전부터 잠재해 있다가, 패턴이 바뀔 때 그 변화는 순간적이고도 비연속적이다.

11. 생물학에서 단조의 가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단조의 가치 monotone value란 상승 또는 하강만을 계속하는 가치이다. 생물이 갈망하는 물질, 물체, 패턴 혹은 생물이 어떠한 의미에서 좋다고 느끼는 경험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다. 즉 최적량이 존재한다.
이 생물적 가치의 특성은 돈에 비교할 수 없다.
전투가 없는 관계는 생기가 없고 전투가 지나치면 관계는 독성을 가지게 된다.

12. 때로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

물체를 하나로 연결시켜 고정시키는 힘과 중력에 의한 힘이 동일한 양적 규칙성을 따르지 않는데서 구조적 불안정성이 생겨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물리적 세계에서 작은 이유로 불안정해지는 경우가 있다. 표면적과 중량이 비선형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어떤 물질이든 용해시킬 때에는 잘게 부수는 것이 능률적인데, 작은 덩어리일수록 체적에 대한 표면적의 비율이 커져 그만큼 액체로부터 작용을 쉽게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큰 덩어리는 오래 견딘다.
참돌고래는 몰길이 약 1미터, 지방층의 두께 약 3센치, 표면적이 0.5평방미터의 동물인데, 북극해에서 알맞은 체온을 유지한다. 이 돌고래의 약 10배의 길이로, 100배의 표면적, 1000배의 체적을 가진 대형 고래에게는 두께 30센치의 지방층이 있는데, 어떻게 체온의 균형을 유지하는지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고래는 모두 혈액을 등지느러미와 꼬리로 보내 열을 방출하는데, 이 대형고래는 우리들의 이해범주를 넘어선 뛰어난 기호논리학을 구사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야자나무의 경우는 높이가 높아져도 그에 맞추어 몸통을 조절하지 않는다. 떡갈나무는 성장조직을 나무와 나무껍질 사이에 지니고 있어 일생 동안 높이와 굵기를 늘려간다. 그런데 코코야자나무는 성장조직이 줄기의 맨 꼭대기 부분 - 억만장자의 샐러드라는 부분으로, 이곳을 잘라버리면 죽어버린다.- 밖에 없으므로 오직 위를 향해 자랄 뿐이다.
백년초(유카-용설란의 일종)같은 식물은 몇십 년이나 사는데, 이는 연어와 마찬가지로 생식을 하는 동시에 죽어간다. 맨 꼭대기에 꽃이 많은 가지를 내는 것을 제외하면 유카에는 가지가 없다. 그 가지를 낸 꽃이 곧 유카 줄기의 끝이다.
고등동물에서는 생장이 조절된다. 어떤 일정한 크기, 연령, 단계에 달하면 더 이상 생장을 하지 않는다. 세포는 통제 아래서 성장과 분열을 멈춘다. 메시지의 발신이나 수신에 장애가 생겨서 그 통제가 이루어지지 않게 된 결과가 암이다.

13. 논리는 인과관계의 빈약한 모델이다.

삼단논법에서 사용되는 논리인 만약~이라면과, 인과관계에서 사용되는 만약~이라면과는 전혀 다르다.
원인과 결과의 연쇄가 순환을 이룰 때 그 연쇄를 무시간적인 논리로 바꾸어 기술하거나 지도화하려고 하면 모순에 빠지게 된다. 순순한 논리로는 처리할 수 없는 모순이 발생하는 것이다. 전체 생물계에서 보이는 몇백만 개의 항상성의 하나하나의 예가 이러한 모순을 안고 있다.
스위치로 전류를 흘러 보내는 시스템에서 인과적 관계를 나타내는 ~이면 ~이다에는 시간이 포함되어 있으나, 논리의 ~이면 ~이다에는 시간이 포함되어 있지 않으므로, 접촉이 이루어지면 접촉은 끊어진다라는 결과가 된다. 즉 논리는 인과관계의 모델로서 불완전한 것이다.

14. 인과의 역전은 있을 수 없다.

논리의 세계에서는 거짓도 참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으나, 결과는 절대로 원인에 선행할 수 없다.
생물학자들을 괴롭힌 문제는 적응이라는 문제였다. 게의 집게발이 물건을 집기 위해서 있다고 한다면, 집게발의 목적에서 출발하여 집게발의 발생의 원인으로 논리를 역행시키게 된다.

15. 언어는 통상 상호반응의 한쪽 편만을 강조한다.

언어는 주어와 술어라고 하는 구조에 의해 사물이 어떤 속성이나 성질을 갖고 있다라고 규정한다. 보다 정밀한 화법으로는, 그 내적인 관계들 및 다른 사물이나 화자와의 관계들 속에서의 행위에 의해 사물이 생산되며, 또 다른 사물과 구별되어 보이며 실재하고 있다고 표현해야 할 것이다.

16. 기술description의 각 부분은 안정 또는 변화라고 기술된다.

서커스의 외줄타기는 균형의 무너짐을 지속적으로 시정함으로써 안정을 유지한다.
지각 과정 자체 속에 단순함을 선호하는 오컴의 면도날 원칙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은 지각의 소재에 무엇인가 보다 철학적인 소재가 얽혀 있음을 의미한다.

제3장 세계의 변형들

1. 차이인 경우

정보가 전해지기 위해서는 그 상호관계 속에 차이가 내재할 수 있는 2개의 존재가 있어야만 한다.

2. 양안 시각의 경우

좌우 망막 위의 시신경은 놀랍게도 모두 수직으로 깎은 듯이 서있는 경계면에 의해 2개의 장치로 분리된다. 그런데 합성된 정보에는 수직경계면의 흔적이 모두 사라져 있다.
뇌가 이러한 두 개의 눈으로부터 들어온 정보를 공들여서 처리한 이유는 2가지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먼저 사물의 가장자리나 명암차에 대한 선명도가 더욱 뚜렷해져 작은 글자를 읽을 수가 있으며 어두운 빛 아래에서도 사물을 파악할 수 있고, 사물의 원근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형식논리학의 표현방법에 따르면 한쪽 망막에서 얻은 정보와 또 다른 망막에서 얻은 정보의 차이가 다른 논리계형 logical type에 속하는 정보 그 자체가 된다고 할 수 있다.

3. 명왕성의 경우

1930년 대학원 학생이던 윌리엄 톰보가 명왕성을 발견할 때, 이미 해왕성은 불규칙한 궤도를 나타낸다고 알려졌으므로, 해왕성 바깥쪽을 도는 작고 희미한 혹성의 존재를 어떻게 발견할 것인가의 문제를 해결했다. 천체의 다른 물체와 구별되는 점이라고는 인간의 눈으로는 지각하지 못하는 매우 느린 속도로 움직이는 것을 안다는 사실 뿐이었다.
그는 블링커 blinker라 부르는 장치로, 해당 천체를 시간 간격을 두어 사진에 담고, 2장의 사진을 재물대 형식의 건판에 두고, 레버를 순간적으로 움직여서 겹쳐진 사진 위에 똑같은 항성과 다른 존재를 알아낸 것이다.

4. 시냅스 가중의 경우

시냅스의 가중 synaptic summation이란 뉴런 C가 뉴런 A와 뉴런 B의 결합에 의해 비로소 발사되는 사례를 나타내는 신경생리각의 용어이다. 이 경우 곱셈에 가까운 논리를 생각해 낸다.

5. 환각 단검의 경우

하나의 감각에 의한 정보와 또 하나의 별개의 감각에 의한 정보를 비교하고 거기에 시각상의 변화를 결합시킴으로써 그는 자신의 결합이 환영이라는 메타 정보를 얻기에 이른다.

6. 이어동의의 경우

대수와 기하라고 하는 2개의 언어가 상호 번역 가능하다는 발견도 그 자체로서 이미 계발이다.
1에서부터 시작해서 10개의 홀수의 합은 얼마인가?
이 때
1에서부터 1개의 홀수의 합은 1
1에서부터 2개의 홀수의 합은 4
1에서부터 3개의 홀수의 합은 9
1에서부터 4개의 홀수의 합은 16
1에서부터 5개의 홀수의 합은 25
그러면 곧 방법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도형을 이용하여 알려주는 방법도 있다.
작은 사각형 하나와 세 개를 더하면, 큰 4개짜리 사각형 하나가 만들어지고,
작은 사각형 5개와 앞의 4개짜리 사각형 하나를 합치면 9개짜리 큰 사각형이 된다.
그런 식으로 시각화를 하면 더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97면##

7. 2개의 성sex의 경우

기계가 자기 복제를 할 때에는 2대가 협력하여 행하는 것이 필요조건일 것이라고 폰 노이만이 말한 적이 있다.
분열은 외관상 반드시 융합에 의해 끝이 난다.
만일 2개의 배우자로부터 실 모양의 물질의 차이가 너무 크면 수정이 일어날 수 없다.

8. 맥놀이와 모아레 현상의 경우

리듬 패턴의 경우 2개의 패턴이 결합하여 제3의 패턴을 만든다.
모아레현상 moire phenomenon은 2개의 서로 다른 주파수를 갖고 있는 음이 결합되어 발생하는 유명한 맥놀이 현상디ㅏ.
모아레 현상에는, 어떤 패턴도 2개가 적절하게 결합될 때에는 제3의 패턴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들 3개의 패턴 중 2개의 패턴으로 나머지 패턴도 기술할 수 있다.
시, 무용, 음악이라는 미적 경험의 본질에 접근해 가는 의문들은, 이러한 리드미컬한 현상은 아주 옛날부터 산문 이전에 인간과 함께 있었다고 보인다.

9. 기술 Description, 토톨로지, 설명의 경우

설명은 의심할 여지없이 아주 중요하며 또한 확실히 description에 포함된 이상의 통찰력을 보너스로 주는 것 같다.
기술과 설명이라는 2가지 유형의 정보조직을 연결시키는 것을 바로 토톨로지라고 부른다.
토톨로지에는 어떠한 정보도 일체 포함하지 않으며 설명은 description 속에 존재하는 정보밖에 포함하지 않는다. 설명은 description을 토톨로지 위에 지도화하는 것이다.

거울에 상을 비칠 때, 상과 하는 바뀌지 않지만, 좌우는 바뀐다. 상과 하가 외적인 언어임에 비해 좌와 우는 내적인 언어에 속하기 때문이다. 동과 서, 상과 하는 동일한 언어에 속하며, 좌와 우는 다른 언어에 속한다. 좌와 우라는 말은 정의하기 곤란한 것이다.
##좌와 우는 인간이 눈이 두 개이기 때문에 생기는 변이가 아닐까##
우리는 정보가 아닌 우리들 자신이 정한 만약 ~이라면의 세계로부터 빠져 나올 수는 없다.
우리들의 공준은 하나의 차원을 역전시키면 반드시 좌우 역전체stereo-opposite가 생긴다는 것이다.
몰리에르의 희극에 나오는 수면소 dormitive principles - 아편이 잠을 유발하는 효과가 있는 것은, 아편 속에 수면소가 있기 때문인가. 아편이 수면소를 함유한다는 명제를 참이라고 정해 버리면, 이러한 형태의 표현을 다른 많은 현상들에도 적용할 수 있다.
인간의 사고방식에는 2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모든 생물류에 공통된 자연의 사고이고, 하나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관례적-논리적 사고이다.
양안 시각의 예에서 보듯이, 탐구의 방법은 이중 또는 다중 비교의 방법을 사용하자.

제4장 정신과정의 기준들

만약 어떠한 현상의 집합체 곧 시스템이 목록화된 그 모든 기준들을 충족시킨다면 나는 주저없이 그 집합체를 정신이라고 말할 것이다.

기준1. 정신은 상호반응하는 부분 또는 구성요소들의 집합체이다.
정신과정은 항상 각 부분들 사이의 상호반응의 연속이다. 정신현상에 대한 설명은 항상 부분들의 조직화와 상호반응의 방식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기준2. 정신의 각 부분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반응의 방아쇠는 차이에 의해 당겨진다.
정신을 기술하는 것은 보통 물질세계를 기술할 때와는 전혀 다른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관념의 세계에서는 두 부분 사이에 혹은 시각1의 어떤 부분과 시각 2의 같은 부분 사이에 어떠한 관계가 존재함으로써 비로소 수신체라고 하는 제3의 구성요소가 활성화된다. 즉 수신체는 차이 혹은 변화에 대해 반응하는 것이다.
비생물세계에서 A가 B와 C의 차이에 대해 반응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변화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그것에 대해 움직이지 않는한 지각되지 않는다.
우리 눈은, 안구는 극소진탕 micronystagmus라 불리는 진동을 끊임없이 하고 있다. 안구는 항상 2도나 3도 각도로 호를 그리며 흔들리고 있으며, 그 때문에 망막에 비친 상은 감각말단기관인 간상체와 원추체에 대해 항상 운동상태에 있다.
우리는 구별을 힘들여 이끌어내어 사물을 인식한다. 이끌어내지 않는 구별은 존재하지 않는다.
완만한 변화와 무변화를 구별하는 데에는 별개의 정보, 즉 시계와 같은 것이 필요하다.
변화를 특징으로 하는 현상의 추세를 파악하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정원으로 날아드는 나비나 새들의 숫자가 놀라울만큼 감소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 힘들다. 그러한 변화는 큰 것임에도 지각이 새로운 사태라고 보고하기 전에 우리들은 그것에 익숙해져 버린다.
상대가 왼쪽 주먹을 뻗으려는 것처럼 페인트 모션을 쓰고는 왼쪽 주먹이 나오지 않으면 우리는 왼쪽으로는 치지 않을 것이라고 믿어버린다. 그러다 왼쪽 주먹을 얻어맞게 되므로 의외의 불쾌함을 맛보는 것이다.
정신은 차이의 소식만을 수용할 수 있기 때문에 완만한 변화와 정지상태의 구별이 잘 되지 않는다.
차이는 관계의 본질이 되므로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위치를 정할 수 없다.
자극이라는 말은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오는 한 묶음의 정보의 각 구성요소를 가리키는 말이다.

기준3. 정신과정은 방계에너지를 요구한다.
정신과정은 차이에 의해 방아쇠가 당겨진다는 것과 차이란 에너지가 아니며 보통 에너지를 포함하지 않는다.
당구공들 사이에 부딪히는 행위도, 주는 행위도, 반응하는 행위도, 사용하는 행위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표현방식은 사물을 의인화하는 습관에서 나온 것인데, 이러한 난센스가 인간의 의물화라는 더욱 한심한 넌센스로 발전해 버린다.
켜진 상태에 있는 스위치는 다른 곳에서 생긴 에너지의 통로가 될 뿐이다. 수도꼭지를 쥐고 있는 사람이 부분적으로나마 결정할 수 있는 것은 물이 나오면 어떤 통로로 나오게 하겠다는 정도이다. 실제로 물이 흐르느냐 마느냐는 우리가 간섭할 수 없다.

기준4. 정신과정은 순환적 결정의 연쇄가 필요하다.

암석과 생물은 생존경쟁의 참가방식이 서로 다르다. 즉 암석은 변화를 거부한다. 높여진 상황에서 변화하지 않은 채 그대로 유지한다. 이에 비해 생물은 변화를 수정하고 변화와 더불어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며 스스로 자기 안의 지속적 변화를 포용하는 방법으로 변화를 극복한다.
인간이 타인이나 사회의 통합을 파괴하려 할 때 에너지는 거의 들지 않는다.

전기회로의 일부분으로서의 스위치는 켜진 상태에 있을 때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회로의 관점에서 보면 스위치와 그 앞뒤의 전선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또한 꺼진 상태일 때에도 스위치는 회로의 시점에서 보면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스위치란 교체의 순간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스위치라는 개념은 시간에 대해 특별한 관계를 가진다. 그것은 물체라는 개념보다도 변화라는 개념과 더 밀접하다.
감각의 말단기관은 스위치와 유사하다. 외계에서 충격을 받은 그 순간만 켜지게 된다.

기준5. 신경과정에서, 차이의 결과는 그것에 선행하는 차이의 변형들로 볼 수 있다.
지도란 결국 지형에서의 차이의 소식을 조직하는, 일종의 최종 결과로서의 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디지틀 시스템은 수를 포함하는 시스템과 유사하며, 아날로그 시스템은 양에 보다 강하게 의존한다. 디지틀 형의 뉴런에서 아날로그 양상을 띠는 시스템을 만들어내는 것도 가능하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 지각은 항상 부분에 대한 지각이라 할 수 있으며 뒤에 오는 다른 부분이 제시됨으로써 전체에 대한 우리의 추측은 계속해서 입증되거나 혹은 모순되기도 한다. 우리들 앞에 전체가 제시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기준6. 이러한 변형과정의 기술과 분류는 그 현상에 내재하는 논리계형의 분류단계를 나타낸다.
메시지를 만들어내는 사건과 메시지 자체는 다르다.
A가 B에게 지시를 할 때, A에게서 오는 메시지를 어떻게 기호화해야 할 지 B에게 가르쳐주거나, B는 또 다른 정보의 클래스가 존재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클래스에 속하는 메시지는 A와 B에 대한 메시지가 아닌, 메시지의 기호화에 대한 것이다. 같은 형태의 행위나 발성이라도 컨텍스트 - 문맥에 따라 의미하는 바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학습과 유전이 만나는 것도 극히 추상적인 수준일 것이다. 유전자는 아마도 동물이 어떻게 학습의 컨텍스트를 지각하고 분류해야 할지 그 방법을 결정할 때 영향을 줄지도 모른다.
과거 성격이라 불렀던 것은, 우리가 자신과 만난 컨텍스트에 부여하는 해석의 시스템으로서, 유전자와 학습 양쪽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다.
인간관계에서 유머라는 단순한 사실 하나만 보더라도 계형 type들이 다중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에서 얼마나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인가를 명백히 보여준다. 논리계형에 혼동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유머가 생겨날 필연성도 없어진다.

인간은 고양이와의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마치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메시지의 단편들을 짜맞추어 고양이의 의도를 이해해 버린다.
서로 다른 종간의 커뮤니케이션은 어떠한 경우에나 각각의 종이 만들어낸 컨텍스트를 서로 수정해 나가는 학습 컨텍스트의 연쇄이다.

파블로프의 개에 대한 실험에서, 개가 2개의 자극을 구별하는 것과, 개의 구별이 붕괴한다라는 표현방식이 가능하다. 개의 구별이라는 표현방식으로의 비약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개개의 사건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부터 구별이라는 시각을 넘어선 추상의 세계로 들어가 개 내부에 있는 존재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로지칼타입의 비약을 무시한 점에 파를로프 학습의 오류가 있다. 개가 구별하는 것을 보는 것은 가능하나, 개의 구별을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개는 이것이 구별의 컨텍스트이다라고 배운 것이다.
컨텍스트의 차이를 구별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 개의 머리는 이러한 훈련을 시작한 연구자의 머리와 다를 바가 없다.
하와이 해양연구소에서 암돌고래를 이용하여 실험을 한다. 어떤 동작을 하면, 먹이를 주게 되는데, 돌고래는 하나의 패턴, 하나의 컨텍스트적인 구조, 정보의 결합방법에 대한 일련의 규칙을 호각, 수조, 조련사 등에 연결하는 단순한 몇 개의 규칙을 습득했다. 조련사들은 돌고래의 훈련법을 계속 보여주고 싶어 단일한 패턴을 무너뜨려서 에피소드가 모아진 클래스에 대처시키려고 했다. 돌고래는 게임의 규칙을 알게 되자, 15번째 시도에서 갑자기 8가지의 연기를 정성들여 해보였다.
하나의 로지칼타입에서 그 다음의 한 단계 높은 로지칼타입으로의 진보는 개개의 사건에 관한 정보에서 사건의 클래스에 관한 정보로, 혹은 개개의 클래스를 생각하는 것에서 클래스의 클래스를 생각하는 것으로의 진보인 것이다.
아무리 벌을 주어도 쥐가 학습하는 것이라고는 한 번 전기쇼크를 받은 상자에 한해서 코를 디밀지 않겠다는 것뿐이며, 상자라고 하는 것 속에 코를 디밀어서는 안된다는 것은 전혀 배우지 못한다.
탐구의 목적은 탐구 자체의 옳고 그름을 아는 것이 아니라 탐구대상에 관한 정보를 얻는 것이다.
범죄란 실제로는 탐구와 마찬가지로 행위의 조직방법인 것이다.
한 생물의 성질을 바꾸려는 진지한 노력과 한 생물의 개개의 행동을 바꾸려는 노력 사이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다.
컨텍스트의 변화를 잘못 인식했기 때문에 벌을 받은 파블로프의 개나 행위의 조직방식이 나빴음에도 불구하고 개별행위에 대해서만 처벌을 받은 기결수들에게는 정신이상이 초래될 가능성이 있음을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자연이 꾸며대는 인과의 순환에서 죽음의 은유를 보는 우리들은 직선적 논리에 매달려 사후의 세계를 상상하고 더 나아가서는 환생의 관념까지 이끌어내어 죽음이라는 단순하고도 정상적인 현상을 애써 부정하고 있다.
정신과정의 논리적 일관성이 무너져 버린 후의 세계는 진정 죽음을 생각케 한다.
자연계의 모든 생명활동 회로의 하나하나에 죽음의 그림자가 엿보인다.
정신은 지도에 영향을 받지, 결코 땅에서 영향을 받지는 않는다. 따라서 수신된 정보를 근거로 주변 세계나 자기 자신에 대해 무엇인가를 증명할 수는 없다.
학습하는 것, 기억하는 것, 부의 엔트로피를 축적하는 것 등은 모두 경험적 방법과 시행착오라고 불리는 스토캐스틱한 게임에 의해 행해진다.

제5장, 관계의 다양한 변형들

정신은 그 안에 아무 것도 포함하지 않는다. 있는 것은 관념 즉 차이에 관한 정보 뿐이다. 정신 안에는 시간도 없고 공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관념이 있을 뿐이다.
자신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변화시키는 학습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먼저 상호작용의 단위와 성격에 관한 학습의 단위는 동일하다. 생활의 컨텍스트 학습은 한 생물의 내부가 아니라, 두 가지 생물간의 외적인 관계로서 논해야 한다.
개인의 프라이드를 끄집어내어 그 사람의 오만스러운 행동을 설명하는 것과, 공격성을 끄집어내어 그 사람의 공격적 행동을 설명하려는 것은 얼마나 공허하고 무의미한 일인가를 깨닫게 해준다.
프라이드를 논하는 경우라면 두 사람의 인간 혹은 2개의 집단을 이끌어내어 둘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을 논하지 않으면 안된다.
양쪽 눈으로 원근이라는 새로운 차원의 정보를 얻는 것처럼, 관계를 통해 행동을 이해함으로써 새로운 로지칼타입에 속하는 학습을 얻을 수가 있다.
상호작용의 최소단위는 3개의 요소인데, 자극, 반응, 강화이다. 학습자의 반응은 가르치는 사람이 주는 자극을 강화한다.
프라이드란 상대방이 주는 조건부 칭찬 더하기 행위자의 반응 더하기 더 한층의 칭찬 더하기 그 칭찬의 수용~` 등이다.
프라이드가 강한 사람일수록 상대의 경멸을 두려워한다.

1. 너 자신을 알라

이 말은 여러 수준에서 신비스러운 지혜를 보여주며 동시에 극히 단순하고 보편적이며 실용적이라 할 수 있는 측면을 갖고 있다.
우리들은 자신에 관한 여러 가지 견해를 외계에 투영한다.
게임과 게임의 조작은 동일한 현상이다. 게임은 그 행위의 연쇄 안에 계획에 들어 있지 않은 어떤 독창적인 부분이 없으면 이미 게임으로서의 의미가 상실되어 버린다.

탐구란 언어적으로나 비언어적으로나 자신에 대한 제1차 description이다. 탐구는 자기 강화적이다. 탐구자에 의해 기쁨이든 괴로움이든 상관없이 자동적으로 강화되어간다.
육체의 나약하고 자기 연민적인 불평과 고통의 소리들을 듣지 않는 것이 등산가에게는 가장 큰 단련이다. 그것은 등산가의 만족감, 자신이 자신을 정복했다는 기쁨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본다.

2. 토테미즘

자신이 부분이 되는 시스템과, 동물과 식물 그리고 인간 모두를 포괄하는 생태학적이고 생물학적인 시스템의 유사에 그들의 사회시스템을 비춘다.
그런 것은 환상에 의해 억지로 짜맞추어진 부분도 있으며 또 환상이 사회 구성원에게 부과하는 행동에 의해 실제로 두 시스템이 비슷해지는 부분도 있다.
서양인들은 신화의 체계를 빌어 가문을 드러내 보였는데, 토테미즘이 가지는 이러한 자기 과시성이 확대됨에 따라 자연계와의 결합이라는 본래의 웅대한 세계관을 상실하고 하찮은 말장난만 무성해지는 사태가 발생했다.
토테미즘이 이렇게 타락해가는 세속화과정의 배경에는 우리가 더 이상 인간과 사물과의 관계를 파악하지 않고 한쪽 끝의 관계되는 사물이나 인간에게 관심을 집중시킨다는 의미가 자리잡고 있다. 그리하여 이미 자연과 인간을 함께 둠으로써 얻을 수 있었던 새로운 정보나 계시를 잃어버리고 살벌한 인식론만이 뒤에 남았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아이들에게 하찮은 자연의 역사와 예술을 주입시킴으로써 아이들은 동물적이고 생태학적인 본성과 생의 미학을 망각한 채 훌륭한 비즈니스맨을 목표로 삼고 있다.
현대는 자연의 역사를 이솝화한 것이고, 종교는 이기적인 권위가 아닌 오락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3. 가설설정

우리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계에 너무 익숙해져 그 세계를 보잘 것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고방시에 갇혀 있다. 이로 인해 가설설정이 가능하다. 즉 세계의 어떤 사건이나 사물을 먼저 describe하고, 그 description을 위하여 고안한 것과 똑같은 규칙에 들어맞는 비슷한 예를 찾아가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이 얼마나 경탄스러운 일인지 거의 느끼지 못하고 살아간다.
가설설정을 행할 수 없는 세계에서는 사고가 모두 정지해 버릴 것이다.
터무니없는 공상일지라도 그들의 자연관은 사회체계에 의해 지탱되고 있으며, 반대로 그 사회체계는 그 자연관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
자연에 대해서나 사회에 관점을 바꾸는 것이 몹시 어려운 일이 되었다. 안정을 얻은 대신에 경직성마저도 떠맡게 된 것이다. 서로를 지탱하는 전제가 엮어내는 한 없이 복잡한 네트워크 속에 갇혀서 태어나는 것, 이는 모든 인간의 공통된 숙명이다.
생물체의 구조와 기능부터가 결코 자신의 내적 일관성을 무너뜨리지 않는 하나의 가설설정 시스템이라고 볼 수 있으며, 생물을 둘러싼 환경도 내적일관성을 갖춘 가설설정 시스템이다.
생물체의 내적 요청은 구석구석에 이르기까지 보수적이다.

제6장 거대한 스터캐스틱한 과정

학습에서나 유전에서나 어떤 국면에서든 무작위적인 사건의 흐름이 있으며 또한 그 무작위한 사건중 일부만을 뽑아 다른 부분보다 오랫동안 존속시키는 작위적인 선택과정이 있다고 생각한다. 무작위성 없이는 새로운 것은 생겨나지 않는다.
진화와 체세포적인 변화는 근원적으로 유사하며 양쪽 모두 본질적으로는 스터캐스틱한 과정이고 양자의 차이는 과정 작동의 기준이 되는 관념이 속해 있는 로지칼타입의 차이에 불과하다.
2개의 과정중 하나는 개체의 내부에 있는 시스템인데, 이를 학습이라 부르고, 유전과 개체군에 내재하는 시스템으로 이를 진화라 부른다.

1. 라마르크 학설의 오류

아우구스트 바이스만은 체세포와 생식질 사이에는 커뮤니케이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가 생식질이라 보르는 흐름, 즉 한 세대에서 그 다음세대로 계승되어가는 원형질의 연속적 흐름이 있으며 이 생식질에서 세대마다 분파된 것이 체세포 또는 표현형으로서의 신체가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RNA가 DNA의 어떤 부분의 각인을 동일 세포 내의 다른 부분으로 전달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이두박근에서의 화학적 변화의 각인이 생실질에 전달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만은 아니다.
라마르크가 말한 유전이 자연계의 법칙이라고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일반적인 사건이라고 한다면 유전과 학습을 복합한 스터캐스틱한 과정으로서 전체 시스템은 정지해버린다는 이론이다.

2. 용과 불용

생물계를 둘러볼 때 용과 불용의 결과가 대대로 전해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누구의 눈에나 분명할 것이다. 그러나 이를 사실로서 받아들이면 개체의 자유로운 적응능력이 몇 세대도 되지 않아 완전히 상실되어버릴 것이다.
용과 함께 나타나는 체세포 변화는 일반적으로 적응성이 있기 때문에 그와 같은 변화에 어떠한 형태로든 기여하는 유전적 제어는 유익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변하지 않는 환경 조건에 체세포적 변화로써 적응하는 경우가 있다. 고산지대에 정착한 종은 고산지대 특유의 기후나 낮은 기업에 대한 적응을 유전적 결정에 맡기더라도 손해는 없다.
반대로 변동과 역행을 반복하는 상황에의 적응은 체세포적 변화에 의존하는 것이 훨씬 이익이다.
즉 일시적인 긴급상황에서 직접적이고도 가역적인 체세포 변화로써 대응하는 편이 적합하다.
순화 acclimation - 순화는 수많은 전선 - 심장, 헤모글로빈, 흉부근육조직- 에서의 수많은 변화에 의해 쟁취되는 데 비해 긴급조치는 보통 개별적으로 그 국면에 한정된다. 순화한다는 것은 생물이 보다 심각한 경직성에 대한 대가로 표면적인 유연성을 사는 것이다.
생물은 항상 유전적 변수에 의해 이완되는 스트레스를 어느 정도 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기존의 스트레스를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유전적 변화를 작용시키는 것은 곤란하다. 변수의 허용한계치를 상하로 이동시켜주는 유전적 변화가 필요하다.
80톤이나 되는 왕고래에게 왜 200그램 정도의 넓적다리밖에 달려있지 않은가는 더 이상 수수께끼가 아니다.
유전적 메시지는 동사나 명사로 표기되는 우리의 언어와는 전혀 다른 형태로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진화를 생각할 때에는 한 번에 하나의 결과밖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으나 그 단일한 결과의 배후에는 몇 가지의 원인이 서로 협력하여 작용하고 있다.

3. 유전적 동화 genetic assimilation

체세포적 변화는 유전적 변화에 선행할 수 있으며 따라서 유전적 변화를 모방자로 보는 편이 적절할 때가 있다.
개체 단계에서 환경과 경험이 체세포적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개체의 유전자는 이 단계에서는 영향을 받지 않는다. 획득형질의 직접 유전은 있을 수 없다. 선택없이 획득형질을 유전시키는 것은 체세포적 변화가 가지는 유연성을 비가역적으로 소모시키는 것이다.
개체군 단계에서 적절한 표현형 선택이 이루어질 때 환경과 경험은 그 선택망에 걸린 적응도가 높은 개체를 만들어낼 수가 있다. 이러한 범위에서 개체군은 라마르크적인 유전의 단위로서 행동한다.

4. 체세포적 변화와 유전적 제어

메타변화를 수행하는 능력은 유전적으로 결정될지도 모르지만 변화의 능력을 변화시키는 능력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학습하는 것을 학습하는 것은 가능하다. 학습해 대해 학습하는 것을 다시 학습하는 것도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그 이상은 무리이다.

5. 무에서 유는 생기지 않는다는 발생설

진화의 학습이 필연적으로 발산적 divergent이고 예측 불가능한 것임에 비해 발생은 수렴적 convergent이어야 한다.
정자는 전형적으로 적도의 조금 아래에서 알 속으로 들어오게 되는데, 그 점과 2개의 극을 포함하는 면이 개구리의 좌우대칭의 축면이 된다. 알은 맨 처음 그 면을 경계로 해서 분열한다. 그리고 정자가 들어온 쪽이 배가 된다.
분열과 성장을 위해서라면 정자는 필요치 않다. 차이의 표시자로서 작동하며, 어떠한 차이를 표시하는가는 문제되지 않는다. 차이의 표시가 없으면 배는 생기지 않는다.
외배엽과 중배엽은 완별할 정도로 대칭적이지만, 내배엽인 소화관, 간장, 췌장 등은 완전히 비대칭적인 점은 모든 척추동물에 공통적이다.
내장 역위의 경우 개구리에게도 발생하지만, 확률은 낮다. 인간의 경우 100만명중 1명 꼴이다.
현실적으로 역위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기관의 좌우 배분이 분자의 좌우 비대칭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님을 나타낸다.
왼쪽과 오른쪽을 사전에서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언어뿐 아니라 어떠한 디지틀 시스템으로도 이 문제는 해결할 수 없다.

6. 상동 homology

어떤 변화는 확률이 높아 간단하게 일어나며 또 어떤 변화는 너무 어려워 일어나기 어렵다. 이러한 세계에서 완만하게 진행되는 변화는 뒤에 남겨져서 상동의 기반을 이룬다.
곤충의 유충은 성충에 뒤지지 않게 놀랄만큼 다양성을 나타내 보인다.
일반적으로 유사가 차이보다 시간적으로 더 오래되었다. 유사가 상동보다 오래된 점이야말로 각 생물이 분지수 branching trees 위의 점들이나 자리들로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가설을 증명한다.
고양이 크기밖에 되지 않는 바위너구리는 하마와 비슷하며, 사자도 고양이와 상당히 비슷한 면을 갖고 있다.
차이라는 광대한 영역을 분류할 때 전통적으로 이용되어온 이분법은, 패턴의 특징이냐 양의 특징이냐로 보는 것과 연속적인 특징이냐 비연속적인 특징이냐로 보는 방법이 있다.

톰슨은 형태가 크게 다른 두 생물이 관련되어 있는 것을 보여주는 모자이크도를 제시한다


변형이 그렇게 단순하면서 일률적인 것은 양자의 표현형 사이의 차이, 비교적 소수의 유전자형의 차이에 의해 나타난다는 사실을 뜻한다.
변형이 동물의 몸 전체에 일률적으로 미치고 있다는 것은 또한 그러한 유전자가 다면적으로 나타나며 변형이 몸 전체의 조화를 담당하고 있음을 추측케 한다.
표현형을 결정하는 유전적 메시지나 고정적인 신호 속에 유형론적인 사고와 통합론적인 사고를 나누는 신택스가 내포되어 있는 추정을 한다.
동물은 비교적 유사토폴로지컬한 패턴을 갖고 있다.

7. 적응과 탐닉

무작위적인 유전적 변화로부터 종에 보탬이 되는 것만이 자연선택에 의해 선별되거나 무작위적인 시행 착오에 의한 사고과정으로부터 개체에 보탬이 되는 것만이 강화에 의해 선별되는 일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또한 개인차원에서 환영될 만한 것이 그대로 사회적으로 생존적 가치를 갖느냐 갖지 않느냐 혹은 반대로 사회를 대표하는 구성원들이 선호하는 정책이 개개인의 생존을 이롭게 하느냐 등은 모두 앞으로의 역사전개가 결정할 문제이다.

8. 스터캐스틱한 과정, 발산과정, 수렴과정

영원의 눈으로 바라보면 만물을 무한의 공간과 무한의 시간 속에 놓고 파악하게 되며 모든 사건을 전부 스터캐스틱한 연속 속에 놓게 될 것이다.
우리들은 우주의 극히 한정된 영역 안에서 극히 일순간의 삶을 살고 있을 뿐이다. 그러한 우리들에게 시스템이 발산한다는 것은 아주 현실적인 문제이며 무질서로의 타락이냐 혁신으로의 상승이냐 하는 절박한 의미를 안고 있다.
각 세대에서 행해지는 유성생식은 새로운 개체의 DNA 청사진이 이전의 개체와 너무 달라지지 않도록 제어하고 있다. 발생은 수렴적 시스템이며 보수적인 시스템이다.

9. 2개의 스터캐스틱한 과정의 비교와 결합

2개의 구성요소는 먼저 무작위적인 요소가 있고 이어 무작위적으로 생겨나는 것을 선별하는 선택과정이 있다.
발생은 토대를 이루는 것과 그 위에 부가되는 것과의 결합의 연쇄, 즉 양립성 검열의 연쇄이다.
새로운 것이 이전의 것보다 더 나쁘지 않다는 것, 이것이 언제나 중요하다.
환경과 생리적 기능이 체세포적 변화를 제안한다. 그 생존의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것은 유전적으로 결정된 그 시점에서의 유기체의 상황이다.
게놈은 적응 선택 통로의 기억장치라 할 수 있다.
다윈은 후에 획득형질의 유전이나 진화가 진행되기 위해서는 지질학적인 시간으로 부족하다는 데 생각이 미쳐 종의 기원 후기 판에서는 라마르크학설을 받아들인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이 진화에 필요한 시간은 도브잔스키가 발견한 것처럼 진화의 단위가 개체군이며 개체군 안에 광범한 유전 가능성이 저장되어 있다고 하면 대폭 단축될 것이다.

모든 생물의 세포는 놀라운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모든 세포 유기체를 하나로 연결시키는 패턴이 세포에 있다는 사실은 먼저 세포의 상동으로부터 패턴이 확보됨을 말한다.
배우자 형성에서부터 수정 직후까지 생물의 초기단계에 상동이 가장 많이 나타난다고 주장하는 것은 상동의 정도를 양적으로 결정하려는 태도이다. 즉 염색체의 수, 유사분열의 패턴, 좌우대칭, 5개의 발가락, 중추신경시스템 등의 각 특징에 어떤 가치를 부여하려는 것이다. 양이 결코 패턴을 결정하지 않는 세계에서 이와 같이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지나치에 인위적인 일이다.
배의 형태 패턴의 유사성이 성체의 형태 패턴 유사성보다 큰 것은 어떤 이유일까?
체세포적 변화는 일반적으로 적응성을 갖고 있다.
체세포적 적응은 언제나 유전적 변화의 컨텍스트를 만들어내고 있으나 실제로 유전적 변화가 일어나느냐 아니냐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창조적 사고는 반드시 무작위적인 요소를 포함한다.

사고나 관념을 검열해 보는데 2가지 방법이 있다.
일관성의 검열 - 새로운 관념이 이미 알려져 있거나 통용되는 관념과 서로 견주어볼 때 의미가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검열이다. 의미라는 것도 천차만별이지만, 논리라는 것이 현상계의 활동을 파악하는 데는 너무나도 빈약하다.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 자체는 이미 보유하고 있는 관념의 교체나 재구성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한다.
사고과정에서의 엄밀성은 진화에서의 내적일관성과 같은 것이다.
문화사 학자들은 몇 세대에 걸친 형태적 유사를 세계 문화사에서 엿보게 되었으며, 동물학자들이 추구한 상동과 같은 문화의 패턴을 찾아내었다.
생물의 행위는 모두 어느 정도 시행착오적이다.

제7장 분류에서 과정으로

설명의 한 종류는 과정 또는 현상집합체에 하나의 추상적인 토톨로지를 제시하고 그 위에 description을 지도화한다.
뇌는 뇌 자체를 구성하는 신경통로와스위치 시스템과 신진대사물 이외에 아무 것도 포함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하다.
또한 정신 속에는 뉴런도 없고 있는 것이라고는 돼지나 코코넛에 대한 관념 뿐이다.
이름은 이름지어진 사물 자체가 아니며 돼지에 대한 관념도 돼지 그 자체는 아닌 것이다.
개나 고양이는 논리를 구축하고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나 그들도 세계를 아무런 추론 없이 받아들이는 것만은 아니다. 본래 지각과정 자체가 하나의 로지칼타입을 설정하는 행위이다. 이미지 하나하나가 몇 개의 단계를 걸쳐 복잡하게 기호화되고 지도화된 그 집대성이라 할 수 있다.
사물들 및 살아있는 것들조차 서로를 직접 경험할 수는 없다.
대칭형을 이루는 상호작용과 상보형을 이루는 상호작용이 서로 상쇄적으로 작용한다.
체세포적인 상황이 유전자 구조에 직접적인 작용을 미치게 되는 것을 허용한다면 생물체 내의 조직의 상하단계는 붕괴해 버리고 말 것이다.
윌리엄 블레이크 - 현명한 사람은 윤곽을 본다.

제8장 그래서?

훌륭한 인간일지라도 너무 오랫동안 변하지 않으면 해독을 끼치는 쓸모없는 인간이 된다.
사슴이나 퓨마가 자신의 존재를 변명할 필요가 있을까
나는 오랫동안 멍청한 것이 종교의 필요조건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들은 신앙을 설교하고 복종을 설교한다.
마술로부터 종교가 발생했다는 것은 전통적인 사고방식인데, 실은 종교가 타락해 마술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야비한 물질주의를 벗어나는 것은 기적이 아니라 미 beauty이다.
미의 문제에 대해서나 의식의 문제에 대해서 아직 한 사람도 답하지 못했다는 것은 이유가 있다. 있지도 않은 거위 사냥에 나선 것이 되었을 수 있다.
정신이란 일종의 부분들의 조직화 안에 내재한다.
외계에서는 정적인 차이라도 우리가 그 차이들과 관련하여 움직이면 사건이 발생할 수 있다.
가장 아름다운 답은 가장 어려운 문제를 묻는데 있다.
의식이 개처럼 혀를 내밀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니까 어정쩡한 물음에 야비한 답이 나오려 한다. 이런 것을 시니시즘 cynicism-냉소주의 라고 한다. 성스러움의 본질이나 미의 본질을 의식으로 파악하려는 것은 축소주의의 어리석음이다.

부록 혼돈의 시대

로마카톨릭교회가 라틴어의 공용을 포기한 반면에 젊은이들은 산스크리트어를 암송하는 현실은 결코 우연한 일만은 아니다.
달리는 자전거의 균형의 법칙을 운동신경이 거의 무의식적으로 인지할 때만이 자전거를 타고 자유롭게 달릴 수 있다.
생물에게서는 내적인 선택작용이 항상 이전의 상황과 양립성을 유지한다는 점, 그리고 그 작용이 오랫동안 진화해 오면서 일관되게 나타난 것이 상동이다. 바꾸어 말하면 내적 선택의 보수성이 발생의 절차와 추상적인 형태의 고수에 가장 강력하게 발휘된다는 것이다.
보수적, 급진적, 진보적 이런 이름에는 어떤 인식론의 진리가 작용하고 있다. 이 진리는 사람들을 분류하는 이 대조의 극이 실제로 살아있는 세계를 구성하는 변증법적인 대조의 극이라는 점을 주장하고 있다.
생물 진화에서의 규칙은 간단명료하다. 개체가 직접 받게 되는 몸의 기능적 변화가 그대로 개체의 유전적 기호를 좌우하는 것을 막는 한편,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의 차이는 자연선택의 검열을 통해 능력이 모자라는 것은 도태되어 결과적으로 개체군 전체로서 변화해 나간다.
단순히 구조적 변화를 촉진시키는 것이나 또는 단순히 기능적 변화를 억제하는 것만으로는 시대에 뒤떨어짐을 피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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