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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0월 24일 월요일

명화로 읽는 서양미술사

명화로 읽는 서양미술사 – 권용준
<고대그리스에서 로코코까지>, 추후 신고전주의에서 인상주의 증보


그림 속에 녹아있는 기호와 상징을 해독하지 못한 채 작품을 눈으로만 보고 지나친다면, 그림이란 한낱 지적 허영심을 채워주는 도구에 불과하다. 해독이라는 지적 과정을 거쳐 그 진의를 파악한다면 예술이란 오늘 우리의 삶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역사로, 오늘 우리의 편협한 행위에 대한 대안으로 빛을 발할 것이다.



서평

그림을 감상하는 것은 행복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림을 알고 본다는 것은 행복 외에 깨달음을 주는 일이다. 온갖 미술사 서적의 책들은 비록 시대별로, 혹은 저자가 생각하는 분류별로 정리를 잘 해놓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붙잡고 읽는 일은 거의 없다. 기껏 이제까지 본 책들 중에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가 보는 즐거움과 깨달음을 주기는 했지만, 바로 잘 알려지지 않은 이책이 제일 재미있고, 미술을 이해하는데 가장 즐거웠던 기억이 난다. 아마도 책을 잡고 바로 다 읽으려고 하다가도 일부러 중단한 채 다음 날 읽기 위해 남겨 두었던 책이다. 이 책에서 쓰여진 논리와 감상을 따라가면 당신도 어느덧 미술애호가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림은 읽는 것이다.

미술작품이 역사의 산물로 한 시대의 인간정신과 행동을 드러낸다 할지라도, 그 표현 방식에서 미술은 역사와는 다르다. 역사가 인간의 행위를 직접적으로 기술한다면, 미술은 이를 간접적으로 코드화시킨다. 즉 인간의 정신적이며 세속적 삶의 모습이 그림 속에 수많은 기호와 상징으로 녹아있는 것이다. 그 기호와 상징은 해독되어야 하며, 해독이란 인간의 시각보다는 지각 즉 지적 활동에 의존하는 것이다.








예술은 철학인가 – 고대 그리스 예술



밀로의 비너스는 파로스 섬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현재 루부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820년 농부가 밭을 갈다가 발견한 것으로 이 섬에 정박중이던 프랑스 해군이 입수하여 루이 18세에 헌납된 것이다.
이것은 아름다운 여인의 인체를 묘사한 것인데, 고대 그리스인이 지향했던 예술의 목표가 이상적인 인체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이상적인 인체의 표준을 만들어서 그것을 카논-Canon이라고 한다. 카논은 7등신 혹은 8등신 비례로서 인체를 표현하는 예술의 표준이었다.
그리스인들은 아름다운 육체란 건강한 육체이고, 건강한 신체란 건전한 정신을 가지기 위한 필수요소이므로 다양한 체육경기도 벌였고, 이를 표현하는 것도 많다.
비너스의 몸을 가로지는 선은 전혀 경직되지 않고 아름답고 부드러운 율동미를 보이고 있다. S자로 휜 멋진 각선미이다. 이는 한쪽 다리에 몸의 무게중심을 두면서 신체가 자연스레 지닌 곡선으로, 몸이 목에서 한번, 허리에서 한번 꺾임으로써 형성된 것이다.이 포즈가 콘트라포스토의 곡선으로 인간의 육체를 가장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8등신의 황금분할 비례법에도 주목해야 한다. 비례법을 처음 만든 사람은 기원전 5세기의 조각가 폴리클레이토스인데, 그가 카논이라는 책에서 이상적인 비례를 7등신으로 말하였고, 대부분의 남성입상은 7등신으로 표현되었다. 기원전 4세기 조각가 리시포스가 8등신의 카논을 말하였는데, 기원전 1세기 로마 건축가 비트루비우스는 수학적으로 발꿈치에서 발가락 끝까지는 신장의 7분의 1, 얼굴 길이는 신장의 10분의 1, 손끝에서 팔꿈치까지는 신장의 4분의 1이라는 것을 발표했다.
위의 비너스 상은 완벽한 해부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이목구비와 얼굴의 모습, 머리카락 그리고 목에 표현된 두 선의 주름과 어깨의 폭, 가슴과 그 아래로 흐르는 배 위의 복근 구조와 선, 약간 볼록한 아랫배의 모습, 옷과 주름에 감싸인 다리 형태와 길이 등이 철저한 관찰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대상을 시각적으로 세밀하게 관찰하여 재현하는 행위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재현하므로 인간의 이성활동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비너스의 상체는 정신적 숭고미를 바탕으로 한 플라톤의 철학이, 하체는 관능이라는 세속성에 바탕을 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존재한다.
상체는 이목구비를 갖춘 얼굴과 그 표정을 보면, 특히 강한 선의 코가 두드러진다. 그 모양새가 단정하고 오똑한 것이 그녀의 고집스런 내면, 허영과 사치를 따르지 않는 자기성찰적인 성격이 보인다. 얇은 입술의 작은 입을 야무지게 다물고 있는 모습은 검소하고 숭고한 성품의 소유자임을 느끼게 한다. 이런 정신적 내면세계는 그녀의 눈을 통해 더욱 두드러진다. 이러한 얼굴은 단정하게 정리된 머릿결과 합치하여 조화를 이룬다.
목을 따라 내려오는 고운 선과 그 선이 머무는 양쪽 가슴의 형태는, 정삼각형 구조로서 이상적이다. 전체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함부로 드러내지 않는 아주 맑고 조용한 정적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고, 여인의 이상적 아름다움, 즉 정신의 이데아를 드러내고 있다.
하반신을 보면, 허리가 상대적으로 굵고 아랫배가 충만하게 발달하였는데, 이는 아이를 생산하는 능력과 관계가 있다. 옷에 가려진 커다란 엉덩이와 굵은 허벅지로 연결되면서, 생명의 잉태와 출산이라는 여인의 본질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또 이는 현실, 즉 세속적 관능성과 연관이 있는 것이다. 헬레니즘 시대의 예술가들은 여인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이지적인 면뿐 아니라 세속적이고 현실적인 면도 포함하여 고전기의 이상적 여인의 모습보다 더 풍만한 모습을 보여준다.
허리에서 점차 부풀어지는 S자 곡선과 풍만하고 관능적으로 보이는 엉덩이, 그에 따라 약간 뒤틀린 동선, 배꼽 아래의 부풀고 부드러운 살결, 옷 속에 감추어진 풍만한 육체미, 이런 것들이 세속적인 관능과 육체의 성적 가치도 중요시했음을 보여준다.
고대 그리스인에게 예술의 아름다움이란 단지 눈의 즐거움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선과 도덕이라는 인간의 내면 즉 정신과 관련이 있다. 이렇게 미()가 선의 관념을 나타낼 때 예술의 진실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리스에서 개발된 예술표현을 위한 기법은 카논의 사용, 콘트라포스트, 해부학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현실세계의 발견 – 북유럽의 르네상스

르네상스 예술의 조형적 특징은 눈에 보이는 현실을 그대로 재현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르네상스 예술을 시각예술이라고 한다. 3차원의 공간세계를 2차원에 담기 위해서 만들어진 기법이 원근법과 명암법이다.
인간의 세밀한 관찰을 바탕으로 하는 대표적 회화장르가 초상화인데, 초상화는 인간의 보편적 이미지가 아니라 한 개인의 생김새와 성격을 표현하는 것이기에 꼼꼼한 관찰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즉 이 시기는 중세의 보편성에서 탈피하여 특수성과 개별성을 표현하는 시기가 된 것이다.
르네상스 미학의 특징으로는 블레사아블랑스-Vraisemblance인데, 이는 진실을 닮았다는 의미의 프랑스어이다. 또 하나는 르네상스의 조형이념으로 트롱프 뢰이-Trompe-loeil를 들수 있다. 이것은 눈속임이라는 프랑스어인데, 3차원인듯한 공간을 2차원에 펼쳤다는 것을 눈속임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시각적 리얼리즘의 르네상스 미학의 탄생을 읽을 수 있는 그림 중 하나가 15세기 네덜란드의 화가 얀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니의 결혼식이다.

1434년에 제작된 것으로, 오크 나무 위에 유화로 채색되어 있으며 런던국립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작품이 왜 르네상스 기운을 표현한 것인지 금방 알 수 있다. 주제가 기독교와는 무관한 인간의 삶이다. 인간의 침실과 그 침 내의 오브제들이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고, 두 주인공의 개성이 표현된 인간의 초상화라는 것이다. 인간 개성의 표현에 주목할 때 남자에게서 풍기는 정직하지도 진실하지도 않는 느낌과 여자에게서 착하고 정숙한 마음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다.
얀 반 에이크가 이렇게 세밀하게 묘사할 수 있는 것은 유화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는 계란 노른자를 용매로 한 템페라기법과 마르지 않은 석회벽에 채색을 하는 프레스코기법이 주된 것이었지만, 기름을 용매로 사용한 유화기법을 창안함으로써 기량을 마음껏 뽐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또 하나 상징체계를 통해 당시의 세계관과 우주관을 표현하고 있다. 결혼식이 거행되는 장소가 신성한 공간인 성당이 아니고, 침대나 소파, 탁자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인간의 공간이다. 이 공간은 결혼 후 두 사람이 거처할 신방으로 조용하고 사치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또 몰래하는 비밀 결혼식 같은 분위기이다. 당시 결혼을 성사라 하였다. 하느님이 주관하는 일곱가지 일을 칠성사라 하는데, 세례성사, 고해성사, 견진성사, 성체성사, 병자성사, 성품성사 그리고 결혼성사가 있고, 결혼이라는 것은 무척 소란한 행사였는데, 이곳은 사적이며 은밀해 보인다.
이 두사람은 벨기에 서부 브뤼주(혹은 브뤼에)라는 도시에 살던 이탈리아인들이다. 남자는 조반니 아르놀피니이고, 여자는 조반나 체나미이다. 아르놀피니는 이태리 토스카나 지방의 루카 출신으로 이태리와 플랑드르 간의 무역을 하여 크게 성공한 상인이다. 1421년 브뤼주에 정착하여 플랑드르의 필립공 궁정에 진출하여 재무를 담당하는 등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다.
남자는 넓은 창이 돋보이는 모자를 쓰고 검정색 셔츠에 반바지와 스타킹을 신고 그 위에 테두리가 모피로 장식된 진홍색 빌로드 코트를 걸치고 있다. 얼굴은 좁고 긴 것이 특징이다. 꼭 다문 입과 얇은 입술이 돋보인다. 턱은 뾰족하고 갈라져 있다. 가늘게 뜬 눈은 사심과 사욕으로 번득이며, 매사를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빈정거림으로 불타고 있다. 이런 관상과 표정이 그를 엉큼하고 교활한 인성의 소유자로 보이게 한다. 그가 취하는 포즈를 보면 혼인 서약이라는 엄숙하고 뜻깊은 순간이라는 인상을 보여주지 못한다.
여자는 브뤼주에 사는 이탈리아의 유명한 은행가 집안 출신으로 침착하고 얌전하며 젊고 순진하게 표현되었다. 어찌보면 고집도 세고 잘 토라질 것 같은 냉랭한 분위기의 여성상이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 표정과 부드러운 시선, 단아한 목의 각도 등 전체적인 자태는 순종적이며 신앙심이 깊은 경건한 이미지를 보이고 있다.
특히 이 여인의 배가 불룩하게 나와있어 마치 임신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부부의 전기에는 자식이 없는 것으로 나오는데, 당시의 유행하던 복식스타일이 이처럼 배를 강조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 방에는 다양한 오브제들이 존재하는데, 천정의 샹들리에는 놋쇠로 정밀 세공되어 있으며, 부드러운 옷과 강아지의 털은 포근함과 따뜻함이라는 우리의 촉각을 자극한다. 샹들리에에서 다른 촛대는 다 비어 있고 단 한개의 촛불이 켜져 있다. 이 촛불은 하늘의 모든 일을 주관하는 그리스도의 존재를 암시한다. 또 촛불은 세속적으로는 다산과 관련이 있다. 이 시대 여인들은 많은 아기를 낳기 바라며 침대 머리맡에 촛불을 늘 켜놓았다.
그림 왼쪽의 창문이 있다. 그 창에는 덧창이 달려 있으며, 가운데 문틀에는 덧창 고리가 세밀하게 묘사되었다. 밖의 덧창에 투사된 빛의 그림자가 문기둥에 표시되어 있는데, 이는 세밀한 관찰을 통해 현실을 묘사하려는 하가의 의지를 보여준다. 창의 윗부분에는 스테인드글라스가 장식되어 있으며 창밖으로는 정원수들이 보여 그림에 공간적 깊이를 더하고 있다.
창문 아래에는 작은 테이블이 있다. 빨간 과일 오렌지가 놓였는데 이는 지중해에서만 생산되는 비싼 과일로서 두 사람이 부유한 생활을 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바닥에 있는 터키산 양탄자 역시 당시 비싸기로 소문났으니 부유함을 알려준다.
벽에는 묵주가 걸려있는데, 알알이 반사되는 빛으로 보아 크리스털 묵주이다. 당시 남자가 약혼녀에게 주던 선물로서 크리스털은 순수와 순결을, 묵주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의 덕성을 상징하니, 신부에게 이런 덕목을 요구하는 것이다.
바닥에는 두 켤레의 신발을 벗어 놓았는데, 신발을 벗었다는 것은 땅과 육체가 직접 만나는 성스러운 의식의 거행을 뜻한다. 신발이 함께 하지 않고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둘의 결혼이 순탄하지 않을 것을 예고한다.
아래의 강아지는 상대방에 대한 성실성과 변치 않는 애정의 약조를 의미한다.
뒷편의 붉은 색 침대는 왕가 또는 귀족 집안에서 재산의 상속 및 지위 세습, 인간의 출생과 죽음을 상징하는 물건이다. 이 침대가 묵주와 함께 묘사되면 부부의 완전한 결합을 뜻한다. 침대 머릿기둥에 옷솔이 하나 걸려 있는데, 솔이 걸린 부분에는 용을 밟고 서 있는 여인의 형상이 조작되어 있고, 이 여인은 주부의 수호성인인 마르타라고도 본다.
그림의 중앙에 둥근 거울이 하나 걸려 있는데, 테두리에는 그리스도가 골고다 언덕을 향해 죽음의 행진을 하던 십자가의 길중 10개의 장소가 동그라미에 묘사되어 있다.
거울 위로는 “얀 반 에이크가 지금 여기에 있노라”라는 글귀가 있다.
거울 안에는 이 그림에 나타나지 않은 다른 두 사람이 보이는데, 한사람은 붉은 색 옷을 입고 다른 사람은 푸른 옷을 입고 있다. 그 두사람은 화가와 그의 조수일 것이다. 당시의 관례에 따르면 화가는 푸른 색 옷을 입고 조수는 붉은 색 옷을 입었다. 그러면서 이 두 사람은 결혼식의 증인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결국 이 그림은 주제와 기법에서 결혼증명서로서의 가치를 보여 주고 있다.





영원한 여성성의 상징 – 이탈리아 르네상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여명기를 풍미한 화가로 알려진 산드르 보티첼리(1444-1510)의 비너스의 탄생을 알아보기로 한다. 보티첼리는 메디치가 지식인 모임의 주요멤버였다. 그는 이 모임에서 인문주의와 신플라톤주의에 눈을 뜨게 된다. 그의 화풍은 유려한 선과 투명감 넘치는 색채를 중심으로 시적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이런 이유에서 그의 작품을 視覺時라고 하며 그를 시인화가라고 부른다. 그는 한때 보티첼로라는 금은세공방에서 일했는데, 여기에서 보티첼리라는 별명을 얻었다.


러스킨은 보티첼리를 세속의 붓으로 천상의 아름다운 글미을 그린 화가라고 칭송한 적이 있다. 유려하고 섬세한 선으로 가냘픈 누드의 아름다운 여체를 그린 예술가인 것이다.
이 작품은 메디치가의 로렌초 디 피에로프란체스코가 결혼기념으로 주문한 그림이다.
그림을 보면 바다 한가운데에서 막 태어나 육지로 상륙하는 비너스가 있고, 양쪽에 인물들이 있다. 비너스가 발을 딛고 있는 섬이 비너스의 섬이라 불리는 키프로스섬이다. 나체의 비너스는 부끄러움에 두 손으로 몸을 가리고 수줍어하고 있는데, 전형적인 콘트라포스트 포즈와 S자 곡선의 각선미를 보여주고 있다.
비너스 왼쪽의 두 인물은 바람을 일으켜서 비너스를 육지로 인도하고 있는데, 남자는 서풍의 신 제피로스이고, 여자는 그의 부인 클로리스이다. 클로리스는 원래 헤라의 황금사과를 지키는 요정이었는데, 제피로스에게 유괴되어 그와 결혼하면서 꽃의 여신 플로라가 되었다. 그녀는 결혼선물로 자신의 손과 숨결이 닿는 모든 것을 꽃으로 변하게 하는 능력을 받았다. 그 주위로 플로라의 숨결이 만드는 수많은 장미꽃이 보인다. 그들의 옷은 아주 세밀한 주름이 잡혀 있으며 날개 역시 아주 정교하게 세공된 금장식처럼 보인다.
오른쪽에는 계절을 알리는 과실나무의 요정 호라이가 시간을 상징하는 데이지 무늬로 수를 놓은 망토를 펼쳐서 비너스의 몸을 감싸주려고 한다. 호라이는 수레국화 무늬의 옷을 입고 영원한 사랑을 암시하는 도금양 목걸이를 걸고 있다. 호라이는 순수, 순결, 고고함을 나타내는 여인이다. 바람에 치마가 뒤쪽으로 부풀어 호라이의 왼쪽 다리를 감고 있는 모습에서 호라이의 풍만하면서 처녀성을 잃지 않은 순결한 육체임을 확인할 수 있다.
호라이 뒤에 있는 세 그루의 나무는 월계수이다. 월계수는 영광과 영원성을 상징하는 나무로, 그 나뭇잎 몇가닥이 비너스의 머리카락에 거의 닿아 있어, 마치 미의 여신 비너스에게 무한한 영광과 존경을 보내는 듯하다.
호라이의 발치에 있는 조그마한 꽃 한송이는 봄을 알린다는 아네모네이다. 바로 비너스가 봄의 여신임을 보여준다.
비너스의 얼굴을 보면 우선 큰 눈이 눈에 띈다. 그 눈은 초점없이 멍하니 허공을 향하고 있다. 이것은 내면세계를 응시하는, 세속의 현상에 전혀 관심이 없는 비너스의 정신을 보여준다. 점감법으로 위로 갈수록 은밀하게 감소된 코의 형상과 꼭 다문 작은 입 역시 숭고한 정신세계를 추구하는 비너스의 성품을 대신하고 있다.
손은 희고 통통하며 다리는 시원스레 길게 뻗어 있다. 그리고 통통하고 작은 발이 앙증맞게 표현되어 있고, 가슴과 측면은 뼈의 윤곽이 뚜렷하지 않고, 머릿결은 붉은 금빛을 띠고 있다. 이 금발의 머리색은 당시 메디치가에서 가장 즐겨 사용하던 호사스런 가발색으로 그 머릿결은 무한한 태양광선의 형태와 색을 닮아 있다.
비너스의 왼쪽발이 무게 중심을 이루고 오른쪽 다리는 발가락 끝만 조개에 닿아있다. 이런 자태에 의해 S자의 물결선이 이 여신의 몸매를 한결 부드럽게 보여주고 있다.
왼쪽의 두 사람은 신의 이미지라기보다는 인간의 모습, 세속적이고 현실적인 인간의 미를 드러내고 있다.
오른쪽의 호라이는 맑고 깨끗한 심성과 순수하고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다.
비너스는 바로 이들 사이에서 두 아름다움의 세계, 즉 순결하고 이상적인 아름다움과 관능적이며 세속적인 아름다움의 세계를 지배하는 완전한 여인의 자태를 보여준다.

비너스의 형상은 육감적이라기보다 관념적, 플라토닉한 여인상이다. 이는 당시 메디치가를 중심으로 한 신플라톤주의라는 관념적 인문주의에 입각한 형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너스는 이런 면 이외에도 세속의 욕망이라는 현실적 아름다움을 보이고 있다. 섬세한 이목구비와 금발의 긴 머릿결, 부끄러워 가린 손아래로 드러나는 팽팽하고 탄력있는 젖가슴, 그 사이로 흐르는 복근의 선과 아랫배의 원형곡선, 그 가운데의 앙증맞은 배꼽, 매끈하게 흐르는 각선미의 선율, 아랫부분을 살짝 가린 머리카락 등은 비너스가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육감적인 면이라고 할 수 있다.

헤시오도스의 신통기에 의하면, 비너스는 바다 한가운데 물거품에서 태어났다. 그리스어로 아프로디테는 물거품과 반짝이다는 뜻의 합성어이다. 바닥의 조가비는 은유적으로 여성의 생식기를 암시하고, 이 세계의 탄생과 생명을 의미하는 우주적이 고 보편적인 자궁을 의미한다. 주변의 소용돌이치는 물결은 남성의 이미지로 본다.

이 그림의 조형성의 핵심은 명암이 아니라 선이다.즉 이그림은 선묘법으로 완성되었다고 할 정도이고, 명암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시각적으로 무게감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비현실적이며 비사실적인 비너스의 실체가 우리 눈에는 천상의 이미지로 비춰지는 것이다.
해부학적인 문제로는 몸과 머리를 연결하는 목이 지나치게 길 뿐 아니라 옆으로 꺾여 있고, 어깨는 너무 처져 있으며 왼팔과 몸의 연결부분이 어색하다. 특히 배의 근육은 이상적인 여성의 육체라고 보기 어렵다. 이러한 시절에 해부학이 그다지 중시되지 않은 시기의 작품이라는걸 알 수 있다.
신비의 미소와 휴머니티의 표현 - 이탈리아 르네상스 2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는 토스카나 지방의 빈치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화가이다. 그가 지닌 예술적 재능은 눈에 비친 세계를 합리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명암법의 개발과 합리적인 공간을 표현할 수 있는 과학적 원근법을 창안해 내었다. 그는 수학을 비롯해 물리와 천문, 식물과 지리 등 과학에 관심을 갖고 많은 소묘를 했으며, 특히 인체를 연구하기 위해 많은 해부도를 남겼다.
모나리자는 1503년부터 약 3년에 걸쳐 제작된 그림으로 세로 77cm, 가로 53cm에 지나지 않는다.
Mona Lisa란 리자부인이란 뜻으로, 당시 견직업에 종사하던 상인이자 은행가인 프란시스 델 조콘도의 부인으로 세 아이의 어머니였다.

이 그림은 한 개인을 묘사한 작품인데도, 리자라는 여인의 개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모나리자에는 눈썹이 없다. 눈썹뿐 아니라 눈꼬리와 입꼬리 부분도 그 형태와 윤곽이 뚜렷하지 않다. 따라서 리자의 감정상태나 성격은 보는 사람의 시각과 감정에 따라 파악될 뿐이다. 이는 이 그림의 목표가 행복한 여인의 순간적 감정과 개성을 표현하는데 있지 않고, 인간이 갖고 있는 온갖 감정과 성격의 순간성을 뛰어넘어 인간의 보편적 감정, 보편적 인간성을 표현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중적 이미지를 지닌 모나리자에 대해 미술사학자 뮌츠는, 다정함과 요염함, 수줍음과 은밀한 관능성이 동시에 표현된 작품으로 일찌기 어떤 예술가도 여성성의 본질을 이렇게 그려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이탈리아 미술사학자 안젤로 콘티는 이 여인의 미소가 선함과 사악함을, 잔혹함과 자비스러움을, 또 우아함과 간악함을 동시에 보이는 것으로 기술하였다. 또한 프로이드는 '쥐를 포식한 고양이의 만족스런 미소'라고 평했다.
이렇게 모호한 이유는 바로 다빈치가 사용한 스푸마토기법-Sfumato 때문이다. 스푸마토는 증발된, 부드러워진, 그늘진 이라는 뜻의 이탈리아어로, 조형적으로는 유화기법과 관계가 있다. 소묘나 회화에 적용될 경우 담채기법이나 목탄을 사용하여 조심스럽게 윤곽선을 지움으로써 안개가 낀 것 같은 효과를 내는 기법이다. 원래 3차원 공간을 2차원에 투영하기 위해서는 적합한 기법이 필요한데, 원근법이나 명암법이 필요하다. 다빈치는 명암법 중 하나를 개발했는데, 명암법이란 이른바 사물의 입체관계를 묘사하기 위한 돌출법으로서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석고데생연습을 연상하면 됨)라고 하는데, 스푸마토는 이 키아로스쿠로라는 명암법의 한 종류이다.
모나리자의 미소를 의학적 견지에 분석한 것들이 있는데, 모호한 감정의 웃음, 미소를 머금은 야릇한 얼굴 근육, 불명확한 감정이 어린 눈동자 등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모나리자의 부은 듯한 얼굴은 콜레스테롤 수치가 과다하다는 증거이다. 얼굴 근육의 형상이 안면마비 증세를 보인다. 벌어진 콧불과 고정된 입술 형상이 잔잔한 기침을 참는 천식환자의 모습이다.
입 언저리와 입술, 볼의 근육이 전혀 발달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선천적 벙어리나 귀머거리였다고 까지 이야기 한다.
당시의 이상적 미인상은 작은 얼굴에 가는 목, 세련된 머릿결, 좁은 어깨와 날씬한 몸매를 지닌 여인을 말하기 때문에 모나리자가 그런 미인상과는 다르다.
여자라는 선입견을 버린다면 리자는 건장한 남성의 이미지에 가깝다. 넓은 어깨와 벌어진 가슴, 커다란 손 등 남성적인 면모를 보인다. 그 근거로 다빈치의 자화상에서 보이는 골격 구조와 모나리자의 골격 구조가 일치한다는 것이다.
당시 관례는 초상화에 풍경이 등장하지 않는다. 풍경은 모델의 개성을 파악하는데 방해가 되고 보는 이의 시선이 분산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려진 풍경은 순전히 다빈치의 상상에 의한 것이다.
이 풍경에서 다빈치는 대기원근법을 알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대기원근법 등 용어는 모두 알고 있는 것으로 가정하고 설명을 붙이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본인이 이 글을 읽는 사람의 이해를 도우기 위해 책을 요약하는 것이 아니고, 추후에 개인적으로 참고할 것이기 때문이다.##
대기원근법도 일종의 스푸마토 기법이다. 즉 풍경조차 흐릿하게 사라지므로 리자를 파악하는 방해 요인이 아니라, 오히려 그녀의 이미지를 더욱 부각시켜 주고 있다.
좌측에는 구불구불 나 있는 도로가 지평선 위에 솟은 뾰족한 산봉우리를 향하고 있다. 우측으로는 격렬하게 흐르는 강이 있고 그 위에 다리가 놓여 있다.
구불구불한 도로는 진리와 덕을 추구하는 인생 여정이 얼마나 험한지를 암시하며, 물 위의 다리는 험하고 고통스런 인생행로에서 인간은 늘 준엄한 결단과 선택을 해야 하는 운명을 말한다.
특이한 점은 좌측과 우측의 경관이 일치하지 않는다. 풍경의 형상과 균형이 다를 뿐만 아니라, 관찰의 눈높이가 다르다. 왼쪽은 리자의 어깨 분분이고 오른쪽 시평선은 여인의 눈 정도에 맞춰져 있다. 그것은 그림에 생동감을 주기 위함이다. 좌우의 경관이 불안정하다는 사실이 작품에 동적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이다.
다빈치와 동시대의 바사리가 작성한 내용에 의하면,
촉촉한 물기가 고인 두 눈에는 광채가 살아 있어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을 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녀의 눈가에는 매우 섬세한 연보랏빛 음영이 드리워져 있고 지극히 세밀하고 정교한 붓으로 마무리 되어 있다. 코의 생김새와 그 발그스름한 콧구멍은 살아서 숨을 쉬는 듯하고, 입술 가장자리가 살포시 부풀어 있어, 여기에서 입술의 붉은 색조와 뺨의 살색이 만난다. 이런 이유로 이 여인은 붓으로 그려졌다기보다는 마치 피와 살로 빚어진 창조물처럼 보인다. 목 아래 패인 곳을 유심히 바라보면 여인의 맥박이 살아 뛰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플라톤의 이데아 재현 – 이탈리아 르네상스 3



미켈란제로(1475~1564)는 다빈치의 23세 연하로서, 조각을 가장 위대한 예술로 생각했다. 다빈치가 눈에 보이는 유기적 조직의 자연세계를 담아내는 회화를 가장 고귀한 예술이라 생각하고 그 행위를 하는 화가를 가장 고결한 영혼의 소유자라 생각한 데 반해, 미켈란젤로는 예술은 과학이 아니라 인간의 창조활동으로 신의 창조활동과 유사한 행위라는 신념 속에서 조각을 가장 위대한 예술로 간주했다. 조각은 신이 이미 대리석 속에 창조해 놓은 형상을 드러내기 위해 잉여부분을 제거하는 자라고 여겼다.
대리석이라는 물질의 감옥으로부터 진실의 3차원 세계를 해방시키는 것이 조각가의 임무라는 것이다.


피에타 1408~1500, 대리석, 175*195cm, 바티칸 성 베드로성당
미켈란젤로 23세때 만들어진 것으로, 완벽한 균형과 인물의 상호성, 마리아의 차분한 표정이 보여주는 운명적 체념 등으로 그에게 예술가로서의 명성을 안겨주었다.
피에타는 경건함, 측은함, 동정을 의미하는 이탈리아어인데, 자식을 잃은 성모의 슬픔이라는 뜻의 고유명사가 되었다.
세밀하고 정교한 이미지는 이 작품이 정말 차갑고 단단한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놀라운 것은 이 작품의 주름효과이다. 시각적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사실적이고 가시적인 세계를 완벽하게 재현한다는 르네상스예술이 이 작품에서 실현되어 있다.
이 작품은 완벽한 삼각형구도이다. 언뜻 보기에 모든 것이 아래를 향한 채 안정감있고 너무도 편안해 보이는데, 유일하게 상승적 힘의 근원은 예수의 오른쪽어깨 밑으로 들어간 마리아의 손이다. 위로 젖혀진 이 부분이 작품 전체의 무게와 균형을 이루는 중심점으로 볼 수 있다.
예수의 형상을 보면, 오른쪽 어깨가 들어올려지면서 예수의 팔은 무기력하게 밑으로 쳐진다. 외부의 힘에 의해 위로 올려지면서 목이 젖혀지면서 뒤로 슬쩍 떨어진다. 곧게 펴진 상체와 하체의 연결부분은 완만한 곡선으로 이루어졌지만 꺾인 허리의 각도는 좀 급하다. 또 하체가 장딴지를 통해 밑으로 쳐지면서 무릎 역시 90도 이상의 각도를 유지하고 있다. 이런 형상은 미켈란제로의 해부학적 지식에 의한 형상이고, 조형적으로는 콘트라포스토의 아름다운 형상이다. 이 작품에서의 해부학은 죽은 자의 해부학이다.

마리아의 얼굴이 굉장히 젊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가 33세인데, 마리아는 26세 정도로 보인다. 오누이에 가까운 얼굴 들이다.
미켈란젤로는 마리아를 통해 정결하고 순수한 젊음의 형상을 표현하고 있다. 마리아는 극단적이고 인간적인 슬픔의 감정을 표현하기보다는 깊은 명상과 슬픔을 머금은 체념의 표정을 보이고 있다. 미켈란젤로는 세속적 욕망을 버리고 살아온 성모마리아의 정결함과 순수함을 표현하기 위해 그녀를 젊은 형상으로 표현했음을 시인했다. 육신의 형상과 감정을 절제하는 모습들은 모두 신플라톤주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롬바르디아인이 이 작품을 보고 롬바르다인의 작품이라고 한데 격분한 미켈란젤로는 성당에 몰래 들어가서 마리아가 차고 있는 경대 부분에 사인을 하고 나온다. 그리고 노을이 지는 석양을 보고 감탄하며, 이렇게 아름다운 하늘 어디에도 하느님의 누가 만든 하늘이다라고 표시를 하지 않았는데 나는 경솔한 행동을 했다는 생각을 했고, 그 뒤로 어느 작품에도 사인을 하지 않았다.


다비드상

다비드상의 대리석은 상당히 질이 나쁜 대리석이다. 미켈란젤로가 이 작품을 시도하기 40년전 조각가 두치오에게 할당된 것인데, 질이 고르지 못해 대성당 작업장에 버려진 것이었다.
다비드상은 그리스 조각의 이상이 충분히 나타나있다. 육체의 역동적인 근육은 내면에서 분출하는 다윗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흔히 헬레니즘 시대 최고의 걸작이라는 라오콘 군상과 비교하기도 한다.

라오콘군상 기원전 150~50, 대리석, 높이 242cm, 바티칸 미술관

이 군상의 얼굴에 나타나는 거친 풍랑의 고통스런 이미지를 통해 심연에서 느낄 수 있는 고요하고 위대한 영혼의 은밀한 감정을 분출하고 있다. 18세기 독일의 미술사가인 빙켈만은 그리스 예술의 특징을 고귀한 단순과 고요한 위대라는 말로 대신한다.

다비드 1501~1504, 대리석, 높이 410cm, 피렌체 아카데미아 텔레 벨레 아르티
이 조각에서 완벽한 해부학의 구도를 읽을 수 있다. 우람한 근육보다는 훈련을 통해 단련된 강인한 육체의 이미지가 보인다. 근육질이라기보다는 원만하고 조화롭게 다듬어진 육체이다.
허리를 기준으로 상체와 하체의 해부학적 구도가 다르다. 하체의 포즈는 콘트라포스토이다. 하체가 이런 평온한 자세를 취하고 있음에도, 상체인 토르소는 대단히 긴장되어 있다. 우선 뻣뻣이 서 있는 목의 구조를 통해 팽팽하게 긴장된 근육을 볼 수 있다. 찌푸린 미간에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제하는 긴장감이 드러나며 부릅뜬 눈은 벌겋게 충혈되어 있다. 입은 굳게 다물어져 있고 그 순간적인 긴장감으로 인해 입 언저리 근육이 경련을 일으키는 듯하다.
손은 굉장히 육중하게 표현되었는데, 안으로 굽어 있어서 손의 힘줄, 핏줄 부분과 손목의 관절 부분이 툭 튀어나와 있다. 배의 근육도 힘이 들어가 양쪽이 함몰되어 있고, 한쪽 손은 투석용 수건을 쥐고 있다. 이 작품은 좌우대칭 구조를 이루며 강함과 분노를 완벽하게 재현하고 있다. 바로 역동적이고 과격한 행동을 하기 직전의 순간적인 정지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
형태적으로 정지, 부동의 구도를 보이지만, 이를 통해 우리가 느끼는 것은 그 속에 내재된 충만한 에너지와 긴장감이다. 그래서 이 작품의 미적 구도를 정중동의 이미자라고 한다.

모성의 전형인 성모, 그리고 이성을 향하여 – 이탈리아 르네상스 4

라파엘로(1483~1520)는 서른 일곱 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화가이다. 라파엘로가 1504년 처음 피렌체에 왔을 때 미켈란젤로는 29, 다빈치는 52살이었다. 당시 교황이던 율리우스 2세와 후계자 레오 10세가 라파엘로의 적극적 후원자였고, 1513년 그를 교황청 전속 건축가로 임명한다.
라파엘로는 천성이 착하고 유순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미켈란젤로에 질린 교황은 이런 부드러운 성품의 화가를 보내준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고, 라파옐로가 죽자 ‘당신께서 아끼던 천사를 제게 잠깐 보냈다가 다시 데려가셨군요’하고 기도를 했다는 일화도 있다.
아름다운 정원사 성모 마리아, 1507, 목판에 유화, 122*80cm, 루부르박물관
이 작품은 완벽한 삼각형 구도로서 안정된 모습이다. 또 그들의 시선과 시선으로 연결되는 암시적 삼각형이 그림 내부에 존재한다. 그리고 그 내부의 삼각형 꼭지점에는 각 인물의 머리가 자리잡아 각각 원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원과 삼각형으로 이루어진 원만하고 부드러운 완벽한 구도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림을 사각형으로 하지 않고 상부를 원형으로 한 것은 완전체로서 무한을 상징하는 하느님의 세계이고, 하부의 사각형은 유한의 세계인 지상을 의미한다.
그림의 구성을 보면 마리아가 한가운데 배치되었고, 그 아래 왼쪽에는 아기 예수가 있어 모자간에 따스하고 깊은 애정의 눈길을 주고 받고 있다. 그녀는 손에 솔로몬의 지혜서를 들고 있는데, 지혜와 지식, 교양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오른쪽 소년은 작은 십자가와 양털로 만들어진 옷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세례 요한이다. 흔히 세례 요한은 짐승가죽 옷에 늘 십자가 지팡이를 지니고 다니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 세례 요한이 예수의 눈을 바라다보며 두 모자가 주고받는 따뜻한 정감의 분위기에 화답하듯 부드러운 시선을 보낸다.
멀리 있는 풍경은 대기원근법으로 그려졌다. 흰구름에 간간이 보이는 금빛 색조가 천상의 성령을 암시하는 듯도 하다. 교회가 있는 원경의 마을은 평화스러워 보이고, 땅은 신성하기에 맨발로 딛고 있다. 그 땅에서 온갖 생명체들이 질경이,엉겅퀴 등의 모습으로 피어나고 있다. 마리아는 정원사로서 아름다운 화초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를 보살피고 있다.


치마부에, 1280, 목판에 템페라, 옥좌위의 성모 조토, 1311, 모판에 템페라, 영광의 성모

중세의 이코노그래피에 의하면, 아기 예수는 항상 마리아의 품에 안겨 추앙받고, 아기의 해부학이 적용되면 안되지만, 이 작품에서 아기의 해부학과 함께 나체로 땅을 딛고 있는 점이 눈에 뜨인다. 즉 세계관이 인간중심으로 바뀌면서 성서를 인간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중세의 전통에 따르면 마리아는 항상 엄숙한 여인으로 세속적이며 개인적인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보편적 형상의 여인상으로서, 붉은색 원피스에 청록 혹은 검정색 도포를 쓰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마치 우리들의 어머니와 같다. 라파엘로는 이그림에서 성모를 영원한 모성의 이미지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이 그림에서 성모의 청록색 옷이 뒤로 접혀졌고, 머리의 베일도 벗겨졌다. 중세에서는 있을 수 없는 표현이고, 이는 마리아의 아름다운 외모와 함께 순수모성이라는 인간 내면의 본질적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아테네 학당

이 작품은 굉장히 큰 벽화로 현재 바티칸 성당의 교황서명실을 장식하고 있다. 반원형인데, 가장 넓은 부분이 772cm이다.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자신의 서명실을 꾸미기 위해 주문한 것인데, 그 서명실은 벽면마다 철학, 신학, 시학, 법학 등 4개의 주제로 구성되었고, 이 작품은 철학을 표현한 것이다.
라파엘로가 이 그림을 그릴 당시 25세였다. 당시 라파엘로는 이런 대형 프레스코를 제작한 경험이 없는 무명의 예술가였고, 그 옆에는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 작업을 하고 있었던 에피소드도 있다.

아테네학당, 1510~1511, 프레스코벽화, 로마 바티칸 성당 서명실
우선 장엄한 건물의 내부 모습이 눈에 뜨인다. 그리고 건물을 표현하기 위해 적용된 원근법이 매우 합리적이며 과학적이다. 건물 내부에 보이는 웅장함과 조화는 인간적 가치보다는 초인간적 이미지, 보편적 이성의 실체를 보여주려는 전성기 르네상스 미술의 정신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작품에는 많은 대가들이 출연하는데, 이런 의도는 학문과 인물에 있어 과거와 현대를 이어주는 위인들에 대한 라파엘로의 존경심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모두를 한 공간에 표현한 것은 시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학문의 위대성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이 건물의 좌우 가장 윗부분 벽면에 있는 두 개의 조각상이 있는데, 왼쪽에는 수금을 들고 있는 신이 있고, 이 포즈는 전형적인 그리스조각의 콘트라포스토 형태이다. 그는 바로 태양과 이성의 신 아폴론이다. 신화에서 아폴론은 철학적 계명과 이성의 교화력, 그 엄숙함과 조화미를 상징하는 신으로 학당의 학문세계를 주관하는 신이다. 오른쪽에 창을 들고 메두사의 얼굴이 박힌 방패를 가진 여인은 바로 지혜의 여신 아테나이다. 아테나는 흔히 평화와 국방을 주재하는 전쟁과 지혜의 여신으로, 지식과 전통의 후원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림 한가운데에 복도를 걸어나오고 있는 두 사람중, 왼쪽의 인물은 팔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고, 오른쪽의 인물은 팔을 뻗쳐 정면을 가리키고 있다. 왼쪽의 인물이 플라톤이고, 오른쪽의 인물이 아리스토텔레스이다. 플라톤이 하늘을 가리키고 있는 것은 그의 이데아론 즉 추상적이고 논리적 철학의 중심으로서 형이상학적 정신의 세계를 자신의 학문세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팔을 정면으로 뻗치는 것으로 보아 물질과 질료라는 현실세계를 중시하는 자신의 학문세계를 드러내고 있다.
이들의 손에 플라톤은 티마이오스를,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윤리학 책을 들고 있다. 이 두 사람은 다빈치와 미켈란젤로를 모델로 한 것이다.
플라톤을 중심으로 왼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청록색 옷을 입은 현인이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은 전사를 비롯해 여러사람 앞에서 두 손을 맞잡은 채 무언가를 설파하고 있는데 이가 소크라테스이다.
그리고 그 앞에서 무언가 열심히 강의를 듣고 있는 전사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다.
그림의 가장 왼쪽 건물의 기둥머리에 포도잎의 면류관을 쓰고 책을 기술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이 행복이란 정신적 쾌락의 추구라고 정의를 내린 에피쿠로스이다.
그 오른쪽 아래에 앉아 커다란 책을 들고 무언가를 설명하는 사람이 있고, 그 뒤쪽에는 설명 내용을 열심히 받아 적는 사람이 있다. 그 아래에 한 소년이 커다란 칠판을 세워 들었는데, 이 장면의 주인공은 기하학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피타고라스이다.
피타고라스 오른쪽에 조그마한 탁자에 팔을 괸 채 깊은 사색 속에서 저술을 하는 인물이 있다. 이는 나중에 삽입된 장면인데, 바로 이 인물이 만물은 유전한다고 말한 헤라클레이토스이다. 특히 그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한탄했던 우울한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이 헤라클레이토스의 모델이 젊은 시절의 미켈란제로이다.
피타고라스와 헤라클레이토스 사이에서 무언가를 피타고라스에게 보여주는 사람이 엘레아학파의 파르메니데스이다.








화면 중앙 하단 계단에 홀로 앉아 있는 깡마른 체구의 노인이 있는데, 이 노인이 계단에 비스듬히 누워 점진적으로 후퇴하는 계단의 공간적 깊이감과 아울러 화면에 원근감을 주고 있다. 이런 기법은 르뿌수아르-Repoussor라고 하는 것으로, 대상들의 원근과 대소관계를 통해 공간의 깊이를 극대화시키는 기법이다. 이 노인은 견유학파의 철학자 디오게네스이다.
화면 오른쪽 아래에 허리를 구부려 바닥에 있는 석판에 컴퍼스를 대고 기하학의 형상을 그리는 사람이 유클리드이다. 유클리드의 모델은 당시 유명한 건축가였던 브라만테이다.
유클리드 뒤쪽으로 지구의를 든 채 뒷 모습을 보이는 인물이 프톨레마이오스이다.
그 앞쪽으로 흰옷을 입고 천구의를 든 인물이 조로아스터, 즉 짜라투스트라이다.
위 두 사람의 얼굴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모자를 쓰고 우리를 빤히 바라보는 사람은 라파엘로 자신이다.

이 작품은 전체적으로 시각적 완결성을 추구하는 르네상스 이념에 부합한 완벽한 원근법적 구도와 더불어 사람들이 구성하는 암시적 수평선이 계단의 수평선과 맞물려 있다. 동시에 가장 아래에 있는 모자이크의 수평선과도 어울린다. 기둥의 수직선을 고려하면 이 원근법과 수평과 수직이라는 기하학적 조화가 바로 이성의 산물인 것이다.



과연 매너리즘인가? - 후기르네상스


16세기말 대가들의 소묘실력은 정점에 달했고, 미켈란젤로 이후 가시의 세계를 표현할 수 있는 완벽한 기법과 방법이 생기면서 더 이상 미술의 발전은 없는 것은 아닌지라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젊은 미술가들은 르네상스의 이상인 조화와 균형을 거부하고 반고전주의를 지향하게 된다. 목과 팔, 손을 길게 변형하는 등 사물을 과장하고 부자연스런 효과를 의식적으로 만들기도 하는데, 이러한 왜곡과 변형을 위주로 한 경향의 미술을 매너리즘이라고 부른다.


한스 홀바인(1497~1543)

아우쿠스부르크에서 태어나 영국의 왕실화가를 지냈다. 그의 화풍은 대체로 전통적인 아름다움을 무시하면서 디테일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북유럽 전통의 그림을 그린다.

대사들 , 1533, 캔버스에 유화, 207*209.5cm, 런던 국립미술관
이 그림은 작품 중앙에 보이는 기이한 오블제로 인해 수수께끼처럼 알려져 있는 그림이다. 원래의 제목은 장 드 댕트빌과 조르주 드 셀브이다. 이 그림 당시에 왼쪽의 댕트빌은 29세이고, 셀브는 25세이다. 댕트빌은 권력과 정치에 속한 사람이고, 셀브는 성직자이다. 댕트빌은 프랑스가 영국왕 헨리 8세에게 파견했던 사신이다. 영국이 로마 교회와 결별하는 것을 막으려는 임무를 띠고 파견된 대사이다. 셀브는 후에 프랑스 대사가 되어 스페인이 지배하던 베네치아에 파견되기도 했던 당대의 대표적인 교양인이라 할 수 있다.
그림에서 두 인물을 중심으로 가운데 탁자가 놓여 있다. 장 드 댕트빌은 베레모 모자를 쓰고 있고 모피로 장식된 훌륭한 외투를 입고 있다. 그리고 커다란 목걸이를 걸고 단검을 들고 있다. 목걸이는 생 미셀이라는 훈장으로, 1469년 루이 11세가 제정한 가장 영예로운 기사훈장이다. 단검에는 AETSVAE29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라틴어로 현재 나이가 스물아홉임을 말하고 있다. 모자에는 해골마크가 달려있다. 조르주 드 셀브는 주교 서품자로서, 당시 가톨릭 내의 개혁주의자였다. 그가 오른쪽 팔을 펴고 있는 책 모서리에 역시 AETATIS SVAE25라고 적혀져 있다. 두 사람의 의상을 보면 댕트롱은 짧은 옷, 셀브는 긴 옷을 입고 있다. 당시에 정치인으로서의 외교관을 짧은 옷의 외교관, 성직자로서의 외교관을 긴 옷의 외교관이라고 불렀다.

탁자의 상부에 위치한 물건은 왼쪽으로부터 천구의와 휴대용 해시계, 사분의, 다면 해시계, 토르카튬 등이다.
천구의는 태양계의 중심이 지구가 아니라 태양이라는 천문학적 계산을 위한 도구이다. 그림 속의 천구의에는 닭이 독수리를 공격하는 형상이 묘사되어 있는데, 독수리는 유럽이며 닭은 옛 프랑스 갈라시아의 상징이다.
사분의는 일종이 경사측정기로 태양 광선의 각도를 재는데 사용된다. 0도에서 90도까지 눈금이 있는 4분원의 금속환이 있고, 그 중심을 벽에 받치게 되어 있다.
다면 해시계에는 현재 날짜와 시간이 4111030분임이 표시되어 있다. 이 날짜와 시간은 영국과 로마의 결별이라는 유럽의 위기와 분열을 암시하는 것으로, 헨리 8세와 캐서린의 이혼 날짜와 이혼서의 서명 시간을 정확히 재현하고 있다.
토르카튬은 태양광선의 각도를 측정하기 위해 고안된 것으로, 주로 태양이나 별 같은 천체의 위치를 측정하는데 쓰이는 천문도구이다. 이 작품에서는 1533411일 즉 이 그림을 그린 날짜가 표시되어 있다.
테이블 하단의 도구들은 지상의 지식과 관련이 있는 것들인데, 지구의와 수학책, 삼각자와 컴퍼스를 비롯해 16세기를 중심으로 유럽에서 크게 유행했던 류트와 피리 그리고 찬송가들이다.
손잡이가 달리 휴대용 지구의는 지리학의 상징으로서, 그 안에 그려진 두척의 작은배는 1522년 마젤란의 세계일주 항해를 암시한다. 또 지구의에 적혀있는 여러 도시 이름은 모두 댕트빌과 연관이 있는 도시이다. 그 중 그의 고향인 폴리시라는 지명과 함께 도시의구조가 그려져 있다.
삼각자가 안에 꽂혀 반쯤 펼쳐진 책은 1527년 독이레서 출간된 산술교본인 상인산술이라는 책이다. 책의 열린 부분에 선명히 보이는 나눗셈-Division이라는 단어가 마치 유럽의 분열을 의미하는 것 같다.
류트와 피리는 음악의 생명을 상징하는 조화의 표현이다. 자세히 보면 류트의 줄 하나가 끊어져 있는데, 이는 갈등과 전쟁 등 인간 간의 부조화를 의미한다. 탁자 맨 아래의 어둠 속에 이 류트의 케이스가 거꾸로 있는데, 줄 끊어진 악기와 더불의 죽음의 이미지를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다.
찬송가집은 1524년 요한 발터가 비텐베르크에서 출간한 프로테스탄트의 성가집으로 루터파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책의 펼쳐진 왼쪽에는 루터파의 합창곡 ‘성령이여 오소서’의 첫소절이, 오른쪽은 십계명을 암시하는 성가 ‘인간이여 행복하기를 바란다면’이 보인다.
이 두 사람은 철저한 카톨릭 신봉자로서, 이들이 신교의 성가집과 함께 있는 것은 카톨릭 내의 급진적 개혁주의자라고 볼 수 있다.
이 그림은 사영기하학을 중심으로 단축법과 약화법과 같은 원근법이 정확하게 적용되어 인간의 지적 세계와 엄중한 종교적 가치를 동시에 표현하였다. 특히 시각적 입장에서 소재가 되는 모든 것을 명확하게 재현하였다. 그럼에도 두 인물은 차분하면서도 생명력 가득한 모습이 아니다. 이는 오브제들과 인간들간의 친밀한 인과관계를 맺지 못한 채 생기없고 무기력한 존재들 처럼 보인다. 그들의 발치에 있는 생경한 모습의 물건도 이런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이 수수께끼 같은 물체는 바로 인간의 두개골이며 그 주위를 죽음의 그림자가 배회하고 있다. 홀바인은 이 두개골을 있는 그대로 재현한 것이 아니라 길게 늘어뜨려 변형시킨 것이다. 일반적으로 해골이 전하는 메시지는 죽음이다. 16세기 이후 그 세속적 욕망이라는 인간의 사치심을 바니타스-Vanitas라 하여, 예술적으로 이 허영심을 고발하는 화풍이 유행한다. 인간의 허영과 사치의 무상함을 드러내는 주된 소재가 해골 , 촛불, 모래시계, 시든 꽃, 비눗방울, 고대의 폐허 등이다.
그런데 홀바인은 죽음의 이미지를 길게 늘어뜨린 왜상기법을 사용함으로써 이 죽음을 새로운 가치체계 즉 삶의 상징으로 환원시키고 있다.즉 죽음을 감추는 이유는 죽음의 구체적 형사보다는 그 형상 이면의 실체, 즉 상반된 가치인 삶의 의미 구조를 재현하기 위한 것이다. 주인공 댕트빌의 신조가 메메토 모리-Memento Mori (항상 죽음을 생각하라)였음을 상기하면 된다. 그의 모자에 달린 작은 해골이 이런 신조를 표현하는 것이다.
2막의 연극효과 – 이 그림은 당트빌이 자기 집에 걸기 위한 그림으로, 발트루사이티스는 왜상기법을 근거로 2막의 연극효과를 기대했다고 주장한다. 먼저 성을 방문한 사람들이 응접실 깊숙이 자리잡은 그림을 보면서 두 사람의 얼굴을 보게 되고, 점점 가까이 가게 되면서 그림 밑의 이상한 물체를 느끼게 된다. 무언지 모를 느낌으로 오른쪽에 열린 문을 통해 물러나면서 마지막 시선을 던질 때 그림 하단부의 물체를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 작품의 두개골 형상을 직감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위치는 그림의 오른쪽 1.5미터 떨저진 곳이다. 관람객이 오른쪽으로 이동하다 궁금증에 문득 다시 돌아보는 순간 실체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엘그레코(1541~1614)

엘그레코란 스페인으로 그리스사람이라는 뜻이다. 크레타섬에서 출생하여 스페인의 톨레도에 정착하여 살았고, 화가, 건축가, 조각가로 대단한 명성을 날리게 되었다.
그레코는 주체적이며 자연적인 형태와 사실적인 색채를 과감하게 무시하면서 환상적인 감동의 세계로 관객을 이끈다. 시각적 합리성보다는 변형의 형태를 통해 극적 효과를 창출하며 인간의 정감에 호소하는 화풍을 개척하였다. 이런 자연스럽지 못한 형태와 고르지 않은 색채를 근간으로 한 그레코의 화풍은 비난의 대상이 되고 오랫동안 잊혀지지만, 예술이 정확한 재현에 그 목적이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된 20세기에 들어와서야 재발견되었다.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1586, 캔버스에 유화, 480*360cm, 톨레도 산토토매교회
이 작품은 상층부와 하증부의 구도가 전혀 다르다. 하층부는 사제복의 두 성인이 죽은 귀족을 무덤 속에 안장시키는 형상이다. 바로 오르가스백작이다. 그의 시신을 묻으려 할 때 두 사람의 성자가 천국으로부터 내려와 그의 시신을 받아 무덤에 안치했다는 이야기인데, 이 기적이 일어나자 그의 무덤 위에 성당이 세워지고 이름을 산토 토메라 불렀다.
그림의 상반부 아래는 천상의 모습이다. 수많은 성인들이 모여 있는데, 구름과 인간의 팔과 다리, 의상 등은 그리스도를 향해 휘몰아치는 화염과 같은 움직임을 보여 주고 있다. 그 위 상반부는 상대적으로 사실적인 필치로 그려졌다. 길게 늘어진 팔을 뻗고 있는 그리스도가 보이고, 그 왼쪽에 마리아, 오른쪽으로는 무언가 탄원하는 성 요한이 보인다. 마리아 뒤쪽으로는 천국의 열쇠를 쥔 제1사도 베드로가 있고, 요한의 뒤에 있는 인물 중 검은머리의 뚜렷한 옆모습을 보이는 사람이 스페인왕 펠리페2세이다. 마리아와 요한의 아래쪽으로 날개를 펄럭이며 죽은 영혼을 하늘로 인도하며 날아가는 천사가 묘사되어 있는데, 이 천사가 들고 있는 흐릿한 영혼이 오르가스의 죽은 영혼이다. 이 영혼을 천국의 세계로 받아줄 것을 마리아와 요한이 간청하고 있다.
그림 하단부는 인물들이 늘어서 있는데, 이 부분을 ‘얼굴들의 벽’이라고 한다. 당시 스페인의 저명한 인물들의 초상화라고도 할 수 잇는데, 그 인물들 중 왼편의 일곱번째가 화가 자신이다. 가장 왼쪽에 생각에 잠긴 수도사가 보이고, 그 아래로 꼬마가 있는데, 그 꼬마가 화가의 아들 호르헤이이고, 그 주머니의 손수건에는 이 아들이 태어난 1578년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매장을 하는 양쪽에 있는 인물중 왼쪽의 부사제 예복을 입은 사람이 성 스테반이다. 서기 35년 부사제로서 최초로 순교한 사람인데, 성 스테반은 젊고 점잖은 모습으로 묘사하는 것이 관례이다. 그가 입은 예복에는 자신의 순교할 때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성난 군중의 돌에 맞아 순교한 바로 그 순간의 자신의 모습이 예복에 그림으로 표현되어 있다. 오른쪽은 성 아우구스티누스다. 서기 354~430년의 사람으로서 초대 그리스도 교회가 낳은 위대한 철학자이며 사상가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오른쪽에 투명한 서플리스를 입은 사제의 뒷모습이 보인다. 이 사람은 안드레스 루네스라는 이 교회의 사제인데, 원래 오르가스가 죽으면서 교회에 많은 액수의 기부를 하는데, 후세들이 유언을 이행하지 않자 법정 투쟁을 하여 이긴 후 고인의 유언을 집행하게 되고, 그 사실을 기념하여 이 그림을 주문제작하는 것이다.
그 옆에 부사제가 십자가를 들고 성경을 읽고 있다. 이 십자가는 오르가스 영혼의 부활을 암시하기도 하고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그레코는 자기 나름대로 비사실적인 터치, 비현실적인 색감을 통해 그 이야기의 구도를 우리들에게 생생하고 감동적으로 전하는 화가라고 할 수 있다.



예술의 본질 – 감성인가 이성인가? 바로크예술

바로크 예술은 1600~1750년대 유럽을 풍미했던 예술양식이다. 일그러진 진주란 뜻을 가지고 있는 말로서 고전적 양식의 미를 일그러진, 즉 왜곡된 기괴한 양식으로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세계에 대한 작가의 주관적 표현을 중시한 경향으로 볼 수 있다.

루벤스와 그의 화풍

루벤스(1577~1640)는 귀족 출신으로 외교관으로서 명망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다. 삶 자체가 윤택했고 사고방식도 낙천적이며 긍정적이었다. 빛과 색채의 역동적 효과를 강조하는 화풍을 구축했다. 색채를 회화의 생명으로 보았기 때문에 완성도를 위한 엄격함이나 기하학적 특성을 보이지는 않고, 오히려 형태 자체가 과장되고 왜곡된 기괴미를 나타낸다.

삼미신, 1640, 목판에 유화, 221*181cm,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제우스와 바다의 요정 에우리노메 사이에 출생한 비너스의 시종들고 정숙, 청순, 사랑을 상징하는 유프로시네, 탈리아, 아글라에를 소재로 하였다. 작품을 보는 순간 우리는 건강하고 힘찬 젊음을 상징하는 세 여인의 모습에 경탄한다.
금빛과 우윳빛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이들의 육체 위에 뿌리는 그 반사광의 효과가 매혹적이고, 빛을 통해 표현된 그 힘과 매력이 감각적이며 격정적인 그리고 역동적인 근육효과가 살아있는 육체의 표현과 동시적으로 결합되어 보인다.
이 여인들은 부분 부분이 상당히 과장되고 불규칙하며 기괴하게 표현되어 있다. 왼쪽의 여인은 루벤스의 두번째 부인 헬레나 푸르멘트를 모델로 해서 그려진 형상인데, 그 여인의 팔 두께나 가운데 여인의 왼쪽 옆구리의 겹쳐진 뱃살, 허벅지로 흐르는 근육의 꿈틀거림 그리고 오른쪽 여인의 젖가슴과 허리와 근육들의 효과를 보면 미의 기준과는 어긋난 것으로 보인다.
이런 형태 속에도 어색하고 불합리한 데생 이미지를 발견하지 못하는 이유는 여인들의 피부에서 드러나는 색감과 빛 때문이다. 또 모두 콘트라포스토 포즈를 하여 S자 곡선의 각선미가 돋보인다. 여인들의 머리에는 장미꽃이 있고, 오른쪽 끝 위에 사랑의 신 큐피드가 동상의 형상으로 이 여인들을 지켜 본다. 세 여인을 겹침으로 입체적인 느낌을 주기도 한다.
즉 이 작품은 엄격한 데생이라는 형태미를 무시하고 인간의 감각과 감정에 호소할 수 있는 화려한 색감의 세계, 그 역동적 화풍을 여실히 보여주는 루벤스의 대표작이다.


파리스의 심판, 1638~39, 캔버스에 유화, 199*379cm,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그림 왼쪽에는 목동 파리스가 세 여신의 아름다운 자태에 망연자실하여있고, 그 뒤로 날개 달린 천리화를 신고 카두세우스의 지팡이를 든 제우스의 전령 헤르메스가 황금사과를 들어 보이고 있다.
오른쪽에는 투구와 방패 등이 상징하는 전쟁의 신이자 지혜의 신 아테나, 화살통을 맨 큐피드와 함께 한 사랑의 신 비너스, 공작을 동반한 번영과 결혼의 신 헤라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여인들은 역동적 이미지이기는 하나, 명확하고 명쾌한 데생은 보이지 않는다. 그 약점과 불안감을 아름답고 화려한 색채와 빛을 통해 해소하고 있다. 이런 그림을 감상하는데 그저 우리의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해주면 되는 것이므로 이것이 루벤스가 추구했던 감각의 화풍이라고 할 수 있다.

십자가를 지고가는 그리스도, 1634, 목판에 유화, 74*55cm, 암스테르담 미술관
이 작품은 형태와 형태, 부분과 부분 그리고 부분과 전체 간에 어떤 합리적인 구조와 공간이 형성되어 있는지 그 구체적 형상을 감지하기 어렵다. 모두 뒤죽박죽 범벅이 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 눈에는 구체적인 형태 이전에 빛의 형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루벤스의 화풍이다.빛과 색채의 현란한 혼합을 통해 인간의 감정에 호소하는 감각의 화풍인 것이다.
예수가 무거운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던 중 넘어지면서 그 십자가에 깔리는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 예수의 뒤쪽에는 십자가를 들어올리는 시몬과 앞쪽에는 오만한 눈빛의 로마병사가 보인다. 그리고 그 밑에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형을 선고받은 두 죄인이 있다. 예수의 머리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주는 애절한 모습의 성녀 베로니카, 그 위 아들의 고통에 애절한 마음을 보이는 성모마리아와 요한이 표현되어 있다. 좌우에는 우는 아이와 더불어 예루살렘의 여인들이 예수의 운명에 슬픔과 오열을 참지 못하는 형상들이 나타나 있다.
이 그림은 형태가 모호하고 경계가 불확실하며 세밀한 부분의 묘사를 포기한 화풍으로, 만약 디테일한 데생으로 표현했다면 우리가 받는 감동이 덜했을 것이라고 보면, 이성활동이라는 여과과정을 거치지 않고 직접 감정에 호소하는 그림이라 볼 수 있다.



푸생의 고전주의
푸생(1594~1665)은 프랑스 출신이지만 대부분의 예술활동을 로마에서 했다. 루벤스가 색깔을 회화의 생명으로 보았다면, 푸생은 데생과 형태미를 회화의 생명으로 간주했다. 바로 데생과 형태의 명확함이 이성과 사유의 명증이며, 이는 도덕적 분별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푸생에 의하면, 회화가 지닌 최상의 목표는 인간의 숭고한 사유와 고결하고 진지한 인간의 행위를 재현하는 것이다. 결국 루벤스가 만인을 위한 화풍을 추구했다면, 푸생은 그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만이 그림을 감상하고 해독할 수 있는 지식인이라는 특권계층을 상대로 한 화풍을 추구했다고 할 수 있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가 있는 풍경, 1650, 캔버스에 유화, 124*200cm, 루부르 박물관
그림의 테마는 오르페우스의 이루지 못한 사랑을 다룬 비극이다. 오르페우스는 칠현금에 아버지를 능가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다. 에우리디케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에우리디케가 산책을 하다가 뱀에 물려 죽게 된다. 오르페우스는 칠현금을 들고 온갖 역경을 물리치면서 지하의 왕 하데스를 만나서 성공하는 찰나에 뒤를 돌아 보지마라는 약조를 어겨서 모든 것을 실패한다.
그림 오른쪽 상단에서 왼쪽 하단으로 내려오는 대각선으 ㄹ기준으로 근경과 원경이 있다. 원경을 보면 도시가 보이는데, 검은 연기가 뿜어 나오고 있다. 또 강 건너편에는 힘든 노동을 하는 사람, 노인을 등에 업고 가는 사람 들이 보인다. 거대한 운명 앞에 무기력한 인간의 존재이다.
근경의 모습을 보면 오로페우스가 칠현금을 연주하고 있고 그 앞에서 즐거워하는 두 여인이 있다. 그 왼쪽에 소스라치게 놀라는 모습의 여인이 에우리디케이다. 그녀의 앞에는 결혼의 신 히메나이오스와 뒤쪽에 낚시하는 사람이 있다. 이 그림은 결혼의 신이 두 사람의 중간에 서서 그들이 결혼할 수 없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오르페우스 뒤쪽으로 음식과 술의 흔적이 있는데 행복했던 한 순간을 의미한다.



탄크레디와 에르미니아, 1630, 캔버스에 유화, 98.5*146.5cm, 생 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지미술관
이 작품은 십자군 원정에 관한 타소의 서사시 '해방된 예루살렘'을 근거로 한 것이다. 한 병사가 누워있는데, 십자군에 참전했던 탄크레디이다. 그 위에 칼을 들고 있는 여인은 훌륭한 전사이자 예의바르고 사려깊은 사라센의 여인 에르미니아이다. 그리고 누워있는 병사를 부축하는 자가 탄크레디의 종복인 바프리노이다. 에르미니아는 열병을 하던 칸크레디를 숨어서 보다가 한눈에 반하였고, 그 사랑을 이기지 못하고 적진에 뛰어들어 에리미니아는 포로가 된다. 탈출하는 과정에서 바프리노를 만나 그가 탄크레디에게 인도하는데, 밤새 말을 달려 도착한 예루살렘에서 그들은 두 명의 시체를 발견한다. 사라센기사와 탄크레디이다. 에르미니아는 탄크레디의 주검 앞에서 ‘당신은 죽었지만 나는 당신을 여전히 사랑하고 있습니다. 죽음은 사랑에 상처를 주지만, 사랑을 죽일 수 없음을 보실 것입니다’라고 외치며 눈물을 흘린다. 그 눈물이 탄크레디의 얼굴에 닿자 탄크레디가 눈을 뜨게 된다. 그의 갑옷을 벗기자 출혈이 멈추지 않는데, 에르미니아는 탄크레디의 칼을 들어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르는데 이 모습을 그림에서 표현한 것이다. 출혈이 멈추지 않으면 사랑하는 사람의 머리카락을 잘라붙이면 출혈이 멈춘다는 통설이 있었다고 한다.
이 그림은 세사람이 이루고 있는 구도가 원의 형상으로써 시각적 편안함과 안정감을 준다. 또 빛과 희망의 상징인 하늘이 구름에 뒤덮이면서 이 그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갈색의 대지와 맞물린다. 대지는 죽음의 빛깔이다. 바로 탄크레디의 운명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하늘 곳곳에 푸른 구원의 빛이 남아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읽지 말 것을 이야기하는 것같다.
이 그림에는 두 마리의 말이 있는데, 흰색 말은 에르미니아의 말이고 갈색 말은 탄크레디의 말이다. 탄크레디의 말은 땅의 색깔과 같은 갈색이고, 죽음의 색이다. 곧 저쪽으로 뛰어갈 것같은 모습은 저승으로 갈 것같다는 암시이다. 그러나 이 갈색은 흰색에 비해 두드러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서, 흰색의 말의 운명에 따를 가능성이 많다.
푸른 빛의 에르미니아의 원피스에 비해, 탄크레디의 옷은 붉은 색이다. 바로 생명과 행복의 의미이다. 이 작품에서는 우리는 감각적이며 세속적인 사랑의 모습과 의미는 찾기 힘들지만, 어떻게 고결한 삶을 살아갈 것인지, 도덕적으로 완전하게 살 것인지에 대한 사유의 과정을 볼 수 있다. 그렇게 스스로의 정서를 순화시키는 카타르시스로서의 예술작품을 구가했던 화가가 푸생이다.


서정적 휴머니즘의 묘사로서의 예술 – 바로크 예술 2

루벤스, 푸생과 더불어 위대한 바로크 화가 중 한명이 벨라스케스(1599~1660)이다. 그는 스페인의 초상화가라고 알려져 있고, 초상화를 통해 장엄함과 사실성, 친근함과 고적한 정감을 동시에 표현한 화가이다.

라스 메니나스, 1656, 캔버스에 유화, 318*276cm,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이 그림은 깊은 공간감을 주고 있는데, 왼편의 대형캔버스가 만들어놓은 경계로 인하여 공간감이 더욱 입체적이며 깊이 있게 묘사되어 있다. 아테네학당에서 본 르뿌수와르 기법이다.
캔버스 앞의 남자는 벨라스케스 자신이다. 그가 들고 있는 긴 붓은 실제로 사용하는 붓이라기보다 화가 자신의 위엄과 명예를 드러내기 위해 회화적으로 고안된 붓이다. 그의 가슴에 붉고 커다란 십자가 훈장이 달려 있는데, 바로 ‘성 이야고’라는 십자훈장으로서 이 그림을 그린 4년 뒤인 1660년 수여받았다. 즉 그림을 그린 뒤 다시 덧칠해서 훈장을 그린 것이다.
정면의 작은 소녀는 펠리페 4세의 공주로서 다섯살의 마르가리타이다. 어딘가에 주의를 집중하면서 앞으로 나가려는 모습인 듯도 보이는데, 왼쪽의 시녀가 빨간 물건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 여인들이 가지고 있던 향수병이다. 오른쪽 시녀는 치마를 펼치며 역시 공주의 주의를 돌리려 한다.
우측에 한마리의 개와 한명의 난장이가 있고, 작은 시녀도 있다. 이 작은 시녀는 리콜라시토라는 왕궁의 어릿광대인데, 개의 등에 발을 올려 놓고 구르고 있다. 난쟁이 시녀는 마리바르볼라라는 이름으로, 병색이 완연한데, 이 그림 완성후 곧 죽게 된다. 어릿광대 뒤에는 수녀와 신부가 있는데, 가톨릭 국가답게 시종역할을 맡고 있다. 문가에 서있는 사람은 호세니오토라는 사람으로서 왕비의 시종이다.
벽에 걸려있는 그림은 벨라스케스가 스승으로 삼고 있던 화가들의 작품인데, 왼쪽에 걸린 작품은 루벤스의 ‘팔라스와 아라크네’를 그대로 옭겨 그린 그림이다.
공주가 주의를 집중하는 대상은 바로 그림에 나타나지 않는 우리가 감상하는 위치에 있는 펠리페 4세와 왕비로서, 그림의 뒤쪽 거울에 반사되어 보인다.
즉 이그림은 단순한 풍속도가 아니라 그룹초상화이자 자화상으로 가치도 있는 그림이라 하겠다.

렘브란트

다빈치와 더불어 유럽회화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라고 알려진 렘브란트(1606~1669)는 인간의 내면적 심리, 즉 인간이 매 순간마다 겪게 되는 갈등과 번뇌, 사색, 신앙심 등을 표현하는데 남다른 재능을 보인 예술가이다.

욕실에서의 밧세바, 1654, 캔버스에 유화, 142*142cm, 루부르박물관
밧세바는 골리앗을 죽인 다윗의 부인이다. 이 그림은 다윗이 탐욕 때문에 남의 아내를 빼앗고 죄를 범한다는 성서의 내용을 주제로 삼고 있다. 밧세바는 다윗의 부하인 우리아 장군의 부인으로, 다윗은 우리아를 최전방으로 보내 전사하게 하고는 밧세바를 부인으로 맞아 훗날 솔로몬을 낳게 된다.
밧세바는 다윗이 보낸 편지를 읽고 깊은 시름과 고뇌에 잠겨있는 모습이다. 남편이 죽은지 얼아 안되지만, 몸단장을 하는 것을 보니 다윗의 부름에 응하는 눈치다. 그러나 그 얼굴에는 실리적인 갈등의 기색이 역력하다. 사랑과 죄의식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이다.
그림에서 어두운 부분과 밝은 부분의 대립이 뚜렷하다. 그래서 주위배경도 잘 파악이 되지 않는다. 우리 눈에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들어오는 것은 밧세바의 육체 뿐이다. 이처럼 명암을 대비시켜 주제를 부각시키는 방법을 테네브리즘-Tenebrism이라고 한다. 카라바조가 창안하였는데, 예술적으로 한차원 끌어올린 사람이 바로 렘브란트이다. 렘브란트를 빛의 화가라 하는 것은 이런 이유이다.
이 작품에서 밝은 부분은 밧세바의 육체이고, 그 육체의 아름다움이 침대보의 밝고 흰 색조와 만나면서 더욱 강조되고 있다. 어둠 속에는 한 노파가 밧세바의 발을 다듬어주고 있는데, 이 부분이 확연하다면 밧세바에게 향할 시선이 많이 분산되었을 것이다.
이 작품의 또 다른 가치는 누드의 개념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기존화가들이 서 있거나 누워 있는 모습을 누드로 그려서 콘트라포스트나 율동미를 강조했다면, 앉아있는 누드는 선정적이고 에로틱한 자극을 주므로 금기시되었던 모습이다. 그러나 렘브란트는 육감적 미라기 보다는 인간의 고뇌에 찬 심리적 정서를, 감성보다는 사색을 표현한 것이다. 이것이 예술가의 재능이다. 이 그림에서 여인은 날씬하고 싱싱한 모습이 아니라 이미 배가 풍만한 중년에 든 여인이다. 즉 여인의 외양적 아름다움이 아니라 편지를 읽은 뒤 여인이 겪는 갈등과 고뇌라는 인간적 심리를 표현한 것이다.


벨사자르의 향연, 1635, 캔버스에 유화, 167*209cm, 런던국립미술관

벨사자르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아들로, 왕위에 올랐다. 그 아버지는 이스라엘을 침공하여 유대인 지도자 다니엘을 포함하여 6천명의 유대인을 끌고 바빌로니아로 돌아온, 바빌론의 유수라는 사건의 주인공이다.
벨사자르는 총명하지도 않으면서 향락적인 생활을 하고, 하느님을 모독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어느 날 술에 취해 유대인의 성배인 황금술잔을 내어오라고 명령하여 술잔에 포도주를 마시는데, 그의 뒤로 빛과 함께 손이 나타나서 벽에 글씨를 새긴다.
이 장면에서 향락에 취했던 웃음이 공포로 바뀌고, 벨사자르는 그 무서운 광경에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머리를 얼마나 빨리 돌렸던지 터번과 왕관이 옆으로 돌아가 불균형하게 표현될 정도였다. 옷의 단추도 떨어져 나가 그 부분의 옷이 벌어져 있다.
벨사자르는 다니엘을 불러 글귀를 해석하라고 하자, 그 글은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고 하며 메네는 왕의 나라 햇수를 마감했다. 데겔은 왕을 저울에 달아보니 무게가 모자랐다. 우바르신은 왕의 나라를 미디안인과 페르시아인에게 나누어 준다라는 뜻으로 해석했다.
이 작품은 사람들의 내면 상태가 잘 나타나 있다. 벨사자르는 손으로 성잔을 넘어뜨려 포도주를 바닥에 쏟았고, 왼쪽의 두 인물은 향락에 젖어있다가 순간적으로 두려움에 빠지는 모습들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에르티시즘의 미학인가, 인간 애환의 표현인가? 로코코미술과 계몽주의


로코코미술은 18세기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에서 위세를 떨친 예술사조다. 태양왕 루이14세와 베르사이유궁전에서 향락을 즐기던 귀족들이 루이 15세 즉위와 더불어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명령하자, 그들은 왕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파리의 쌩 폴이라는 지역에서 그들만의 다운타운을 만든다. 이런 과정에서 이들이 만든 문화를 살롱문화라고 한다. 귀족들의 타락하고 퇴폐적인 풍류와 연관된 예술이 로코코이다.
로코코는 대저택을 사들인 후 그곳에서 이룬 예술경향과 연관이 있는만큼 귀족사회의 생활을 미화하기 위하여 고안된 장식 공예품 등 실내장식과 연관된 용어로서, 세련미와 화려한 유희적 정조를 중심으로 한 섬세하고 리드미컬하며 경쾌한 여성적인 이미지라 할 수 있다.
로코코예술은 왕과 서민들과 격리된 채 자신들만의 미적 성취를 목표로 삼았던 귀족들의 경박하고 타락한 풍류를 표현한 것인데, 와토(1684~1721)가 대표적 작가로서, 그는 경쾌하고 사치스럽고 감성적인 그림을 그려갔다.

키테라 섬의 순례, 1717, 캔버스에 유화, 129*194cm, 루부르박물관
이 작품은 왕립아카데미의 살롱전에서 대상을 받은 것으로, 시적이며 몽상적인 분위기를 현실세계와 결합시켜 아름다운 사랑과 서정을 그린 것이다. 희극작가 당쿠르가 쓴 “세 사촌 자매”의 첫 구절 ‘우리와 함께 키테라 섬에 순례하러 갑시다. 젊은 처녀들은 애인을 얻어 돌아옵니다’에 도취되어 그린 작품이다.
이 키테라 섬은 흔히 비너스의 성전이라고 이야기 되는 사랑의 섬이다. 그림의 오른쪽에 비너스의 동상이 보이고, 동상 아래에는 검이 걸려있다.
그림의 원경에는 감미로운 색채의 하늘이 보이고, 어린 천사들이 날개짓을 하며 내려오고 있다. 이들을 푸토라 하는데, 큐피드의 화신으로 사라의 모험을 이끌어내는 자들이다.
그림의 좌측에는 키테라 섬에 도착한 한 척의 배가 있고, 배에서 내린 많은 사람들이 보인다. 어떤 남자는 여자의 허리에 팔을 끼고 있으며, 뱃사공들 역시 사랑의 흥정에 끼어들어 한몫 거들고 있다.
우측에는 세 쌍의 남녀가 있는데, 먼저 도착해서 달콤한 사랑의 한나절을 보내었다. 세 쌍 중 왼편의 두 연인이 일어서며 도착한 배를 타는 준비를 하고 있고, 중앙의 연인들도 이 부름에 응하지만, 우측의 한 쌍은 지팡이를 앞에 내던진 채 연애 삼매경에 빠져 있다. 귀족의 상징인 지팡이를 내팽겨쳤다는 것은 사랑에 압되되었다는 것이다. 그 옆에 부채를 들고 사랑의 고백을 듣고 있는 여자도 보인다.
이렇게 감미로운 연애감정을 표현한 와토의 화풍을 페트 갈랑트라 하는데, 연애축제 혹은 사랑의 축제 화풍이라고 한다.
와토는 세 쌍의 연인을 인도하는 강아지를 통해 사랑의 방종을 암시하고, 제일 오른쪽의 어린아이가 바지를 벗고 연인들을 쳐다보는 모습을 보이면서 이런 행동을 고발하는 분위기도 보인다. 그림 좌측 하단의 썩은 나무와 뱃사공들의 해골같은 얼굴 역시 인간의 사랑이 얼마나 허무하고 덧없는 행위인지 암시하는 것이다.


부세, 목욕중인 다이아나, 1742, 캔버스에 유화, 53*73cm, 루부르박물관
부세는 와토의 제자로서 로코코 시대의 대표작가이다. 다이아나는 처녀성과 아름다운 미모를 자랑하지만 잔인한 사냥의 여신이다. 다이아나는 대개 활과 화살을 갖고 사냥개와 사슴을 데리고 다니는 사냥꾼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 작품은 사냥을 하던 다이아나가 시종과 함께 목욕하며 휴식을 즐기는 장면이기 때문에, 감미롭고 육감적이며 에로틱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여기에서 다이아나는 체구가 작고 매우 젊은 여인이다. 부푼 가슴과 허벅지에서 드러나는 육체의 성숙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키가 작고 얼굴도 어려보인다. 특히 두 여인의 피부색은 눈부시기 짝이 없다. 어리지만 성숙한 자태와 이 피부 빛으로 인해 우리는 이 여인에게서 에로틱한 분위기를 즉시 감지하게 된다. 주위에 무질서하게 놓여 있는 화살과 화살통들을 보면 이런 여인은 현실적이며 경박한 사유를 보인다.
그림 좌측 멀리에서 사냥개 두마리가 물을 먹고 있다. 개의 포즈나 치켜올라간 꼬리의 형상이 남성의 욕망구조를 보이는 듯도하다.


그네, 1767, 캔버스에 유화, 81*64cm, 런던 월러스컬렉션
프라고나르는 부셰의 제자이기도 한데, 로코코를 대표하는 그네라는 그림으로 많은 것을 알려준다. 그림의 배경은 로코코시대의 귀족들이 사들인 대적택이다. 저택 안에는 커다란 나무와 고대의 조각상이 보인다. 바로 고전과 도덕의 상징이다. 이런 곳에서 고전을 조롱하면서 그네를 타는 모습을 보인다.
여인의 좌우로 남자들이 있는데, 우측에 있는 노인은 필립공작이다. 당시 나이가 70세가 넘었다. 눈은 녹내장으로 푹 패어있고, 얼굴에 병색이 완연하다. 왼쪽의 남자는 줄리앵이라는 애인이다.
이러한 순간에 줄리앵이 여인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고 있는데, 여인은 그 요구를 들어주고자 다리를 치켜 들었는데, 그만 신발이 벗겨져 날고 있다. 여인의 옷 색깔은 진한 분홍색으로 무척 선정적이다. 이 색깔이 나무 사이로 들어오는 강렬한 햇살에 반사되며 금빛과 뒤엉킨다.
프라고나르가 그린 이 선정적이고 농기가 가득한, 동시에 경쾌하고 에로틱한 매력을 뿜어내는 그림이 로코코를 대표하는 그림이다. 순수예술적 입장에서 로코코예술을 바라본다면, 이 시대가 인류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예술을 구가했던 시대라고 평가할 수 있다.


계몽주의 화가들

샤르뎅, 장을 보아온 여인, 1739, 캔버스에 유화, 47*37.5cm, 루부르박물관
서민의 삶을 소재로 한 샤르댕의 이 작품은 장을 보고 부엌에 들어온 여인의 표정과 부엌밖의 옆집 남자의 모습을 대비시키는 구도이다. 밖에 보이는 여인이 콧수염 기른 남성의 집을 방문하는 모습을 의식하고 있는 눈치를 주인공 여자가 보이고 있다. 그 여인은 삶을 영위하기 위한 장보기를 하지만, 밖의 남녀는 그녀의 그런 삶과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이런 대비를 통해서 여인의 혼란스러움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작가는 그림의 주화면에서 보여주는 당시의 소탈한 부엌살림을 정교하게 묘사하면서 질박하게 살아가는 서민의 본모습을 보여주려는 의도도 보인다.


글뢰즈, 시집가는 새색시, 1761, 캔버스에 유화, 91.4*118.1cm, 루부르박물관
이 그림에서 눈에 띄는 점은 배경이 되는 공간이 무질서하다는 것이다. 장롱문이 열려있고, 천장의 선반에는 천이 무질서하고, 장총과 사냥 물통이 걸려있다. 이러너 분위기 속에서 아버지는 옷을 잘 차려입고 있다. 신부 아버지는 신랑에게 지참금을 건네고 있으나 사위의 표정은 밝지 않다. 어머니는 딸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슬픈 감정만 자아내고 있다. 신부 옆에 고개를 파묻고 있는 아이는 세째이지만, 아버지 뒤에 있는 둘째가 시집만 가면 각오하라는 독한 표정을 보이고 있다. 이런 가족사이의 미묘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이런 화풍을 통해 진정한 휴머니즘이 무엇인지 표현하는 것, 이성적인 측면에서 서민들의 삶이야말로 진리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계몽주의이다.


11. 예술인가 해부학인가? - 신고전주의

신고전주의 예술은 고대 로마 등 고전에 대한 취미와 질서를 향한 열망 그리고 나폴레옹의 영광스런 위상이 서로 만나면서 탄생한 예술이다. 신고전주의를 대표하는 예술가가 자크 루이 다비드(1748~1825)이다.
신고전주의 예술은 고대로 복귀하는 것이다. 즉 형식의 통일과 조화, 균형과 명확성을 근간으로 이상적인 미의 전형을 마련한 그리스 로마의 고전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시각을 중시하기 때문에 해부학을 가장 중요시했고, 엄격한 데생과 견고한 화면, 균형과 조화의 질서라는 고전적 조형성을 만들어 내었다. 도덕과 명예 및 역사에 관한 엄격한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기 위한 다비드의 조형성은 수평선과 수직선의 교차라는 구도가 회화의 근간을 이룬다.
독배를 마시는 소크라테스, 1787, 캔버스에 유화, 129.5*196.2cm,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소크라테스가 독약을 건네받는 죽음의 순간을 묘사한 것이다. 독배를 건네는 제자의 발치에는 사형집행을 명하는 문서가 놓여있고, 검고 무거운 족쇄가 바당에 뒹굴고 있다.벽면의 차갑고 선명한 색조는 감방의 암울하면서도 폐쇄적인 분위기를 전달하고 있다. 소크라테스의 튀어나온 눈과 짜부라진 사자코 등 이미지, 그리고 사물에 대한 묘사를 위해서 다비드는 고대의 작품을 고증하였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의 육체를 비롯해 침대보와 의상 주름을 매우 견고하고 무겁게 그렸다. 화면에 있는 사람들 또한 그리스 로마 시대의 조각상들을 모델로 그린 듯, 이상화된 형태로 표현되어 있다. 감방, 족쇄, 명령서, 술잔 등은 철저한 관찰과 고증으로 재현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죽는 순간 손으로 하늘을 가리킨 채 진리의 길을 설파하고 있고, 이런 영웅적이며 웅변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다비드의 의도라 보인다. 그 주변의 인물이 12명인 것으로 보아 예수의 12사도를 연상시킨다. 모든 제자들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바로 감정의 대립, 즉 영웅성과 슬픔의 대립 효과이다.
감정의 대립 이외에도 벽면과 바닥을 중심으로 형성된 여러 개의 수평선과, 인간과 촛대를 중심으로 한 수직선들이 이루는 엄격한 기하학적 대비효과를 발견할 수 있다.
이렇게 관찰과 고증 그리고 엄격한 해부학을 바탕으로 영웅성이나 애국심 등 역사적인 가치를 드러내고자 한 예술이 신고전주의 예술이라 할 수 있다.
사비니 여인들, 1799, 캔버스에 유화, 386*520cm, 루부르 박물관

이 그림은 전투를 벌이려고 하는 로마군과 사비니군,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싸움을 말리고 있는 여인들의 모습이 보인다. 로마 건국신화를 소재로 한 것인데, 로마의 인구문제가 걱정이 된 로물루스는 북쪽의 타티우스가 지배하는 사비니의 여인들을 약탈하려고 사비니인들을 로마의 제례에 초대하고 , 이들이 구경에 정신이 팔린 틈을 타서 도시를 습격하고 사비니 여인들의 납치에 성공한다. 타티우스 왕은 군사를 동원해 로마로 쳐들어 오지만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로 두 도시는 화해한다.
그림 오른쪽 커다란 방패를 들고 있는 전사가 로마군이다. 방패 중앙에 ROMA라고 씌어져 있다. 왼쪽에는 사비니군의 모습이다. 중간에는 싸움을 말리는 여인이 있다. 영웅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두 전사의 이미지와 그 사이에서 운명을 탓하며 오열하는 여인의 이미지가 결합되어 있다. 사비니군은 아버지나 오빠, 로마군은 남편일 수도 있는 것이다.
역시 여인을 통해 나타나는 슬픈 운명과 남성을 통해 나타나는 영웅성이 두드러진 대비효과를 보이고 있다. 작품 속의 무기류나 장신구, 의상 등은 철저한 고증에 의해 재현된 것이다. 여인의 원피스는 전형적인 고대 그리스풍이다. 조형적으로는 작품속 인물들의 수평선과 창과 건물의 수직선의 대립구도이다. 이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당시의 유명한 희극배우나 유한 마담 등 실제 인물이다.
이 그림이 암시하는 것은 프랑스 혁명이다. 이 그림 속에 익히 알려진 인물들을 형상화한 것은 관객들에게 이 인물들과 함께 영광된 순간에 동참했다는 자긍심을 심어주기 위한 의도이다. 일반 대중에게 공개될 때 대형 거울을 통해 감상하도록 기획하여 거울에 관람객이 함께 재현되도록 했던 것이다.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 1807, 캔버스에 유화, 610*931cm, 루부르박물관

나폴레옹은 1804년 12월 2일, 파리 노틀담성당에서 대관식을 거행한다. 이 그림은 시각적 사실을 엄격한 필치로 재현하여 대관식 때 어떤 인물이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자태로 있었는지 보여준다.
전통적으로 왕관을 수여하는 자는 교황이지만, 나폴레옹은 교황 비오 7세가 자신에게 왕관을 씌워주려는 순간 그의 손에서 왕관을 빼앗아 버린다. 나폴레옹 뒤에 지팡이를 짚고 침통하게 앉아있는 사람이 교황 비오7세이다. 나폴레옹의 의상은 로마의 케사르가 입고 있던 의상을 연상시킨다. 머리에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영광을 의미하는 월계관을 황금으로 장식해서 썼다.
교황의 주위로 외국에서 초대받은 성직자들이 있고, 나폴레옹의 오른쪽에는 파리의 성직자들과 관료들이 보인다. 화면 왼쪽 끝으로 흰 원피를 입은 나폴레옹의 누이동생들이 있다. 당시의 생생한 현장성을 인물의 성격과 심리적 반응을 통해 드러내는데 성공한 역사화라고 볼 수 있다.
나폴레옹의 열렬한 추종자인 다비드는 나폴레옹이 실각하자, 1816년 브뤼셀로 추방당한다.
앵그르(1780~1867)
앵그르는 다비드의 제자로, 그의 작품세계는 스승의 화풍을 완성시킨 점이 아니라, 조형적 아름다움의 가치는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한 점에 있다. 앵그르 전까지는 신조전주의를 중심으로 예술적 아름다움과 해부학적 아름다움을 혼동하고 있었다.
그랑드 오달리스크, 1814, 캔버스에 유화, 91*162cm, 루부르박물관

이 그림은 1819년 살롱에 출품되어 형편없는 소묘력 때문에 비평가들의 비난을 면치 못했다. 일견 숭고하고 엄격한 고전주의 화풍을 따르고 있고, 콘트라포스토의 포즈와 율동미가 보이는 S자 공선이 적용되어 있지만, 해부학적으로 너무도 엉터리 그림이다. 허리는 지나치게 길고 휘어 있으며, 팔도 상당히 길게 표현되었고, 엉덩이와 허벅지 부분이 묘연하다. 또 오른쪽 다리 위에 올려진 왼쪽 다리의 모습이 어색하기 그지없다. 발도 오른발, 왼발이 아니라 양쪽 다 왼발로 보이고, 왼쪽 어깨도 지나치게 처져있다. 이런 해부학적인 문제로 인해 이 작품은 거짓이라고 비난받은 것이다. 비록 그림 속에 여인의 아름다운 육체와 터번, 머리 장식 핀을 비롯해 부채와 커튼, 침구류 그리고 오른 편의 담뱃대 등의 묘사가 합리와 명증을 토대로 한 고전적 특성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지만 해부학적 오류가 비난을 자초한 것이다.
그러나 앵그르는 예술적 아름다움은 사물에 대한 예술가의 주관적 심상을 표현한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즉 예술의 대상을 객체에서 주관의 세계로 바꾼 것이다. 예술가는 아름다움을 창조하기 위해서 시각적 세계를 감각적으로 변형시켜 표현한 것이다.
이 그림에서 미녀의 아름다움은 사실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라 바로 예술로 표현할 수 있는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결국 이 그림에서 허리와 팔이 길고, 허벅지가 짧지만 장딴지가 긴 것 등은 선의 아름다움을 위한 것이다. 단순한 선의 형상이 아니라 견고한 양감의 이미지로 표현한 것이다, 그 인물의 아름다움을 주관적으로 표현하였다면, 커튼이나 침대의 주름, 터번 등은 엄정한 관찰을 토대로 묘사한 것이다.
발팽송의 욕녀, 1808, 캔버스에 유화, 146*97cm, 루부르박물관

이 그림은 여인의 등이 등장한다. 전통적으로 예술의 소재가 될 수 없는 것임에도 양감과 곡선의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 과감하게 이 부분을 소재로 한 것이다. 허리가 잘록한 여인이 아니라, 풍만한 여인이다. 이 여인의 아름다운 양감과 볼륨 그리고 선의 이미지가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이 여인의 육체는 상체와 하체의 균형이 맞지 않다. 침대 아래의 하체가 너무 빈약한 것이다. 역시 해부학적인 구도가 아니라 중요한 부분만 부각시키는 기법이라 보인다.
샘, 1856, 캔버스에 유화, 163*80cm, 파리 오르세미술관

소녀의 몸은 콘트라포스토와 S자 곡선이다. 여체의 한가운데를 중심으로 좌우의 선적인 이미지가 대비를 이루고 있다. 여인의 좌측의 선이 단조롭고 미끈한 반면, 오른쪽의 선은 구불구불한 것이 그 굴곡이 심하게 이루어져 있다. 해부학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인체의 모습인데, 이런 상반된 선의 조화가 여인의 아름다움을 시각적으로 극대화시키고 있다.
터키탕의 욕녀들, 1863, 캔버스에 유화, 직경 108cm, 루부르박물관

이 그림은 피카소가 크게 감명받았다고 하는 것으로, 에로틱한 이미지를 돋보이는 부풀려진 양감에 주목해 본다. 피카소는 여인의 부풀려진 양감을 통해 예술적으로 무엇이 어떻게 변형될 수 있는가라는 주관적 가치 혹은 그 가능성을 배웠다고 한다.

결국 앵그르는 객관의 세계에 충실하면서도 예술적인 순수한 아름다움이라는 조형적 가치를 표현할 것인가라는 고뇌를 하였고, 이러한 앵그르의 고민 속에서 탄생한 것이 낭만주의이다.
12. 감성, 그 광기의 분출 - 낭만주의 예술 1

로뎅, 코뼈 부러진 남자, 1864, 청동, 파리 로뎅박물관
로뎅이 이 작품을 살롱전에 출품하지만, 당대의 비평가들은 혹평을 가한다. 즉 코뼈가 부러졌다는 것은 신체의 균형미가 깨진 것이다. 모델은 저명인사가 아니므로 숭고한 정신의 소유자가 아니다(실제로 로뎅이 사는 마을의 노인이 모델이 되 준 것이다). 또 이 작품은 찰흙에 금이 가서 머리 뒷부분이 떨어져 나갔는데, 로뎅이 마스크로 제작하여 출품했으니 마치 뒤통수가 깨진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 작품은 고전주의의 엄격한 법칙을 거부하는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한 예술품이었다.

뤼드, 라 마르세이예즈, 1835, 대리석, 파리개선문
고전주의의 전형성에 따르면 인간의 팔은 머리 위로 올라가서도 안되고, 배꼽 아래로 내려와서도 안된다. 팔을 지나치게 올리거나 내리는 것은 감정을 극단적으로 드러내는 동작이기에 삼가야할 포즈였다. 이런 관점에서 뤼드의 작품이 공개되었을 때 엄청난 비판을 받았던 것이다.

낭만주의 예술

낭만주의 예술은 주제가 더 이상 교훈적인 역사나 도덕, 완결의 이미지를 보이는 육체미가 아니라 인간의 회노애락, 인간이 현실에서 겪는 비합리적인 감정과 그 감정의 직접적인 분출이 된다. 여과되지 않은 인간의 감정 상태를 표현하고, 엄격한 데생이 아니라 풍요로운 색채를 위주로 발전한 예술이다. 낭만주의 작품에는 빨강, 노랑, 검정, 흰색 등 원색과 그 보색을 사용하고 대비효과를 일으키는 장면이 많다. 사랑, 혁명, 학살, 전쟁, 폭동 등 개인이 겪는 감정 문제나 사회에 만연한 충격적 사건을 주제로 삼는다.

고야, 1808년 5월 2일, 1814, 캔버스에 유화, 266*345cm, 마드리드 프라도미술관

1808년 카롤로스 4세와 그의 아들 페르난도가 잇따라 왕위에서 물러나면서, 강력한 군대를 앞세운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점령하고 지배하게 된다. 프랑스군은 야만적인 행위를 하게 되고, 이런 와중에 마드리드에서 시민들이 봉기하여 프랑스 측의 모로코 용병과 시민들이 시가전을 벌인다. 이 작품을 위해 고야는 수많은 증인을 동원하여 그림 속에 표현한다.
이 작품은 나라에 대한 애국심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국가의 무능과 무력함으로 가치없는 죽음을 당해야만 하는 무고한 익명의 희생자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반영웅성의 그림이다. 이 그림은 전시대에서 유행했던 영웅을 그린 것이 아니라 우리들에게 역사적 진실과 더불어 도덕적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형이상학적 작품이다.
고야, 1808년 5월 3일의 학살, 1814, 캔버스에 유화, 266*345cm,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이 그림에는 잔인한 학살이 벌어진 프린시페 피오 언덕의 실제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프랑스 군대의 모자, 배낭, 손잡이가 사각형인 칼, 바지, 가죽코트, 총 등이 프랑스 보병의 모습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멀리 보이는 궁전과 교회의 종탑은 리리아 궁전과 산 조아킨 수도원이다. 그림 왼쪽에는 총살당한 시체들의 피가 땅을 적시고 흰옷을 입은 한 남자가 팔을 높이 치켜든 채 저항하고 있다.
왼쪽에는 주먹을 불끈 쥔 비장한 모습을 보이는 사제가 있는데 이 사람은 갈레고 다빌라라는 프란체스코파의 사제다. 새벽 4시인데, 오직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 하나 보인다. 이 등불에 등을 보인 군인들이 똑같은 포즈로 얼굴없는 존재들이 총칼을 겨누고 있는 것이다.
흰옷을 입은 사람의 손에는 십자가에 못박힌 자국같은 것도 보인다. 그래서 이 그림을 근대의 십자가처형이라고 부른다. 그 옆의 사제는 마치 하느님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절규하는 듯도 하다.
이 그림은 무차별하게 만행을 가하는 자와 그것을 감수하는 무기력한 자들간의 격렬한 감정 충돌을 여과없이 직접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13. 죽음과 혁명의 향연 - 낭만주의 예술 2
삶과 죽음에 연관된 희로애락 등 인간의 극단적인 감정을 표현하는데 주력한 흐름도 있고, 비인간적이고 야만적 행위와는 동떨어진 채 고요하고 평온한 자연경관을 화폭에 담은 영국식 낭만주의도 있다.
제리코, 메두사의 뗏목, 1819, 캔버스에 유화, 491*716cm, 루부르박물관
1816년 프랑스는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개척할 목적으로 군함 세 척을 띄우는데, 당시 25년간 배를 탄 적이 없는 사람이 뇌물을 주고 군함의 함장이 되었다. 7월 2일 이들의 미숙한 지휘와 무능으로 배가 촤초하게 되어, 승선했던 4백명 중 대부분 죽고 149명만이 뗏목에 올라탄다. 이 뗏목이 15일동안 바다를 표류하여, 7월 11일 생존자는 15명으로 줄어들고, 7월 17일 군함 아르귀스 호에 의해 구조된다. 구조된 15명중 5명은 곧 사망하고, 나머지는 모두 그 두려웠던 시간의 충격을 이기지 못해 모두 정신이상 증세를 보인다.
1819년 살롱전에 출품되었을 때 도덕성이 결여된 그 충격적 소재로 인해 아주 거센 비난을 받게 된다. 그러나 다음해 런던에서 다시 전시되자 영국인들의 대단한 찬사를 받게 된다.
그림의 주제는 너무 슬프고 절망적이며,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항해의 어두운 이미지가 보는 이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그림 속에는 시체들이 즐비하다. 제리코는 시체 공시소에 가서 다양한 시체들의 모습을 스케치하고 일부 시체를 아틀리에로 가져와 밤새 그리기도 했다고 한다. 다만 제리코는 태양의 열기에 말라비틀어진 시체나 굶어 야윈 얼굴, 더럽고 오염된 피부, 열대병 등 구역질나는 실제 상황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기 보다 순화시켜 표현함으로써 도덕적인 가치를 보여주는 측면이 있다. 왼쪽에 누워있는 시체는 야위고 썩은 비참한 모습이 아니라 마치 미켈란젤로의 데생을 모방한 듯 보인다.
그림에서는 구조의 순간을 격동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와 대비되어 왼쪽의 사나이는 건장한 육체의 사내가 하반신이 뗏목 사이로 빠져 끌려다니고, 그림 오른쪽에는 상체가 바다에 빠진 채로 끌려다니는 처참한 광경이 있다.
결국 이 그림은 죽음에서 삶으로 옮겨가는 과정의 격정적인 감정처럼 여과되지 않은 순순한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다비드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질서정연하고 일사분란한 감정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림에는 피라미드 형태가 두 개 있다. 인간들이 구성하는 피라미드와 돛대가 이루는 피라미드, 또 그림 왼쪽으로 거대한 파도가 있고, 오른쪽으로 수평선이 보인다. 이런 불균형이 고난에서 희망으로 대비시키는 효과를 준다.
들라크루아, 키오스 섬의 학살, 캔버스에 유화, 417*354cm, 루부르박물관
키오스 섬은 터키가 지배하고 있던 그리스의 영토였는데, 터키의 압제를 견디지 못한 그리스인들이 독립전쟁을 일으킨다. 터키군들은 그리스인들에게 무차별한 학살을 감행하고, 민가를 불태우는 잔혹한 행위를 한다. 이에 들라크루아가 분노를 담아 그린 그림이다.
멀리 불타는 민가가 보이고, 그 연기 속에서 많은 그리스인들이 터키군에게 집단으로 학살당하고 있다. 전투로 황량해진 들판과 멀리 짙은 바다가 우울한 분위기를 더한다. 그림 오른쪽에 터키병이 한 여인을 발가벗겨 말에 매단 채 납치해 가고 있고, 한 남자가 애원하고 있는 모습이다. 기병의 아래에는 죽은 엄마의 배에 올라 젖을 달라고 우는 아이의 모습이 보인다.
그림 왼쪽에는 죽은 남편과 부인을 부둥켜안고 오열하는 남녀의 모습이 있고, 중앙에는 한 노파가 망연자실 모습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삶의 의지를 포기하고 모든 희망을 상실한 채 죽음의 두려움조차 아랑곳하지 않는 상황, 즉 학살의 비참함과 공포, 비인간적인 죽음이다. 당시 공개되었을 때 '회화의 학살'이라는 혹평을 받았던 작품이다.

드라크루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1830, 캔버스에 유화, 260*325cm, 루부르박물관

1830년 7월 27일부터 29일까지 벌어진 7월 혁명을 '영광의 3일'이라고 부른다. 파리의 민중은 시가지에 바리게이트를 치고, 정부군이 총과 대포를 난사하지만, 결국 시위대가 승리하고, 그 결과 부르봉가의 샤를 10세가 퇴위하고 오를레앙 가의 루이 필립이 즉위하게 된다.
그림에서 일단 5명의 무장한 시민군이 보이고, 가운데는 삼색기와 총을 들고 진군을 외치는 자유의 여신이 있다. 오른쪽에는 쌍권총을 들고 있는 아이가 보인다. 밑에는 비참하게 죽은 시체의 모습이 즐비하다.
왼쪽의 베레모를 쓰고 칼을 들고 있는 자의 모자에는 루이 필립을 상징하는 물건을 달고 있다. 그 아래로 모자를 쓰고 한 손에는 칼을, 다른 손에는 돌을 들고 있는 청년이 있는데, 당시 시민군에게는 무리란 돌과 칼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실크해트에 고급외투를 입고 엽총을 든 사람이 부르주아로 보이지만, 그 바지를 보면 실제 신분은 예술가나 기능공이다. 이 사람들 뒤로 흐릿하지만 삼각형 모자가 보이는데, 이는 당시 파리의 공과대학학생들이 쓰던 것이다. 자유의 여신 왼쪽 아래에는 두건을 쓰고 붉은 허리띠를 맨 사람이 애원하는 모습이 있다. 농부의 옷임을 알 수 있다.
그 아래에 죽은 시민들의 모습이 보이는데, 누가 바지와 한쪽 양말을 벗겨갔다. 오른쪽 시체중 청회색 외투를 입고 견장을 달고 있는 이는 왕실수비대의 스위스 연대에 소속된 보병이고, 모자가 벗겨진 채 죽은 사람은 왕실수비대의 기병이다. 혁대와 탄약통마저 모두 빼앗긴 모습이다.
그림의 소년 뒤편으로 사격을 하는 왕실수비대의 모습과 연기에 휩싸인 노트르담 성당이 보인다. 중앙의 여인은 전문모델이 아니고, 마들렌느라는 보통의 여성인데, 콘트라포스트의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 여인이 머리에 쓴 모자는 로마시대 노예들이 해방을 염원하며 쓰던 모자를 변형시킨 것이고, 붉은색 프레지아는 자유와 공화국을 상징한다. 여인의 가슴이 드러났고, 혁명군이 사용하는 붉은색 띠로 허리를 동여매었다. 여인의 팔 근육은 역동적인 남성의 근육이다. 팔 아래 겨드랑이의 털까지 표현되어 있다. 그림 하단의 시체에 표현된 음모와 더불어 고전주의 시대 작품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추악한 모습이다.

콘스터블, 건초 마차가 있는 풍경, 1821, 캔버스에 유화, 185*140cm, 런던국립미술관
영국의 낭만주의는 서정적인 자연을 위주로 한 따뜻하고 소박한 양상을 보인다. 존 콘스터블(1776~1837)은 자연을 세밀하고 꼼꼼하게 모사하는 수법을 뛰어넘어 확장된 공간과 대기에 녹는 빛의 미묘한 움직임 등을 묘사한 풍경화가이다.
그림에는 상쾌한 대기가 있고, 밝고 맑은 빛이 보이며, 그 반사로 인해 그늘과 밝은 면의 대조가 돋보이며 빛의 절대성을 암시하고 있다. 콘스터블 당시에는 역사만을 회화의 유일한 주제로 생각했고, 역사야말로 신이 인간에제 준 가장 위대한 선물이라고 믿었던 시절이다. 콘스터블은 풍경도 도덕적이며 정신적인 가치가 가득 차 있고, 자연의 광채와 상쾌한 기분을 흠뻑 느끼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콘스터블의 그림의 가치가 발견되기까지 50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모네를 비롯한 인상주의자들이 발견한 것이다.
그림은 조화로운 자연의 모습이다. 1820년은 흉년이 들고 전쟁에서 돌아온 군인들의 실업문제 등 경제불안이 감돌던 시절이다. 그림 속 장소는 이스트 앵그리아라고 불리는 화가의 고향이다. 그림에서 신선한 충격을 주는 것은 하늘의 대기인데, 구름을 단순히 배경으로 처리하지 않고 적절한 원근법을 사용하여 표현했다. 그림 왼쪽의 오두막은 윌리 로치의 오두막이다. 그는 귀머거리에 괴벽을 가진 가난한 농부로, 여기서 태어나 80년을 살았다. 오두막 앞에는 한 여인이 물을 긷고 있는지 빨래를 하는지 분명치 않다. 그림의 중앙에는 빈수레를 달고 건초 마차가 바퀴를 식히고 있다. 풍경 멀리 지평선에는 사람들이 마차에 건초를 싣고 있다. 강가의 우측에는 나룻배가 있고, 붉은색 머플러를 한 사람이 낚시를 하고 있다. 강아지 한마리도 보이는데, 이 강아지는 우리의 시선을 건초마차로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강아지 앞에는 그림자 같은 것이 있는데, 원래는 여기에 통을 그렸다가 지운 것으로 세월의 흐름에 따라 물감이 투명해지면서 원래 형상이 나온 것이다.

14. 예술인가 이데올로기인가? - 사실주의 예술
리얼리즘은 자유분방한 상상력을 기반으로 한 낭만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생겨나 눈 앞에 보이는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는 조류이다.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아름다운 휴머니즘과 넓은 전원과 같은 시골의 편안한 풍경을 그림에 담는 사람들이 프랑스의 퐁텐블로 근교에 있는 바르비종에 모여 작품활동을 하게 되었는데 이들을 바르비종파라고 부른다.
코로는 '들라크루아가 독수리라면, 나는 종달새에 지나지 않는다'고 스스로를 평가했는데, 그것은 위대와 평범을 말할 수도 있고, 피의 현장과 역사 대 자연의 소박함으로 말할 수도 있다. 쿠르베는 리얼리즘에 대해 '나에게 천살를 보여다오, 그럼 나는 천사를 그릴 것이다'라고 말했다.

코로, 모르트퐁테느의 추억, 1864, 캔버스에 유화, 89*65cc, 루부르박물관
코로는 상상에 의한 그림이 아니라, 자신이 실제로 목격한 아름다운 곳, 이름난 장소가 아니지만 가슴에 시정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따뜻한 풍경을 그렸다. 이 그림의 특징은 낭만주의자들이 즐겨 사용한 원색과 보색의 대비효과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림을 보면 배경이 아름답게 꾸며지거나 경관이 빼어나지도 않다. 야생의 들녘에 이름 모를 꽃들이 무수히 피어있고, 오른쪽에 커다랗고 웅장한 나무가, 왼쪽에 가냘프고 볼품없는 나무가 있다. 멀리로 호숙보이고 더 멀리에도 산이 스푸마토기법으로 그려져 있다. 한 여인이 작은 나무를 매만지고 그 아래로 두 자녀가 있는 모습, 이 이름모를 자연 앞에서 현실의 어려움을 잊고 순간적으로 따뜻한 시정을 가지면서 인간의 소박함과 겸허함의 가치를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밀레, 이삭줍기, 1857, 캔버스에 유화, 83*111cm, 오르세미술관
밀레(1814~1875)가 작품의 주된 소재로 삼은 것은 바르비종의 아름답고 소박한 자연의 모습들이다. 1848년 2월혁명에 따라 부르조아와 프롤렡리아 간의 계급갈등이 두드러진 시대인데, 밀레는 노동자 계급을 대변한다는 프랑스 최초의 민중예술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림의 멀리로 작고 희미하지만 층층이 쌓인 수확된 밀짚들이 대기원근법으로 표현되어 있고, 말을 탄 사람의 지시에 따라 밀짚들을 마차에 싣고 있다. 그림에 보이는 세 여인은 노동으로도 생계를 잇는 사람들보다 못하게, 수확이 끝난 밭에서 떨어진 밀알을 주워서 연명하는 사람들이다. 밀알을 줍는 여인의 투박한 손을 보면 그 고생을 짐작할 수 있다. 여인들의 그을린 얼굴도 힘든 분위기를 전해준다.
그러나 이 그림을 통해 노동에 대한 부정적 의미는 찾아볼 수 없다. 자연과 운명에 순응하며 살아가려는 인간의 소박한 의지를 볼 뿐이다.

밀레, 삼종기도, 1859, 캔버스에 유화, 55*66cm, 오르세미술관
그림 속 두 부부는 수확하고 난뒤의 감자 밭을 뒤지고 있는데, 종소리가 울려퍼지는 순간, 모자를 벗고 겸허하게 기도를 올리고 있다. 남자는 오랫만에 모자를 벗어 모자에 눌린 자국이 머리에 선명하다. 바지는 자기 바지가 아니라 짧고, 신발도 밭을 갈 때 신는 것이 아니다. 지평선이 그림 윗부분의 3분의 1 선상에 놓여 그림의 평온하고 안정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런 수평 구도에 두 사람과 쇠스랑이 수직의 조하를 보이며 이들이 그림 평면의 균일한 분할을 담당하고 있다.
원래 이 작품의 하단의 바구니에는 굶어 죽은 아이의 시체가 들어있다. 이를 본 밀레의 친구가 감자로 그쳐 그리도록 조언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쿠르베, 돌을 깨는 사람들, 1849, 160*259cm, 드레스덴국립박물관(2차대전중소실)
쿠르베는 그림에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표현한 사람이다. 뙤약볕 아래에서 힘들게 노동하는 노인과 청년의 모습인데, 이들의 옷은 해져서 볼품이 없다. 옷 여기저기에 구멍이 나 있고, 신발과 바지도 너덜너덜하다.
힘든 노역 도구인 지게와 곡괭이들이 보이고, 오른쪽으로 집기류도 보인다.
나의 아틀리에, 1855, 캔버스에 유화, 361*508cm, 오르세미술관
중앙에 쿠르베 자신이 풍경화를 그리고 있다. 그림의 오른쪽에는 부르주아 계층의 사람들이, 반대쪽에는 프롤레타리아들이 있다. 부르주아들 가운데 오른쪽 맨 끝에 책상 위에 앉아 책을 보는 이가 시인 보들레르이다. 그의 앞에는 아마도 그림을 주문한 부부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있고,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은 사실주의 문학의 창시자로 리얼리즘이라는 말을 만든 샹폴뢰리이다.
누드한 여인 뒤로 예술수집가 알프레드뷔야르, 푸르동, 위르벵 케뇨, 등이 보인다. 누드 모델은 몸매가 아름답지 못하다. 눈에 보이는 현실을 그대로 그린다는 쿠르베의 사실주의 화풍 때문이다. 이 그림을 쳐다보는 작은 소년과 아무 것도 모르고 즐거워하는 강아지만가 주목을 끈다.
쿠르베가 향하고 있는 프롤레타리아들이 그가 지향하는 사람들이다. 그림 뒤쪽에 십자가형상의 사람은 마네킹이다. 아틀리에 벽면에 초록 색조들로 된 흐릿한 것은 농부와 목욕하는 여자들을 소재로 한 쿠르베 자신의 작품들을 흐리게 묘사한 것이다.

15. 예술의 진실을 찾아서 - 인상주의 예술의 태동

마네(1832~1883)는 처음에 쿠르베와 같은 입장이었지만, 사실주의 기치에서 벗어나 관례적인 물감 혼합법과 세련된 완성미를 포기하고, 과감한 색조를 통해 햇볕이 만들어내는 생생하며 거친 세계의 사실성을 탐구하게 된다. 그의 작품에는 주제를 찾을 수 없다. 그림이 문학의 대변인이 아닌 순수 그림으로 존재하기를 바랬던 것이다.
마네, 피리부는 소년, 1866, 캔버스에 유화, 161*97cm, 오르세미술관
광대가 부르는 피리에 열정과 감흥이 읽혀지지 않는다. 무덤덤한 표정으로 관객을 빤히 바라다본다. 원근법이 존재하지 않고, 배경도 단색 톤이다. 이국풍의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공간감이 사라진 진공상태에 놓여 있는 것같다. 빨간 바지의 양쪽에 두른 검은 선 중 오른쪽 바지의 선이 발목에서 잘려 있다. 사라진 현실감을 조형적으로 상쇄하기 위해 도입된 선이다. 피리를 잡고 있는 손도 갑자기 튀어나온 것으로 보인다. 이른바 환영의 창조인데, 시각적 현실의 묘사라는 전통화법을 거부하고 있다.

풀밭 위에서의 점심식사, 1863, 캔버스에 유화, 208*265cm, 오르세미술관
마네는 이 작품을 1863년 살롱전에 출품하지만 낙선하고 만다. 누드로 있는 여자는 빅토린느 뫼랑이라는 여인으로 파리지엔 특유의 날씬하고 세련된 몸맵시가 돋보인다. 그림의 시간적 배경이 낮인데 남자들과 공원에 놀러와 누드로 앉아있는 모습, 여인의 모습도 짧은 목에 둥근 등의 곡선, 접혀진 아랫배와 굵은 허벅지는 관객들이 참을 수 없는 그림이었다. 여인이 사내의 가랑이 사이에 다리와 발을 뻗고 있고, 옆에는 쓰러진 과일바구니 사이로 사과, 체리, 빵, 물병, 흰냅킨이 보이고, 여인들이 벗어놓은 원피스와 옷가지들이 어수선하게 널려 있다.
여인 뒤쪽으로 모자를 벗은 정장차림의 사내는 마네의 동생 귀스타브 마네이다. 당시 파리 시의 자문관이었고, 후에 교도소 소장을 지낸다. 화면 오른쪽 파리 대학의 학생모자를 쓰고 있는 인물은 마네의 친구이자 조각가인 페르디낭 렌호프라는 사람인데, 후에 마네의 매제가 된다.
멀리 속옷을 입은 여자가 몸을 물에 반쯤 담그고 구부리고 있는데 물속에서 소피를 보고 있는 모습이다. 이 여인은 원근법적으로 처리되지 않고, 그림 속의 벽화 배경처럼 표현되어 있다.
이 그림에서 마네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실제 삶 속에 존재하는 보잘것 없는 인물과 사물의 가치였다. 푸른 색조의 숲은 생동감있고 사실적이기보다 빛이 바랜 밋밋한 색조의 벽감처럼 표현되어 있고, 나무나 풀이 거친 붓자국으로 완성되지 않은 듯하다. 여인의 발과 무릎, 가슴과 팔꿈치, 엉덩이와 손, 얼굴을 강조하고 있는 음영이 해부학적 근거를 따르고 있지 않다. 그림속의 오브제들도 꼼꼼하고 세밀하지 못하다. 보들레르는 1845년 살롱을 기록한 문헌에서 '이루어진 작품이란 곧 완성된 작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지오르지오네, 전원연주회, 1508, 캔버스에 유화, 110*138cm, 루부르박물관
이 그림은 벨라스케스, 엘그레코, 라파엘로, 와토의 작품을 비롯해 지오르지오네의 전원연주회를 패러디한 것이다.

올랭피아, 1863, 캔버스에 유화, 130.5*190cm, 오르세미술관
1860년대 매출부들이 사회 저변에 등장하면서 황금만능주의에 물든 사회의 부조리한 현상을 그린 것이다.
꿈꾸는 데 싫증나면 올랭피아는 잠을 깨고, 봄은 얌전한 흑인 메신저의 팔에 들려오네.
낮에 볼 수 있는 감미로운 꽃을 피우려고 사라의 밤같이 하녀가 찾아온다네.
젊고 예쁜 처녀의 가슴이 불에 탄다네.
여인의 얼굴은 겉늙었고, 때묻은 발에는 슬리퍼가 걸쳐져 있고, 손목에는 놋쇠로 된 팔찌가, 목에는 검은 천으로 된 리본 목걸이가 걸려 있어 천박한 이미지를 더 강조하고 있다. 신체도 군데군데 얼룩이 남아 있어 더 천박해 보인다.
이 작품은 사회에 음성적으로 만연해 있던 부르주아들의 매춘 행위를 간접적으로 고발하고 있다. 잰 채하는 부르주아의 번지르하고 근엄한 삶의 이면에 도노가 결부되어 횡행하던 부끄러운 작태가 드러나 있는 것이다. 놀랍게도 여인이 아주 편안하고 당당한 자세로 관객을 초대하는 듯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에밀졸라가 말하는 감상법 - 흰색의 침대와 여인의 피부 색조가 흰색을 바탕으로 그 위에 더욱 창백한 흰색조가 이중으로 곁들여져 있어, 백색의 두가지 색조가 서로 상호작용을 하면서 여인의 육체에 격렬한 대비효과를 만들고 있다. 그외 세부묘사는 생략되었다. 꽃다발을 통해서 나타나는 색의 조화와 흰색의 대비가 작품의 진정한 주제다.
티치아노, 우르비노의 비너스, 1538, 캔버스에 유화, 119*165cm, 우피치미술관
이 그림은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패러디한 것이다. 우르비노의 비너스는 상류층의 귀족여인을 그린 것인데, 올랭피아는 저속한 매춘부로 대치되었다. 머리의 장미는 매춘부의 난초로, 중실한 개는 성적 방종을 의미하는 고양이로, 의복을 꺼내는 하인은 고객이 보내 온 꽃을 들고 오는 흑인하녀로 바뀌었다.
16. 예술언어로서의 빛과 색의 발견 - 인상주의
모네, 인상 - 해돋이, 1872, 캔버스에 유화, 50*65cm, 파리 마르모탕미술관
프랑스 노르망디 해안에 위치한 르아브르라는 도시의 해변 모습이다. 안개와 연기 속에 감추어진 어슴푸레한 형상들과 강한 색조로 표현된 떠오르는 태양밖에 보이지 않는다. 진정한 주제는 해가 뜨기 직전의 아름다운 아침이 아니라, 그때의 짧은 순간이 어떻게 보여졌는지를 기록하는 것이다.
물체의 고유한 색상을 드러내기에는 빛의 양이 너무 적기 때문에 화가의 눈에 비친 이 순간 항구의 감흥과 인상을 그린 것이다. 화물선과 크레인 등은 그 구체적 형상을 드러내지 못한 채 안개에 가려 모호하고 어슴푸레한 이미지를 던지고 있다.
아래는 루앙성당을 각각의 다른 날에 포착한 것이다.
르누아르, 선유객의 점심식사, 1881, 캔버스에 유화, 130*173cm, 워싱턴 필립컬렉션
르누아르(1841~1919)는 빛의 효과보다는 파리의 현대적 풍경에 매료되었던 사람이다. 그는 평소 '그림의 생명은 아름다움이다. 우리의 인생은 귀찮은 일이 너무 많아 새로이 문제들을 제기할 필요가 없다'라고 말해 왔다.
이 그림은 파리 세느강변에 있는 샤뚜섬의 라 그루누이에르 유원지이다. 당시 도시의 먼지와 소음을 피해 기차를 타고 와서는 맑은 공기와 휴식을 만끽하던 ㅇ원지이다. 장소는 푸르네즈 레스토랑으로 음식과 생동감있는 분위기로 알려진 곳이다. 작품에서는 사람들의 상호관계가 재미있게 표현되어 있다.
그림 왼쪽에 강아지를 든 여인 뒤의 밀집모자를 쓴 사람이 이 식당의 주인 푸르네즈이고, 강아지를 어르고 있는 여인이 나중에 르누아르의 부인이 된 알린 샤리고이다.
중앙에 등을 돌리고 있는 사람이 친구인 라울 바르비에르이고, 발코니에 몸을 기대고 손으로 턱을 괸 여인이 식당주인의 딸 알퐁신이다. 오른쪽 위에 세사람중 등산모를 쓴 이가 르누아르의 친구이고, 코안경을 쓴 이가 폴 로트, 그들과 어울린 여인이 유명했던 여배우 잔 샤말이다. 화면 오른쪽 정면으로 얼굴을 보이는 여자가 유명한 배우이자 모델이었던 알렝 앙드레, 서 있는 남자는 신문기자마졸로이다.
포도주 잔에는 포도주의 앙금이 약간 비쳐나오는 모습도 눈여겨 볼 붓터치이다. 작품 중앙에 잔을 입에 대고 있는 여인이 르누아르가 가장 좋아했던 모델인 앙젤이다.

인상주의자들의 그림은 색채는 있지만 형태가 모호하다. 이러한 회화적 약점을 극복한 사람들을 후기 인상주의라고 한다. 이 책은 여기서 끝나고, 읽은 책중에 인상주의부터 시작하는 새 책이 있으므로 후일을 기대한다.