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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4월 8일 일요일

내재하는 신 - 르네 드보

내재하는 신 - 르네 듀보

A God within - Rene Dubos


도시 집단생활은 때때로 개미굴이나 벌집으로 곧잘 비유된다. 도시는 사회적 곤충과 같이 일하는 인간의 숙소이다. 수많은 사람들은 공동체 안에서 동일한 역할을 연출하면서 아침저녁 지정된 소굴로 돌아간다.
앙드레지드 Andre Gide, 당신은 당신 이외의 어떤 다른 사람이라도 말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그런 것은 말하지 말아라. 당시 이외의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것 그런 것은 행하지 말아라. 당신을 제하고는 존재할 수 없는 그런 측면에만 관심을 기울여라.
지각있는 성인이면, 자기의 일면은 짐승이고 또한 일면은 성자라는 것, 그리고 어리석음과 이성, 사랑과 미움, 용기와 비겁의 혼합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믿는 자인 동시에 회의하는 자요, 이상주의자인 동시에 회의론자이며, 이타적인 선량한 시민인가 하면 이기적인 쾌락주의자인 것이다. 이와 같이 상반되는 모순성이 함께 공존하면 으례 긴장을 초래하는 법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가 서로 잘 상용하면서 건전성을 이루고 있다.
산책할 경우에는 꽃을 즐길 수가 있고 마차를 타고 갈 때엔 작은 시냇물의 물소리를 들을 수가 있으나, 스피드를 내는 자동차 여행의 경우 최고의 경치는 넓게 펼쳐진 광야의 풍경이다.



서 평

인간과 자연이 공존할 수 있는가, 인간의 환경파괴는 제재를 받아야 되는지, 항상 자연에 대한 영감을 주는 글을 써는 저자는, 사소하게 잊혀져 가는 사실들로, 총체적인 입론의 근거를 마련하고 있다.
저자의 글을 따라가다 보면 오늘날의 그린피스나 환경론자들이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다.
안타깝지만 생태학에 관한 책들이 그렇듯이, 정확한 사실을 기반으로 하기 보다는 여러 저자의 감상이나 당시의 보고서, 그리고 저자의 느낌이 모자이크 되면서 지금에 와서는 과학적인 기반이나 근거가 조금 더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서론 - 실재 속에 숨겨져 있는 측면

원시인은 의식은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어떤 사물 뒤엔느 혹은 그 안에는 반드시 어떤 다른 것이 있고, 또 눈에 보이는 운동 뒤에는 반드시 이와 대응되는 힘이 있으리라고 상상했다. 바로 이와 같은 비물질적인 것이나 힘을 그들은 신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호칭은 외적인 실재 안에 숨어 있다고 생각되는 법칙을 나타내는 데 불과했다. 그 명칭 자체에는 아무런 별다른 뜻이 부여되어 있지 않았다. 현대에 살면서도 아직 그 석기시대의 문화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부족들은 자기들 주위에 도처에 신이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전고전기 및 고전기의 그리스인들은 인간성의 숨겨진 측면, 특히 기억에 남는 행동을 이룰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자극한 힘을 entheos 즉 내재하는 신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enthusiasm은 바로 이 entheos에서 유래한 말이다.
enthusiasm이라고 하는 그리스어의 뜻은 논리나 명석한 사고만 가지고는 인간생활의 창조적 활동을 완전히 설명할 수 없다는 뜻도 포함하고 있다.
nature라는 말은 심리적 사회적 또는 인간적인 외적 풍모만 말해 주는 것이 아니라 실재의 표면 밑에 숨어 있는 모든 힘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이스나 로마 시대 사람들에게는 영웅 아니면 무슨무슨 신들이 주역이 되어 있는 신화를 환기시키지 않고서는 아무리 설명해 보아야 어떤 장소나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역할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제1장 세계에 내재하는 세계들

비가 거친 뒤 빗물을 잔뜩 머금은 야생버섯이 적절한 시기와 장소를 적절히 택하여 폭발적으로 번식하는 현상은 진기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겨울, 봄, 이른 여름 동안에는 발견되지 않던 효모는 풍성하게 번식해서 포드즙을 큰 항아리에 저장하자마자, 즉시에 발효하기 시작한다. 그러한 수확기가 지나고 나면 효모는 포도원에서 자취를 감추고 만다.
어떤 사물을 묘사할 때, 그것이 제아무리 섬세하고 객관적으로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그것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성을 제대로 다 전달해 주지는 못한다. 오직 그것을 그대로 몸소 체험하는 길 밖에 다른 방법은 없다.
지금에 와서 나는 내 인생항로를 형성하는데 있어 행동적 결정론보다는 오히려 동기나 자유의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역사의 과정에 있어서도 우발적인 사건이 더 큰 역할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전신에 펼쳐져 있는 유기적 기능으로 받아들여지는 감각을 통하여 세계와 접촉하고 있는데, 우리의 세계관에는 그러한 것 이상의 것이 존재하고 있다. 감각은 우리 개개인이 그 내부에 가지고 있는 정신작용에 따라 완전히 그 사람 독자적인 개념구조로 전환되는 것인데, 그 정신작용은 그 사람의 유전적 경험적인 과거에 입각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어떠한 사람의 정신작용과도 다른 것이다.
아무리 우리가 개인적으로 또는 집단적으로 공동의 생활을 위해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생각해 보면 우리는 극히 사적인 자기 자신의 세계를 살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인간들이 교류를 하고 우주적인 테크놀로지가 전세계를 획일화시키려고 노력한다하더라도 대부분의 정상적인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지리적으로 극히 한정된 소지역에서 배타적이라고도 할 만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제2장 지구의 신학

태양으로부터 발사되는 지나치게 뜨거운 자외선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수면뿐이었기 때문에 극히 오랫동안 생명이 존재할 수 있었던 곳은 오직 바다의 수면 밑이었을 것이라는 상상은 쉽게 할 수 있다. 수중에는 풍부한 영양물이 있었기 때문에 바다는 원시생물로 가득했을 것이다. 남조류가 20억년 전의 선캄브리아기의 퇴적층에서 발견된 것은 그것이 근거가 있는 이론이다.
지구의 특징을 말할 때 성스로운이라는 표현을 쓰는 생각은, 인류의 마음깊이 뿌리박혀 있는 태도를 표현하는 것이다. 자연을 파괴하는 것에 대해서 모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토양은 그대로 하나의 생명체이다. 화학성분이나 구조로 보아 그 토양이 어떠한 장소의 것이든 간에 항상 생물의 활동에 의해 원시의 암석으로부터 쉬지 않고 재생되어 가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어떠한 곳에서나 많은 종류의 다양한 생물이 생식하고 있으며 그것들은 각기 자기에게 적절한 장소를 찾아서 자기에게 적합한 토양으로 변질시켜 가고 있다.
자연에서 내리치는 끊임없는 회초리에 내 몸을 맡긴다는 것은 인간의 건전성을 위하여 본질적으로 필요한 우주의 힘의 핵심과의 생동하는 접촉을 뜻하는 일이다.
인간은 소우주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 소우주는 자기인식 능력으로 대우주를 포용하면서 동체가 되어 그것들을 새로이 보다 풍부하게 재조직한 결과 이번에는 조직의 힘을 빌려 대우주에다 보다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빈곤 질환 그리고 환경의 황폐화 등에 대한 여러 가지의 문제는 고도로 발달한 과학기술만 가지고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다. 기술적인 처리만을 구사할 경우 대개 경과조치의 난잡성만 늘어날 뿐 뜻하지 않았던 부작용이 발생하던가, 자연의 힘에 역행하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이와는 달리 인간과 지구와의 관계에 대한 깊은 지식은 현대의 우리들에게 원시시대의 조상들이 그랬던 것보다 훨씬 더 큰 자연보호에 가능성을 던져주고 있다.
정통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이성은 미신이나 공포심보다 훨씬 유효한 자연을 관리하는 지침이 될 수 있다.

Henry Beston, 자연은 우리 인간성의 일부이다. 이와 같은 성스러운 신비에 대한 자각과 경험을 갖지 않는다면 인간은 인간이길 멈추게 될 것이다.


제3장 뿌리는 깊다

인류는 아열대적 환경 속에서 출현하였지만, 인류의 진화가 완성된 것은 빙하시대였다. 즉 인류는 안정된 기후 속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빙하가 전 지구를 뒤덮고 있었던 추위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렇게 기후적인 요인과 수렵이나 식물채집의 생활양식에 맞추어 몇 가지 인류의 형이 도태 선택되었는데, 이러한 도태현상의 압력은 굉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인류는 한 형이 형성되고 나면 적어도 5만년은 그리 큰 변화를 일으키지 않은 것 같다.
석기 시대 사람은 지구를 방방곡곡 누비고 다녔던 탓으로 격심한 기후의 변화도 경험했다. 그리하여 당연한 결과로써 매우 다양한 유전형이 나타났는데, 그러나 그 유전자의 변화는 그다지 뿌리 깊은 것이 못되었다.
우리 자신의 육체나 정신 면에 있어서, 문명생활이 짊어지고 있는 많은 문제들은 석기시대로부터 내려오는 몸과 마음을 가지고 이 기술사회를 살아야 한다는 모순된 사실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인간의 생물학적 성질과 그의 환경 전체 사이에서 생기는 균열은 변화가 가속될 때 특히 심해진다. 신석기시대의 농업혁명, 청동기시대의 도식혁명, 산업혁명 이후의 2세기에 걸친 시기를 보면, 생물의 진화메커니즘은 대단히 더딘 데다가 그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 생활양식의 변화가 급격할 때 그 보조는 맞지 않게 된다.
인간의 신체나 마음의 대부분, 주야의 일주기, 계절에 의한 계절주기, 그리고 월경주기와 같은 리듬은 인간이 자연계와 결부되어 있다는 가장 명확하고 정정된 현상들이다. 이와 같은 리듬은 먼 옛날부터 내려오는 인가의 진화역사를 통해서 진화의 모든 측면에서 우주의 힘이 지배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해 주고 있다.
인간도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혈압, 홀몬 작용과 같은 생리적 기능은 우주의 영향력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같은 13도의 온도가 7월에는 춥게 느껴지지만, 12월에는 매우 쾌적하다. 그것은 인간 신체의 기본조건이 여름과 겨울에 다르기 때문이다. 그 메커니즘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지만, 겨울에 흔히 있는 식량부족등에 대비한 몸의 변화로 판단할 수 있는 것같다. 적응 메커니즘은 유전 기호로서 유전코드에 기록되고, 여전히 변함없는 그 힘을 발휘하고 있다.
석기시대에 개발된 생물학적 장치를 갖춘 인간이 현대의 기술사회를 생활하며 기능하지않으면 안 될 모순이야말로 몇몇의 현대 질환의 발생원인인 것으로 보인다.
1940년대에 미국에서 일본이나 한국까지 프로펠러 비행기로 30시간이나 걸려 오는 동안, 부신 스테로이드 호르몬의 분비량을 측정한 기록이 있다. 여행중에는 미국의 표준시와 시간적으로 일치하고 있었는데, 아시아에 도착하자 변화가 있었다. 도착후 9일이나 10일이 지나서야 겨우 아시아 시간과 일치하였다. 미국에서 유럽으로 여행했을 경우에는 적응에 5일이 걸렸다.
호모사피엔스가 출현한 곳은 동아프리카의 고원지대인데, 그곳은 우기와 건조기가 교대로 있어서 식물의 성장기와 휴식기에 상응하는 아열대 기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현대인의 욕구, 기호 또는 습관 같은 것도 따지고 보면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는 캘리포니아나 지중해 연안과 같은 기후 조건이다. 그러므로 대개의 인간들은 그와 같은 아열대 기후를 대단히 좋아하며 심지어 그들의 주택 안도 이와 같은 기후환경을 만들어 놓고 즐긴다.

신화나 고전 예술의 많은 테마가 쾌적한 기후조건 하에 있는 전원풍경 속에서 전개되고 있는데, 이것은 호모사피엔스가 그의 생물학적 진화를 완결시킨 곳이었던 사반나 지방과 매우 흡사한 지대인 까닭이라 생각한다.
고금을 가리지 않고 세계 도처에서 그려지고 있는 전원풍경화라는 것은 목장 안에 무성한 나무 밑에서 양치기들이 양떼를 지키며 젊은이들이 사랑을 속삭이고 있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이렇게 전원생활이란 확실히 인류의 가장 기분좋은 추억과 결부되어 있다.

인간은 자기가 경험한 모든 경험을 상징화하고 또 그 상징에 대하여 마치 그것이 현실적인 실재의 사건이라도 되는 듯이 반응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역시 그 기원을 선사시대에다 둘 수 있는 것이다.
적어도 십만년 전 네안데르탈인들은 사자를 장사지낼 때 부장물과 함께 죽은 사람을 동에서 서쪽으로 향해 구부리고 앉아 있는 자세로 이장을 했으며, 또 야생화로 장식한 침상 위에다 시체를 올려놓고 매장하기도 하였다.
Ralph Waldon Emerson, 연령 인종을 뛰어넘어 만인이 범하는 악덕이라든가 우행이라는 것이 있다. 인간은 조상을 닮기보다는 동시대 사람을 더 많이 닮는다.
환경 속에는 우리 이외, 즉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외부 세계의 환경 전체가 가지고 있는 여러가지의 측면 이외에 개인의 마음 속에만 존재하는 측면, 그러니까 한사람의 극히 사적인 개념적 환경에 의해 구성되는 측면이 있다.
모든 인간은 학식이 있건 원시적인 무식이건 간에 모두 각자의 개념적 환경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 개념적 환경이 각자의 윤리적 사회적 상태를 결정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진보의 본질에 관한 의견, 우주의 질서 안에 있는 인간의 위치에 관한 개념, 그리고 신이라고 하는 언어와 관련되는 태도 같은 것들이 이렇게 하여 결정되는 것이다.
인간의 반응이 아니라 응답이라는 단어는 인간과 환경과의 상호작용이 인간에게 있어서 단순한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인간측의 자유의지가 작용하고 있다는 점을 나타내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다.
어린 시적의 경험이 특히 중요하다고 말하는 까닭은 탄생 시에는 아직 발달하지 않았던 신체나 뇌가 환경의 여러 가지 자극을 받아 거기에 음답해 가는 동안에 완성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뇌는 3살만 되면 갓 태어났을 당시의 3배로 성장하는데, 뇌의 기본구조는 초기 기간에 정교한 수상돌기가 여러 개 생겨나면서 발달하는 것이다. 언어, 상상력, 의식, 자아의식 같은 것 역시 이 시기에 고도로 발달한다.

제4장 개성, 인격 및 집단

도시 집단생활은 때때로 개미굴이나 벌집으로 곧잘 비유된다. 도시는 사회적 곤충과 같이 일하는 인간의 숙소이다. 수많은 사람들은 공동체 안에서 동일한 역할을 연출하면서 아침저녁 지정된 소굴로 돌아간다.
인간을 생물적 인간, 사회적 인간, 정치적 인간, 경제적 인간이라고 하는 것과 같이 인간을 추상화할 수 있는 보편적 법칙을 발견하려고 하였다. 우나무노 Miguel de Unamuno 1864~1936는, 골육을 가지고 있는 인간은 모두 보편성 같은 것에는 무관심하며, 오직 개개의 독자성만을 귀중히 여긴다.
문명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 여러 가지 형태로 달라지지만 그 모든 양상의 문명은 역시 똑같은 생물적 충동과 고정된 행동 패턴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사랑과 슬픔의 시 또는 숭배라든가 승리의 기념비 같은 것은 모두 보편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모든 사람의 오늘의 모습, 내일의 모습 하는 것은 모두 어제 또는 과거 한때의 그 사람의 모습에서 조금밖에 변하지 않은 것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발달과 행동을 과학적으로 구명하려 할 대 대부분의 연구는 마치 인간을 유전과 환경의 힘에 의해 만들어진 수동적 제품인 것같이 취급하려 든다.

육체를 살려두기 위해서는 이것만은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과, 인간이 죽는다거나 성장을 멈추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이것만은 해서는 안되는 일이 있는 것은 분명한 반면에, 그 중간 영역은 지역적, 문화적 특색에 의하여 주장되어진다. - 에릭슨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Arthur Compton은, 뉴튼의 법치과 왼손을 올리고 싶을 때 올리는 자유가 서로 충돌하면, 뉴튼의 법칙을 변경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자유의지가 통계적으로 표시되지 않는 이유는, 관찰을 통계적으로 처리할 때 예견할 수 없는 현상을 될 수 있는 한 숨겨 버린다거나 또는 말살해 버리려고까지 한다.
어린아이에게 있어 논다는 사실은, 자기 독자의 세계를 구성하는 모은 감각과 지각을 얻기 위한 하나의 중요한 수단이라고 간주해도 좋을 것이다.
유아기, 소년기, 청년기, 성인기를 통하여 복잡한 조정을 되풀이해 가는 중에 인간의 자기의 아이덴티티에 관한 감각을 갖기 시작하게 되고, 또 그것은 점점 예리해져 가는 것이다.
어린아이 시절의 온갖 사건은 전생애의 모든 단계를 통하여 남김없이 계속 반영된다. 그것은 초기의 경험이 미래를 엄격하게 규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이후의 모든 반응을 조절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개성이라고 하는 것은 존재이기 보다는 형성되어 가는 것이다.
전생애를 통하여 끊임없는 변화를 계속해 나가면서도 마음은 항상 아이덴티티의 감각을 잃지 않고 있다. 이와 같은 안정성은, 물질대사에 의한 변화로부터 기본적으로 독립해 있는 하나의 신경계의 패턴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뜻하고 있다.
어떤 개인의 독특한 정신구조는 부분적으로는 자기 자신의 창조에 의한 것이므로 환경이나 사건에 대한 그 자신의 반응은 발달하여 감에 따라 자기 자신의 진화적 과거나 자기가 태어난 문화환경으로부터 독립성을 더해 가는 것이다.
성인은 어떤 특수한 의식적인 경험에다 촛점을 맞춘다. 그리고 성인은 지금 당장 쓸데없는 사물에 대하여 선택과 배제를 행하여 이에 따라 선택된 자기의 목표만을 향하여 나아가는데 도움이 될 만한 일종의 터널적인 비전을 발전시킨다. 이렇게 한정된 범위 안에서의 경험이나 목표에 촛점을 맞춘다는 태도야말로 인간 개개의 개성적 발전을 가능케 할 뿐만 아니라, 알베르 까뮈의 말처럼 어느 연령 이상의 사람은 모두가 자기 얼굴에 책임이 있다라는 말이 매우 심각하면서도 비극적인 의미조차 띠게 된다.
개성 individuality과 인격 personality의 구분 - 개성이라는 말은 불가분이라는 말과 같은 어원을 가진다. 즉 개성은 대단히 잘 통합된 조직체로서 구조와 기능간의 영속적인 상호관계가 하나의 유기체를 독특하고도 영속적인 것으로 만든다. 인격은 페르소나와 같이 의식적으로 수득한 역할이나 태도를 나타내는 것이라 본다.
퍼스낼리티는 유기체에 부가되었든가 아니면 유기체에 의해서 채용된 속성이기 때문에 그가 상징하는 역할이나 태도가 이미 적절한 것이 못될 경우 또는 불필요해졌을 경우 그것은 제거되던가 아니면 상실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인간됨됨의 그 그릇은 자기 스스로의 페르소나를 선택하고 또 창조하려고 하는 능력에 따라 결정되어 진다. 사람은 결단을 내릴 때만이 참다운 인간이 된다.

앙드레지드 Andre Gide, 당신은 당신 이외의 어떤 다른 사람이라도 말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그런 것은 말하지 말아라. 당시 이외의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것 그런 것은 행하지 말아라. 당신을 제하고는 존재할 수 없는 그런 측면에만 관심을 기울여라.

지각있는 성인이면, 자기의 일면은 짐승이고 또한 일면은 성자라는 것, 그리고 어리석음과 이성, 사랑과 미움, 용기와 비겁의 혼합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믿는 자인 동시에 회의하는 자요, 이상주의자인 동시에 회의론자이며, 이타적인 선량한 시민인가 하면 이기적인 쾌락주의자인 것이다. 이와 같이 상반되는 모순성이 함께 공존하면 으례 긴장을 초래하는 법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가 서로 잘 상용하면서 건전성을 이루고 있다.
인간은 항상 사회구조의 일부이기 때문에 인간이 유기적인 전체로 통합된다는 것은 그의 생물적 또는 정신적인 속성뿐만 아니라 그가 속해 있는 사회적 집단의 자기 이외의 구성원과의 상호작용과도 관련되는 것이다.
이해한다는 것은 행동이 결정론적 법칙에 지배된다고 믿는 것이며, 용서한다는 것은 결정론을 초월한 동정의 행위이다.
가슴아픈 사실은 인간이 어떠한 가치있는 일을 달성하려 할 때면 항상 하나의 통일체로서 기능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일이다.

제5장 장소, 인간, 국가

일상생활에 있어서는 흔히 사람이 장소보다 더욱 중요하다. 장소나 비인간적인 사물은 끊임없는 응답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넓은 평야나 대해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의 몸과 마음은, 삼림 속의 오지나 산간계곡의 온유한 빛 아래 있을 때와 판이하다.
목축민인 아벨과 농경민인 카인으로 표현하여, 아벨과 카인의 투쟁이 인류역사라는 영국 생물학자 달링턴의 이야기는 약간의 의미는 있다.
유전과 환경의 상호 작용에 의해서 발생하는 생물학적 유독성은 자유의지가 작용함에 따라 더욱 증대된다.
풍경이나 기후는 사람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리스의 위생시설은 비참한 상태이며, 남프랑스 지방의 상수도는 그 시설이 불충분하지만, 지중해 세계의 경치, 하늘과 강물이 평생을 지배하는 기호나 태도를 낳게 하는 사실에 비추어 보면,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가?
히포크라테스는, 공기과 물과 장소에 관하여라는 에세이에서, 여러 국민들의 신체적 정신적 특징은 그 나라의 제세와 공기 및 물의 질, 또는 식량의 풍요성과 그 질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
국민이라는 것은 지리적, 기후적, 또는 인종적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경험에 의해서 성립되는 것이다.
영국에서는 금지되어 있지 않는 것은 전부 허가되어 있다는 뜻이고, 독일에서는 허가되어 있지 않으면 다 금지되어 있고, 프랑스에서는 설사 금지되어 있다 하더라도 모든 것은 허가되어 있다이고, 러시아에서는 허가되어 있다 하더라도 모든 것은 금지되어 있다.

미국인을 비유할 때, 수백만의 광우리 속에서 뛰어 돌아다니는 수백만의 다람쥐들이라고 표현한 것은 D. H. Lawrence이다.
인간 모두 지역적으로 인종적으로 다르기는 하지만, 우리들의 몸 안에 흐르는 피는 같은 색깔이다. 우리들은 실은 한 민족이다.

제6장 장소의 영속성

먼 옛날의 조상들이 땅에 남겨 놓은 흔적이 아주 말살되어 버린 경우는 거의 없다. 서유럽의 농경지 대부분이 수천년 전에 삼림을 개척하고 땅을 개간한 신석기 시대의 정주자들에 의하여 최초로 만들어졌다는 옛날의 기록문서가 있다. 이것은 최근의 항공사진에 의해서 확인되었다. 또 많은 도로도 고대에서 그 기원을 가지고 있다.
고대의 입체도로나 로마의 하이웨이를 개발하는 데 사용한 기술은 그 지방의 식물이나 토지에 커다란 영향을 끼쳐 주었다. 그러한 영향은 매우 항구적인 것으로서 항공사진으로 보면 지름길에서 다리에 의해 변경된 곳까지라도 본래는 도로가 통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식물의 분포가 현저하게 다르다.
전 인류의 역사를 통하여 문명의 발달은 도시의 중심부의 존속과 항상 결부되고 있다. 성서 바이블이라는 명칭은 비브로스 Byblos라는 도시명에서 유래된 것인데, 파피루스의 두루마리를 뜻하는 말인 동시에 레바논 해안 베이루트에서 25마일 북방에 위치하는 고대의 항구명이기도 하다.
미국 미시시피강 서쪽에 있는 여러 대도시중 샌프란시스코는 서부 개척민에 의하여 이룩되지 않은 유일한 도시이다.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한 최초의 사람은 그 대부분이 파나마 지협을 넘고 호온만을 돌아온 도박사, 매춘부, 악당들, 일확천금을 노린 사람들이었다. 이 새로운 도시는 청교도의 영향을 입지 않고 발전했던 것이다. 그 뒤 북이탈리아로부터 대규모의 이민이 몰려 닥쳐 이 도시 독특한 성격이 이룩되었다. 가난한 시실리아인이나 나폴리인들과는 달리 북이탈리아인들은 유럽 문명에 정통하고 있어서 지중해항의 코스모폴리탄적 분위기와 흡사한 것을 만들어내었다. 이 도시는 유럽 대륙의 대도시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어서, 인스에 무관심했을 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개혁에도 어떤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아, 새로운 스타일의 생활을 희구하는 메카가 되었다.
런던은 벨기에 계의 소부족의 수도로서 출발하여, 로마제국의 일지방의 수도가 되었고, 색슨인의 수도, 노르만인의 수도, 그러다가 드디어 세계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렘브란트와 콘스터블이 엘 그레꼬나 세잔느와 다른 까닭은 그림의 제재뿐에서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다른 종류의 빛깔들이 그들의 감각이나 마음에다 각기 다른 영향을 던져 준 결과에서이다. 지중해의 하늘은 바닥이 뚫어질듯이 밝고 맑게 갠 공기 때문에 눈에 띄는 것이라고는 모두 빛을 발산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북대서양의 하늘 아래에서는 빛깔은 모두 사물 속에 빨려들어가 있는 듯이 보이는 탓으로 사물이 어떤 신비성을 띤다.
한 국가의 사회사나 문화사는 그 국민의 행동이나 기호에서 뿐만 아니라 인간의 온갖 활동이 그 경관을 이룩하는데 어떤 역할을 하는가에도 달려있다. 이 세계 어디치고 사람이 사는 곳이면 다 그 나라의 경관의 주요한 특징을 이루고 있는 것의 대부분이 그 나라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 오락의 방법, 사회적 교류의 방법 등에서 유래한다.
미국의 도시공원의 대부분이 미국인의 생활과 별 상관이 없는 까닭은, 그것의 설계가 치졸해서가 아니라 , 한 가호씩 독립된 주택이 아파트의 수를 훨씬 능가하여 집 뒷뜰이 사교장이 되어있어 공공의 광장은 자연히 방치되고 사회의 낙오자의 것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개인이 심은 버드나무가 수 세대 이전에 공공의 부지에 심어 놓은 유서깊은 느릅나무나 떡갈나무를 능가한다.
일본 페루 남유럽 같은 여러 지역에서는 전통적인 사다리밭 경작의 방법으로 수세기를 내려오면서 표토의 유실을 막아왔는데, 현대의 농업에서는 등고선 경작으로 토양의 침식을 막고 있다.
구세계에서의 다리는 무엇보다도 사람과 사람과의 교류를 위하여 만들어진데 비하여, 미국의 근대적 교량은 자동차를 통과시키기 위하여 설계되고 있다. 구도시의 건축물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단을 구분시켜 주었으며 그들 사이에는 꼬불꼬불한 골목길들이 있었다. 대조적으로 미국에서 일찌기 발달된 격자호 도로망 gridiron pattern은 길다란 도로의 탄생을 촉진시켰고, 그것은 하이웨이로 발전해 나갔다.
국가의 크기는 그 나라가 토지 이용을 어떻게 하는가의 태도에 영향을 던져 주는 요소의 하나이다. 영국에서는 토지의 황폐화에 대한 외침이 커지만, 미국에서는 전혀 그런 두려움이 없다. 미국인은 만약 어떤 장소가 쓸모없게 된다면 곧 그곳을 버리고 다른 데로 옮겨갈 수 있다.

제7장 자연의 인간화

인간이 경작해 온 토지들은 쉴 사이 없이 경작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비옥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인간이 원시 들판을 인간 사회에 알맞은 풍토로 뜯어 고쳤으며, 사람의 손길이 닿은 풍경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생물학적으로도 윤택해지고, 새로운 문명의 발생과 그의 성장을 돕기에 알맞은 조건을 제공하기에 이르렀다.
유럽의 자연은 인간과 그가 살고 있는 장소와의 사이의 끊임없는 긴밀한 공동작업, 즉 지구의 구애로부터 오는 산물인 것이다.
인간은 야성 속에서 소외감을 느낀다. 그러므로 수백 세대를 내려오면서 야성으로부터 도망쳐왔다. 자연을 조종한다든가 또는 많은 장소에다 새로운 환경을 만들어 냄으로써 인간은 점차 야성으로부터 자기를 지키기에 이르렀다. 야성을 극복하고 자기에게 쾌적한 생태학적 상황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된 바로 그 시기에 인간생활의 본질적인 특성을 형성하였다.

재배식물은 거의가 양수성인 것으로서 다른 나무 아래에서는 성장할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은 농업의 발전, 문명의 발전을 위해서 삼림을 베어낸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제일단계였던가를 말해 준다.
지구의 총 육지면적에서 11%는 경작지로서, 10%는 방목지로서, 그리고 20%는 관리된 삼림으로 이용되고 있다.

제8장 프란시스코 수도회의 자연보존과 베네딕트 수도회의 자연경영

성 프란시스 Francis, 1182~1226는 자연의 윤리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모든 생물과 무생물까지도 마치 그의 친 형제자매처럼 다루었다.
홍적세의 기간에 이동한 대륙의 빙상에 의하여 그 당시의 많은 동물상 식물상이 파괴되었으며, 토양이 유실되었다. 그러나 자연은 또 회복하여 새로운 동식물상을 획득하기에 이르렀다.
미국의 밤나무는 미국 동부의 삼림 속에서 꽤 울창하게 자랐었는데, 1906년 아시아로부터 우연히 수입된 진균식물로 말미암아 오늘날에 와서는 그 썩어버린 밤나무가 부식토를 이루고 있어 숲속의 그 자리는 수많은 종류의 오크로 뒤덮이게 되었다.
1883년 자바와 수마트라 중간에 끼어있는 작은 섬인 크라카토아 krakatoa에서는 화산분출 활동이 매우 활발하였다. 그 폭발력으로 섬의 3분의 2가 날라가 버렸다. 화산재는 지구상 대단히 광대한 면적으로 퍼져 나갔다. 폭발이 있은 지 1년 후에 그 섬을 상세히 조사한 결과 오직 한 마리의 거미와 몇 포기의 풀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25년 후 3일을 계속해서 조사하는 과정에서 202 종류의 동물이 발견되었으며, 50년 후에는 880 종류의 동물을 헤아릴 수 있었고, 삼림이 섬을 온통 뒤덮을 정도로 생물학적인 회복이 진행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생물의 거의가 자바나 스마트라에서 왔던 것이다.
태평양의 비키니나 애니웨톸 Emiwetok 환초는 1946년으로부터 1958년에 이르기까지 수차례의 핵실험으로 말미암아 산산이 분쇄되어 버렸음에도 1964년에는 이러한 섬들의 표토만은 파괴되어 있었지만, 거의가 모두 정상의 상태로 되돌아 갔다.
자연계를 보호한다는 것은 다양성의 소실을 막는 최량의 보증도 되며 생태학적 재해를 최소한 줄이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 되기도 한다.
자연보호를 권장하는 또 하나의 이유로서 경제적 생태학적 이유를 훨씬 넘어서는 미적 도의적인 이유가 있다.
콘돌과 같은 것을 구하는 일에 있어서의 진정한 중요성은 우리가 콘돌 그 자체를 필요로 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그것을 구하려고 하는 행위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데 있다.
Thoreau는 그의 일기에서, 어쩌다 내가 월든호 Walden Pond를 따라 무심히 흘러갈 때면 나는 사는 것을 그만두고 존재하기 시작한다고 적고 있다.

아씨시의 프랜시스와 마찬가지고 너시아 Nursia의 베네딕트는 참 자연보호는 잘못된 인간의 행동으로부터 자연을 지켜 나갈 뿐 아니라 잘 조화된 인간과 자연과의 사이에 이루어지는 창조적인 관계를 더욱 촉진시키는 것과 같은 인간활동을 발달시켜 나가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라가고 하는 신념을 가진 사람에게 있어서만이 그들의 수호신처럼 받들여질 것이다.
베네딕트회의 수도사야말로 손에다 흙을 묻힌 최초의 학자였다.
창세기의 제1장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에 관해 말하고 있다.
초기 무렵의 베네딕트회 수도사는 언덕 위에 살고 있었는데 비하여, 그 분회인 시토수도회 Cistercian의 수도사들은 계곡에 살기를 좋아했다.
시토수도회는 사람이 살기에 부적당한 습지나 숲으로 뒤덮인 계곡을 찾아 수도원을 설립하면서, 숲을 베어 넘기고 습지에는 배수시설을 하여 말라리아가 번지는 곳으로부터 건강하고도 번영을 다짐하는 새로운 농토를 만들어 내었다. 말라리아를 박멸하는 일로 대단히 명성이 높았던 그들은 마침내 로마 평야에다 배수시설을 하라는 대공사까지 맡기에 이르렀다.

제9장 적합성, 변화, 설계

영국은 종획지 실시로, 경지면적 5~10에이커마다에 도랑을 파고 직선으로 된 산울타릴르 만들어 분할해 놓고 일정한 간격으로 나무를 심었다. 이처럼 독특한 지금은 오랜 역사와 많은 문학작품 속에서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경관이야말로 영국 중부지방의 전형적인 풍경이다.
꽃이라든가 담 또는 초원, 꼬불꼬불한 작은 길 같은 것은 느릿한 속도에서 바라보면 즐거운 일이지만, 그것이 시속 60마일이 된다면, 벌써 흐릿하게 어른거려 방해가 됨은 물론 오히려 위험할 정도이다. 산책할 경우에는 꽃을 즐길 수가 있고 마차를 타고 갈 때엔 작은 시냇물의 물소리를 들을 수가 있으나, 스피드를 내는 자동차 여행의 경우 최고의 경치는 넓게 펼쳐진 광야의 풍경이다.
저속력으로 달리는 승용차와 얌전하고 섬세한 산업화 이후의 시골과는 서로 잘 어울려 있지만, 오늘날의 자동차나 비행기의 여행은 넓은 벌판의 경관과 잘 어울린다.
모든 생태학은 궁극에 가서는 항상 인간중심주의가 된다. 인간은 가치판단을 도입하지 않고 환경의 적합성을 논할 수는 없다.
식량의 생산과 소비는 문화를 안정시키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이긴 하지만, 인간의 적응력은 식습관에까지 번지고 있다.
스파게티는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서 14세기에 베니스로 소개한 것이고, 토마토는 17세기에 중미로부터 유럽으로 넘어 왔는데, 영국과 프랑스는 성욕을 증진시킨다고 생각하여 “사랑의 능금”이라고 불렀다. 옥수수와 감자도 그 기원은 미국이고, 쌀은 인도에서 중국으로 넘어가기까지 2000년이 걸렸고, 거기에서 일본으로 건너가기까지 800년이 걸렸다. 바빌로니아 앗시리아 이집트 문명의 기본 곡물은 보리쌀이었다. 밀은 이디오피아의 고지대에서 생겨 세계에 퍼졌다.
고향이란 탄생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 피부 눈 머리 빛깔에 따라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란 극히 왕성한 적응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세계 어느 곳에서나 살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현대의 수많은 문제거리의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자연과 적합하는데 성공한 주거나 농경지 또는 풍경의 모든 형태를 살펴 보면 그 뿌리 밑에 깔려 있는 사회철학이 모두 외부에 현재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그것들은 그것을 이룩한 사람들의 습관 기호 희망을 드러내 놓고 있는 것이다.
도미니크회에서는 읍내에다, 예수교회에선 도시에다가 제각기 뜻에 맞는 활동과 장소를 선택했다. 영국인들은 동식물을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동식물 그 자체를 위하여 사랑했고, 프랑스인들은 동식물을 조형디자인 속에 끌어 들이려는 원망을 일찍부터 드러내기 시작했다.
문화패턴의 기원은 대부분 태도나 형태나 기술 중의 한 작은 쏠림이 우연한 동기로 어느 일정한 방향으로 집합작용을 일으킬 때 일어났던 것 같다.
고대의 조형가들은 우선 그들이 관여하지 않아서는 안 될 상황이 대단히 단순했던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나라들을 여행하는데 매력을 느끼는 이유의 하나는, 건물이나 지붕이 그 지방의 조건과 잘 적합해 있어 지금도 그 때의 정신을 역력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적응성은, 오랜 뒤에 가서는 육체나 정신에 때때로 병이라고 하는 댓가를 지불하게 한다.
히포크라테스는, 질병을 일으키는 주요한 원인은 변화다. 그것도 최대의 변화인 계절이나 그밖의 사상에 있어서의 급격한 변화이다라고 한다.
인간 대 자연의 관계를 추상적인 말로 생각한다는 것은 일반 사람에 있어서는 좀 어려운 일이다. 아마도 이 어려움 때문에 고대의 사람들이 개개의 장소를 거기에 유일한 특수성을 부여하고 그것이 해내야 할 사명 vocation을 결정짓는 속성을 똑똑히 밝히는 신성에 의해 의인화시켰던 것같다.
영국의 경관설계가들은 17세기의 회화에서 유래하는 미적인 배려를 장소의 정신 속에 쏟아 넣음으로써 새로운 종류의 경치를 창조해 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타리아와 영국은 자연과 풍토에 있어 현저히 다르다. 이는 새로운 경관을 창조한 것으로 봐도 좋다.

제10장 내재하는 악마

스위스의 건축가 르 코르브제 Le Corbusier는, 현대주택은 테크놀로지 문명이 몰고온 여러가지 기술을 받아들이고 있긴 하나 문명생활을 육성하는 쾌적이라고 하는 점에 있어서는 대단히 부족하다고 한다. 현대주택은 살기위한 기계이다.
산업문명의 성공은 인간관계의 질에 의하는 것보다 음식물이나 제품의 양에 의해 측정되게끔 되었다.
옥외변소를 옥내로 옮기고, 육체적인 노동을 경감시키고, 전력으로 집을 냉난방하고 실제로 필요 이상으로 자동차 냉장고 전화 등등 여가용품을 소유할 수 있을 정도로 풍요로울 때 그 사회는 문명화되었다고 말하게끔 되었다.

동양문명은 입으로는 자연의 신성성을 부르짖으면서도 실제로는 숲을 베어 넘기고 토지를 침식하고 석탄 석유 광물을 구하려고 구덩이를 파헤칠 뿐만 아니라 단일재배 농업을 시행하는 등 그 결과 서양문명과 거의 같을 정도로 환경을 무참히 오염시키고 있다.
과학기술이 사회적인 면에서 파탄한 까닭은 그것 자체가 갖는 너무나 강대한 힘과 또 그것의 지나친 정밀성 때문에 지금와서는 오히려 사람의 능력으로 그것을 이해하고 다루기는 어렵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테크놀러지가 사회를 자기 뜻대로 조형하고 있는 악마의 손에 의해 좌우된다고 하는 광범한 신념은 테크놀로지적인 정신이 드디오 모든 사회제도나 사고양식 속에 스며들기 시작한 현실 사태로부터 야기된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사회의 시스템이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해석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기술문명에 있어 가장 악마적인 힘의 하나는 성장에의 끊임없는 추구이다.
내쫓아야 할 악마는 테크놀러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 한 가운데 숨어 있다.

숙명론적인 태도에 의하면, 우리는 어떤 사물의 처리방법을 알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일을 그렇게 행하고 있음에 지나지 않으며, 이런 독특한 숙명주의야말로 현대세계의 무서운 악마적인 힘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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